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삼십 건이요?!”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갑환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연녀가 30명이나 있었다는 말인가요?”
“아뇨. 내연녀 이외에도 안태민 일가에게 피해를 당한 분들이 많더라고요. 토지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거나, 안태민에게 맞아서 실명을 한 사람도 있었고요. 잘나가던 사업을 빼앗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토지는 좀 이상한데요? 낮은 가격에 샀다면서 왜 해외로 보낸 거죠? 합의금이랄까 그게 더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문제가 생기니까 그제야 쥐여 준 거죠. 이 돈 가지고 외국 나가서 조용히 살라고요.”
“거 참. 처음부터 제대로 주었다면 손해 보지 않았을 걸 일을 키웠군요.”
“조사에 따르면 안태민 일가의 만행은 책 한 권 분량으로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칠곡에서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더군요.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돈 몇 푼 쥐여 주면서 외국으로 보내버리고요.”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안재영에게 물었다.
“안당녀 기자 회견 이외에도 준비한 게 따로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표님! 피해자 사례를 모아서 기획 기사로 내보낼 예정입니다. 안태민 일가가 그간 벌인 일들에 대해서 말이죠.”
“좋군요. 연락 온 30건의 메일 이외에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제보 채널을 계속 열어 두세요.”
“네, 지금도 제보를 계속 받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어떻게 이런 인물이 여당 대선 후보로 당당히 나올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주전영이 화가 난 표정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 * *
주전영이 쓴 수십 건의 고발 기사에도 불구하고.
안태민은 이를 가짜 뉴스로 명명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철웅이 창립한 오프라인이 자신들의 창립자를 위해 사탄의 계략을 쓰고 있다면서 소송을 제기하는 등 공격했다.
처음에는 안태민을 옹호하던 보수 언론들도.
주전영이 계속하여 기사를 통해 증거를 제시하자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안태민, 비판 보도 쓴 오프라인에 줄소송…… 재갈 물리기는 곤란해>
<가짜 뉴스라면 그에 맞는 증거를 제시해야…… 소송은 바람직하지 않아>
<국일당 내부에서도 안태민 비판 의견 나와 “후보 교체 필요”>
나는 한동안 거리를 두고 있던 백철웅 캠프를 오랜만에 찾았다.
선대위 총괄본부장인 이광우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우 대표.”
“고생 많으십니다. 본부장님. 미리 연락드리고 왔는데, 백 후보님 자리에 계십니까?”
“네, 아까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간 왜 자주 안 왔습니까?”
이광우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도 안태민과 국일당 측에서 오프라인과 백 후보님의 관계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보고 있는데 대표인 제가 이곳을 자주 들락거리면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참 나. 오프라인이 보수 언론처럼 안태민 나팔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공정하게 기사를 쓰고 있는데 뭐가 문제랍니까!”
“그래도 세간의 이목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조심해야죠.”
그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나를 백철웅이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백철웅이 문 앞까지 나와 나를 격하게 포옹했다.
나는 그를 진하게 포옹한 다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대통령 후보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하하. 기사 봤습니다. 그런 건 또 어떻게 찾아내신 겁니까?”
“주전영 기자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에 다녀왔거든요.”
“이제 오프라인이 더는 국내 미디어가 아니라 글로벌 미디어라는 실감이 납니다.”
“그나저나 요즘 캠프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오시는 길에 보셨겠지만 다들 200% 열일해 주고 계십니다. 오프라인에서 내보낸 안태민 기사가 주효했죠. 아주 흥이 올라 있는 상태입니다.”
“다행이군요. 이제 대선이 이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60%를 넘어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말이 있더군요.”
내 말에 백철웅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개표가 진행돼 봐야 알겠죠.”
백철웅은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신중했다.
막강한 라이벌이었던 안태민의 지지율이 급락하여 3위로 쳐졌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백철웅은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개표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과연.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청와대요?”
“네, 이국대 대통령에게서 말입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안태민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왜요?”
“자신이 평소 저를 높게 평가했다면서 대선 준비 잘하라고 하더군요. 무명의 1선 국회의원을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게 바로 자신이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면서요.”
“허허.”
어처구니가 없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여론이 급격하게 백철웅 쪽으로 기울자 뒤늦게 갈아타는 것인가? 정말이지 처세의 달인답군.’
내가 이국대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하는 사이.
백철웅이 내게 물었다.
“선거가 머지않았습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를 찾았습니까?”
“백 후보님. 당신에게 있어 언론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네? 뜬금없이 언론 개혁 말입니까?”
“백 후보님이 정계에 진출하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언론을 개혁해야 된다는 거 아녔습니까?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한테 말씀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지하게 백철웅을 바라보았다.
언론 개혁은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언론 개혁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며, 뭘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12월 19일.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렸던.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투표소를 향했다.
나는 일부러 하얀 입김을 허공으로 뿌리며 오늘이 겨울임을 재차 확인했다.
“세진 씨!”
멀리서 강세연이 두꺼운 점퍼를 입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러다 넘어져요. 천천히 와요.”
“헉헉.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방금 왔어요.”
“엄청 추워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강세연이 팔짱을 끼고는 나를 투표소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신분증으로 본인 확인을 마친 다음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로 들어갔다.
나는 후보자 이름을 확인하고는 도장을 찍고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었다.
내가 투표를 마치고 출구로 나오자 나보다 먼저 투표를 마친 강세연이 나를 맞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백 후보님 찍은 거 아니에요?”
“어허! 비밀 선거의 원칙 모릅니까? 제가 누굴 찍었는지는 절대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과장된 몸짓으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강세연이 웃으며 답했다.
“정말. 장난꾸러기라니깐.”
“부모님은 언제 투표하신대요?”
“벌써 하시고 가셨어요.”
“네? 지금 오전 7시인데요?”
“눈 뜨자마자 옷 입고 대기하고 있다가 아마 투표소 문 열리자마자 오셨을 거예요. 대한민국을 바꿔야 한다나 뭐라나. 주책이시라니까요.”
강세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투표소는 선거일 오전 6시에 문을 열었다.
‘오전 6시에 이미 투표를 마치고 갔다는 말인가.’
나는 혀를 내두르며 투표소를 나왔다.
강세연이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웃더니 물었다.
“오늘은 회사 쉬는 거죠?”
“네, 법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직원 모두에게 하루 휴가를 줬어요. 투표 잘하라는 의미에서요.”
“응? 그럼 오늘 오프라인은 기사를 안 내보내는 건가요?!”
강세연이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당연히 기사를 내야죠. 대선이잖아요.”
“아니, 오늘 모든 직원에게 하루 휴가를 줬다면서요?”
“AI가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에서 보내는 자료를 바탕으로 자동으로 기사를 쓸 겁니다.”
“네? 사람이 아니라 AI가요?!”
“네, 이날을 위해서 DC 소프트와 기술 협력에 매진했거든요. 일반인들이 보면 기자가 썼는지 아니면 AI가 썼는지 분간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나는 이덕오에게 특명을 내려 대선 전까지 AI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현재의 기술도 뛰어났지만, 더욱 고도화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덕오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군말 없이 기술 향상을 이뤄냈다.
‘이번 대선 끝나면 상무로 진급시켜 줘야겠어.’
물론 AI 기술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었다.
관점이나 시각 등 사람의 통찰력이나 혜안을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강세연이 신기하다면서도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이제 기자들이 필요 없게 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 예측하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아직 사람 수준으로 글을 쓸 수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사람이 할 일을 도와주는 보조 도구죠.”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렇다면 AI 기사로만은 부족한 거 아니에요?”
“하하.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누가 보면 세연 씨가 오프라인 직원인 줄 알겠어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강세연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흥. 남자 친구 회사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고마워요. 그래서 주요 기사들은 미리 작성해 뒀어요. 누가 당선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요.”
실제로 대선과 같은 중요 이벤트의 경우 며칠 전부터 기사를 작성해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해당 결과에 따라 내용을 조금씩 수정하여 빠르게 기사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속보를 중요시하는 업계의 관행 때문이지만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덕분에 중요 이벤트를 여유롭게 대비할 수 있고, 이렇게 하루를 쉴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강세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잠깐만요! 법정 공휴일이 아니면 오늘 모두 쉬는 날이 아닌 건가요?”
“아쉽게도 관공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만 쉴 수 있는 날입니다. 일반 회사는 별도의 사규나 공지가 없다면 출근하는 게 맞죠.”
“이런. 어쩌지. 저는 대선일은 당연히 모두 쉬는 날인 줄만 알았어요!”
강세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회사 직원들한테 따로 쉬라는 이야기를 안 했거든요. 당연히 쉬는 날인 줄 알고. 설마 오늘 모두 출근하는 거로 알고 있진 않겠죠?”
“예전에는 어떻게 했는데요?”
“지난 대선 때는 제가 관장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강세연이 울상을 지으며 걱정했다.
나는 괜찮다며 그녀를 토닥인 다음 말했다.
“이제 겨우 7시 15분이에요. 아직 출근 전이니, 직원들에게 문자나 메일을 통해 오늘 하루 쉰다고 알려 주면 괜찮을 겁니다. 오히려 출근하는 줄 알았는데 쉰다고 하면 더 좋아할걸요?”
“그럴까요? 빨리 연락 돌려야겠다. 세진 씨! 저 먼저 집에 들어갈게요. 이따 문자할게요~”
강세연은 부리나케 자신의 집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어떨 때는 참 똑똑한 거 같으면서도 또 어떨 때는 덜렁거리는 면이 있었다.
‘그런 모습조차 매력적이지만.’
나는 허둥지둥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 * *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던 안태민 후보의 몰락 덕분이었을까.
출구 조사에서 백철웅은 2위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가 무려 40%나 차이가 났다.
일찌감치 백철웅의 당선이 유력해지면서 방송사들이 열심히 준비한 대선 방송은 다소 김이 빠진 상태로 진행되었다.
모든 방송사는 개표가 시작된 지 불과 15분 만에 백철웅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했다.
<18대 대선, 백철웅 후보 당선 유력>
<방송 3사, 백철웅 당선 유력 일제히 보도>
<안태민 후보 패배 인정 “승복하지만, 오프라인 보도는 모두 거짓”>
개표 방송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덕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 덕오야. 쉬는 날인데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