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00)

“시원해 보이십니다.”

“하하. 그렇죠? 여름에는 우리나라 전통 옷인 삼베옷만 한 게 없습니다. 아 맞다! 여기 평양냉면도 정말 뛰어납니다. 와보셨습니까?”

“아뇨. 처음입니다. 다만 그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을지로 쪽에 있는 냉면집들의 원조가 바로 여기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이북에서 내려온 분들이 여기 의정부에 정착해서 가게를 열었죠. 서울에 있는 집들은 이 집 자제들이 분가해서 만들었고요. 어찌 보면 원조 중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집입니다.”

내가 평양냉면 마니아라는 걸 알고 있는 이광우는 한참 동안 식당에 대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평소였다면 무척 즐거운 자리였겠지만 오늘만큼은 과도한 정보였다.

나는 잠자코 듣다가 말했다.

“대표님.”

“응?”

“백철웅 장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 장관이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는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걸 보고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혹시 그를 위로 끌어올릴 생각입니까?”

역시 정치 9단이었다.

그는 단번에 내가 무엇을 묻는지 눈치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리 봐도 그만한 사람이 장관으로만 머무는 것은 국가적으로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 회사 대표를 몇 년 하시더니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따지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셨군요.”

그는 냉면 그릇을 들더니 육수 한 입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를 낀 채 내게 말했다.

“본인은 생각이 있답니까?”

“아뇨. 싫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알고 계셨습니까?”

“알다마다요. 사실 그에게 킹을 권한 건 우 대표만이 아닙니다.”

“그럼?”

“저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미 이야기를 건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때마다 거절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랬겠죠. 자기는 결코 대통령 깜냥이 아니라면서. 바보 같은 녀석입니다. 이미 충분히 자질을 보여 주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사람을 보는 눈은 모두 비슷했다.

나는 냉면을 먹다 말고는 의자 뒤로 몸을 빼었다.

“뭘 어떻게 하면 그가 욕심을 가지게끔 만들 수 있을까요?”

“하하. 우 대표. 킹메이커가 되고 싶은 모양인데, 후보가 의지가 없어서야 그건 어렵습니다.”

“킹메이커가 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다만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거죠, 휴.”

내가 길게 한숨을 쉬자 이광우는 쥐었던 깍지를 풀고는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백 장관은 오래전부터 제게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해 왔습니다. 선배님, 어떻게 하면 정치인이 될 수 있을까요, 하면서요.”

“네, 제게도 정치의 꿈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권력에의 의지가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정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죠.”

이광우는 길게 썰린 허연 무절임을 젓가락으로 집어 한입 베어 먹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정치 번아웃 상태입니다.”

“정치 번아웃이요?”

“생각해 보세요. 그토록 바라 왔던 국회의원이 된 게 겨우 3개월 전입니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통일부 장관에 임명되었지. 아마 정신없이 일만 했을 겁니다.”

“네, 본인도 너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군요.”

“그렇죠? 지금은 무기력해져서 뭘 해도 즐겁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을 시기입니다. 정치하다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는데 백 장관은 너무 빠르게 온 거죠.”

“어쩌면 좋겠습니까?”

“본인이 회복해야죠. 휴가를 가든 마음을 달리 먹든. 외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에요.”

“그렇지만 저희에게 시간이 넉넉지 않습니다. 대선까지 불과 4개월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자 이광우가 나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이 문제는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이 대표님이요?”

“우 대표에게는 정치하던 시절 마음의 빚을 졌던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백 장관은 제가 아끼던 후배이기고 하고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대표님.”

“허허. 이제 대표 아니라니까 그러네. 냉면 불겠습니다. 어서 드세요.”

* * *

<무디스, 한국 신용 등급 역대 최고인 Aa3로 격상>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 등급을 A1에서 Aa3로 상향 조정한 가운데 모든 매체가 이에 대해 집중 보도하였다.

“이제 한국도 중국, 일본과 동급이 되었군요.”

이철수가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번 발표는 무디스가 그동안 한국에 부여했던 신용 등급 중 최고 등급이었다.

“한반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북한과의 관계가 큰 폭으로 개선되었고, 경제 회복력도 좋아졌으니까요. 뭔가 한국이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기분도 드네요.”

“네, Aa3 등급은 위에서 네 번째에 해당하는 상위 등급이니까요. 외환위기 이전 수준인 A1을 드디어 넘어섰습니다.”

본부장들이 이번 상향 조정에 대해 한마디씩 나누는 가운데 나는 이철수에게 물었다.

“조금 전 나간 기사를 보니까 데이터랩을 통해서 인터랙티브 포맷을 강화했더군요.”

“네, 대표님. 이번 무디스의 발표와 관련된 기사에는 모두 데이터랩에서 추가로 콘텐츠를 가공하였습니다.”

“독자들 반응 살펴보시고, 저는 괜찮아 보였습니다. 앞으로 다른 기사에도 해당 포맷을 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데이터랩이 가공한 기사는 디지털에 최적화된 형식으로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

그리고 반응형 인포그래픽이 적절히 조화되어 디지털에서 구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끝판왕을 보여 주었다.

이덕오도 데이터랩의 기사를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저희도 인터랙티브 기사를 많이 만들어 봤지만 이건 정말 끝판왕 느낌이 드네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이번 무디스 발표는 단순 수치 발표라 스토리텔링으로 풀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그걸 한국 신용등급의 역사와 연계해서 멋지게 풀어냈습니다. 아마 다른 기사라면 더 좋은 스토리텔링을 보여 줄 수 있을 겁니다.”

“네, 데이터랩 친구들 수준이 아주 높은 것 같아요. AI 기술 연구도 함께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기술적인 건 이 이사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네, 대표님. 저만 믿어 주십쇼.”

이덕오가 고릴라처럼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김희철 사장님 벌써 복귀하셨던데, 알고 계셨어요?”

“네? 희철이 형님이요?”

“네, 목발 짚고 가게에 계시더라고요.”

“이런. 아직 치료를 더 받아야 할 텐데!”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김희철은 전치 7주 판정을 받을 만큼 중상이었다.

‘재활 치료까지 고려하면 너무 이르다. 아직은 병원에 있어야 해.’

나는 그를 만나면 단단히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흰 삼베옷을 입은 누군가가 로비에서 경비원의 제지를 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 참. 저 여기 들어가 봐야 한다니까요.”

“어허! 할아버지. 여긴 출입증도 없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허허. 돌겠네. 저 여기 오프라인 대표님하고 만나 봐야 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한둘인 줄 아십니까? 저도 우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은 절실합니다. 허튼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나는 김희철에게 가려던 발길을 멈추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삼베옷을 입은 노인의 뒷모습이 낯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경비원이 깜짝 놀라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어이구. 우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좀 시끄러운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헤헤. 작은 소란일 뿐이죠. 대표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그때였다.

노인이 나를 보고는 아는 척을 하였다.

그는 바로 며칠 전 의정부에서 만났던 이광우였다.

“아니, 이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연락도 없이요.”

“허허. 백 장관 만난 김에 근처라서 들러 봤습니다.”

“네? 백 장관님을 만나셨어요?”

우리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자 옆에 있던 경비원이 사색이 되어 나와 이광우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이광우를 내 집무실로 안내했다.

“연락하고 오시지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시면 곤란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하하. 경비 아저씨요? 저는 이제 당 대표가 아니에요.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제가 뭐라고 바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겠습니까.”

“제가 회사에 없을 수도 있고, 원칙상 연락 없이 방문하시는 건 안 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근처 온 김에 그냥 들러 봤습니다. 없으면 다음에 오면 되니까요.”

“다음에 오실 때는 꼭 미리 연락을 하고 와 주시면 좋겠군요.”

이광우는 국회의원일 때도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지만 은퇴한 이후에는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자리에 앉히고는 물었다.

“백 장관님을 만나고 오셨다고요?”

“네, 조금 전에 보고 왔습니다.”

“뭐라던가요?”

내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이광우가 갑자기 씩 웃으며 답했다.

“하겠답니다.”

“정말요?!”

“네, 알겠다고 하더군요.”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마음을 바꾼 건가요?”

이광우는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고 했습니다.”

“기회요?”

“정치라는 건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거죠.”

“타이밍이라.”

“백 장관은 지금이 딱 그때예요. 더 시간이 지났다가는 지금 같은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과거 한때 유명했던 정치인들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지금은 별 볼 일 없이 지내는 경우가 떠올랐다.

“힘을 모으고 있다가 한 번에 도약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도 있죠. 백 장관처럼 국민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 말이에요.”

나는 이광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철웅이 운 좋게 통일부 장관이 되었지만, 다음에는 장관은커녕 국회의원조차 당선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의 이 기세를 살릴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본인은 출마 의사를 밝혔고 이제 정당이 필요한 차례인데.”

“그렇죠.”

“아무래도 무소속 출마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죠. 역사상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사례가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만이 유일하게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그밖에는 전무후무하죠.”

“네, 그래서 저는 백 장관님이 민주통일당의 대선 후보로 나오면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내 말에 이광우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현재 경선이 진행 중이라서?”

“그렇죠. 아직 본선은 열리지 않았지만, 예비 경선은 이미 끝났고 현재는 모바일 선거인단 모집 중입니다.”

“아직 본선 돌입 전이니, 후보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겠지만 컷오프에서 탈락한 후보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심지어 백 장관은 민주통일당 소속도 아닌데.”

“민주통일당은 후보 발표가 너무 늦습니다. 국일당은 벌써 대선 후보를 정해서 여기저기 홍보를 하는 마당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런던올림픽 기간을 피해서 한다는 게 오히려 독이 되었어요.”

이광우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민주통일당의 이번 경선 기간에 대해 실망감을 내비쳤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민주통일당은 그럼 9월 중순에 대선 후보가 확정되나요?”

“지금 일정상으로는 그렇죠.”

“대선 3개월 전이로군요? 김설송 위원장 방문 시기와도 비슷하고요. 시기적으론 나쁘진 않은데 말이죠.”

“뭐가 말입니까?”

이광우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 장관님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되 이후 민주통일당 대선 후보와 단일화에 나서는 겁니다.”

“단일화요? 오호라.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로군요. 만일 성공할 수만 있다면 야권 지지층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어요.”

“네, 백 장관님이 출마를 선언하고 어느 정도의 주목을 받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민주통일당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거야 당내에서 누가 대선 후보로 결정되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다라 달라지겠죠. 아무튼 단일화 그 자체는 괜찮은 방법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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