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200)

“알아가는 사이예요.”

“이거 경사로군요. 회장님도 엄청 기뻐하시겠습니다. 사모님도요.”

강세연은 그의 말이 싫지는 않은 듯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침대랑 소파. 식탁. 음. 또 뭐가 있어야 하죠?”

“책장이랑 책상도 있으면 좋겠군요.”

“책장이랑 책상. 그리고 의자도 필요하겠네요. 옷장도 필요할 테고.”

“암요, 암요. 저희 매장에 다 있으니 마음껏 구경하세요.”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가게 주인과 가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들뜬 모습을 보였다.

“우 대표님은 어떤 게 좋으세요? 저는 화이트 톤을 좋아하지만, 또 너무 하얀 색만 있는 건 별로예요. 집이 너무 심심해 보이잖아요? 포인트가 되는 색상이 필요한데. 보자. 아! 이건 어떠세요?”

그녀는 카키색으로 된 가죽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독특한 색이네요. 레트로한 느낌도 있고요.”

“제가 대표님 집을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저희처럼 오래된 나무로 되어 있는 집이라면 잘 어울릴 거예요. 뭔가 중후한 느낌이 있거든요. 카키색은.”

“그렇군요. 저는 잘 모르겠으니 전문가인 관장님이 알아서 골라 주세요.”

“실내 장식의 핵심은 소품이에요! 여긴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없지만 클래식하고 엔틱한 느낌의 소품들이 많아서 우 대표님과 잘 어울릴 거예요.”

그녀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을 골라서 내게 보여 주었다.

고풍스러운 탁상시계와 원목 스탠드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주방은 여기 말고 다른 곳을 봐야 할 것 같긴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 북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선호해요. 단순해서 깔끔하면서도 단아한 멋이 있죠. 주방은 아무래도 여자가 많이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제가 골랐으면 좋겠는데.”

“네?”

“그러니까 주방은…….”

강세연은 자신이 말하고도 방금 자신이 뭐라고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아닙니다. 저는 가구나 소품 쪽은 젬병이니 관장님만 믿을게요. 사례비는 충분히 드릴 거구요.”

“아니에요!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닌걸요.”

그녀는 무척 심통 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짐짓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럼 제게 오늘 저녁을 대접할 기회를 주시렵니까? 아가씨.”

“음. 그게 좋겠네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빠른 속도로 가게 주인과의 흥정을 마무리했다.

생각지 못한 매출에 가게 주인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연 아가씨를 봐서 특별히 30% 할인된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 배달도 공짜로 해 드릴 거고요!”

역시 잘 모르는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 * *

강세연과 함께 간 까닭이었을까.

배달 및 설치는 그날 저녁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덕분에 텅텅 비어 있던 집이 어느덧 각종 가구로 가득 찼다.

세련된 느낌과 중후한 멋은 덤이었다.

고시원에서 평창동으로 짐을 옮긴 나는 강세연을 비롯하여 오프라인의 주요 인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을 방문한 박창후가 요란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야! 으리으리합니다. 흡사 영국의 고급 저택에 온 것 같아요. 이거 인테리어를 누가 한 겁니까? 원래 있던 가구인가요?”

“아뇨. 강 관장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강 관장님이요?”

박창후는 내 옆에 선 강세연을 바라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빼박인데요, 대표님. 더는 두 분의 관계를 저희한테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뭐야! 형님! 진짜로 강 관장님하고 사귀는 거예요? 대박!”

“아니,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우리 우 대표님이 연애를 한다고요! 뭐야뭐야! 왜 저한테는 말 안 해 줬어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나와 강세연의 관계를 물었다.

나는 강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 볼에 홍조를 안고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마련된 자리.

이곳에 강세연과 친분이 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편할 리 없는 자리에 이렇게 흔쾌히 방문한 그녀에게 고마운 한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네, 여러분. 저희 사귑니다. 말씀드리는 게 늦었네요.”

“네?! 진짜로?!”

“헉.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셨습니까?”

“대박, 대박! 지혜야. 이거 우리 빨리 기사로 내보내자. 조회 수 바로 톱 찍을 듯!”

최루리가 홍지혜의 어깨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홍지혜는 멍하니 반응이 없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아 네. 그러게요. 기사 쓰면 사람들이 많이 보겠네요.”

“그치, 그치? 우 대표님. 오늘 저희한테 맛있는 음식 제공 안 해 주시면 바로 이 자리에서 기사 쓸 거예요. 오프라인 대표랑 TP 그룹의 하나뿐인 딸이 사귄다고요. 저희 노트북도 가져왔다고요.”

최루리가 자신의 가방을 가리키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랬다가는 평생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못 돌아오시는 수가 있습니다.”

“어머나! 지금 협박하시는 건 아니죠? 안 되겠네. 기사에 대표가 직원들을 협박했다는 내용도 넣어야겠네요.”

“하하. 맛있는 요리를 금방 내어드릴 테니 거실에 좀 앉아 계세요. 그동안 집 구경하셔도 좋고요.”

나는 얼어붙은 강세연의 손을 꼬옥 잡고는 그녀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집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놀랐죠? 미안해요. 이렇게 고백할 마음은 없었는데.”

“언제부터였어요?”

“네?”

“언제부터 고백할 생각이었냐고요.”

“음. 며칠 전 같이, 가구 보러 갔을 때?”

“그런데 왜 그때는 이야기 안 했어요?”

“타이밍을 놓쳤어요.”

“그날 저녁 식사 자리도 있었잖아요.”

“그러게요. 세연 씨 얼굴 본다고 할 말을 까먹었나 봐요.”

“바보.”

강세연은 용암처럼 붉어진 얼굴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주고는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요.”

* * *

강세연은 요리의 고수였다.

듣자 하니 어머니인 이진미 여사는 젊었을 적 프랑스에서 요리사로 근무를 했다고 한다.

해외 출장차 프랑스를 방문한 강규현 회장이 그런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그녀는 재벌가의 안주인이 된 후에도 집안 요리는 손수 해내고 있었다.

또한 딸인 강세연은 물론 유럽 요리를 배우고자 하는 재벌가 며느리들에게 틈틈이 요리를 가르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야. 이게 다 뭡니까? 관장님. 아니, 이제 사모님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 박 본부장님. 사모님은 좀 어색하잖아요. 저는 그냥 형수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래서 형수. 이게 다 뭐예요? 처음 보는 요리들인데?”

“네. 저건 꼬꼬뱅이라고 프랑스 가정집에서 흔히 해 먹는 닭요리예요.”

“오! 저 그거 알아요. 먼 나라 가까운 나라 프랑스 편, 처음에 나오는 요리잖아요!”

“맞아요. 와인에 찐 닭 요리랍니다.”

“와. 이걸 여기서 다 먹어 보네. 잘 먹겠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접하기 어려운 요리라며 강세연의 요리를 칭찬했다.

“진짜 맛있어요! 프랑스 요리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고 제 입맛에 딱인데요!”

“형수님, 저도 노하우 좀 알려 주십쇼. 저 요리가 취미거든요.”

“이 이사님. 새치기하지 마세요. 지인이가 먼저입니다.”

“어허! 제가 곧 프랑스로 떠날 몸 아니겠어요? 그러니 프랑스 요리는 저부터 배우는 게 좋겠네요.”

강세연이 만든 요리는 순식간에 상 위에서 사라졌다.

강세연은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요리가 너무 부족했다며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준비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겠지. 갑자기 일을 맡게 되었는데.’

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로운 요리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 강세연에게 미안하다는 얼굴을 보이고는 주방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와인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며칠은 굶은 것처럼 마셔 대는군.’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고는 두 손 가득 와인 3병을 들었다.

그리고 창고에서 나오려는 순간.

홍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강 관장님.”

“네?”

나는 주방으로 나가려는 걸 멈추고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홍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강세연을 향해 물었다.

“우 대표님하고 사귀신 지는 오래되셨나요?”

“아, 아뇨. 최근입니다.”

“그러셨군요. 좋은 분이에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저는 이제 곧 한국을 떠나거든요. 우 대표님을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미국으로 가시는 거죠?”

“맞아요. 미국 지사장으로 발령 날 예정이에요.”

“대표님에게 들었어요. 처음이라 힘드실 텐데, 고생이 많으세요.”

“뭘요. 저는 대학도 미국에서 나와서 낯선 곳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데?”

홍지혜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숨을 골랐다.

“우 대표님이 듬직해 보이지만 마음은 또 여리고 고민이 많으신 분이거든요. 혼자 두고 떠나기가 걱정되었는데, 이제 옆에 좋은 분이 계시니까 든든하네요.”

“고마워요. 지혜 씨. 저 지혜 씨 팬이었는데, 떠나신다고 하니까 섭섭하네요.”

“잘 부탁드릴게요. 우 대표님도. 강 관장님도. 멋진 두 분이 만났으니까, 앞으로 좋은 일들만 있을 거예요.”

“지혜 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도 미술품 때문에 뉴욕에는 종종 가니까 가면 연락드릴게요.”

“네, 꼭 연락 주세요.”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함께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둘이 주방을 떠날 때까지 한동안 창고에서 나오지 못했다.

밖에서 박창후가 도대체 술은 언제 오는 거냐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집들이가 무르익을 무렵.

백철웅과 원화성이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선 나타났다.

“백 회장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최 본부장. 여기 다 모여 있었네.”

최루리는 백철웅을 향해 달려가더니 백철웅이 들고 있던 선물을 받으며 그를 반겼다.

원화성이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집이 좋네요. 주차하기가 좀 어려워서 한참을 헤맸습니다.”

“집 근처에 차 댈 곳이 없으셨죠?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만.”

“아닙니다. 여기 근처에 지인이 살고 있어서 주차는 그쪽에 하고 왔습니다. 그나저나 소문으로만 듣던 강세연 관장님도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원화성입니다.”

“반갑습니다. 원화성 회장님. 강세연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 미인이시군요. 농담이 아니고 지금까지 제가 만나 본 여인 중에서 두 번째로 미인이십니다.”

“두 번째요?”

강세연이 궁금한 듯 묻자 원화성이 웃으며 답했다.

“첫 번째는 제 부인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눈에는 제 부인이 최고랍니다.”

“어머. 애처가시네요. 저희 아버지도 저희 어머니가 최고라고 늘 말씀하시는데 멋지세요.”

“아버님이라면 TP 그룹의 강규현 회장님 말씀이시죠?”

“네,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경영계 미다스의 손 아니십니까. 개인적으로도 무척 존경하는 분입니다.”

“하하. 오늘 이 자리에 저희 아버지가 계셨다면 무척 기분이 좋으셨겠네요.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응? 꼭 게스트가 아니라 호스트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원화성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박창후가 웃으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