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00)

“조금 늦었습니다. 어라? 이제 막 음식 나왔나 보네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방금 나왔으니 어서 자리에 앉기나 하쇼.”

“저는 식사하고 와서 그리 배가 고프진 않아요. 저 신경 쓰지 말고 먼저들 드세요.”

배고프지 않다는 안재영의 말에 홍지혜가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만나고 왔어요?”

“슬아랑 데이트하고 왔거든요. 둘 다 너무 바빠서 시간이 지금밖에 없는 바람에.”

“장거리 연애는 고달프네요.”

“그만큼 더 애틋하니까요. 장거리 연애, 강추합니다.”

안재영은 외투를 벗고는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나는 그가 식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물었다.

“이번 사건. 안 본부장은 어떻게 보고 있나요?”

“돌진남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재영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이미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제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럼 진짜로?”

“네. 세연 누나. 아니 강세연 관장 때문이에요.”

“네? 강세연 관장이요?!”

그의 입에서 강세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오자 박창후와 홍지혜 모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재영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네, 일종의 질투랄까. 경계죠. 그렇다고 이렇게 황당한 사건을 벌일 줄은 저도 몰랐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강세연 관장이 이번 사건을 주도한 건가요?”

“설마요. 그런데 이 얘기를 여기 계신 두 분들께 해도 괜찮은 거예요?”

안재영이 나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다는 내 말에 안재영의 표정이 두 배는 더 밝아졌다.

‘그동안 속에 담고 있던 말을 털어내지 못해서 답답했던 모양이군.’

그는 시원하게 물을 한 입 들이켜더니 이야기꾼이 된 것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두 분도 아시겠지만 강세연 관장과 우 대표님 사이가 보통은 아니라는 거 눈치채셨죠?”

“네? 두 분은 그냥 비즈니스 사이 아니셨어요?”

“어쩐지. 강세연 관장이 우 대표님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니까. 제가 물으니까 그때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이거 실망인데요.”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강세연 관장님과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응? 안 본부장은 아니라고 하잖아요?”

박창후가 나와 안재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안재영이 그에게 고급 사케를 따르며 말했다.

“우 대표님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연이 누나 아니, 강 관장은 아니에요. 분명 관심이 있거든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안 본부장은 그걸 어찌 압니까?”

“강 관장이랑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친했어요. 아무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강 관장이 재벌가 남자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거든요. 예쁘지. 머리 좋지. 집안 좋지. 성격 좋지.”

“하긴. 그 외모에 그 배경에.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하겠네.”

“인수강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노골적으로 강 관장에게 어필하는데, 강 관장은 눈길 한번 안 주니 애가 타겠죠.”

“그럼 이게 다 강 관장과 엮인 치정 싸움이다?”

“네. 정훈명 미래전략실장은. 아니다. 이제는 전 실장이겠구나. 아무튼 정훈명은 인수강 따까리예요. 인수강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고 뒤처리하는. 그와 연관되었다면 어떻게든 인수강하고도 엮인 일일 겁니다.”

“이야 이거 주간잡지에 나오는 재벌가 뒷이야기 듣는 것처럼 아주 흥미진진하구먼.”

박창후가 단숨에 술을 들이켜며 흥미로워했다.

그는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이제 대표님은 어떡하시렵니까? 상대가 성삼 그룹 후계자 중 한 명이라면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까다롭긴 뭐가 까다롭습니까. 법의 판결에 맡기면 될 뿐.”

“네? 그걸 인준영 회장이 가만히 내버려 둘까요? 자기 아들인데. 그것도 후계자 다툼을 벌일 정도로 그룹에서 영향력도 크고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안재영이 고개를 젓자 박창후는 곧바로 안재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라니.”

“후계자 다툼이 치열한 상황이잖아요? 인준영 회장도 내심 이번 일로 후계자가 명확해지면 좋을 거예요.”

“그룹 내에서 인수강을 지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은데?”

“그럼 뭐해요. 사건이 명확하잖아요? 별것 아닌 문제로 전 국민적 관심 사항이 되었고, 까닥 잘못했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이건 인준영 회장이라도 케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긴.”

“게다가 우린 전 국민이 사랑하는 언론사 오프라인이잖아요? 재벌가 자제가 언론사 대표에게 테러를 가했다? 제 새끼를 감싸다가는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 * *

사건은 안재영의 말대로 진행되었다.

해외로 출국하려는 정훈명은 인천 국제공항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의 구속 이후 사건은 빠르게 끝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정훈명은 성삼 그룹 쪽 변호사단을 접견한 이후 돌연 태세를 전환.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인수강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폭로하였다.

<종로센터 돌진남 배후에는 성삼 자동차 사장 인수강이 있었다!>

<인수강의 남자 정훈명 “모든 건 인수강이 시킨 짓…… 나는 그저 따랐을 뿐이다”>

<성삼 그룹 입장문 발표 “국민적 우려에 사죄……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

<인수강은 왜 종로센터를 노렸나..오프라인에 대한 적대감 표시 가능성 높아>

대다수 언론에서 인수강이 도대체 왜 이런 사건을 저질렀는지 궁금증을 표하는 가운데.

일부 찌라시 매체에서는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기사에 강세연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건의 원인은 치정 싸움? 인수강-강세연-우세진 삼각관계설 전격 진단분석>

<인수강 사장, 오래전부터 강세연 관장에게 관심 많아>

인수강이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된 날.

강세연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사 봤어요. 이거 진짜로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안녕하세요. 관장님. 자세한 내용은 경찰 조사가 더 진행돼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기사에는 이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강 관장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인수강 그가 도가 지나쳤죠>

<아니 그래도 그게 정말이라면 저 때문에 사람이 다친 거잖아요!>

<관장님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제가 경찰에는 신변 보호 요청해 둘 테니까 당분간 집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출근하면 기자들이 미친 듯 따라붙을 테니까요>

<아예 출근조차 하지 말라는 건가요?>

<네. 당분간만요. 전화가 오네요.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강세연과 문자하는 것을 중단하고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네, 우세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우세진 대표님. 갑작스럽게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품위 있으면서도 무척 부드러웠다.

“누구시죠?”

-성삼 전자 부회장 인수천입니다.

성삼 전자 부회장 인수천.

성삼 그룹 총수인 인준영 회장의 큰아들로 성품이 곧고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성삼 그룹의 후계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물적 자원이 풍족치 않은 한국에서 글로벌 대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경영과 냉정한 판단이 필수인데 인수천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비인 인준영은 그를 아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가끔 서재에서 어머니 사진을 보시며 우시곤 하시니까요.”

“그러셨군요. 부회장님께서는 어머니 얼굴도 못 보셨으니 많이 애틋할 것 같습니다.”

“하하. 어릴 적에는 원망이 더 컸죠. 성삼가는 정글 같은 곳이거든요. 이런 곳에 어린 나 혼자 남겨두고 떠나다니. 너무하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한잔하시죠.”

나는 그와 건배를 나누고는 술잔에 든 술을 입안으로 털었다.

진한 솔 향기가 입안 가득 올라와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이어졌다.

“소나무 향이 참 좋습니다. 무슨 술인가요?”

“송순주라고 소나무의 햇순을 넣어 빚은 술입니다.”

“향도 좋지만, 맛도 뛰어나군요. 이런 술은 처음 먹어 봅니다.”

“2007년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주로 선정될 만큼 좋은 술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500년 전통을 가지고 있죠.”

“저는 좋은 술을 주신다기에 위스키가 아닐까 싶었는데 제 생각이 짧았군요.”

“하하. 아닙니다. 위스키도 좋지만 우 대표님은 이 술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죠. 남북정상회담과 인연이 깊은 분이니까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인수천은 수천 권의 책이 가득한 자신의 서재에서 술상과 함께 나를 맞았다.

“오늘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이신 인준영 총수님과는 얼마 전 뵌 적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뒤에 개최된 청와대 만찬회에서 말이죠? 아버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떤?”

“큰 인물이라고요. 꼭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그룹의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하시더군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언론과 기업의 관계가 너무 가까워도 곤란합니다. 특히나 성삼 그룹처럼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라면 말입니다.”

내가 그에게 술을 따르며 담담히 말하자 인수천이 내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되죠. 언론과 기업 홍보의 관계를 말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네. 공자께서도 경이원지(敬而遠之)라 하여 상대방을 공경하되 적당히 거리를 두라고 말씀하셨죠. 제 인생 철칙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의 서재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책이 참 많습니다.”

“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습니다. 모으고 모으다 보니 어느새 수천 권이 넘어 버렸네요. 이것도 병입니다. 하하.”

“아뇨. 독서만큼 자신을 성장시키기에 완벽한 방법은 없으니까요. 저도 책 읽는 거 참 좋아합니다. 요즘은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게 못내 아쉬울 정도로요.”

빈말이 아니었다.

취미를 묻는 칸에 늘 독서라는 답을 적었을 정도로 책 읽는 걸 즐겼다.

하지만 오프라인의 사장을 맡은 뒤로는 책을 멀리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인수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이 공간은 언제든 편하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책도 마찬가지고요.”

“아닙니다. 개인 공간이신데 실례를 할 순 없죠.”

“괜히 듣기 좋으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집에 돈이 있다 보니 어쩌다 이렇게 큰 서재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가끔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넓은 공간을 나 혼자 독차지하는 게 맞는가 하고요.”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군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나는 송순주를 한 입 마시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수강 사장 일은 아쉽게 되었습니다.”

“철없는 녀석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게 적대심이 심했죠. 셋째 어머니의 교육 방침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쯧.”

그가 혀를 차는 소리가 서재 가득 울렸다.

“사이가 많이 안 좋습니까?”

“저는 동생에게 특별히 악감정은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 피를 이어받은 동생이고요. 하지만 녀석은.”

“형에 대한 미움이 있군요?”

“미움이랄까. 그것보다는 성삼 그룹은 자신이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이 차이가 17살이나 나는데 늘 저를 경쟁상대로 보았죠.”

“성삼 그룹 내부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자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랑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저돌적이고 냉철하죠. 그런 녀석이 도대체 왜 그런 황당무계한 일을 지시했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요.”

“사람이 다쳤습니다. 저희는 이번 일에 대해 절대로 합의에 응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인수천은 오해하지 말라며 양손을 흔들었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을 방침입니다. 법의 냉철한 판결에 따라야죠.”

“그건 부회장님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그룹의?”

“아버님께서도 재가하신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 부회장직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성삼그룹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 간섭을 일절 하지 않을 거라고요.”

“다행이군요.”

어느새 송순주 한 병을 다 비운 우리는 추가로 한 병을 더 꺼냈다.

부드러운 향과 술맛 덕분인지 마셔도 마셔도 취하는 느낌이 적었다.

“사건에 개입하지 않겠다면 오늘 저를 이 자리에 부르신 까닭은 무엇인지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네?”

“동생을 미워하는 건 아닙니다만 요즘 들어 특히 골치가 아팠거든요.”

“후계자 다툼 때문에?”

“맞습니다. 성삼 그룹의 왕좌에 오르는 게 저의 인생 목표는 아니지만 요즘 들어 너무 저를 공격하는 게 보였으니까요.”

“그랬군요.”

“네. 이번 일로 아버님을 비롯해서 그룹 내 많은 세력들이 한 가지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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