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위를 조용히 시킨 다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오바마는 미국 시카고에 위치한 자신의 캠프 본부에서 수많은 지지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단상 위로 가족들과 함께 걸어 나왔다.
지지자들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한목소리를 내었다.
“4년 더! 4년 더!”
오바마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 마이크를 잡고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2년 전, 아시아의 아주 작은 나라에서 저를 당혹하게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지지자들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바마의 입을 주시했다.
오바마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프라인의 홍지혜 기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 제게 15분 빠른 선물을 선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홍 기자. 고맙습니다, 오프라인.”
오바마의 말에 지지자들이 환호했다.
“오프라인! 홍지혜! 오프라인! 홍지혜!”
캠프 본부는 수많은 이들이 외치는 오프라인과 홍지혜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졌다.
그 모습을 머나먼 한국에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네,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의 국가이자 하나의 국민으로 모든 흥망성쇠를 함께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협력과 신의 은총 속에 위대한 나라 미국의 전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와!!!”
오바마는 당선 소감을 밝히며 가장 먼저 오프라인과 홍지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오프라인의 트래픽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오프라인 미국 지사의 홈페이지는 서버가 뻗으려고 하는 걸 이덕오와 마르코의 노력으로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제임스 리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오바마 덕분에 미국 지사의 흥행은 문제없겠는데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흥행은 다음에 생각하고, 지금 바로 홍 지사장님에게 연락해서 백악관 측과 일정 조율하고 인터뷰 잡으라고 하세요. 재선 이후 첫 인터뷰는 무조건 오프라인에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요.”
“네, 대표님. 홍 지사장은 지금 보도로 정신없을 테니 백악관과 연락은 저희 쪽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제임스 리는 백악관 연락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백악관에 전화를 걸었다.
몇 분 뒤.
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백악관도 좋다고 합니다. 오히려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맙다고 하네요.”
* * *
오바마가 롬니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자 한국의 정치권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1달 뒤 대한민국에서는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영향이었을까.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민주통일당의 위정동과 백철웅과의 단일화는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위정동-백철웅, 대통령 후보 단일화 극적 합의!>
<야당 대선 후보 단일화 ‘극적 타결’…… 백철웅 “통 큰 양보 감사”>
<아름다운 단일화 성공 이유……. 위정동, 美대선 결과 보고 마음 바꿔>
위정동은 단일화 발표 직후, 오프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단일화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소감에 대해 이렇게 밝히더군요. 하나의 국가이자 하나의 국민으로 모든 흥망성쇠를 함께할 것이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하나의 국민과 하나의 국가를 위해 마음을 크게 먹어야겠다고 말이죠.”
위정동의 양보뿐만이 아니었다.
백철웅은 김설송이 북한으로 돌아간 지 일주일 후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뒤 통일부 장관 자리를 내려놓고는 후보 단일화에 집중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후 백철웅 캠프와 위정동 캠프는 단일화 방안을 합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대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단일화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캠프는 24시간 동안 중단 없는 협상 및 담판을 진행.
백철웅으로 후보를 단일화하는 것으로 합의를 마쳤다.
위정동이 사퇴를 선언하고 백철웅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자 여론을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백철웅의 지지도가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줄곧 1위를 유지하던 국일당의 안태민 후보는 2위로 주저앉았다.
안태민은 악을 쓰며 비난을 퍼부었다.
“단일화는 졸렬한 야합정치이자 구태정치에 불과합니다. 이런 분이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리더로 대한민국호를 이끌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짓은 국민의 공분을 부추기는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절대로 속으면 안 됩니다!”
오프라인은 이번 대선과 관련하여 많은 인력을 배치하고 관련 기사를 작성하는 데 힘썼다.
오프라인을 설립하고 처음 있는 대선이었다.
‘이 중요한 이벤트를 놓칠 순 없지.’
모두가 기사를 쓰는 데 분주한 가운데 본부장급 회의가 열렸다.
이철수는 기사 현황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기자 대부분이 대선 관련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태민은 저희를 보이콧한 게 자승자박으로 보입니다.”
“왜죠?”
“후보자의 목소리가 실리지 않으니 기사의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저희도 최대한 다른 언론사의 인터뷰나 공식 발언을 참고해서 기사를 쓰고는 있는데 오프라인이 진행한 깊이 있는 인터뷰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기사량을 줄이지는 마세요. 어찌 되었건 여당의 대선 후보입니다.”
“물론입니다. 기사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절대 적지 않아요. 여당 후보이니만큼 오히려 많은 편이죠.”
백철웅은 단일화에 성공한 이후 여론 조사에서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2위는 여전히 안태민의 몫이었고 그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의외로 박빙이네요. 안태민 같이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은 인기가 없을 것 같은데.”
영상본부장인 신동석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며 말하자 이철수가 답했다.
“현 정부와 이국대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높은 만큼 그 후광을 입고 있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대북 정책 등 여러 면에서 정부와는 각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뿌리는 같으니까요. 이국대도 대놓고는 아니지만 공공연하게 안태민을 밀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 본인이 구린 게 많으니까 뒤를 털리지 않기 위해 가능하면 같은 정당을 밀어주는 거군요?”
“뭐 그런 셈이죠.”
이국대는 자신의 대북 정책을 반대하는 국일당의 눈치를 보다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백철웅의 뒤를 잇는 신임 통일부 장관에 극우 인사를 임명한 것이다.
퇴임 이후 자신의 안전을 걱정한 까닭이다.
나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어차피 그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공정하게 이번 대선을 다루면서 국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사를 통해 도우면 그만입니다.”
“네, 대표님. 그렇지만 혹시라도 국민들이 잘못한 선택을 할까 봐 우려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맞아요. 보수 언론들은 아예 대놓고 안태민을 밀어주고 있습니다. 저희만 선비처럼 너무 공정한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그들의 말처럼 보수 언론은 자신들이 스스로 표방하는 정론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안태민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안태민이 막말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수 언론의 안태민 빨아 주기가 큰 몫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숨겨 두었던 카드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급파했던 주전영이 놀라운 뉴스거리를 안고 귀국한 것이다.
<안당녀 8명 공식 기자 회견서 “안태민, 유부남 아닌 척 유혹…… 문제 생기자 거액 주며 해외 이민 강요”>
<안태민 후보, 결혼 이후 여러 명과 수차례 간통 혐의……. 사실 여부 떠나 도덕적 흠결 논란>
<안태민 후보 도덕적 흠결 극복할 수 있을까…… 공소 시효 지나 법적 처벌은 어려워>
주전영은 두 달간 미국에서 조사를 진행.
미국을 비롯하여 독일,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총 8명의 피해 여성을 찾아낸 것은 물론.
그중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3명을 설득해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그들이 기자 회견을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덕오가 주전영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안당녀가 ‘안태민에게 당한 여성들’의 준말이죠?”
“네, 맞습니다. 이 이사님.”
“무슨 셜록 홈스도 아니고 무슨 수로 8명이나 찾으셨어요? 연락처도 없고 어디 사는 줄도 모르잖아요.”
“안재영 지사장님이 이야기하신 학과 선배 있잖아요?”
“아, 안태민에게 당하고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진?”
“네, 안 지사장님이 그분의 사이버토리 주소를 알려주셨거든요.”
“엥? 사이버토리 요즘도 사람들이 해요?”
“아뇨. 잘 안 하는데 서비스는 유지하니까요. 혹시나 싶어서 거길 가 봤더니 이메일 주소가 있어서 연락해 봤죠.”
“뭐라고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락드렸다. 혹시라도 관심 있으면 연락 달라고요.”
“이야. 진짜 사이버 수사대가 따로 없군요! 그래서 연락 왔어요?”
“네, 미국 도착한 셋째 날에 바로 연락 오더라고요.”
“뭐라던가요?”
이덕오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전영은 당시를 떠올리듯 이마를 긁으며 답했다.
“자기는 텍사스주의 오데사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어딜 가면 저를 만날 수 있는지 묻더군요.”
“오데사? 오데사가 어디죠?”
“텍사스 서부에 위치한 인구 10만의 작은 마을이에요. 우리가 텍사스 하면 떠올리는 그 사막과 같은 지역에 있죠.”
“그런데 주 기자는 뉴욕에 있던 거 아니에요?”
“네, 맞아요. 제가 뉴욕에 있다고 하니까 바로 비행기 타고 오겠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셨어요.”
“헐. 엄청 멀 텐데, 왜죠?”
“억울해서 안 되겠다더군요.”
“억울해요?”
이덕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전영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안태민이 준 돈을 받고 미국으로 떠난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그럼 나름 선택한 거잖아요? 이런 말하기 조금 그렇지만 그 돈 받고 조용히 살기로요.”
이덕오가 말을 마치자 이수빈을 비롯한 여성 본부장들이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이덕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궁금증을 우선했다.
주전영이 잠시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그렇다기에는 상처가 많은 것 같았어요. 안태민의 아이를 가진 것도, 지운 것도 그리고 안태민에게 미국 이민을 강요받은 것도 너무 어릴 때였거든요.”
“어릴 때요?”
“네. 피해자들은 대체로 20대 초반의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성들이었어요. 성숙한 판단을 하기에는 아직 어렸죠.”
“으흠. 그건 그렇겠네요.”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안태민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 그것도 현재 인기가 높은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거예요. 뉴스는 물론이고 온라인에도 매일 등장하게 된 거죠. 이 이사님이라면 어떻겠어요?”
주전영이 역으로 이덕오에게 질문을 하자 이덕오가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싫을 것 같네요. 내 인생을 와장창 박살 낸 사람이 대선 후보로 미디어에 등장한다면.”
“그렇죠? 게다가 그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성조차 없었어요. 자신은 깨끗하다, 자신은 올바르다고만 했죠. 상대 후보는 철저히 깎아내리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랬다더군요. TV와 컴퓨터만 켜면 안태민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가 되는데 아주 구역질이 올라왔대요. 자기가 알고 있는 안태민은 악마 중의 악마인데, 어떻게 저런 자가 대선 후보로 나올 수 있냐면서요.”
주전영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일이라고 하지만 그때 당한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피해 당사자일수록 과거의 일은 마치 오늘 당장 겪은 것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일종의 트라우마로군요.”
“맞습니다. 대표님. 제가 취재한 8명의 피해자 모두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과거의 상처도 가슴 아픈데 그 장본인이 계속 미디어에 등장하니까 견디기 힘들었겠어요.”
“네. 그래서 조사는 오히려 쉬웠습니다.”
“쉬웠다고요?”
“양선영 씨. 그러니까 안 지사장님의 대학 선배가 나서자 순식간에 피해자들이 뭉치더라고요. 나도 안태민에게 당했다면서요.”
“서로 연락하고 지낸 사이였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자신의 실수를 한평생 남모르게 끌어안고 사신 분들인데요. 그런데 홍지혜 지사장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어떤?”
모두가 궁금한 듯 주전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각국 한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습니다. 안태민에게 당한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요.”
“한인 커뮤니티?”
“네, 국가마다 한인들끼리 교류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더라고요. 거기에 글을 올리니까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신이 왔어요.”
“그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군요. 익명성이 보장되니까 연락을 하기도 쉬울 테고요.”
“저도 미국에 있을 때는 한인 커뮤니티를 자주 이용했습니다. 직접 글을 쓴 적은 없지만 눈팅은 자주 했죠.”
이철수와 제임스 리의 말에 주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연락 주신 분들은 8명이 다가 아니었어요?”
“8명이 다가 아니었다고요? 그럼 더 있다는 말입니까?”
“회신이 온 건 30건이 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