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회장님을 후계자로 인정하자는?”
“비슷한 거죠. 회사에 없으면서 그룹을 이끌 순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인수강이 감방에 들어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성삼 그룹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함구하겠단 의미였다.
그는 나의 빈 잔에 술을 따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근불가원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저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이 빚은 어떻게든 꼭 갚고 싶습니다.”
“부회장님을 위해 벌인 일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저를 도와주신 건 맞으니까요.”
“투자라면 이미 충분합니다.”
“하하. 냉정하시군요. 알고 있습니다. 뒤에 원화성 회장은 물론 진양 그룹도 버티고 있고, 또…….”
그는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TP 그룹과도 인연이 있으시고요.”
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나와 강세연과의 관계를 묻는 말이었으니.
나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답했다.
“TP 텔레콤의 광고를 찍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게 다입니다.”
“그 말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강세연 관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비즈니스 관계죠.”
“그런가요? 수강이 녀석이 단순히 그런 관계 때문에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를 것 같진 않습니다만.”
“공격 타깃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저도 궁금할 따름입니다.”
“하하. 사랑에 눈이 멀어서 갑자기 정신이 나갔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저 우 대표님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상관없다면서 말이죠.”
“그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것 같습니다만.”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만큼 무서운 생물은 없으니까요.”
그는 내게 술을 권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아무튼 어떤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뭐든 편하게 이야기 주세요. 투자가 아니라면 협업도 좋고 사무실 임대도 좋고, 독자적인 프로젝트도 다 열려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서재의 밤이 깊어갔다.
* * *
인수강이 체포된 이후 사건은 점점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피의자인 인수강이 전혀 입을 열지 않았으며.
성삼 그룹의 강력한 후계자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삼에서 별다른 대응이 없었던 것은 물론.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오프라인에서도 이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자 여흥이 식어 버린 까닭이었다.
강세연과의 연관성에 집착하던 일부 찌라시 매체들도 결국은 다른 이슈로 흥미를 옮겼다.
홍지혜가 이번 수사를 책임지던 김광호 경감의 말을 내게 전했다.
“인수강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일체의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룹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하자 자포자기한 모양이죠?”
“그의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부끄러워서 그렇지 않을까요?”
“부끄럽다고요?”
“네. 모름지기 국내 최고 기업인 성삼 그룹의 후계자 후보였습니다. 그런 그가 질투심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떠들었다가는 그는 물론이고 그룹의 명예에도 먹칠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김광호 경감은 뭐라고 하던가요?”
“피의자가 모든 죄를 다 인정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더 조사해 봤자 나올 만한 게 없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냈고 법원에 넘기면 될 것 같다고요.”
“네. 김광호 경감님도, 홍 본부장님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뭘……. 그나저나 참 무섭네요.”
“무섭다고요? 뭐가요?”
“남자의 질투가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되었어요. 여자의 질투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남자의 질투라기보다는 인수강 그자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겠죠. 저로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인물입니다.”
“뭐 그 모든 원인 제공이 제 앞에 앉아 계신 대표님 때문이라고 한다면 대표님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겠죠?”
“네?”
“하하. 농담이에요. 그런데 강세연 관장은 이번 사건에 대해 뭐래요?”
“그걸 왜 저한테 묻는 겁니까?”
내가 딱딱한 얼굴로 되묻자 홍지혜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 중에서는 대표님이 강 관장과 가장 친하니까요?”
“안 그래도 오늘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역시! 두 분은!”
“넘겨짚지 마시고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자리로 돌아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홍지혜는 알겠다면서 한쪽 눈을 찡긋 감더니 여유롭게 내 방을 나갔다.
나는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그녀답지 않게 지나치게 밝은 느낌이라 어쩐지 불안했다.
* * *
북촌한옥마을이 위치한 가회동 깊숙한 길가 한 곳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현대식으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강세연과 함께 건물로 들어와 2층 창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강세연이 해맑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찾으셨어요? 처음 오는 곳이에요.”
“스페인 요리 좋아하신다면서요?”
“어머!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 이야기는 안재영으로부터 들었지만, 그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나는 짐짓 모른 척 말했다.
“저번에 창덕궁 구경했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제가요?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요?”
“네. 여기 주인장이 스페인에 요리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스페인 요리가 괜찮다고 합니다. 드시고 싶은 거로 골라주세요.”
내가 메뉴를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는 즐거운지 콧소리를 내며 메뉴를 살펴보았다.
“이제 기자들한테 연락은 안 오죠?”
“네. 대표님 말대로 출근도 안 하고 계속 집에 있었더니 기자들도 관심을 끊더라고요. 요즘은 집 앞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없고 전화도 없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우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즐겁게 메뉴를 고르던 강세연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더니 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대표님을 뵙자고 하세요.”
“네?!”
# 4장 평창동
평창동.
북한산 남쪽.
그리고 북악산 북쪽에 자리한 이 동네는 면적 대다수가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될 만큼 산과 계곡이 많았다.
마을 또한 대다수가 급경사의 산지 위에 지어져 있으며 교통이 불편하여 지하철역과의 거리 또한 멀었다.
그럼에도 이곳이 부촌인 이유는 간단했다.
도심 속에서도 산과 계곡을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며 지리적으로 광화문과 가깝고, 대중교통이 없더라도 자가용을 이용하면 이동에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동네는 오랜만에 오는군.’
북한산 기슭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의 계단을 오르자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형성된 저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벽돌로 된 담장에 작은 정원이 딸린 아담한 저택.
어릴 적 살았던 집이었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온 가족이 고생하지 않고 즐겁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집.
내가 멍하니 해당 건물을 바라보고 서 있자 앞에 가던 강세연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우 대표님. 어딜 그렇게 보고 계신 거예요?”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했네요. 가시죠.”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서자 드넓은 정원이 우리를 반겼다.
대충 눈짐작으로도 정원이 100평은 넘어 보일 정도로 대저택.
바로 국내 재계 서열 3위인 TP 그룹 강규현 회장의 자택이었다.
“평창동이 부촌이기는 하지만 재벌가는 잘 없는데 신기하네요.”
“응? 평창동에 대해 잘 아시네요?”
“어릴 적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네. 아버지가 북한산을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이 집에 북한산의 정기가 흐른다나 뭐라나.”
그녀는 다 좋은데 교통이 너무 불편하다면서 투덜거렸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집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요. 하필 대로에서 가장 먼 집이라 저희 집 근처 도로만 제설한다고 해결되지도 않고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자기네 집 앞 도로는 잘 치우지 않나요?”
“맞아요! 그런 인식이 있어서 그나마 제설 작업이 느리진 않은데. 그래도 경사가 심하고 외진 곳이다 보니 가끔은 밑에다 주차하고 걸어 올라가야 할 때도 있어요.”
“집 앞 도로 눈 치울 때가 그립네요.”
“몇 살까지 여기 사셨는데요?”
“고등학생 때 이사 갔어요.”
“어머나! 그럼 저랑 상당히 오랜 기간 주민으로서 같이 사셨겠는데요? 아니 같이 산다는 게 그러니까 그 의미는 아니고요.”
“네, 그래도 저희 집은 저기 아래쪽에 있어서 마주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겁니다.”
“에이. 여기 대로라고 하면 평창문화로 하나잖아요. 자주 스쳤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처럼 평창동은 북악터널을 지나 신영동 삼거리까지 이어지는 평창문화로 하나가 유일한 큰길이었다.
그녀와 평창동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연아. 손님을 모시고 왔으면 그만 실내로 들어오거라. 밖에서 무엇을 하는 게냐.”
“앗! 네 아빠. 지금 들어갈게요.”
나는 강세연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만큼이나 앤틱한 가구들로 꾸며진 실내에서는 낡은 집 특유의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고약하거나 지저분한 냄새가 아닌.
따스하면서도 친근한.
곧 안에서 풍만한 체구의 남성이 나오더니 내게 손을 건넸다.
TP 그룹 회장 강규현이었다.
“반갑소. 우 대표. 강규현입니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우세진입니다.”
“네, 집에 들어오셔서 냄새를 맡는 것 같던데. 좀 퀴퀴하죠? 낡은 집이라서 어쩔 수가 없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저도 어릴 적에 이 동네에서 자랐는데, 그때 살았던 집 냄새와 비슷해서 무척 친근하고 그리운 느낌입니다.”
“오! 이 근처에 사셨나요?”
“네, 안 그래도 따님과 밖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연이가 안으로 손님을 안 모시고 밖에서 그리 즐겁게 떠들어 댔던 거군요. 하하.”
강규현은 강세연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전형적인 딸바보 아빠였다.
그는 내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 엄마는 오늘 일이 있어서 외출 중입니다. 함께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아닙니다. 사정이 있으신 건데요.”
“같이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면 좋았으련만 그 사람도 참.”
“아빠, 이제 그만 하세요.”
강세연이 부끄러운 듯 강규현을 말렸다.
그러자 강규현이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아니, 딸의 남자 친구가 집으로 온다는데 그것보다 중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뭐가 그리 바쁘다고.”
“아 진짜! 아빠! 세진 씨는 제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엄마도 그래서 부끄럽다면서 다른 모임에 가신 거잖아요!”
“아니긴 뭘. 아니었으면 인수강 그 녀석이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아빠도 다 알아보고 하는 소리다.”
“아이참! 아니라니까요! 제발 좀 그만 하세요!”
“허허. 얘도 참. 어떻습니까? 우 대표. 우 대표도 우리 세연이한테 전혀 관심이 없습니까?”
예상치 못했던 돌직구.
나는 유리잔에 든 냉수를 마시며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지.’
강세연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며, 재벌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