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자 한 사람만 피해자가 아니라는 거잖아? 최소한 8명이 기자 회견에 나섰고 그 뒤로도 제보가 쏟아진다던데. X발! 안태민 그 새끼는 완전 짐승보다 못한 놈이네!!>
나는 양선영을 달랜 다음 물었다.
“그런데 왜 한국을 떠나신 거죠?”
“아이를 지우고 비참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안태민이 갑자기 저를 찾아와서는 흰 봉투를 건네더군요.”
“흰 봉투요?”
“네, 그 안에는 1억 원의 수표가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 돈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저도 같은 질문을 안태민에게 했습니다.”
“뭐라던가요?”
“힘들어 보이는데 미국으로 건너가라고.”
“미국으로요? 왜죠?”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가는 게 저를 위해서도 좋을 거라면서 이야기하더군요. 하지만 당시에는 저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양선영은 잠시 자세를 고쳐 앉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시에 저는 심각한 정서 불안 상황이었어요. 부모님에게도 죄송하고 지워 버린 아이에게도 미안하고요. 제 방에서 틀어박힌 채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죠.”
“그 심정 이해합니다.”
“학교도 휴학을 한 상태였어요. 부끄러웠거든요. 이렇게 살 바에는 낯선 땅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1억이라는 금액은 그렇게 많은 금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맞아요. 얼핏 큰돈처럼 보이지만 젊은 여성이 낯선 땅으로 건너가 살기 위한 금액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돈이죠.”
“그래서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신 건가요?”
“네, 안태민에게 돈을 받고 부모님과의 연락도 끊은 채 미국으로 건너가 미친 듯이 일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저 자신을 자학하는 것만이 저에 대한 유일한 위로였거든요.”
“일이라면 어떤?”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불안정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대화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방을 치우고 빨래를 하거나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저 일만 하셨던 건가요?”
“네,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렇게 일만 하니 어느샌가 미국 시민권자가 되어 있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안태민이 건넨 돈을 일종의 합의금이랄까 사죄금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합의금이라고요? 하.”
그녀가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제게 그 돈을 건네면서 그 어떤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외국으로 떠나는 게 좋을 것이라고만 말했죠. 이후에도 단 한 차례도 저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네, 맞아요. 그건 이미 이전 기자 회견 때도 밝힌 내용입니다.”
“당시 어린 나이에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이 일을 자세히 판단하기가 힘들었던 면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양선영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땐 정말 너무 어렸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화제를 잠시 돌리죠. 한국에 와서 부모님들과는 엄청 오랜만에 만나셨을 것 같습니다.”
양선영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정말 너무 오랜만에 만났죠.”
“처음 연락을 드리고 만났을 때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무 말 없이 저를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오열했죠.”
“부모님께도 사정에 대해서는 말씀하셨나요?”
“네, 제가 왜 한국을 떠나게 되었는지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의 반응은요?”
“저를 위로해 주고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안태민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셨고요.”
“기분이 어떠시던가요?”
“부모님께는 너무 큰 죄를 지어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고, 고맙고, 미안하고. 그런데 그런 저를 또 아무렇지 않게 용서해 주시고 안아 주셔서 그저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오늘 저희 생방송에 나온 김에 부모님께 한 말씀 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그녀는 내가 안내한 카메라를 보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 * *
1시간여 동안 정신없이 달려왔던 인터뷰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카메라가 꺼지자 스태프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나와 양선영 쪽으로 뛰어오더니 옷매무새와 화장을 고쳐 주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양선영에게 말했다.
“잠시 화장실 다녀오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사전 리허설도 없고 준비도 많이 못 했는데 너무 잘하셨어요.”
“그런가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네요. 지금도 얼떨떨해요.”
“아뇨. 정말 너무 자연스러웠고 잘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15분 정도 휴식 시간을 가진 우리는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이어서 다시 인터뷰를 재개하겠습니다. 양선영 씨. 얼마 전에는 안태민에게 당한 분들과 함께 기자 회견에 나서기도 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죠.”
“네.”
“혹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안태민에게 당한 사람들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설마요. 제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유부남이기도 하고요.”
“지금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기자 회견에 나선 8분 이외에 지금도 저희 쪽에 제보가 들어온 분만 무려 23분이 넘습니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혼인한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명백한 현행법 위반인데요. 간통죄가 있습니다.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현행법상 간통죄는 성교 행위를 한 수를 기준으로 죄가 성립합니다. 그러니까 5번 성관계를 했으면 5번의 죄가 성립하는 것이죠. 같은 상대와 했든 다른 사람과 했든 무관하게 성관계를 한 횟수로 죄가 늘어납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CG팀에서 간통죄에 대한 인포그래픽을 영상에 띄워 사람들의 이해를 도왔다.
“물론 간통죄는 친고죄이기 때문에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또한 혼인이 해소되거나 이혼 소송을 제기한 후에만 가능하죠. 그것뿐만 아니라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기에 증거를 잡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 때문에 이와 관련된 흥신소 업체들이 있고,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장면들. 그러니까 모텔에서 밀회를 즐기던 남녀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깜짝 놀란 표정을 하면서, 경찰 뒤에서 나타난 부인에게 남성이 손이 발이 빌도록 비는 모습은 바로 이 증거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CG팀은 재치 있게도 경찰이 들이닥쳐 난장판이 된 불륜 현장을 재현한 영화의 한 장면을 작은 화면으로 띄웠다.
“그래서 아마 안태민에게 간통죄 위반 혐의가 있더라도 증거를 제시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아직 불륜이 있은 지 10년이 넘지 않아서 소멸 시효에 걸리지는 않았습니다만.”
나는 한동안 간통죄의 성립 요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나서 화제를 바꿨다.
“다소 민망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선영 씨. 혹시 최근에 안태민이 방송하고 있는 유튜브 개인 방송인, 안태민 TV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네, 어제도 보았습니다. 자신은 그 어떤 불륜도 저지른 적이 없고 자식이 다섯이나 된다면서 부부 사이의 애정을 과시하더군요.”
“네, 그는 기자 회견에 나온 여성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과거 폭행을 당하거나, 사업 아이템을 빼앗기는 등 피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선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가 그때 당한 마음의 상처를 안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요.”
“오프라인에서도 그와 관련하여 안태민과 그의 일가가 저지른 각종 비리와 범죄 행위에 대해 꾸준히 기사를 내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도 모두 거짓 보도라며 맞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피해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최근까지 저는 안태민에게 당한 사람이 저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비슷한 경험을 많은 분들이 하셨고, 마찬가지로 한국을 떠나서 해외에서 힘들게 살고 계시더군요. 그러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을요?”
“네, 더 이상 이렇게 방치하면 안 되겠다고. 더 이상 제2의 양선영을 만들면 안 되겠다고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이 자리까지 나와 주신 거겠죠?”
“맞습니다. 해외에서도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오프라인에 이런 일로 제 얼굴을 비춘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네, 큰 결심 하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요.”
“저는 안태민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스튜디오에 설치된 모든 카메라가 양선영 쪽으로 방향을 돌리더니 그녀를 클로즈업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한마디 한마디를 힘을 주어 말했다.
“안태민 씨.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인간이라면. 적어도 처자식에게 일말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과 당신 일가가 행한 모든 죄를 인정하고 법의 심판을 받길 바랍니다. 그 뻔뻔한 얼굴을 유튜브에 들이대고 더 이상 거짓을 입에 담지 마시고요. 정말 역겹습니다. X새끼야.”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너무나 차분한 어조로.
그리고 침착하게 웃으며 생방송에서 욕을 뱉었던 것이었다.
* * *
양선영의 인터뷰는 폭발적이었다.
지금까지 한발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거나, 심지어 안태민을 응원하던 사람들까지도 안태민에게 등을 돌렸다.
포털을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에는 온통 이 이야기로 도배가 된 가운데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그의 일가를 심판해야 한다고.
주전영은 심혈을 기울여 조사한 호랑 재단과 연관된 기업사냥꾼에 대한 기획 기사를 내보냈다.
때마침 TP 그룹에서도 안태민 일가가 지원하는 호랑 재단으로부터 피해를 받았다며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국내 재계 서열 3위의 TP 그룹에서 낸 보도 자료는 영향력이 컸다.
오프라인의 보도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서 있던 일부 언론들도 TP 그룹의 보도 자료는 외면하지 못했다.
관련하여 수많은 기사가 나왔고, 사람들은 호랑 재단의 실체에 대해 경악했다.
<호랑 재단에서 후원한 사람들 목록 봤어? 국회의원에, 법조인에 의사에, 연예인에, 대기업 임원 등 장난 아니던데?>
<그게 다 지금까지 안태민 일가를 지킨 멍멍이 역할을 했다는 거 아냐? 무시무시하다>
<나 오프라인 보도에 나온 피해 업체 주주였는데. 저것 때문에 몇억 날린 것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완전 의도적이었던데 지금까지 정부는 뭐 하고 있었던 거냐! 다 안태민 일가 부하야?>
포털의 많이 본 기사에는 안태민과 그의 일가.
그리고 호랑 재단과 그 수혜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지 오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오프라인을 방문했다.
똑똑똑똑!!!!
온라인으로 기사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방문을 다급하게 두들겼다.
조갑환이었다.
그는 서둘러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헐떡거리며 말했다.
“대, 대표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그, 그녀가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조갑환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고는 말했다.
“안태민의 부인 문선정 씨가 지금 오프라인에 찾아왔습니다!!”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은 여성은 도저히 40대로 보이지 않았다.
선천적인 동안인 건지 아니면.
‘안태민 일가의 그 더러운 돈으로 계속 관리를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자 안태민의 부인인 문선정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미모하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보는 건 좀 부담스럽군요.”
“갑자기 무슨 일로 당사를 방문하신 겁니까?”
“어머. 뚫어져라 저를 쳐다본 남자치고는 말투가 매섭네요.”
“할 말이 있으면 빨리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바쁜 사람이라.”
문선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소파 뒤로 몸을 기댔다.
“뭐야. 재미없어. 오프라인을 위해 엄청난 뉴스거리를 안고 힘들게 찾아왔는데 너무 매몰찬 거 아닌가요?”
“엄청난 뉴스거리?”
내 말에 문선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며칠 전 양선영 씨 인터뷰는 잘 봤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그때 간통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시지 않았나요?”
“그랬습니다만.”
“우세진 대표가 이야기하길 간통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셨죠. 또한 불륜 현장을 촬영한 증거 자료도 필요하고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선정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연한 갈색의 서류 봉투였다.
“이게 뭐죠?”
“드리려고 가져왔으니 직접 보시죠.”
나는 그녀가 가져온 봉투를 열어 안에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네, 이혼 서류랑 최근 촬영한 불륜 증거 사진들이에요.”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가져온 이혼 신고서에는 문선정의 도장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또한.
불륜 현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증거 사진들이 10장 넘게 동봉돼 있었다.
나는 문선정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안태민의 행실로 보아 그가 지금까지 바람피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