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전에 사귀었던 주소월도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강세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직 강세연과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 않던가.
나는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답했다.
“강 관장님에게 관심이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교제 중인 건 아닙니다.”
“관심은 있으나 사귀는 건 아니다?”
“네.”
“허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로군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그래요? 일부 기사에는 우 대표와 우리 세연이. 그리고 인수강 사장이 삼각관계라고 하던데?”
“한낱 소설입니다.”
“소설이라. 그런데 말이요.”
“네.”
“우리 세연이도 우 대표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아빠!!”
“아니, 그렇잖소. 우 대표도 세연이한테 관심이 있고, 세연이도 우 대표한테 관심이 있으면. 그럼 답은 하나 아니오?”
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자신의 딸과 교제한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은 서로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 대표. 내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소?”
“잘 모르겠습니다.”
“내 나이도 벌써 65살이요. 적지 않지.”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정정은 무슨. 그런데 자식은 우리 세연이 하나가 전부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겠소?”
강규현은 무거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후계자가 없다는 뜻인가.’
강규현 회장은 부인인 이진미 여사와 잉꼬부부로 유명했다.
하여 슬하의 딸인 강세연 하나만을 애지중지하며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후사를 위해 부인을 여럿 둔 성삼 그룹 총수 인준영과는 다른 행보였다.
“부모님은 내게 두 번째 부인을 들여라, 다른 재벌가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며 잔소리를 해 댔지만 나는 그리 하지 않았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남자는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사는 거지.”
“존경스럽습니다.”
“세연이는 내게 우리 TP 그룹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요. 이 아이 눈에서 눈물 나오게 하는 녀석은 내 절대 용서 못 하지!”
“네, 이해합니다.”
“아까부터 존경이고 이해고 하는데, 그래서. 세연이랑 사귀는 겁니까, 아닙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직은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내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자 강규현은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붉히다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도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다니 참 대단하오. 하하. 아주 마음에 들었어!”
그는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보이더니 내게 힘을 주어 말했다.
“맞소. 우 대표 말처럼 남녀 사이에 서로가 알아가는 과정은 필요하지. 그렇지만 내가 그리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아니오. 그러니 빨리 결정해야 할 겁니다.”
“네, 회장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세연아. 아주 마음에 들어! 아빠는 이 친구가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강규현의 웃음소리가 북한산 아래 오래된 저택을 가득 채웠다.
강세현의 새빨개진 두 볼과 함께.
* * *
“정말 죄송해요, 대표님.”
“뭘요. 저라도 그런 이상한 기사를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날 겁니다.”
“다 소설이잖아요. 저는 인수강 그 사람한테는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설이죠.”
“그래도 전부 다 소설인 건 아니에요.”
“네?”
“저는 아빠한테 좀 따져 봐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강세연은 차고 문을 열어 주더니 다시 저택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나이로는 한 살 위 누나지만.
하는 짓은 10대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웃음을 짓고는 차를 돌려 강규현의 집을 빠져나왔다.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도중.
문득 예전에 살던 집이 떠올랐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들렀다 갈까.’
나는 생각을 바꿔 예전에 살던 집 앞으로 차를 몰았다.
미로처럼 꼬여 있는 평창동 길을 따라 곧 익숙한 풍경에 눈앞에 들어왔다.
나는 집 앞에 차를 세워 두고는 주변을 살폈다.
“여긴 예전 그대로구나. 응?”
집 대문에 이런 종이가 붙어 있는 게 아니겠는가.
<완전 급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번호로 연락 주세요>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의 심정으로 종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평창부동산입니다.
“안녕하세요. 급매물건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아! 벽돌 담장으로 된 집?
“네, 맞아요.”
-전화 잘 주셨어요! 그 집이 정말 싸게 나온 집이거든요.
“얼만데요?”
-원래 비슷한 평수의 평창동 저택이 13억 정도 하거든요. 그런데 거긴 주인이 지금 급전이 필요해서 10억에 내놨어요. 완전 거저죠, 거저!
“그랬군요. 혹시 지금 집을 파시는 분들이 몇 번째 주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처음에 이 집을 짓고 사신 분들부터 해서 현재 주인분들이 몇 번째 주인인지 궁금해서요.”
-아. 두 번째예요, 두 번째. 첫 번째 주인은 사정이 있어서 동네를 떠났고 그다음에 사신 분들이에요.
다행히 우리가 떠난 다음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네, 혹시 급전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는데, 알다시피 이런 저택은 금방 안 팔리잖아요? 그래서 빨리 처분하고 싶으신가 봐요.
10억이면 2012년 기준 강남에 있는 새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가격.
아무리 평창동이 살기 좋다지만 교통 불편하고 오래된 집에 그 돈을 내고 산다는 건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구매자가 많을 수 없는 구조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 집. 제가 살게요.”
-네? 갑자기요?
부동산 아주머니는 이게 장난 전화인지 아니면 진짜인지를 몰라 당황했다.
“계좌번호 불러 주세요. 계약금 바로 쏴 드릴게요. 아니다. 지금 바로 10억 넣어드릴 테니까 바로 계약서 쓰시죠.”
* * *
10년 만의 귀환.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 나무도 그대로 있구나.’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심었던 감나무가 못 본 사이 훨씬 더 커진 것. 그것만 빼면 말이다.
집은 공실이었다.
집주인이 이미 모든 물건을 정리한 채 집을 비워 두었기 때문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강규현 회장네 집에서 맡았던 그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손 봐야 할 곳이 제법 많아 보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내에서는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잘은 모르지만, 아빠가 이 집 짓는데 제법 큰 돈을 썼다고 하셨지.’
나는 2층으로 이어진 계단 난간을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겼다.
즐거웠던 기억만이 가득했던 집이었다.
그러나 이 집을 떠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이사했던 쌍문동의 다세대 주택은 지옥이 따로 없었지.’
알코올 중독자가 된 아빠가 엄마를 때리기 시작하면서 그 좁고 낡은 집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아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엄마, 나 예전에 살던 집 샀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평창동 집 있잖아.”
-정원 딸린 집?
“지금 그 집이야.”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 잘 이해가 안 간다.
“그 집 내 돈 주고 다시 샀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나는 엄마에게 집 사진을 찍어서 스마트폰으로 보냈다.
“사진 봤어요?”
-으응.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만 괜찮으면. 여기 올라와 살아요. 엄마도 이 집 좋아했잖아.”
-아니다. 나는 이제 여기가 내 집이야. 거긴 세진이 네가 살렴.
“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데?”
-그러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되잖니.
“엄마는 괜찮겠어요?”
-응, 나는 여기가 좋다. 네 아빠도 여길 좋아하고. 가게도 잘되잖니. 이제 가긴 어딜 또 가겠어. 내 걱정은 말고 네가 거기 살아. 그 쥐방울만 한 고시원은 인제 그만 좀 나오고.
“왜요. 나는 괜찮은데.”
-어휴. 나잇값을 해야지! 너는 괜찮아도 네가 그런데 살면 너희 부하 직원들이 욕을 먹어요. 대표가 저런 곳에 산다고. 그러니 빨리 옮기렴.
“네, 알겠어요. 아무튼 잘 샀죠?”
-응, 물론이지. 역시 내 아들이다. 자랑스러워. 아주.
“네, 조만간 아빠랑 같이 서울 올라오세요. 집 구경시켜 드릴게요.”
-응, 너도 빨리 고시원에서 그쪽으로 옮기고!
나는 전화를 끊고는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렸을 적에 살았던 집이라 그런지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고시원에만 오래 살아서 가구 같은 건 잘 모르는데 어떡하지.’
그러다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 * *
서울 마포구 아현동.
이곳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구 거리가 있었다.
사당, 논현 등과 함께 서울 3대 가구 거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는 수많은 가구점이 밀집해 있었고, 또한 가구를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아세요?”
“여기요? 강북에서는 제일 크고 유명하니까요. 다른 곳들은 대형 브랜드 업체들이 많은데 여긴 작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가구점들이 즐비해요. 그래서인지 개성 있고 튼튼한 가구들이 많고요. 저희 갤러리 가구 중에서도 여기에서 산 물건들이 많아요.”
“그래요? 다 외국에서 수입한 가구들인 줄 알았어요.”
“대표님. 혹시 저를 돈 많은 부잣집 철없는 딸 정도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설마요.”
“저는 어릴 적부터 10원 한 푼도 아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어요. 물론 명품도 좋아하지만 늘 비싼 제품만 사는 바보는 아니랍니다.”
“기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리죠.”
“아뇨. 혹시라도 저에 대해 오해를 할까 봐요.”
나를 향해 눈을 흘기던 강세연이 다시 방긋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나를 한 작은 가구점으로 이끌었다.
“여기가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디자인 좋고 튼튼한 물건들이 많은 집이에요. 제 오랜 단골집이죠.”
“어이쿠! 아가씨 오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60대 남성이 나와 강세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사람 좋은 미소로 물었다.
“혹시 남자 친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