소설리스트

131화 (131/200)

“그러게요. 저도 아쉽지만, 회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어요.”

엄마는 정말로 너무나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거듭 혀를 찼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민 씨 아저씨도 오늘 극장 오신대요?”

“물론! 오늘 저녁에 우리랑 같이 가서 보시기로 했다.”

“잘됐네요. 극장에는 제가 모실게요.”

“그래, 그래. 어제 밤비행기 타고 왔다며? 피곤하겠다. 집에 들어가 좀 쉬어.”

엄마가 주방으로 떠난 사이.

나는 가게를 빠져나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무슨 날인가? 박 본부장도 그러더니 엄마까지 왜 저러는 거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푹신한 소파의 부드러운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연애 따위…….’

오래지 않아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 * *

농장주인인 민 씨 아저씨와 엄마를 태우고 극장에 도착하니 멀리서 아빠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세진아! 오랜만이데이!”

“건강하셨어요?”

“물론이제. 니는 별일 없었나?”

“저야 뭐 늘 똑같죠. 그런데 부산에는 무슨 일이세요?”

“아. 친구 녀석이 뭣 좀 도와 달라고 하는 게 있어서 내 힘 좀 쓰고 왔제.”

“힘이요?”

“하모. 내가 셀프 집짓기를 한 사람 아이가. 지도 나 따라서 집을 지은다카이 선배인 내가 지도를 해 주고 왔제.”

“어이쿠야. 집짓기는 다시는 안 하신다면서요?”

“내가 그캈나? 하하하하.”

아빠는 쾌활하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란데 와~ 여그 사람이 와이코롬 많나?”

“저희 회사 박 본부장님이 찍은 제주 4.3사건 영화 보러 온 분들이에요.”

“아니, 그건 내도 아는데. 사람 진짜루 많다 아니가. 이기 다 그 영화 보러 왔다꼬?”

“네. 오늘 아침 7시부터 지금까지 전 회차 매진이에요.”

“엄청나다 아이가! 니도 그렇고 그 박 감독이라는 사람도 그렇고 대단하데이.”

“여기 제주도 관련 영화니까요.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와 주시다니 저도 감격스럽네요.”

나는 부모님과 민 씨 아저씨를 모시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은 벌써 관람객들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차 있었다.

부모님과 민 씨 아저씨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대표님! 오셨군요!”

내가 뒤를 돌아보자 박창후가 일련의 무리를 이끌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무척이나 낯이 익은 사람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서 있었다.

‘한산하 사무총장?!’

내가 회귀하기 전.

국제연합(UN)의 제9대 사무총장이었던.

한산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지사를 비롯하여 제주도 출신의 국회의원 및 유명 인사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가장 끄트머리에 한산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박창후의 소개에 따라 그들과 차례대로 인사를 나눴고 제일 마지막 순서로 한산하와 악수를 하였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의 머리 곳곳에는 스트레스성 새치가 보였다.

“반갑습니다. 우세진 대표님. 블루어스 동아시아지부 사무총장 한산하입니다.”

“반갑습니다. 사무총장님. 오프라인 대표 우세진입니다. 작년 전남 영광 원전 앞바다에서 펼친 ‘원전 없는 대한민국’ 캠페인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걸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뭘요. 원전에 대해서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환경과 지구를 생각하는 블루어스의 정신에는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계시다니 정말 멋진 말씀입니다.”

나는 박창후가 소개해 준 인사 중에 그와 가장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창후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내게 귓속말을 전했다.

“대표님. 블루어스가 세계적인 환경 보호 단체인 건 맞지만 다른 분들에 비해 지나치게 오래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박창후의 눈동자를 따라서 옆을 살펴보자 앞서 인사를 나눴던 제주도지사와 국회의원 등이 불편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 사람하고는 적당히 이야기를 끝마치고 자리로 빨리 안내나 해 주라는 것처럼.

나는 한산하와 악수를 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 끝나고 시간 괜찮으시면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부모님과 농장주인인 민 씨 아저씨와 함께 자리에 앉은 지 오래지 않아.

영화관의 불빛이 모두 꺼지더니.

광고 없이 곧바로 <도세기>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제주도 지사 등을 배려한 극장 측의 조치였다.

‘별걸 다 하는군.’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영화에 집중했다.

이미 미니 시사회를 통해 한 번 본 내용이었지만 거대한 스크린과 빵빵한 사운드가 있는 극장에서 보는 <도세기>는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영화가 중반쯤 이르렀을 즈음일까.

토벌대가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는 장면이 나오자.

“끄응.”

낮은 신음과 함께 옆에 있던 민 씨 아저씨가 벌떡 일어섰다.

나를 비롯하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스크린을 향해 크게 외칠 것 같았던 민 씨 아저씨는.

두 주먹만 꼭 쥐고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저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고 다시 좌석에 앉혔다.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민 씨 아저씨의 옆자리였던 아빠와 자리를 바꾸고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영화를 관람했다.

거칠고 늙은 손에서 깊은 슬픔이 전해졌다.

다행히 민 씨 아저씨는 이후 별다른 소동 없이 영화를 관람하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고, 영화관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느덧 러닝타임인 2시간이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흑백 스크린이 컬러로 바뀌면서 현대로 바뀌었음을 암시하고.

“오!”

갑자기 등장한 익숙한 얼굴에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국민 여배우 이슬아였다.

그녀는 영화가 시작할 때 잠시 등장하였던 제사상에 있는 향을 끄면서 짧은 독백을 읊었다.

“하루방, 할망. 편히 쉽써예…….”

곧 카메라가 빠른 속도로 뒤로 빠지며 하늘로 올라가더니.

어느 순간 180도 방향을 돌려 드넓은 하늘을 비추었다.

상영 내내 어두웠던 화면에서 강렬한 태양빛이 작열하자 사람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내 구름 사이로 미미하게 사람 얼굴이 보이더니.

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엄마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 손등을 내리쳤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가 내 귀를 잡고는 가만히 속삭였다.

“세진아. 방금 마지막에 구름 사이에 나온 사람. 너 아니니?”

“응, 맞아요.”

엄마가 내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 * *

나는 택시를 잡아 부모님과 민 씨 아저씨를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한산하와 함께 극장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펑펑 소리 내 울었네요.”

“그러셨군요. 저도 처음 보았을 때는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눈물을 보이진 않으셨나 보군요.”

“아니요. 저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슬픈 영화니까요.”

“그런데 영화 크레딧 나오기 직전에 나왔던 인물. 혹시 우 대표님이 아니십니까?”

한산하의 물음에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박창후 감독이 어찌나 부탁하던지, 하는 수 없이 나오게 되었죠.”

“하하하. 아닙니다. 정말 멋졌습니다.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편하게 후손들을 지켜보는 느낌도 들었고, 절대자 같은 존재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도 들었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둘 다 의미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네, 아무튼 그 장면 덕분에 무언가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멋진 연출이었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박 감독에게도 메시지 전하겠습니다.”

나는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한산하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 대표님처럼 바쁘신 분이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사무총장님이 쓰신 ‘지구가 아프다’를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 아주 오래전에 쓴 졸저입니다.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서적이었을 텐데.”

한산하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UN 사무총장의 지위에 오르기 전이라 그런지 그에게선 소탈하고 소박한 모습이 엿보였다.

“환경오염에 대해서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아직 그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총장님 같은 분들이 정말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어휴. 아닙니다. 저 같은 것보다야 우세진 대표님 같은 분들이 정말 큰일을 하고 계시죠. 남북정상회담도 우 대표님이 성사시켰다고 들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환경오염만큼 심각한 건 아니죠. 지구가 아프면 국가고 민족이고 개인이고 다 의미가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한산하가 잠시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보더니 이내 차분하게 미소를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희가 준비했던 캠페인을 오프라인과 함께하였더라면 더 좋은 성과를 올렸을 터라는 아쉬움이 드는군요.”

“좋은 제안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그와 함께 환경오염의 위험성과 극복 방안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카페 안에 설치된 공기청정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환경오염 중에서도 인류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대기 오염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환경오염 사망자 대부분이 대기 오염으로 사망했죠. 그다음이 수질 오염이고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오프라인과 함께 몽골에 나무를 심는 캠페인을 벌여 보는 건 어떠십니까?”

“몽골에 나무요?”

한산하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가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아젠다이자 앞으로 진행하려는 캠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블루어스 내부에 아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요. 제 생각이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요즘 제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었거든요. 말씀하셨다시피 몽골의 사막화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물론 한국에까지 황사와 미세 먼지 피해가 엄청나고요.”

몽골의 사막화는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국에 불어 닥치는 황사의 대부분이 바로 몽골에서 시작되었다.

한산하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우 대표님도 잘 아시겠지만, 황사 발원지가 몽골입니다. 그것뿐만 아니죠. 고비사막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와 남태평양 고기압이 만나면서 여름철 폭염으로 이어지고요.”

“네. 총장님. 남의 나라 일이라고 손 놓고 구경하기에는 우리나라와 지구에 미치는 피해가 너무 큽니다.”

한산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문한 홍차를 마시고 테이블에 놓았다.

시뻘건 홍차의 표면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는 자신이 마시던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우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건 나무 심기 봉사 활동이나 혹은 나무 비용에 대한 지원일까요?”

“그것도 있지만 조금 더 큰 그림을 짜고 있습니다.”

“큰 그림이라면?”

“나무 심기도 좋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나무를 심어도 관리를 제대로 안 해 주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알고 계셨다니 놀랍습니다! 그럼 어떤?”

“해수 담수화 기술을 개발하고 몽골의 낙후된 상수도 시설의 정비. 그리고 나무 심기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전문 회사의 설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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