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보고를 위해 긴장되었던 회의실의 분위기도 다소 느슨해지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아무튼 다들 더위 조심하시고요. 저희 오프라인의 목표가 뭔지는 잊지 않으셨죠?”
내 말에 최루리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대표님. 세. 계. 정. 복! 아닌가요?
* * *
<[속보] 김설송 위원장, 9월 전격 서울 방문 선언>
<김설송 위원장 9월 서울 방문 확정…… 북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
<백철웅 통일부 장관 “구체적인 시기와 장소는 협의 중…… 최선 다할 것”>
북한은 지난 7월 김설송 노동당 제1비서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대외적으로 그녀를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내세우며 권력 승계를 마무리한 것이다.
나는 취재차 백철웅의 집무실을 방문하여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장관님.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설송 위원장이 이렇게 빨리 서울을 방문하겠다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아버지이자 전임 위원장인 김정일 위원장의 유지를 받들어 남북협력을 강화하려는 취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취임 이후 지나치게 빠른 행보라는 평가가 많은데요. 그렇다면 이미 김 위원장이 북한 내부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네, 저희가 내부적으로 파악하기에는 그렇습니다. 이제 그녀를 북한의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로 볼 수 있겠죠.”
“다행이군요. 일각에서는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권력 장악에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낭설일 뿐입니다. 우리 정부는 그녀를 북한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남북협력을 위한 최상의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1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다른 직원들을 회사에 돌려보낸 뒤 그와 단둘이 점심을 먹었다.
바로 맨 처음 오프라인에 들어와 그와 함께 식사하였던 종로 인근의 고급 한정식 가게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안쪽 깊숙한 방에 자리 잡은 우리는 식사를 시키고는 담소를 나눴다.
“여기 참 오랜만이군요. 기억나십니까? 제가 오프라인에 온 첫날 장관님께서 저를 여기로 끌고 오신 거.”
“기억납니다. 여기서 원화성 회장에게 100억을 투자받았죠.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벌써 2년도 더 전의 이야기로군요.”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반주를 위해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나는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김설송 방한 건은 좀 갑작스럽죠?”
“그렇습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서 정부에서도 고민이 많아요.”
김설송이 9월에 방문한 후, 3개월 뒤가 바로 대선이었다.
김설송의 방문은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정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국대 대통령은 뭐라던가요?”
“현재 지지도가 엄청 높으니까 이번 방문이 별다른 영향은 없을 거라 보면서도, 혹시 모를 변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죠.”
“혹시 모를 변수요?”
“대체로 북한 측에 호의적이었던 곳은 야당이니까요. 사실 우 대표가 없었더라면 북한과는 각을 세웠을 현재 청와대와 여당 아니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만 하더라도 이국대는 임기 말 레임덕을 겪으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보이지 못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게다가 시종일관 북한과 대립하면서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번 달 말에 여당인 국일당에서 대선 후보를 발표하지 않습니까? 누구를 밀 것 같습니까?”
“저는 국일당 소속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가장 가능성 있는 두 명이 있습니다.”
“두 명이라 하심은?”
“김석진 원내대표와 안태민 의원 아니겠습니까.”
김석진 원내대표와는 인연이 있었다.
셧다운제가 부결되는 데에 이광우 의원과 함께 큰 도움을 받았던.
“그런데 안태민 의원은 의외군요.”
“왜요? 요즘 보수 정당에서는 가장 핫한 인물 아닙니까.”
“보수라기보다는 극우 인사 아닙니까?”
“하하. 그러니까 가장 핫한 사람이죠. 선동가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말들만 콕 짚어서 말하니까요.”
“흠.”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는 적절치 않은 인사였다.
“청와대는 누구를 더 적합하다고 보고 있습니까? 아무래도 극우인 안태민보다는 김석진 의원이 더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죠. 안태민 의원이 당선된다면 현재 이국대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남북 관계 개선 정책이 후퇴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국일당에서 안태민 의원의 인기가 높은 이유가 있을까요?”
“아시겠지만 한국의 보수는 북한에 대한 적대심이 강하지 않습니까. 믿었던 이국대가 갑자기 친북으로 전향하자 그에 대한 반발이겠죠.”
백철웅이 조용히 술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와 잔을 부딪친 다음 소주를 입안으로 단숨에 털어 넣었다.
한낮이라 그런지 술이 썼다.
“저는 그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요?”
백철웅이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백철웅 장관님 말입니다.”
“네? 저요?!”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무소속으로 당선. 이어서 지금 정부 내에서 가장 일이 많은 통일부 장관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백 장관님이야말로 가장 적임자라고 말이죠.”
“어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은 꺼내지도 마십시오. 저 같은 사람이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백철웅은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정말 관심 없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그럴 깜냥이 되지 않습니다. 장관 자리도 분에 차고 넘쳐요.”
“저는 대통령이란 자리는 기본적으로 야망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야망이 있는 사람?”
“네, 바로 백 장관님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추진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 말이죠.”
“하하. 저를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왜요? 저와 LP 바에서 나눈 이야기는 다 거짓이셨습니까? 언론 개혁을 위해 한 몸을 불사르시겠다고 한 말이요.”
“대통령과 언론 개혁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왜요. 장관보다는 대통령이야말로 언론 개혁을 최전선에서 수행할 수 있는 자리인 것 같은데요.”
갑자기 백철웅이 정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우 대표님. 저를 장관으로 만들어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마는 더는 곤란합니다. 저는 국회의원이 된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더는 아무 욕심이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것참 아쉽게 되었군요.”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앞에 있는 소고기 수육을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철웅 만한 적임자는 없다.’
* * *
경기도 고양에 위치한 킨텍스.
국내 최대 규모의 컨벤션센터인 이곳에서 국일당 전당 대회 열렸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국일당 후보를 뽑기 위해서 말이다.
그 결과 안태민 의원이 5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국일당의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다.
“2위인 김석진 후보가 획득한 11%에 비해 무려 5배나 높군요.”
이철수가 국일당 전당대회 결과를 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오프라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전당대회 결과를 보도하며 이에 대한 분석을 곁들었다.
<국일당 18대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서 안태민 후보 선출>
<안태민 후보 “자유민주주의 확립에 사활을 걸겠다”>
<국일당 안태민 후보 지명……. 남북 관계 달라지나>
나는 본부장급 회의를 주최하고는 본부장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곧 김설송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합니다. 국일당에서는 극우인 안태민 의원을 지명했는데 다들 어떻게 보십니까?”
이철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청와대의 남북 관계 개선 의지와는 정반대의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보수 집단에서는 현재 정부의 정책에 불만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이국대 정부는 현재 80%가 넘는 지지도를 보이고 있어요. 국민들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지지한다는 건데, 여론을 잘못 읽은 게 아닐까요?”
“여론도 중요하지만, 불만 가득한 집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거겠죠.”
집토끼란 집안에서 기르는 동물로 정치권에서는 확고한 지지 세력을 의미했다.
반대로 산토끼란 길들여야 할 대상으로 중도 세력이나 부동층을 뜻했다.
이처럼 선거철마다 각 정당은 집토끼를 지키면서 산토끼를 잡기 위해 고심했다.
본부장들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한마디씩 전하며 선거 판세를 분석했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곰곰이 듣다가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대선 후보로 백철웅 장관님은 어떻겠습니까?”
“백 장관님이요?”
모두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홍보본부장인 조갑환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킹메이커로 나서시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해야겠죠. 다만 오프라인을 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기사를 통해서 여론몰이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른 후보와 공정하게 다룰 겁니다.”
“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조갑환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를 설득해야죠.”
“설마, 백 장관님 본인은 출마 의지가 없으신 겁니까?”
“네. 아직은요.”
“이런. 그럼 어렵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란 자리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럴 마음에 들게 만들어야겠죠.”
“휴.”
조갑환은 쉽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사실은 무척 어려운 난이도라는 걸 깨달은 학생처럼 곤란한 표정을 보이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국일당은 이미 대선 후보를 발표하여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어요. 백 장관님이 나서신다면 시기적으로도 늦은 감이 있는데 설마하니 무소속으로 출마시킬 생각은 아니시죠?”
“물론이죠. 국회의원 선거도 아니고 대통령 선거입니다. 정당의 힘은 필요하겠죠.”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이철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국민들은 분명 새로운 인물을 원하고 있습니다.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안태민 의원이 국일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된 것도 그런 영향이 있을 테고요.”
나는 계속해 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백철웅 장관님은 매력적입니다. 종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셨고, 최근에는 통일부 장관으로 발탁,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게 계시죠. 오프라인의 창업자이기도 하고요.”
“그렇죠. 지금까지 백 장관님이 이룬 성과만 보더라도 그보다 더 뛰어난 이들은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네, 아주 새롭고 에너지 넘치는 인물로 보일 겁니다. 그렇지만 대표님. 대선은 인물보다는 정당 간의 싸움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을 보고 표를 던지지 결코 인물을 보고 표를 던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보여 준 역사가 그러하고요. 그래서 만약 백 장관님이 진정으로 출마를 결심하신다면.”
“결심한다면?”
“최소한 민주통일당의 후보로 지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국일당은 이미 후보를 지명했으니까요.”
내 생각도 이철수와 같았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돌풍을 보여 주었다곤 하지만.
대통령 선거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경쟁이었다.
‘사람들은 인물만으로는 결코 표를 주지 않는다. 소속 정당을 보고 표를 던지지. 그런 점에서 무소속 출마는 불가능하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이수빈이 손을 들었다.
“백 장관님이랑 이광우 전 민주통일당 대표랑 서로 친한 사이 아닌가요? 고교 동문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요.”
“맞습니다. 서로 자주 연락하는 사이셨죠.”
“그렇다면 이광우 전 대표에게 백 장관님을 설득시켜 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네,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 * *
의정부에 있는 한 오래된 평양냉면집.
평일인데도 주차장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주차를 마치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광우였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허허. 대표는 뭘요. 이제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고향에서 백수로 지내는 몸입니다.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의 말처럼 편안한 삼베옷을 걸친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하고는 동네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정장 차림의 말끔한 이미지만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