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계약서에 뻔히 적혀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정산 비율은 어떻게 되는지, 계약 기간과 마케팅 방법 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오프라인이 웹툰이나 웹소설 전문 플랫폼이 아니다 보니 의구심이 들었던 것 같다.
‘기성 작가도 아니고 신입인 주제에 까다롭기 굴기는. 아직 유명해지지만 않았지 곤조 있는 작가란 뜻인가.’
나는 그들이 미래에 쌓아 올릴 작품들과 독자들의 환호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요. 여기를 주목해 주세요.”
나는 크게 손뼉을 친 다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프라인이 이전까지는 웹툰 및 웹소설을 전문으로 하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오프라인이 어떤 매체죠?”
“대한민국 신뢰도 1위 매체?”
“가장 많은 사람이 보는 언론사?”
“바로 그렇습니다. 그 믿음은 기사뿐 아니라 웹툰과 웹소설에도 그대로 이어질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안경남.
전세호 작가가 내게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대표님. 저희는 대표님과 오프라인만 믿으면 되는 겁니까? 그럼 정말 저희 작품이 전문 플랫폼 못지않게 흥행할 수 있는 겁니까?”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오프라인과 계약한 1세대 작가들로서, 업계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겠다고요.”
작가들은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밝은 표정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 * *
작가들과 계약서 작성을 마친 나는 그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차를 마시고 작별 인사를 고하는 자리.
나는 옆자리에 앉은 전세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작가님 혹시 오후에 선약이 있으십니까?”
“선약이요? 아뇨 아무 약속도 없는데요?”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심리상태가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유형이었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저랑 잠시 청계천을 함께 걸으실 수 있을까요?”
“청계천이요? 이 추위에요?”
“걷다 보면 추운 줄 모릅니다. 이럴 줄 알고 두꺼운 외투도 입고 오신 거 아닌가요?”
내가 그가 입고 있는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가리키자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와 헤어진 우리는 둘만 남아 청계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2월의 청계천은 고요했다.
드문드문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이 있을 뿐.
마른 가지 사이로 차가운 냇물만이 조잘대며 흘렀다.
전세호는 추운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호오하고 바람을 불었다.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 휘날리며 금세 사라지는 풍경이 지금이 겨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습니까?”
“그림이요? 어릴 때부터 취미생활이었죠. 흰 종이만 보이면 끄적거렸으니까요.”
“올해 스물여섯이시니 그럼 그림을 그린 지는 20년이 넘은 거군요?”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낙서를 의미하는 거라면 20년은 넘었을 겁니다. 4살도 되기 전부터 제가 하도 그림을 그려대는 통에 집안에 남는 종이가 없다고 엄마가 혼을 내곤 하셨으니까요.”
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천생 그림쟁이였다.
“요즘에는 주로 어떤 내용을 그리고 있나요?”
“최근에 블로그에 올린 그림은. 혹시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다른 세계에 전이했던 영웅이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다시 현세로 전이하는 내용입니다.”
“이세계 전이물에서 다시 현세로 돌아오는 내용이군요.”
“오! 대표님 이세계물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지금까지 경계를 감추지 않던 전세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이죠. 저도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습니다. 이고깽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세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는.”
“이야! 맞습니다! 그 이세계물을 살짝 튼 거죠. 이세계로 소환당한 용사가 그 힘을 가지고 다시 현세로 귀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요.”
“획기적인데요? 제가 알기로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그런 내용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흔한 설정이지만 2013년만 하더라도 전생물이 대세였지 전생한 주인공이 그 힘을 가지고 다시 현세로 귀환한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 혼자 킹왕짱>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지만.’
전세호는 신이 나서 자신이 구상 중인 작품에 대해 내게 말했다.
주인공은 누구이며, 어쩌다 이세계로 전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세계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다가 마왕을 물리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힘을 유지한 채 다시 현세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소설의 시작은 바로 그 주인공이 마왕을 죽이고 나서 갑자기. 그러니까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세로 귀환하면서 시작하게 됩니다.”
“일종의 먼치킨이군요?”
“이야! 먼치킨도 아시는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죠. 예전에야 주인공이 아무런 능력도 없다가 기연이나 스승 등의 도움으로 오랫동안 능력을 키운 다음 천천히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됐지만.”
“지금은 독자들이 그럴 여유가 없다?”
전세호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그렇습니다. 다들 취업도 어렵고 삶이 고단하니까요. 그러니 처음부터 힘을 주고 빠르게 전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동감합니다. 그럼 이야기에 속도감이 붙을 테고 독자들이 시원시원하게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우와. 진짜 오늘 제가 제대로 날을 잡았네요. 맞아요. 그렇게 힘을 가진 상태에서 주인공은 새로운 적과 조우하게 됩니다.”
“새로운 적이요?”
“네. 갑자기 현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던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마치 게임처럼요. 던전 속 몬스터들을 물리치면 엄청난 재화를 얻을 수 있는데, 주인공은 이세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죠.”
“음. 그럼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상태 그대로인가요? 별다른 영향 없이?”
“이야, 거기까지 생각하실 줄이야! 네, 맞아요. 그럼 주인공과 너무 밸런스가 안 맞게 되니까, 다른 이들도 힘을 줘야겠죠. 던전이 생성되면서 알 수 없는 파동에 따라 일반인들도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주인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그가 30여 분간 쉴 새 없이 떠든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내가 알고 있는 <나 혼자 킹왕짱>과 거의 흡사하군. 아주 일부만 빼고 말이야.’
나는 그에게 내 생각을 밝혀도 괜찮냐고 물었다.
“물론이죠! 대표님도 보통 덕후가 아니신 것 같은데 의견은 얼마든지 대환영입니다!!”
“하하. 이야기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히로인이 조금 걸리는군요.”
“히로인이요?”
전세호가 궁금하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네, 주인공이 능력이 있으니 인기가 많은 건 당연하겠지만, 지금 말씀하신 내용으로는 히로인이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많은 여성에게 인기를 얻는 게 로망이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전세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분명 하렘을 꿈꾸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크게 웃을 뻔하다가 겨우 참고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죠. 그렇지만 너무 히로인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적절한 히로인은 도움이 되지만 계속해서 아무 의미 없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히로인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네요.”
“흐음. 그런가? 아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표님 같은 전문가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무협지나 만화는 좋아했으니까요.”
1시간 가까이 청계천을 따라 걸은 우리는 다시 위로 올라왔다.
나는 그에게 몇 가지 추가 아이디어를 던지고는 좋은 작품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제가 봤을 때 작가님은 분명히 한국 웹툰계에 한 획을 긋는 대작가가 되실 겁니다. 분명히요.”
“말씀만으로도 너무 힘이 되네요. 진짜 부모님은 취업하라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시는데, 취업은 안 되지, 그렇다고 정식으로 웹툰 작가가 된 것도 아니지. 허탈한 마음에 블로그랑 커뮤니티에 그림을 올렸을 뿐인데 이렇게 보고 연락도 주시고 좋은 말씀도 주시고, 정말 너무 행복합니다!”
그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멀리 사라졌다.
‘저런 인재들을 더 발굴할 필요가 있어. 기회를 주고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오랫동안 걸으면서 신나게 떠들어서 그런지 2월의 청계천은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이지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매일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가 가득한 기사만 보다가.
판타지에 대해 실컷 떠들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
2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백철웅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보려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공식 초청을 받은 입장객은 8만 명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새 정부의 성공을 기원하며 국회의사당으로 몰린 까닭이었다.
이날의 장관은 바로 식전 행사였다.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개사해 노래를 부르면서 국회의사당 앞은 수만 명이 함께 말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이어서 백철웅이 무대로 등장했다.
그는 새하얀 정장과 흰 구두를 신고는 단상에 섰다.
첫 순서는 헌법 제69조에 따라 취임 선서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어서 취임사가 이어졌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을 맞아 흰색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바로 백의민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흰색은 태양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자연과 같은 색이죠. 저는 그 어떠한 부도덕한 색이 청와대를 물들이지 않도록 도덕적인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그의 발언에 환호했다.
나는 미소를 보이며 그의 취임사를 듣다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단상에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안태민이었다.
안태민은 백철웅과 상반되게 짙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단상에 올랐다.
수많은 인파가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충격을 받았는지 취임식장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소 수척해진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좌중을 살펴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안태민입니다. 저는 오늘 제 죄를 고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끊자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시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섰다.
“야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아! 네가 여긴 왜 나타난 거냐!!”
“당장 저 죄인을 잡아라! 대한민국의 수치다!”
“안태민은 즉시 물러가라! 무슨 염치로 이 좋은 날에 나타나서 행사를 망치는 거냐!!”
“우~~!!!”
비난과 야유소리가 국회의사당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저는 천만번 죽어도 마땅한 놈입니다. 제가 여기 설 수 있었던 까닭은 백철웅 대통령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백철웅이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멈칫거렸다.
“뭐? 대통령이 기회를 줬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시방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겨.”
사람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안태민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지금까지 저와 저희 일가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한 분 한 분 직접 만나 뵙고 사과를 드리는 게 마땅하겠으나 저희가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이 자리를 빌려 공개적으로 사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을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안태민이 말을 이었다.
“백철웅 대통령께서는 해외로 도피한 저와 저희 부모님을 찾아내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라고요. 그것만이 그동안 저희 일가가 저지른 죗값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할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일가가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하나 소상히 밝혔다.
오프라인이 기사를 통해 밝혀낸 잘못은 물론.
심지어 저런 짓까지 벌였나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일들까지.
안태민 일가가 벌인 죄는 거대하고 또한 야비했다.
그야말로 악마가 따로 없었다.
“저희 일가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법의 심판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신 백철웅 대통령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는 엄청난 야유를 들으며 단상에서 물러섰다.
그가 단상 아래로 내려오자 갑자기 경찰차 여러 대가 요란스럽게 등장하더니 그를 태우고는 사라졌다.
‘준비된 쇼란 말인가?’
사람들이 경찰차의 뒷모습을 보며 웅성거리는 사이.
나는 백철웅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 * *
취임식 이후 언론사들은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와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백철웅의 선택은 오프라인이었다.
그는 오프라인과의 단독 인터뷰에만 응하고는 다른 언론의 제안은 모두 거절했다.
가장 신뢰도가 높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게 맞다는 이유였다.
취임 첫날, 공개 인터뷰도 아니고 독점 인터뷰라니.
다른 언론사들이 반발할 법도 한데 어쩐지 그들도 납득한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