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 누나? 그게 누구지? 혹시 졸리메종 강세연 관장?”
“그래! 세연 누나 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당근이지! 어릴 때부터 엄청 친하게 지낸 사이거든. 부모님끼리도 꽤 돈독하고.”
“그런데 왜?”
“세연 누나가 갑자기 너에 관해 묻더라? 우세진 대표 어떠냐고.”
“그래?”
안재영은 뭐가 그리 웃기는지 혼자 막 웃으며 술을 마셨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뭐가?”
“아니, 그 도도하기로 유명한 세연 누나가 도대체 어쩌다가 너에 관해 물어볼 정도가 되었냐고.”
“도세기 관련해서 도움을 좀 받았거든. 그뿐이야.”
“그런 게 아닌 것 같던데.”
안재영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얼굴을 잔뜩 들이밀었다.
“야! 대한민국 3대 재벌이 누구냐?”
“장난해? 성삼 그룹, 미래 그룹, TP 그룹이잖아.”
“빙고. 재벌 3, 4세 자제 중에서 특히 그쪽 얘들이 프라이드가 가장 세거든. 우리끼리는 3대 천황이라고 부르는데 그중에 세연 누나가 여자 중에서는 톱이지.”
“그렇군.”
내가 별로 관심 없다며 혼자 술을 마시자 안재영이 이것 보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성삼그룹 총수 아들이랑 미래 그룹 총수 아들이랑 서로 세연 누나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치고받고 싸웠는데! 이거 엄청 유명한 이야기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얌마. 너 잘못하면 성삼 그룹이랑 미래 그룹이랑 척을 질 수도 있다는 의미야. 이제 이해돼?”
영화 <도세기>는 입소문을 타면서 국내 개봉 2주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한 것은 물론.
해외 80여 나라에 판매되며 <도세기> 신드롬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도 4.3사건의 희생자들에게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 차원의 배상을 해 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여론을 민감하게 살폈다.
<이국대 대통령 “국가 폭력에 공소시효는 없다고 생각해”>
<정부, 도세기 흥행에 4.3사건 국가 배상 카드 만지작>
<세상을 바꾼 영화 ‘도세기’……사회 변화 물꼬 터>
강세연의 도움이 컸다.
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에게 점심을 샀다.
인사동의 한 고급 레스토랑.
그녀는 옅은 네이비색의 복고풍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옷이 그래서 그런지 중세 시대의 귀족 영애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이 잘 어울리네요. 중세 시대 귀족 같은 느낌도 들고요.”
“어머. 고맙습니다. 우 대표님은 정확히 포인트를 딱 짚어서 칭찬을 해 주시니까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런가요?”
“네, 주변에 여자 많으시죠?”
“여자라. 직원들 절반 이상이 여성이긴 하죠.”
“에이 뭐예요. 제가 말하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여자 친구를 의미하는 거라면 아쉽게도 없습니다.”
“그래요? 이유가 있나요?”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보며 묻자 나는 역으로 되물었다.
“그러는 강 관장님은 왜 남자 친구가 없으시죠?”
“네?”
“본인도 남자 친구가 없으면서 왜 제게 여자 친구가 없는지 물어보시는 거죠? 강 관장님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나요?”
내 말에 강세연이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요. 후훗.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네요.”
점심을 먹은 나는 그녀에게 가벼운 동네 산책을 제안했다.
“배도 부른데 근처 한 바퀴 어때요? 시간도 아직 여유 있는데.”
“좋아요.”
나는 인사동을 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익선동으로 향했다.
골목길로 들어갈수록 상업 시설이 점점 보이지 않더니.
오래된 한옥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정겹게 붙어 있었다.
강세연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마 우 대표님 집이 근처이신가요?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오신 건가요?”
“아뇨. 그냥 골목길이 예뻐서 가끔 이곳으로 산책을 오곤 합니다.”
“이야.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심지어 제 사무실이 있는 인사동 바로 지근거리예요!”
“익선동이라고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 한옥 지역이에요.”
“삼청동이나 가회동에 있는 북촌 한옥마을은 종종 가 보았지만, 익선동은 정말 처음이에요.”
“여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요.”
“재미난 이야기요? 그게 뭔데요?”
강세연이 두 눈을 번쩍였다.
“일제강점기 때 이 지역을 일본인들이 차지하려 하자 독립 운동을 후원하던 정세권 선생이 이곳을 모두 사들인 다음 넓은 집을 아주 작게 쪼개서 이처럼 빼곡하게 지었죠.”
“이유가 있나요?”
“여러 채가 빼곡하게 밀집해 있으니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집을 사고 싶어도 너무 작고, 집주인이 팔지도 않으니까요.”
“아. 그래서 이렇게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거군요.”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앞장서더니 골목 곳곳을 살폈다.
붉은색, 아이보리색, 옥색 등.
형형색색의 벽돌로 구성된 벽면 위에는 기와로 된 곡선의 지붕이 보였고 철문 또는 나무문으로 된 대문이 예스러웠다.
“와! 정말 집들이 너무 예뻐요! 어떻게 이런 곳이 그동안 매스컴에서 다뤄지지 않은 거죠?”
“지금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조만간 엄청난 핫플레이스가 될 겁니다. 관장님도 여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미리 투자해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내 말에 강세연이 앞서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우 대표님은 언론사라 그런지 부동산 쪽 정보가 빠르신가 봐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이런 곳이 서울에는 거의 없으니까요.”
“음. 희귀하다는 이야기죠?”
“맞아요.”
“그런데 만약 우 대표님만 믿고 투자했는데 제가 손해를 보면요?”
강세연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짓는 표정이나 제스처에는 한국 사람답지 않은 이국적인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손해 보신 금액까지 포함해서 제가 다시 사들이죠.”
“네?”
강세연이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바라보았다.
익선동은 2015년 무렵부터 외부 개발 업체가 들어오면서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독특한 콘셉트의 카페와 식당, 액세서리 가게들이 생겨났고, 도심지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되고 이색적인 분위기 탓에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2010년 후반에는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익선동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지.’
몇 배가 뛸 게 뻔한데 손해를 이야기하는 건 가당치 않았다.
“강 관장님이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프라인은 부동산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포트폴리오는 다양할수록 좋으니까요.”
“와! 몰랐어요. 기사도 내고 영화도 만들고, 애플리케이션 개발도 하고. 거기에 부동산까지. 오프라인은 안 하는 게 없네요.”
“혹시라도 익선동 쪽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주세요.”
“후후. 알겠어요.”
나는 그녀와 익선동을 천천히 걷다가 창덕궁의 입구인 돈화문 앞으로 나왔다.
강세연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지 몰랐다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가 창덕궁이로군요. 익선동도 처음이고 창덕궁 앞에도 처음 와 봐요.”
“그럼 온 김에 창덕궁 안에도 보고 갈래요?”
“창덕궁이요?”
강세연은 조금 놀란 듯하더니 아래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을 따라 아래를 보았더니 그녀의 검정 하이힐이 보였다.
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저런. 신발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괜히 제가 여기까지 모시고 왔네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말 너무 즐거웠어요. 익선동 너무너무 매력적인 공간이었고요. 그리고 저.”
“네?”
“우 대표님만 괜찮다면 창덕궁 안에도 한번 보고 싶어요.”
“괜찮겠어요? 지금까지도 상당히 걸었는데.”
“네. 창덕궁 후원이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었거든요.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기 아쉽네요.”
그녀는 재차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고, 나는 그녀와 함께 창덕궁 안으로 들어갔다.
돈화문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시대가 변한 듯 고층빌딩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고궁의 예스러운 처마와 오래된 나무 그리고 새파란 하늘이 눈을 시원하게 했다.
“정말 좋네요. 경복궁은 자주 가봤는데 창덕궁은 처음이에요. 우 대표님 덕분에 서울 촌놈이 서울 구경 제대로 하는데요. 후후.”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창덕궁은 후원이 유명하죠. 비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요.”
“비원이라.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이죠?”
“맞아요. 사실 비원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쓰인 거라 적절한 이름은 아니지만요.”
“우 대표님은 도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듣고 아시는 거예요? 아까 익선동 이야기도 그렇고요.”
“하하.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듣는 게 많으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덧 네모난 연못에 도착해 있었다.
활짝 핀 연꽃이라는 뜻의 부용지였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는 나무가 심긴 조그마한 섬이 있었는데 마치 꼬마 무인도 같았다.
“아름다워요. 연못도 정자도 하늘도.”
강세연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두 손을 맞잡고는 후원이 안겨 주는 운치를 즐겼다.
평일 점심시간의 창덕궁은 한산하다 못해 인적을 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고, 어느덧 후원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존덕정 부근까지 걸어왔다.
나는 그녀의 신발을 살피며 물었다.
“발은 괜찮아요?”
“발이요? 물론이죠. 저 보기보다 튼튼해요.”
그녀가 오른손을 들더니 뽀빠이 흉내를 냈다.
물론 울퉁불퉁한 알통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괜히 무리하지 말고 불편하면 이야기하세요. 바로 택시 잡아다 줄게요.”
“진짜 괜찮아요. 혹시 우 대표님 제가 불편해서 그러신 건 아니죠?”
“네? 그럴 리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강세연의 웃음에는 미묘한 슬픔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나는 이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강 관장님. 불편하다는 게 무슨 의미죠?”
“아. 그게…….”
강세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짧은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희 갤러리 직원들은 저를 많이 불편해하거든요.”
“갤러리 직원들이요?”
“네, 저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강세연은 일개 갤러리의 관장이 아니었다.
국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그룹의 자제이자 TP 그룹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
직원들이 그녀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 태연한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
“구체적으로 직원들이 뭘 불편해하는데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제가 출근하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다가도 표정이 굳어요.”
“그런 건 대부분 기업에서 마찬가지일걸요? 상사가 왔는데도 웃고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그런가요? 제가 회사에 다녀본 경험은 없어서요. 그럼 이건 어때요? 저만 빼고 자기들끼리만 식사를 해요!”
“그것도 대부분 그래요. 편하게 먹기 어려우니까.”
강세연은 한참 고민하는 것 같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그럼 이건요? 제 비서는 제가 출근해 있는 동안에는 화장실도 안 가는 것 같아요!”
“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정말이에요. 제가 필요해서 부를 때면 언제나 곧바로 제 방으로 들어오거든요. 10초를 넘겨 본 적을 보지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