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00)

-대통령이란 자리는 그래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오프더레코드로 하고 사건의 해결은 당선인님만 믿겠습니다.”

-아 맞다. 혹시라도 베트남 지사 측에 연락해서 필리핀이나 동남아 쪽에 관련 기사를 내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안태민이 경계할까 봐 그러신 겁니까?”

-맞아요. 괜히 경계심을 올리면 곤란하니까요. 자신들은 무사히 도망쳤다고 생각하게 하는 편이 잡기에 훨씬 더 수월하겠죠.

“알겠습니다. 이건 제가 고희열 지사장에게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오프라인과 우 대표가 아니었다면 이번 사건 이렇게 쉽게 처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덕분에 저도 호랑 재단 출신은 새 정부의 주요 인사에서 거를 수 있었고요.

“인수위원회 일로 많이 바쁘신 거로 압니다. 준비 잘하시기 바랍니다.”

-아 참. 이 말을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군요.

전화를 끊으려고 하던 찰나.

갑자기 백철웅이 질문을 던졌다.

“어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꾸준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

-나는 우 대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백철웅은 지나치게 뜸을 들이며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그답지 않았다.

“당선인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흠흠. 혹시 새 정부와 함께할 생각은 없습니까?

“새 정부와요?”

-네, 모두 우 대표를 어떻게든 이쪽으로 영입해야 된다고 아우성칩니다. 장관이 되었든 청와대 수석이 되었든 말이죠.

현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가장 바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인사였다.

조직을 어떻게 꾸리며, 누구를 어떤 자리에 앉히고, 어떤 역할을 줄 것인지가 향후 5년의 국정 수행의 기반이 되었기에.

“휴. 뭔가 했네요, 당선인님.”

-네.

“저는 오프라인에 뼈를 묻을 겁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죠?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수락하면 베스트고, 아니어도 그건 그것대로 좋으니까요.

백철웅.

대통령에 당선되더니 짓궂은 사람이 되었다.

* * *

어느덧 새해의 첫 달이 빠르게 지나가고.

겨울의 끝자락인 2월이 다가왔다.

몇몇 시사 전문지들은 자체적으로 미디어 신뢰도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결과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오프라인, 신뢰도, 영향력, 열독률 모두 압도적 1위>

<신뢰하는 언론인 1위는 우세진…… 2위와 70% 이상 격차>

<오프라인 언론 신뢰도 1위는 우세진 영향력이 크게 작용>

전 매체가 앞을 다투어 위와 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퇴근길에 만난 강세연이 차에 타더니 내게 뭔가를 건넸다.

작은 상자였다.

“이게 뭐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1위에 오른 걸 축하해요. 제 작은 선물이에요.”

“무슨 이런 걸.”

“빨리 뜯어봐요! 잘 맞을지 너무 궁금하다.”

강세연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번쩍거렸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

시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자에 쓰인 로고는 문외한인 나 역시 알 정도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였다.

‘이 브랜드는 개당 수십억이 족히 넘는다는 고급 시계가 아닌가.’

상자 안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시계 곳곳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시곗바늘이 분주하게 각자의 움직임을 보였다.

“멋있네요. 세련되었고요.”

“감상은 조금 이따 하고, 빨리 손목에 차 봐요!”

강세연은 못 참겠다는 듯 스스로 시계를 가져다 내 손목에 채워 주었다.

그러고는 만족스럽단 얼굴로 말했다.

“어때요? 제가 보기에는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네. 정말 예쁘네요. 이런 시계는 처음입니다.”

“세진 씨 정도면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늘 빈 손목이 허전해 보였거든요.”

“비싸 보이는데…….”

“어휴 참.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래서 좋아요? 안 좋아요?”

강세연이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물론 좋죠. 고마워요, 세연 씨.”

“음. 그게 끝은 아니에요.”

“그럼.”

“겨우 시계로 되겠어요? 제가 저녁도 살게요.”

화려한 레스토랑으로 안내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녀는 평창동 가장 구석.

그러니까 북한산 기슭에 있는 한 허름한 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여긴?”

“평창동에서 가장 오래된 해장국집이에요.”

“이런 곳이 있었어요? 처음 알았네요.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세진 씨가 해장국 좋아하잖아요? 어머니 가게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집도 정말 오래되고 해장국이 맛있다고 해요. 제가 주변에 물어봐서 열심히 찾았죠.”

우리는 무너질 것 같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저녁 시간이 다소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가게 안에는 제법 손님들이 있었다.

다들 해장국을 먹으며 반주로 소주 한 잔씩을 곁들어 마시고 있었다.

나는 해장국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세연 씨.”

“뭘요. 이 정도 가지고.”

곧 주문한 해장국이 나왔다.

뚝배기가 참 오래돼 보였고, 뚝배기 위로 건더기와 파가 가득했다.

“실한데요?”

“그렇죠? 아빠한테도 검증받은 곳이에요.”

“강규현 회장님이요?”

“네, 아빠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들르는 곳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세진 씨가 해장국 좋아한다고 하니까 무척 좋아하시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 집에 꼭 같이 오자고 하시던걸요?”

“그랬군요, 드시죠.”

해장국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다소 거칠어 보이면서도 어머니의 그것처럼 따뜻하고 푸짐한 맛이 있었다.

소탈하면서도 때로는 화려한 느낌이 있었고, 붉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해장국을 먹자 강세연이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맛있어요?”

“네, 숨겨진 맛집이네요. 평창동에 이런 집이 있을 줄이야.”

“헤헤. 다행이네요. 해장국 마니아인 세진 씨가 만족했다면 정말로 맛집인 거 맞겠죠.”

그녀는 내게 소주를 따랐다.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한 뒤 소주를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소주가 뜨끈한 해장국 국물과 어우러져 감칠맛을 더했다.

나는 그녀에게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항상 고마워요.”

“제가 고맙죠. 옆에서 많이 못 챙겨 줘서 미안해요.”

“세연 씨가 곁에 있어서 든든합니다.”

나는 앞에 앉은 강세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인인 건 둘째 치고 지금 이 세상에 그녀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엄마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요즘 한 가지 고민이 있어요.”

“고민이요? 뭔데요?”

강세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나는 소주를 단숨에 입안에 털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오프라인에 들어온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고 있어요. 햇수로 치면 4년 차죠.”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보다는…… 이제 국내에서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뢰도와 영향력 모두 1위를 찍어서요?”

“그렇죠. 그런 지표를 떠나서도 오프라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충분히 성장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주변 사람들이 눈을 흘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만큼 나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오프라인은 국내 최정상의 언론사가 되었다.

강세연이 내 빈 잔에 소주를 채우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제는 뭘 하고 싶으신데요?”

“본격적으로 글로벌 진출해야죠.”

“지금도 이미 다섯 개의 해외 지사를 보유하고 있잖아요?”

“그거로는 부족합니다. 오프라인은 세계 최고의 언론사, 아니 세계 최고의 IT 플랫폼 기업이 되어야 하니까요.”

“휴. 세진 씨 그런 이야기 하면 마치 우리 아빠 같아요.”

“아버지요?”

강세연이 돌연 팔짱을 끼더니 두 볼을 팽팽하게 부풀리고는 말했다.

“아빠도 늘 TP 그룹이 나아가야 할 길은 해외 진출뿐이다. 한국은 너무 비좁다. 우리가 살길은 글로벌 비즈니스라는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방금 소름 끼쳤어요. 우리 아빤 줄 알고.”

“한국은 너무 좁으니까요.”

언어만 해도 그렇다.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비율은 채 2%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어는 약 16%의 인구가 사용했고, 스페인어는 5%를, 영어는 4.5%가 사용하고 있었다.

사용 인구를 떠나서 영어는 세계 공용어였다.

내수 시장만으로는.

한국어 사업과 마케팅만으로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강세연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요? 뭔가 방법이 있나요? 설마 한국을 떠날 생각은 아니겠죠?”

나는 그녀의 두 눈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세연의 표정이 충격으로 가득했다.

# 3장 퓰리처상 사진전

한국을 떠난다는 나의 말에 강세연의 몸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재차 내게 물었다.

“정말로 한국을 떠난다고요?”

“네, 한국에서 해외 진출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요? 저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녀는 우주 끝까지라도 따라갈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예요. 세연 씨가 옆에 있는데도 못 챙겨 주면 제가 불편해서 집중하기 어려울지 몰라요.”

“아니, 그래도…….”

“영상통화는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2년 이내에 돌아올 겁니다.”

“2년이요?”

“네. 그 안에 오프라인을 전 세계 최고 IT 플랫폼으로 만들 겁니다. 그 시간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러고요?”

“한국에 돌아와서 세연 씨에게 청혼할 겁니다.”

청혼한다는 내 말에 강세연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그 말, 진심이세요?”

“물론입니다. 약속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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