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선대위 총괄본부장을 맡아서 선대위를 꾸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총괄이라. 그거 엄청 바쁜 일인데?”
이광우가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대표님에게 부탁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치를 오래 하셨으니 이쪽 분야는 제일 잘 알고 계신 분이고요.”
“알다시피 나는 이미 은퇴한 몸입니다. 선대위에 들어간다는 것은 다시 정치를 한다는 의민데 그게 좀 걸리는군요.”
“백의종군한다는 마음으로 선대위만 맡아서 해 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하. 보상은 바라지 않고 희생만 해라? 대선이 끝나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대표님이라면 충분히 그래 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광우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까짓것. 어차피 은퇴 선언도 한 마당에 우 대표랑 백 장관 얼굴을 봐서라도 한번 해 보죠.”
“고맙습니다! 대표님!”
“나는 빚진 걸 그냥 두고는 못 보는 사람이라서 말이오. 이걸로 우 대표한테 진 빚은 모두 갚은 겁니다.”
* * *
<백철웅 장관 “대선 욕심 있다…… 출마 여부 고민 중”>
<백철웅 장관 출마 시 3파전 가능성 높아>
<국일당 대변인 “정부 관계자가 대선 출마 운운하는 것은 염치없는 행위……. 자중해야”>
백철웅은 모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밝혔다.
잡지 에디터가 인터뷰 끝물에 ‘요즘 인기가 높은데 혹시라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던지자 이렇게 답한 것이다.
<“제 꿈은 정치를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 그게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대통령이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겠다”>
이후 정국은 백철웅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으로 불이 붙었다.
정치인으로서의 권력 의지를 드러내었을 뿐이라고 보는 의견, 이번 대선에 출마하여 유력한 후보자가 될 것이라는 시각.
그리고 배후에는 그를 장관으로 임명한 이국대 대통령의 복심이 깔려 있다는 해석까지 파장은 실로 다양했다.
이미 대선 후보를 정하고 홍보에 집중하고 있던 국일당은 경계심을 높였다.
국일당 대선 후보인 안태민은 언론과의 인터뷰마다 백철웅에 대한 적대감을 진하게 드러냈다.
“그는 이국대 정부의 인사입니다. 그러나 아군인지 적군인지 피아식별이 불분명한 상태죠. 무엇보다 출마할 것이라면 확실히 하든지 지금처럼 애매하게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로 보이지 않습니다. 비겁자의 전형이죠.”
그가 쏜 비난의 화살은 당사자인 백철웅에서 그치지 않았다.
백철웅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몸을 담았던 오프라인도 타깃 중 하나였다.
안태민은 오프라인의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한 채, 거절 이유로 이런 답변을 남겼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적이 한때 수장으로 있었던 매체의 인터뷰에 응할 만큼 어리석진 않죠.”
피아 식별을 좋아하고, 대중 정치인답지 않게 공격적인 말투 때문이었을까.
그는 의외로 보수 쪽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높여 갔다.
나는 급히 이철수를 집무실로 불렀다.
“이 본부장님. 안태민이 오프라인의 인터뷰를 보이콧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의 인지도와 명성을 고려하면 바보 같은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네, 대표님. 뭐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 막말을 해 대는 대선 후보는 드물었는데 그런 점에서 일부 보수 세력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게 소수의 팬덤인가요 아니면 대중적인 지지인가요?”
“아직은 소수의 팬덤입니다만 국민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우니까요.”
나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같은 경우도 2016년 대선에 전혀 당선될 것 같지 않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던가. 막말하기 좋아하고 공격적인 성향이 트럼프와 닮은 면이 있다. 조심해야겠는걸.’
안태민이 오프라인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자 다른 매체.
특히 보수 언론에서 안태민에 대해 열렬한 구애가 이어졌다.
제발 자기네 매체에서 인터뷰를 해 달라면서.
“앞서 밝혔지만, 오프라인은 언제나 공정한 중립의 지위를 지킬 겁니다. 특별히 백철웅 장관을 더 부각할 생각도 없고요.”
“네. 대표님. 그렇지만 여권의 유력한 후보자인 안태민이 우리를 보이콧하고 있기에 모든 후보자를 공정하게 다루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본인 인터뷰는 어렵겠지만, 그가 내걸고 있는 정책이나 개인 성향, 걸어온 길에 대한 분석은 가능할 테니까요. 우선은 그쪽에 집중해 주세요.”
* * *
가로수의 잎들이 하나둘 아래로 떨어지는 9월의 어느 날.
북한의 김설송 위원장이 서울을 전격 방문하였다.
지금까지 북한의 위원장 중 누구도 서울 땅을 밟아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파격적인 행사였다.
이국대는 북측이 예고한 4박 5일간의 일정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지시한 뒤 김설송의 서울 방문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자신의 임기 중에 북한 위원장이 처음으로 남한 땅을 밟았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치적이겠지.’
평양지사장인 안재영도 북측 사절단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안재영이 글을 쓰고 지강원이 사진을 찍어 완성한 기사는 내외신을 통틀어 가장 빠르면서도 정확한 내용을 자랑했다.
“과연 평양 지사입니다. 담겨 있는 내용이 단순 추측이 아니라 정교한 분석과 타당한 논리를 근거로 하고 있군요.”
“물론입니다. 현재 저희보다 북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언론은 없을 거라 자부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주로 오갈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경제 교류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이지 않겠습니까?”
“경제 교류요?”
“네, 김정일 전 위원장이 가장 바라 왔던 일이기도 하고, 그만큼 북한 경제의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개방해서 경제를 살리고 싶겠죠.”
“개성공단은 이미 재개되어 가동 중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안재영이 씩 웃더니 손가락을 저었다.
“아마 이번에는 스케일이 훨씬 더 클 겁니다. 나진-선봉 경제특구는 물론이고 해주공단. 나아가 잘만하면 평양까지 오픈을 할지 모릅니다.”
“평양까지요?”
“네, 김설송 위원장은 단순히 개성공단 몇 개 더 늘린다고 북한 경제가 180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경제 교류와 성장을 원하고 있죠.”
“그러니까 성삼이나 TP의 지사가 평양에도 개설될 수 있고, 북한 주민들이 여기서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렇겠죠. 자세한 건 실무단에서 처리할 테니 백철웅 장관님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안재영이 백철웅을 입에 올리자 슬쩍 물어보았다.
“안 지사장님은 백철웅 장관님의 출마 소식을 들었습니까?”
“물론이죠. 북한에서도 아주 핫한 소식입니다.”
“북한에서요?”
“네, 현재 북측에서도 백 장관님의 인기는 무척 높습니다. 일 처리 빠르고 말이 통한다면서요. 그런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된다? 북측에서야 더할 나위 없는 협상 파트너겠죠.”
“그렇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그나저나 국일당에서는 안태민이 대선 후보가 되었더군요.”
“맞습니다. 저는 사실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의외로 인기가 많더군요.”
“아주 위험한 인물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안 지사장님은 그에 대해 잘 아십니까?”
안재영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각종 범죄에 연루되었으면서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간 자입니다. 제 대학 선배가 안태민 때문에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거든요.”
“안태민 때문에 인생을 망쳐요?”
안태민은 올해 43살의 젊은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경북 칠곡의 유명한 지방 유지로, 칠곡 땅을 밟는 동안 그들의 땅이 아닌 곳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 덕분에 안태민은 쉽사리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고 어느덧 2선 의원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인성 및 기행이었다.
“그는 19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엄청 빨리 했군요?”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예요.”
“네?”
“17살짜리 애를 임신시켰거든요. 여자 쪽 집안도 만만치 않은 토호 세력이라 결국 둘은 결혼해야만 했죠.”
“아이가 나이가 많겠군요?”
“네, 큰애가 올해 스물셋입니다. 둘째는 스물둘, 셋째는 스물하나. 넷째는 스물이고요.”
“다 연년생이군요?”
“괴물 같은 녀석이에요. 아무튼 문제는 그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면서도 미혼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거예요.”
“그거 불륜 아닙니까?”
“불륜만 하면 다행이게요. 간통을 저질렀어요. 한국에서는 명백한 범죄 행위죠.”
불륜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사귀는 것을 뜻했고, 간통은 한발 더 나아가 성적 관계까지 맺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한국은 2015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이를 범죄로 다스리고 있었다.
재미교포 2세인 신임 국제본부장 제임스 리도 한마디를 보탰다.
“한국뿐 아닙니다. 미국도 주에 따라서는 간통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제가 앞서 이야기했던 제 대학 선배가 바로 안태민에게 당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안 지사장님 대학 선배면 몇 살인데요?”
이덕오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안재영이 무거운 얼굴로 답했다.
“바로 두 학번 선배입니다. 올해 서른이죠. 당시엔 21살이었고요.”
“헉. 서른이면 마흔세 살인 안태민과는 무려 13살 차이 아닌가요?”
“TV로 보셨겠지만, 안태민이 엄청난 동안이거든요. 그 얼굴로 번화가에서 헌팅하고 다닌 거죠.”
“미친. 유부남이요?”
“바보도 아니고 자신을 유부남이라고 소개하고 여자를 꼬시진 않았겠죠.”
“그런데 그 대학 선배라는 분은 어떻게 되셨길래 인생을 망쳤다는 말까지 하신 거예요?”
이덕오의 말에 안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아이를 뱄거든요.”
“저런!”
모두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이수빈이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애를 지웠죠. 안태민이 절대로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막았으니까요.”
“이런 미친 새끼가!”
이수빈이 욕을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아니, 유부남이 그런 짓을 했는데 대학 선배라는 분은 가만히 있었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휴학하고는 본 적이 없으니까요. 소문에 의하면.”
“의하면?”
“엄청난 거액을 받고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말이 있는데 진실은 본인만 알겠죠. 문제는 이게 제 선배만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듣자 하니 저희 학교에서만 무려 3건이 넘는 유사 사례가 있었거든요.”
“아니, 그런데 다 문제가 없었어요?”
“다 비슷하게 외국으로 떠났어요. 소송을 걸 당사자가 없으니 문제가 될 리가 없고요.”
회의실은 한동안 조용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 * *
김설송은 방한 첫날부터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부산을 방문하고 싶다던 그녀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대연동에 위치한 UN 기념공원을 방문.
6.25 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을 추모했다.
그뿐 아니었다.
그녀는 다음날 오전 일찍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는.
국립현충원을 방문하여 이곳에 묻힌 이들을 추모했다.
그녀가 현충원에서 참배하며 분향하자 취재진의 카메라가 미칠 듯이 플래시를 번쩍였다.
그녀는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이념의 다툼 없이 서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3대 최고 지도자 김설송>
참배를 마친 김설송과 백철웅이 담소를 나누며 현충원을 나오는 사이.
안재영이 김설송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다른 취재진이 안재영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김 위원장님. 어제는 부산의 UN 기념공원을 방문하셨고, 오늘은 국립현충원을 방문하셨습니다. 두 곳이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알고 방문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원래대로였다면 취재진은 사진 촬영만 가능하고 인터뷰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하기로 사전에 입을 맞춘 상태였다.
그러나 평양에서 북측 사절단과 함께 내려온 안재영은 공식적으로는 취재진이 아닌 북측 사절단의 소속으로 되어 있어 이런 구속을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설송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네다. 특히 UN 기념공원은 6.25 전쟁으로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을 안치한 곳이지 않습네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6.25 전쟁이 남침이 맞다는 걸 인정하신 겁니까?”
안재영의 물음에 김설송은 담담히 답했다.
“고저 그게 사실이지 않습네까?”
“그럼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수장으로서 당시의 잘못을 사과한다는 의미로 봐도 될까요?”
“그렇습네다. 같은 민족을 침략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저희의 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입네다.”
백철웅은 그녀의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김 위원장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는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한 커다란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으로서 김 위원장님의 용기에 큰 감사를 표합니다.”
김설송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