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홍보 임원이셨으니까 서울의 맛집이야 꿰고 계시겠죠. 기자들 대접하려면 맛집을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제가 홍보는 처음이잖아요? 안 그래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는데,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 주셔서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러라고 모신 분이니까요. 조 본부장님 밑에서 많이 배우세요.”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며 방을 나가려는 그녀에게 나는 무언가 떠올라 잡았다.
“아 참. 민 팀장님.”
“네?”
“혹시 남자 친구 없습니까?”
“에?! 갑자기 왜요?”
민정희가 깜짝 놀라며 몸을 사렸다.
나는 오해하지 말라며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저번에 제주도 갔을 때 아버님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민 팀장님 남자 친구 없는지.”
민정희는 김빠진 표정을 짓더니 투덜거렸다.
“어휴. 아빠도 참!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노친네가 주책이지!”
“딸이 걱정되니까 그러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정말 남자 친구는 없나요?”
“왜요? 우 대표님이 제 남자 친구 해 주시려고요?”
민정희가 입을 삐죽 내밀고 물었다.
“안타깝지만 저는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네?! 진짜요? 솔로셨잖아요?”
민정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최근에 사귀었거든요. 다른 분들에게는 비밀입니다.”
“누구랑 사귀는데요? 혹시 제가 아는 분은 아니죠? 홍 지사장님은 미국 가셨으니까 아닐 테고. 음…… 누구지?”
“서울 생활은 할 만해요?”
“네, 서울 생활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누구예요? 누구지? 설마 연예인?”
“하하.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강세연 관장과 사귑니다.”
“강세연 관장이요! 와 대박! 대박! 그분 TP 그룹 재벌 3세잖아요? 와 이거 진짜 대박 소식이다!!”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괜한 논란 만들고 싶지 않으니.”
“네네. 제가 입이 좀 무겁잖아요! 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민정희는 묘한 표정을 짓고는 내 방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그녀에게 비밀을 바라고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그녀를 통하면 내가 따로 발표하지 않아도 모두 나의 교제 사실을 알게 되겠지. 그걸로 됐어.’
나는 열쇠로 잠긴 가장 아래쪽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쪽에는 형형색색의 편지 봉투가 잔뜩 쌓여 있었다.
겉봉투에 붙여진 붉은색 하트 스티커를 보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까지 여직원들에게 받은 러브레터만 해도 수십 통이 넘었어. 게다가 메신저를 통해 데이트 신청을 받거나 고백을 받을 때도 있었지.’
그때마다 난처했는데 이번 기회에 연애 중인 사실을 전사에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뭣보다 내 입으로 직원들에게 연애 중이라는 이야기를 꺼내기는 민망하니까.’
오프라인 마당발 민정희.
실로 큰 도움이 되었다.
* * *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이곳은 과거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유독 고풍스러운 외관이 돋보였다.
그런 외관에 걸맞게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수시로 전시하였는데 오늘은 색채의 미술가로 유명한 샤갈의 작품을 전시 중이었다.
“세진 씨는 샤갈 좋아해요?”
어느새 강세연은 대표라는 호칭을 빼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예술 쪽은 문외한이라 잘 모릅니다. 그래도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따뜻한 색감은 좋아해요.”
“와! 그거면 충분해요. 맞아요. 따뜻한 색감. 그의 따뜻하면서도 풍부한 색감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정겹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죠.”
“세연 씨는 샤갈 좋아하나요?”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예요.”
그녀는 자신이 왜 샤갈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한참 동안 내게 설명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샤갈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손을 잡고 천천히 샤갈의 작품들을 관람했다.
내 얼굴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그들은 교양 있게 굳이 아는 체를 하지 않고는 우리 옆을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세연 씨는 어쩌다가 예술 쪽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예술 작품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이런 멋진 그림을 보면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나요? 저는 예술 작품을 통해 제가 정화되는 그런 느낌을 종종 받아요.”
“정화된다라. 멋지네요.”
“세진 씨는 어때요? 앞에 작품들을 보면서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요?”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두 연인이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도시 위를 날고 있었다.
마르크 샤갈의 대표작인 <도시 위에서>였다.
“무척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이네요. 행복해 보이고요.”
“네, 맞아요.”
강세연은 그림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는 내게 작품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샤갈은 약혼녀였던 벨라와 결혼을 하였어요. 그리고 다음 해에는 딸인 이다가 태어났죠. 그러니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작품 속에는 샤갈의 당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죠.”
“도시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네, 정말 멋진 작품이에요.”
딸이라는 말에 나는 강규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셋은 너무 많고, 하나는 외로우니 둘이면 좋겠다는 말.
“세연 씨는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싶어요?”
“네? 갑자기요?”
강세연은 두 볼을 발그레 붉히고선 되물었다.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요즘은 결혼해도 아이를 안 가지는 커플이 많으니까요.”
“음. 이왕 결혼했으면 아이를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둘이서는 나이 들어서 외로울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 아이가 몇 명 정도 있으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제가 외동이라 그래서 그런지 이왕이면 둘이면 좋을 것 같아요.”
“왜요? 외로울까 봐?”
“네, 외동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지만 때때로 형제자매가 없어서 외롭거든요. 그래서 둘 이상이면 좋을 것 같아요.”
“둘 이상이라. 축구단을 만들 수도 있겠군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축구단이라니?”
“그라운드에 서는 축구선수가 총 11명이거든요.”
“네?!”
강세연의 두 볼이 더는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하하. 농담이에요. 그렇게 낳았다 건 평생을 육아만 하다가 끝나겠어요.”
“그래도 세진 씨가 원한다면…….”
“네?”
“아, 아녜요. 빨리 앞으로 가요. 여기 너무 오래 있었네요.”
강세연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왜 이리 귀엽게 보이는지.
나는 덜컥 그녀의 손을 잡고는 물었다.
“세연 씨. 우리 이번 주말에 좋은 데 갈래요?”
“조, 좋은 데요?!”
* * *
평창동 우리 집.
오래된 거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최신 에어컨이 열심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실내를 쾌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시원한 바람 한 편에는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와 강세연이 나란히 앉아 있는 가운데.
앞에는 엄마와 아빠가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제주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세진이가 예전에 살던 집을 샀다기에 구경하러 올라왔더니 집이랑 어여쁜 처자가 같이 있네요. 호호.”
“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니가 훨씬 더 고우세요. 먼 길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쩜 말도 예쁘게 하지.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1시간도 안 걸리는 데요 뭘. 그나저나 황금 같은 주말에 우리 때문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갑작스럽게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 때문에 나는 제주도를 방문할 계획을 취소하고 서울에서 부모님을 맞았다.
장소가 제주도가 아니라 평창동으로 바뀌었지만, 목적은 동일했다.
어차피 부모님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다만 단둘만이 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떠 있던 강세연이 조금 실망했을 뿐.
그럼에도 강세연은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부모님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저희 집도 이 근처거든요. 예전에 여기에 사셨다고 들었어요. 오랜만에 다시 돌아오신 소감이 어떠세요?”
“새롭다고 할까 정겹다고 할까. 여러 가지 감정들이 드네요. 이 집에서 참 오래 살았거든요.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집이죠.”
엄마는 예전 생각이 나는지 거실 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추억에 잠겼다.
“가구랑 인테리어는. 세진 씨가 부탁해서 제가 골라 보았어요. 부모님 보기엔 어떠세요?”
“이야. 아가씨 안목이 참 좋다카이. 외국에 있는 궁전인지 알았다 아임까.”
“그러게요. 고급스러우면서도 아주 개성이 강한 가구들이 많아서 우리 세진이가 고른 건 분명 아니구나 싶었어요.”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강세연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집이 근처면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건가요?”
“아, 네.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그렇군요. 올해 나이가?”
“스물아홉입니다.”
“우리 세진이보다 한 살 위군요.”
“세진이가 누나를 꼬실 줄도 알고 아주 능력 있다카이. 하하.”
아빠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아빠에게 가만히 있으라면서 허벅지를 꼬집더니 다소 냉정한 표정으로 강세연에게 물었다.
“이런 질문 한다고 혹시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 어머니. 말씀하세요.”
“세진이가 여자 친구를 저희에게 소개한 게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좀 궁금하기도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요.”
“네.”
“혹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갤러리를 하나 운영하고 있어요.”
“갤러리라면 그림 전시하는?”
“네, 인사동에 있는 작은 갤러리예요.”
작은 갤러리란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엄청 크고 유명한 갤러리예요. 왜 그 조계사 길 건너면 보이는 커다란 건물 있잖아요? 거기가 세연 씨가 운영하는 갤러리예요.”
“조계사 건너서 갤러리라면 혹시 졸리메종 아니니?”
“응? 엄마 거기 알아요?”
“알다마다! 거기 유명한 해외 작가들 작품을 자주 전시하기로 유명하잖니!”
“맞아요.”
“그런데 거기 내가 알기로는 재벌가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맞아요.”
“저기 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고요?”
“네, 어머니.”
“거기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운영을?”
“네네.”
엄마는 잠시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나를 방으로 불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럼 세연 씨가 재벌가 사람이야?”
“네, 맞아요. TP 그룹 외동딸이에요.”
“T, TP 그룹이라고! 너 전에 광고 찍었던 곳 말이야?”
“네, 그건 왜요?”
“세진아!”
“네?”
“이게 진짜 무슨 일이니!”
엄마는 갑자기 내 얼굴을 꽉 부여잡더니 마구 흔들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