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 시점에서 이걸 가져왔냐는 질문인 거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선정이 다리를 꼬더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아이들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왔어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양선영 씨 같은 사례가 30건이 넘는다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나요!”
“그런데 가져오신 사진을 보면 여성들이 무척 어려 보이고, 최근에 찍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맞아요. 작년에 찍은 거예요.”
“저희 쪽에 제보한 분 중에 가장 최근 사례가 3년 전이었습니다.”
“어휴! 거봐요. 이 인간 아주 도가 텄어, 증말!!”
문선정은 갑자기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더니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는 불을 붙이려 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입에 걸쳐 있던 담배를 빼내고는 탁상 위로 던져 버렸다.
“아앗! 이게 무슨 짓이에요!”
“실내 금연입니다.”
“흥. 여자 기분 하나 맞춰 줄 줄 모르는 사람이군요.”
“그래서 이걸 저한테 보여 주는 이유가 뭡니까?”
문선정은 돌연 악마 같은 얼굴을 하면서 내게 말했다.
“복수하려고요.”
“복수?”
“지난 24년간 그 사람에게 저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했어요. 아니 그것조차 20대 초반이 마지막이었지만.”
“슬하에 자녀가 다섯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흥! 17살부터 20살까지 애 낳는 기계였죠. 그러다 언젠가 술 처먹고 늦게 들어온 날 제가 싫다는 데도 억지로 늦둥이를 낳은 거고요.”
다소 충격적인 발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말을 이었다.
“왜 진작에 헤어지지 않은 겁니까?”
“하아. 그러게 말이죠.”
문선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사정을 떠들었다.
“처음부터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네?”
“물론 그가 좋아서 그의 아이를 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는 제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이를 지우라고 했던 사람이에요.”
“네?!”
“놀란 것도 없어요. 원래 그렇게 잔혹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저희 집안도 나름 그 동네에서는 명문가다 보니 함부로 할 수 없었겠죠. 당사자는 반대했지만, 집안끼리 이해가 맞은 것뿐.”
그녀는 처음에 내 방으로 들어왔을 때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슬픈 표정을 보였다.
“유튜브에서는 그렇게 저랑 화목한 척, 가정을 챙기는 사람처럼 떠들어대지만 단 한 번도 저를 아내로 여긴 적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아빠 노릇은커녕 아이들을 자신의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는 남자입니다. 정말 지긋지긋하네요.”
“다소 늦은 감이 있군요.”
“흥. 헤어지고 싶어도 주변에서 다들 말리는 바람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제 심정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그래서 양선영 씨 인터뷰를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건가요?”
“네. 같은 여자로서 부끄러웠습니다. 그에게 인생을 망친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그리고?”
문선정은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 봉투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 * *
<호랑 재단…… 알고 보니 다른 이가 세운 재단을 억지로 강탈>
<호랑 재단 설립자는 칠곡에서 농사짓던 할머니…… 전 재산 기부하고 떠났는데 안태민 일가가 불법으로 꿀꺽>
<호랑 재단 수혜자 목록 살펴보니…….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최상위 엘리트로 가득>
<‘이것이 알고 싶다’ 안태민 일가는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가>
<호랑 재단 “오프라인 보도는 사실무근…… 법정 대응할 것”>
그러나 호랑 재단은 그 어떤 법적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덕오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쌤통이네요. 안태민도 설마하니 자기 부인이 이런 증거 자료를 우리한테 건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문선정 씨 말로는 본인을 아내 취급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마 이런 비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겁니다.”
“슬프네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아내는 남편을 믿지 못하고.”
“다 안태민의 과오죠.”
문선정은 호랑 재단이 안태민 일가의 손에 넘어오는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에 대해 소상히 적혀 있는 서류 및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를 함께 건넸다.
또한 호랑 재단의 수혜자 목록이 상세히 기록된 서류 역시 함께 넘겼다.
오프라인은 기사와 별개로 이 자료를 그대로 홈페이지에 노출.
누구나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컴퓨터로 내려받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 그래도 양선영의 인터뷰로 안태민에 대한 여론이 나빠진 가운데 터진 호랑 재단에 대한 불법 인수 소식은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뿐 아니었다.
문선정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는 내게 건넨 사진을 모든 언론사에 뿌렸다.
심지어 유명한 여성 잡지에 출연.
자신이 지금까지 안태민에게 부인 취급은커녕 이용만 당했다는 폭로 인터뷰를 하였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말이다.
<여러분. 진심으로 후회합니다. 안태민 같은 사람의 말을 믿고 따랐던 저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때나마 이런 사람을 대선 후보로 뽑은 나 자신이 한심해. 진짜 죽고 싶다>
<어이 안태민 씨! 평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서 떠들었잖아! 반박할 수 있으면 반박해 보라고 이 거짓말쟁이야!!>
유튜브 개인방송인 안태민 TV에는 평소 안태민을 지지하는 자들의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지만, 지금은 온통 비방과 욕설뿐이었다.
그러나 안태민 TV는 이전에 올렸던 동영상이 모두 삭제된 채 그 어떠한 댓글에도 대응하거나 신규 영상이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수상한 생각이 들어 급하게 주전영을 내 방으로 소환했다.
“주 기자. 지금 당장 정부에 요청해서 안태민의 출국 여부를 확인해 주세요!”
“앗! 설마하니 녀석이 해외로 도피했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당장 알아보세요.”
“네, 대표님!”
주전영은 잠시 내 방을 나갔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안태민과 그의 부모가 그제 밤 비행기로 급히 한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젠장. 미리 출국 금지를 신청해 두었어야 했는데!”
출국 금지는 세금을 체납하거나 범죄 수사를 위해서 내려질 수 있는데 아직 그와 관련된 형사 사건이 진행 중이 아니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급히 외국으로 튄 건가. 이러면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안태민 일가는 부정한 방법으로 엄청난 자산을 축재하였다.
한국의 계좌를 모두 압류한다고 하더라도 스위스 은행과 같은 해외 비밀 계좌나 페이퍼컴퍼니를 수십 개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입니다.”
“범죄자의 천국으로 갔군요.”
“그러게요. 젠장. 왜 이걸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주전영이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필리핀이 한국인 범죄자의 도피처로 선호받는 이유는 다양했다.
우선 비행시간이 길지 않고, 항공편이 많으며, 비자가 없더라도 출입국이 가능했다.
게다가 필리핀은 무려 7천여 개가 넘는 섬으로 이뤄진 국가였다.
필리핀으로 들어간 다음 어딘가의 섬으로 숨어 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휴. 보통 돈만 많으면 한국이 가장 살기 좋다고 하지만, 필리핀도 만만치 않습니다. 돈이면 모든 게 다 되는 곳이죠.”
“일단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한 상태이기는 합니다.”
“필리핀은 연간 한국인 방문객만 백만 명이 넘습니다. 게다가 국제법상 강제 송환도 불가능하죠. 머리를 썼군요.”
“그렇지만 지나치게 빠른 것 같습니다. 기사가 나온 당일에 마치 이전부터 미리 준비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구린 게 많으니 평소 이런 일에 대비해 두었을지도 모르죠.”
“진짜 악당 중의 악당이군요.”
“아무튼 이 사실을 기사로도 빨리 내보내세요. 베트남 지사에도 알려서 필리핀 쪽에도 기사를 내라고 하시고요.”
주전영이 내 방에서 나가고.
나는 휴대폰을 만졌다 놓기를 반복하다 마음을 굳히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내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 우 대표.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당선 이후로 연락 한번 없더니.
“오랜만입니다. 당선인님.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다가 연락드렸습니다.”
-응? 뭔가 고민스러운 일이 있습니까?
“이야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안태민과 그의 부모가 그제 밤 필리핀으로 떠났습니다.”
-아 그거요?
백철웅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죠.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뉴스 아닙니까.
“안태민이 한국을 떠난 것은 아직 뉴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그렇죠. 하지만 안태민과 그의 일가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으니까요.
“그런데 당사자가 지금 도피를 한 상황입니다. 그것도 범죄자의 천국인 필리핀으로요!”
-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백철웅 당선인이라는 글자와 그의 전화번호.
그리고 통화 연결 시간만이 말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 * *
오프라인의 베트남 지사장인 고희열은 젊은 시절 베트남에 정착.
귀화하여 오랜 시간 베트남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베트남 안에서만 영향력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접 국가인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는 물론.
바다 건너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도 꽤 많은 인맥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고희열과 죽이 맞았던 백철웅은 안태민이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을 입수하자마자 고희열에게 연락.
그의 동태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예측하신 겁니까?”
-예측이라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였죠. 상대 후보에 대한 조사는 필수니까요.
“후. 그럼 호랑 재단의 비리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자세한 건 몰랐습니다. 수상하다는 정도였지요.
“그래서 현재 안태민 일가의 위치는 파악하고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배를 타고 마닐라 서남쪽에 있는 루방섬으로 이동한 다음 다시 그 서쪽에 위치한 카브라섬으로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카브라섬이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어업이 생업인 시골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여행을 떠나거나 비즈니스 목적이 아닌 도피를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는 게 사실로 굳어지는군요.”
-그렇겠죠. 고희열 지사장과 친한 사람이 루방섬의 경찰 고위 간부입니다. 항시 감시하고 있다고 하니 언제라도 잡아 올 수 있습니다.
백철웅의 자신감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게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그의 위치도 알고 목적도 알고 있는데 왜 그를 바로 잡아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아직은 제가 대통령이 된 게 아닙니다. 2월 25일이 되어야 대통령이 되는 것이죠. 제가 섣불리 이 일에 나서는 것은 리스크가 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아직 대통령 당선인이었지 공식적인 권력 이양 시점은 2월 25일부터였다.
“그럼 일단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취임식 이후 그를 붙잡을 계획입니까?”
-고민 중입니다. 이 사실을 이국대 대통령에게 알려 그가 처리하게 할지 아니면 신임 정부에서 처리할지.
백철웅의 당선이 발표된 이후 이국대의 인기는 빠르게 흩어졌다.
마치 거품처럼 말이다.
‘국민들도 사실 그가 이룬 업적은 그다지 없다고 냉정히 판단한 거겠지. 남북정상회담을 주도한 건 북측이었고, 이번 대선에서 그가 민 후보가 사실은 안태민이었으니.’
이런 와중에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안태민에 대한 수사를 이번 정부에서 담당한다면?
임기 말 큰 성과로 남을 터였다.
‘그보다는 자신이 집권하자마자 이 사건을 처리해서 국민들에게 점수를 따는 게 백철웅에게는 더 유리한 게 사실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선인께서도 정말 정치적으로 변하셨군요.”
-하하. 제가 바로 정치인인데, 그럼 정치적이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아직 취임식까지는 두 달 정도의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안태민이 그 기간 다른 곳으로 떠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따로 사람을 불러 그들을 감시하라고 했으니.
“용의주도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