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00)

-한가한 소리군요. 저는 구렁텅이로 몰아세워 놓고는 자기들끼리 여행을 떠난다고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었어요.”

-휴. 해외 지사장 일로 그러는 거죠? 마음 같아서는 꼭 같이하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 되는군요. 누구 때문에 말이죠.

“다들 해외로 떠나기 전에 서울에서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언론 개혁으로 할 일이 많은데 북한 문제는 참…….

“잘하실 겁니다. 제가 아는 백 회장님이라면 그 누구보다요.”

-우 대표…….

박고선의 무능과 실책이 너무 눈에 띄어서였을까.

여야, 진보, 보수, 시민 단체 할 것 없이 백철웅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어떠한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간혹 그가 잘해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기사가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정치계의 떠오르는 다크호스였다.

무소속으로 종로에서 당선된 것은 물론 오프라인의 설립자이자 공동 대표였다는 경력이 자연스럽게 대중들을 납득시킨 것이다.

* * *

따뜻한 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멀리 한라산 너머로 붉은 태양이 지고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광경.

아무도 없는 다랑쉬오름의 정상에서 나와 단둘이 남은 홍지혜는 말없이 일몰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몰과는 무관하게 나의 마음은 엉킨 머리카락처럼 복잡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나와 단둘이 할 말이 있다는 홍지혜의 말에.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은 다른 사람들이 오름을 먼저 내려간 게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었다.

일몰을 바라보고 있는 홍지혜의 얼굴은 무거웠다.

‘해외 지사장으로 보낸 것에 대한 불만인가.’

나는 한라산 너머로 해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어둠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던 홍지혜가 이쪽으로 돌연 몸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말. 2년 전 이곳에서 우 대표님이 제가 해 주신 말이죠.”

“…….”

“제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더 어울리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주셨고요.”

“네, 기억납니다.”

“그날 이후 많은 일이 있었어요. 광화문 물난리 사건도 있었고, 오바마 미합중국 대통령 앞에서 한국 기자들을 대표해서 당당히 맞선 일도 있었고요.”

“어찌 있겠습니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요.”

잊을 리가 있겠나.

홍지혜라는 이름 석 자가.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 각인된 날이 바로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 날의 설전 아니었던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의 집에서 진행했던 인터뷰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취재였어요. 정말 제게는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경험들이었습니다.”

“네,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지혜는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다가 속으로 삼키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지만 내 쪽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이내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말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미국에서도 절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일게요.”

“홍 본부장님…….”

“그 말 아직도 유효한 거죠?”

“어떤?”

“마틴 루서 킹 기념관에서 제게 했던 말이요.”

“아! 나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후훗.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여전히 그때와 같으신가요?”

그녀는 내게 아직도 오프라인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언론사가 되고 싶은지.

그래서 마틴 루서 킹과 같은 약자를 대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전달하고, 그로 인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묻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때 홍 본부장님에게 했던 말 아직도 유효합니다.”

“네. 그럼 됐어요. 사장님의 그 꿈. 제가 꼭 실현해 드리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고 그녀도 내 손을 잡았다.

검은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돋아나는 가운데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웃었다.

* * *

세화해수욕장 인근의 낡은 민박집.

2년 전에 왔던 이곳의 1층 공터는 자욱하게 피어오른 돼지고기 연기가 가득했다.

그 냄새가 어찌나 향기롭고 맛깔스러웠던지 지나가는 이조차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줄 정도였다.

평상은 각종 요리와 술로 가득했고, 그 옆에 연기가 피어나는 진원지가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비큐 통, 그 앞에서 박창후가 돼지 살점을 잘라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잡은 제주 똥돼지 납시오!”

“우와!!”

그는 지인에게 빌린 대형 바비큐 통과 거대한 돼지 한 마리를 가져와서는 통돼지 바비큐 요리를 선보였다.

바비큐 통 안에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돼지고기는 실로 먹음직스러웠다.

그가 건네준 고기를 한입 먹으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그야말로 천상의 맛.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와 캔맥주를 부딪치며 말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입안에서 살살 녹네요.”

“하하하하. 현지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친구한테 이야기해서 최고품질의 돼지로 잡아 왔습니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죠!”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뭘요. 오늘만큼은 다들 마음껏 즐겨야죠.”

19명의 사람.

2년 전 이곳에 모였던 스무 명의 사람 중 중도에 회사를 나간 한무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간이 멈춘 듯 그때와 같은 표정으로 웃고 떠들며 오랜만의 단체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당시에는 이름 없는 신규 매체의 신입 사원들이었지만.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언론사의 고위인사들이었다.

이덕오 이사와 본부장들을 비롯한 부장급 이상의 핵심 인재들.

오프라인을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이었다.

‘대부분이 여전히 20대일 정도로 젊지만.’

그래서일까.

이날 술자리는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했다.

한참을 웃고 떠들며 술과 음식을 먹고 있는데 흰색 밴 한 대가 민박집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더니 거대한 솥이 민박집 마당으로 들어왔다.

엄마였다.

“다들 고생 많으십니다! 세진이 애미입니다. 여러분 드시라고 해장국 가져왔어요!”

“네? 대표님 어머님?!”

“해장국이면 제주도 대표 맛집 세진해장국의 그 해장국이요?”

“와! 진짜가 나타났다!!”

환호성과 함께 순식간에 남자 넷이 달려들더니 엄마로부터 솥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공터 가운데에 위치한 평상에 턱 하니 솥을 올려놓았다.

무게가 어찌나 나가는지 솥을 올려놓는 순간 평상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뜨거운 연기를 내뿜는 뻘건 국물을 본 최루리가 탐욕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안 그래도 국물이 없어서 라면을 끓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어머님!”

“뭘요. 이런 자리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내가 음식을 미리 다 준비해 놓는 건데 세진이 녀석이 말이 없어서.”

엄마가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이덕오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천하의 형님도 어머니는 못 당하네요.”

엄마와 아빠는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나누고는 빠르게 민박집을 떠났다.

특히 홍지혜에게는 두 손을 꼭 잡으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해장국의 등장으로 더욱 사기가 오른 일행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박창후가 내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홍 본부장하고는 잘 이야기하셨습니까?”

“네. 해외 지사 중 미국은 땅덩어리도 가장 크고 할 일도 가장 많아서 부담이 많을 겁니다.”

“응? 다른 이야기는 없었고요?”

“다른 이야기라뇨?”

“아니, 그…… 아쉽다거나 서운하다는 말은 없었어요?”

“전혀요.”

“이런. 홍 본부장도 참. 이제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박 본부장님은 괜찮습니까?”

“저요? 하하. 지인이도 이제는 어디가 독일 맛집이고 어디가 관광지인지 블로그 검색하며 살피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네, 사실 기자의 매력 중 하나가 해외 특파원 아니겠습니까. 쉽게 오기 힘든 기회이고요. 그런데 지사장이라니. 열심히 해야죠.”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고맙죠, 뭘. 그나저나 도세기는 천만 관객 찍었는데 뭐 없습니까?”

박창후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말대로 영화 <도세기>는 독립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가볍게 돌파하더니 지금도 계속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다.

“독립 영화는 백만 관객만 돌파해도 상업 영화로 따지면 천만 명 돌파 이상의 성과로 생각합니다. 제가 만들었지만 정말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다죠?”

“네. 국내만큼의 성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박 본부장님과 민 팀장님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도세기>의 각본을 쓴 민정희는 고민 끝에 오프라인의 홍보팀장 자리를 수락.

지금은 오프라인을 대내외로 널리 알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하. 뭐 없냐는 말은 농담이었고요. 저희가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대표님과 회사에 감사할 따름이죠.”

“아뇨. 내부에서는 도세기와 관련하여 참여한 직원들에게는 두둑한 보너스를 주려고 계획을 짜던 중입니다. 머지않아 내부에 공지를 돌릴 예정입니다.”

“네? 아니, 저는 그냥 농담으로 드린 말씀인데.”

“엄청난 성과입니다. 덕분에 오프라인은 취재뿐만 아니라 영화도 잘 만드는 회사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고요. 여러분 덕분입니다.”

“대표님.”

박창후는 잠시 말이 없더니 내게 폭탄주를 한 잔 말아 건넸다.

“이런 표현이 조금 웃길지 모르겠지만 제 남은 평생을 대표님과 오프라인에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 충의를 알아 주십쇼!”

“표현이 과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오해하라지요! 제가 모실 분은 우 대표님 한 분뿐입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제가 박 본부장님 같은 분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나와 박창후는 격하게 잔을 부딪치고는 폭탄주를 그대로 원샷했다.

소주를 얼마나 부었는지 소주를 마시는지 폭탄주를 마시는지 모를 맛이었다.

광란의 파티 다음 날.

우리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조를 나눠 제주의 맛집과 명소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덕오가 신이 나서는 외쳤다.

“저희 내기하는 거 어떻습니까?”

“내기요?”

“네. 이번에 만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한 조에는 상을 주고, 가장 낮은 조회 수를 기록한 조에는 벌을 주는 거요!”

“오! 그거 좋다!”

“근데 상은 뭐고 벌은 뭔데요?”

“지금 여기서 정하면 되죠! 돈은 좀 그렇고……. 뭐가 좋을까나. 맞다! 1등 한 조에는 우 대표님이 직접 무엇이든 소원을 이뤄주는 쿠폰을 발급하는 건 어떨까요?”

“무엇이든 이뤄주는 쿠폰?”

“네. 예를 들면 대표님과의 일대일 식사도 좋고, 한 달을 통째로 안식월로 정해 달라고 할 수도 있겠죠.”

“오호! 좋은데요?”

“근데 그럼 벌은요?”

벌이라는 말에 이덕오가 잠시 고민하더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지금 홍보팀에서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고 있던데 거기 인터뷰이로 100% 출연하기라면!”

“네? 저 외부에 얼굴 나가는 거 싫은데요? 영상에 얼굴 엄청나게 부어서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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