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200)

“아니, 그게 왜 부회장의 잘못이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아닙니다. 회장님. 이건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난 인수천이 강규현의 앞으로 오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인수천의 태도에 강규현은 당황한 듯 헛기침을 연발했다.

“흠흠. 됐습니다. 부회장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 하세요.”

“네, 회장님. 부디 못난 동생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내가 아니고 세연이가 해야지. 아무튼 이 건은 인제 그만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그나저나 우 대표.”

강규현은 화제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세연이랑 사귄다면서 어째서 나한테는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소?”

“조만간 찾아뵐 예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집 근처에 집을 구했다면서요?”

“네, 제가 예전에 살던 집이기도 해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좀 섭섭합니다.”

“그런 것까지 보고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정색하며 말하자 강규현이 잠시 움찔거리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맞아요, 맞아. 그런 걸 나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지. 다만 우 대표는 앞으로 나와 이야기할 일이 많지 않겠소.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눠 줬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나저나 조갑환 이사는 만나 봤습니까?”

“네, 며칠 전에 만났습니다.”

“어떻습니까? 괜찮은 사람입니다. 똑똑하고 야망도 있고, 일 처리도 빠르죠.”

“업계에서도 평판이 좋더군요. 저랑은 광고 찍을 때 함께 일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우 대표가 찍은 광고 덕분에 TP 텔레콤 매출이 많이 늘었어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러니 나를 편하게 대하세요.”

강규현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내 어깨를 두드리자 인수천도 웃으며 말했다.

“아직 사귀는 사이이고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회장님께서는 우 대표가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허허. 둘 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곧 좋은 소식을 들려 주지 않겠소. 안 그렇습니까, 우 대표?”

내가 말없이 웃자 인수천이 나를 도와주었다.

“회장님, 요즘 친구들은 저희 때처럼 20대에 결혼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30대 넘어서 결혼하죠.”

“어차피 할 거면 일찍 하는 게 좋지. 늦게 하면 손해야. 아이한테도 안 좋고.”

“그래서 요즘은 아이 없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커플도 많다고 합니다.”

“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아야지! 그게 자연의 섭리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 대표?”

“각자가 결정할 일이겠죠. 세대에 따라 가치관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흠흠. 그런가? 아무튼, 셋은 너무 많고, 하나는 내가 키워 봤더니 좀 외로워. 이왕이면 둘이면 좋겠는데…….”

강규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하자 인수천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 대표님. 어떡합니까? 강 회장님 마음에 이리 쑥 들어서.”

“저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아서 감사한 한편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부담은 무슨.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무엇이든 이야기하세요. 그리고 조갑환 그 친구는 채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쓸 일이 많을 거요.”

“네, 회장님 고민해 보겠습니다.”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는 강규현의 말에 인수천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 주세요.”

국내 재계 서열 1위인 성삼 그룹과 3위인 TP 그룹의 전폭적인 지지라니.

나는 뿌듯한 감정을 느끼는 한편, 이 건물에 들어올 때 D동의 대다수 층에 불이 들어와 있지 않던 게 떠올라 물었다.

“그런데 부회장님. 혹시 D동 건물은 공실이 많습니까?”

“네? 맞습니다. 35층부터 40층까지만 그룹 주요 임원들이 쓰고 있고 그 아래층은 공실이 많습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죠?”

“이유가 있나요? 공실이 많으면 손해도 클 텐데요.”

“그게…… 아버님의 고집 때문입니다.”

“네?”

“D동은 그룹의 핵심 인재들만 모여 있어야 한다고 해서 최고의 성과를 올린 법인만 들어오게 한다는 원칙을 세우셨거든요.”

“그런데 왜 공실이 있는 거죠?”

“그…… 강 회장님도 계시는데 부끄럽습니다만.”

인수천이 강규현의 눈치를 살피자 강규현이 괜찮다며 등을 떠밀었다.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말해 보세요.”

“아버님이 세우신 기준이 너무 높아서 말이죠. 아직 그 기준을 달성한 법인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허허. 역시 인준영 회장님이시군.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공실이 많으면 임대료만 해도 엄청나게 손해일 텐데.”

“네, 그래서 저를 비롯한 많은 임원이 꼭 우리 그룹이 아니더라도 임대를 받자고 말씀을 드리고는 있는데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으시네요.”

“저기 부회장님.”

“네.”

“전에 저한테 뭐가 되었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신다고 한 거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요.”

인수천은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한지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당시 사무실 임대도 가능하다고 하셨던 게 떠올라서요.”

“아. 맞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혹시 여기 아래층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100명 정도가 들어갈 사무실을 빌릴 수 있을까요?”

“100명이요?”

* * *

오프라인은 총 4명의 신규 본부장을 채용하였다.

소셜본부장이었던 홍지혜를 대신하여 센터 일보의 이철수 디지털 총괄을 채용, SNS를 비롯한 디지털 전략을 책임지게 하였다.

국제본부장이었던 최루리를 대신해서는 국제적인 인터넷 쇼핑몰인 아마존에서 CEO를 역임했던 재미교포 2세인 제임스 리를 선임하여 국제 파트를 맡겼다.

영상본부장이었던 박창후를 대신해서는 Never의 디지털콘텐츠사업 본부장을 역임했던 신동석을 채용, 영상 콘텐츠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덕오가 새로 뽑은 본부장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한 분 한 분의 맨파워가 엄청나네요.”

“그만큼 오프라인이 성장했다는 의미겠죠.”

“그런데 이건 뭔가요? 원래 계획에 없던 거 아닌가요?”

“홍보본부장 말인가요?”

“네, 홍보는 본부 사이즈가 아니라 팀이었잖아요? 팀원도 고작 3명에, 민정희 씨가 팀장으로 있고요. 상위 조직이 된 건가요?”

“그렇죠. TP 텔레콤에서 홍보 임원을 하던 조갑환 이사가 올 예정입니다. 민정희 팀장은 그 아래로 배치할 거고요.”

“언론사에 홍보본부라니. 뭔가 어색하네요.”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언론사가 아니라 글로벌 IT 기업입니다. 그걸 잊으면 안 돼요.”

“네, 대표님. 그런데 이건 또 뭔가요?”

이덕오가 본부장 이외의 추가 채용에 대해 적혀 있는 문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이철수 디지털 총괄 밑에 있던 센터 일보 소속의 디지털 인력을 모두 오프라인에서 흡수하기로 하였습니다.”

“네? 100명이나요?”

“맞습니다. 모두 센터 일보를 떠나 오프라인에 오고 싶다고 하더군요.”

“헐. 센터 일보에서는 뭐라고 안 해요? 디지털 쪽을 책임지던 사장은 물론이고 그 밑에 휘하조직이 모두 떠나는데요?”

“뭐라고 하겠습니까. 조직이 싫어서 떠나겠다는 걸.”

“아니 그런 거 있잖아요. 뭐라더라? 동종 업계로 이직하면 안 된다, 뭐 그런 거요.”

“전직 금지 말인가요?”

전직 금지 약정.

근로자가 경쟁 관계에 있거나 동종 업계로 이직 또는 창업하여, 이전에 몸을 담고 있었던 회사의 사업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약정이었다.

전직 금지라는 말을 꺼내자 이덕오가 상하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영업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비슷한 업종의 경쟁 회사로 취업하면 안 된다는 그런 법이 있지 않나요?”

“법은 아니고 상호 간의 계약이죠. 그리고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왜요?”

“전직 금지를 인정하려면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용자의 이익이 있어야 할 텐데 센터 일보의 수준이 오프라인보다 높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아하! 그쪽의 디지털 수준이 우리보다 한참 아래라서 보호할 가치가 없다, 뭐 이런 걸까요?”

“그렇죠.”

“하하. 그거 말 되네요. 기술 수준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는 건 영업 비밀이 노출될 확률이 높지만, 그 반대로 가는 건 그럴 개연성이 없으니까요.”

이덕오는 재미있다는 듯 손뼉까지 치며 웃음을 보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인원이 100명이나 되면 그들은 어디로 오나요? 저희 사옥은 아직 건설 중이고, 종로센터에는 자리가 없을 텐데요.”

“그것도 해결되었습니다.”

“응? 어떻게요?”

“강남역 성삼센터 본사 건물로 입주 예정입니다.”

“네?! 거기 엄청 비싸지 않나요? 아니 다른 성삼 그룹 이외 다른 회사가 들어갈 수 없을 텐데요.”

“가능합니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죠.”

“고, 공짜?!”

“우리 사옥이 지어질 때까지 공짜로 빌려주기로 합의 보았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이덕오가 솔방울처럼 커진 눈을 부라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이걸로 인수천이 나에게 진 빚을 갚았다는 걸.

* * *

오전 9시 30분.

종로센터 사무실은 기사를 쓰기 위한 아이템 발굴로 분주했다.

오프라인 직원들은 어떤 아이템이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인지에 대해 서로 의논하며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자자, 여러분! 잠시만 여기 주목해 주세요.”

나는 박수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데스크 부재로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새로 오신 분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와! 드디어 신임 본부장님들 등판인가요!”

“오오! 네 분이나 계시다!”

나는 흥분한 직원들을 진정시키고는 옆에 있는 이철수를 소개했다.

“우선 홍지혜 본부장님을 대신해서 소셜본부장으로 오신 이철수 본부장님을 소개합니다. 이 본부장님은 여러분들 모두가 알고 계시는 ‘커피톡’을 개발한 바로 그 커피의 CEO를 역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는 센터 일보에서 디지털 총괄로 활약하셨습니다. 모두 뜨거운 박수로 이 본부장님을 맞이해 주세요.”

모두가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치는 가운데 몇몇은 이철수와 연관된 이야기를 나눴다.

“나, 저분 알아. 커피 대표하시던 분이잖아?”

“나도 나도. 센터 일보로 옮기신 지 얼마 안 된 거로 아는데 이쪽으로 오셨네?”

나는 그와 함께 오기로 한 100명의 인원에 대해서도 밝혔다.

“오늘 여기에서 함께 소개해 드릴 순 없지만, 강남역 성삼센터에는 이 본부장님과 함께 오신 100여 분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앞으로 이 본부장님 산하 디지털랩에 소속되어 새로운 기사 형식과 신규 IT 프로젝트를 주도할 예정입니다.”

이어서 제임스 리 국제본부장, 신동석 영상본부장, 조갑환 홍보본부장을 차례로 소개했다.

그들의 커리어를 확인한 직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존, 커피, TP 텔레콤.

모두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IT 대기업이었다.

센터 일보 역시 국내 최정상 메이저 매체 중 하나였으며 전통 언론사 중에서는 디지털 분야에서 가장 앞선 곳이기도 하였다.

‘물론 오프라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 * *

신임 본부장들이 부임하자 오프라인의 이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심 끝에 뽑은 인재들인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인사이트와 경험 그리고 리더십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나는 집무실로 민정희를 불렀다.

그녀는 특유의 사교성을 발휘하여 직원 모두와 친하게 지내며 오프라인의 마당발을 자처하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대표님?”

“네, 새로 오신 본부장님에 대해 내부 직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요?”

민정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더니 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만족! 모두가 대만족 중입니다!”

“그래요? 어떤 부분이 그렇죠?”

“네 분 모두 성품 좋으시지, 실력 있으시지, 열정적이시지. 덕분에 기사가 양이나 질적으로 모두 좋아졌고, 트래픽도 크게 높아졌어요. 직원 모두 대만족입니다!”

“다행이군요. 좋은 분들을 모신 보람이 있어요.”

“그리고 제 사수이신 조갑환 본부장님도 정말 너무 좋아요!”

“조 본부장님이요?”

“네, 맨날 비싸고 맛있는 것만 사주시거든요. 맛집은 또 어쩜 그렇게 잘 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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