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환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좋은 인사로 생각됩니다. 주 기자님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안목이 높으시죠. 기사도 잘 쓰시고요. 평양 지사장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 이사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안태민 일가의 비리를 끝까지 파헤친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역시 우 대표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모두 제 생각에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사장과 평양 지사장 인사는 제가 떠난 다음 날. 그러니까 4월 1일 날짜로 진행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는 다음 주부터 2주일 동안 휴가를 내고 좀 쉬려고 합니다.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대표님. 그동안 정말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푹 쉬다 오시면 좋은 에너지를 얻고 오실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럼 쉬다가 바로 미국으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네, 미국엔 제가 알아서 갈 테니 여러분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자리가 될 것 같으니 한 가지 당부를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십쇼.”
“다들 지금도 너무 잘해 주고 계시지만 앞으로 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없으니까요.”
“네, 대표님!!”
* * *
3월의 제주는 그야말로 꽃의 동네였다.
어디를 가도 노란 유채꽃과 흰색과 분홍색의 매화가 알록달록 화려한 색감을 자랑했다.
내 옆에 앉은 강세연이 창문을 내린 채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3월의 제주는. 왜 사람들이 꽃삼월, 꽃삼월 하는지 알겠어요.”
“제주는 언제 방문해도 아름답지만, 3월의 제주는 정말 예쁘죠. 물론.”
“물론?”
강세연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갸우뚱거렸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말했다.
“세연 씨보다는 못하지만요.”
“에이, 뭐에요. 부끄럽게.”
그녀는 말로는 싫다면서도 내 손을 꼭 잡고서는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긴장되지 않아요? 곧 부모님을 볼 텐데.”
“전에도 한 번 얼굴을 뵌 적이 있어서 괜찮아요.”
“그래도 오늘은 저희 약혼 소식을 전할 거잖아요. 여자들은 이런 자리가 무척 부담스럽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세진 씨도 저희 부모님에게 아무렇지 않게 잘 말씀하셨잖아요. 여자라고 더 부담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잘해야죠.”
나와 강세연은 내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약혼을 맺기로 하였다.
강세연은 정확히 한국을 떠난 1년 뒤라고 못을 박았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면 결혼을 하자고 그녀를 설득시켰다.
제주공항 인근의 렌터카 업체를 떠난 우리는 오래지 않아 부모님이 계신 집에 도착하였다.
제주에 오기 전 강세연과 함께 중대한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미리 말씀드린 까닭인지 부모님은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긴 채 집 안에 계셨다.
평소와 다르게 좋은 옷을 입고 말이다.
“어머나! 어서 와요. 제주까지 오느라 피곤하죠?”
“아니에요, 어머니. 오늘 옷이 너무 고우세요. 아버님도요!”
“허허. 세지니가 중히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신경 썼다 아닙니카. 그런데 세연 씨는 진짜루 볼수록 이뿐니다. 여보. 그 뭐라카드라?”
“뭐요? 볼매?”
“맞다, 맞아! 볼수록 매력덩어리! 하하하.”
“아버님도 참.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세연이 다소곳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엄마는 부엌에서 준비한 다과를 내놓고는 서둘러 물었다.
“그런데 세진아. 도대체 할 말이 뭐니? 그것도 세연 씨랑 같이 와서는?”
그녀는 내가 꺼낼 말은 하나밖에 없다는 듯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빨리 네 입으로 그걸 꺼내 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어색하게 바라보고는 말했다.
“지금 엄마가 뭘 생각하시는지는 잘 알지만, 그것보다는 한 단계 다운시켜 주세요.”
“응? 다운시켜 달라고?”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급히 말을 뱉었다.
“그럼 약혼?”
“딩동댕. 정답입니다.”
“와! 그게 정말이카? 축하한데이. 그란데 왜 결혼이 아니꼬 약혼이코?”
“제가 4월부터 해외로 떠나게 되었거든요.”
“응? 외국에 나간다꼬?”
“네. 아버지. 국내에서 1등 찍었으니까 이제 세계에서도 1등 찍어봐야죠.”
“이야. 역시 우리 아들이데이. 암만. 그래야제. 그런데 와? 길게 다녀오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네, 최소 1년은 있다 와야 될 것 같습니다.”
“뭐? 1년이나! 아니 어딜 가는데 1년 넘게 외국에 가는 거야?”
엄마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은 미국에요. 북미 시장이 가장 크거든요. 미국부터 잡고, 유럽, 아시아를 거쳐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에요.”
“아이고. 그런데 그럴 거면 그냥 지금 결혼하고 둘이 같이 나가는 게 좋지 않아?”
엄마의 말에 강세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놀러 가는 게 아니에요. 정신없이 바쁠 텐데 세연 씨랑 같이 가면 제가 미안하죠.”
“왜? 같이 가면 너도 더 힘이 날 테고, 세연 씨도 덜 외롭지 않겠니. 1년이나 떨어져 지내면 너도 물론이고 세연 씨도 힘들 텐데.”
“어머니…….”
강세연은 엄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오랜 고민 끝에 결정했어요. 세진 씨가 오프라인을 세계 최고의 IT 기업으로 만들고 나서 결혼하기로. 그때까지는 저도 잘 견뎌 보려고요.”
“어쩜. 얼굴도 예쁜데 마음마저 이리 예쁠까. 외롭거나 쓸쓸하면 언제든 편하게 이쪽으로 와요. 내가 말 상대를 해 줄 테니.”
“네. 어머니. 자주 연락드릴게요.”
두 사람은 꼭 손을 마주 잡고는 수다를 떨었다.
나와 아빠는 그들이 편히 이야기하도록 놔두고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아빠가 내 어깨를 세게 주물렀다.
“하하. 축하한데이. 그란데 약혼식은 따로 안 하나?”
“네. 시간도 촉박하고 양가 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하는 정도로 하려고요. 허례허식에 얽매이는 것도 싫고요.”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카이. 근데 미국이면 홍지혜 기자가 있는 곳 아닌가?”
“네. 맞아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하하. 이미 다 지난 이야기다만 원래 네 엄마는 홍 기자를 며느리로 점 찍었었데이. 우얄라고 거기로 가노?”
“홍 기자랑 저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남녀 사이는 모르는카이. 거 홍 기자가 너를 좀 좋아하는 거가트만.”
“아니에요. 그나저나 저 건물 보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나네요.”
“하하. 맞제? 니랑 내랑 개고생해서 만든 건물이지 않카나. 나도 가끔 여기서 가게 보고 있으면 그때 생각이 나드래이.”
“아버지.”
“와?”
“어머니 잘 부탁드릴게요.”
“허허. 실없는 소리는. 걱정 말고 니 앞가림이나 단디해라! 딴 여자는 일절 쳐다보지도 말꼬.”
“걱정 마세요. 저한테는 세연 씨뿐이니까요.”
* * *
나와 강세연은 2주 동안 제주도 곳곳을 누비며 둘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짐을 싸고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덕오를 비롯하여 부사장으로 지목된 안재영.
그리고 임원진들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따로 연락한 적도 없는데?”
“1년 넘게 한국을 떠나계실 거면서 작별 인사도 없이 가시려고 그러셨어요?”
“작별 인사는 저번 회의 때 했잖습니까?”
“에이. 그걸로 되나요. 가시기 전에 얼굴 뵙고 말씀드려야죠.”
“맞아요. 대표님. 안태민도 아니고 왜 말도 없이 떠나려고 그러세요!”
이수빈이 서운하다는 듯 나를 나무랐다.
“이거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네요. 저는 귀찮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귀찮긴요. 대표님이 회사 잘되라고 먼 걸음 하시는데 당연히 배웅해 드려야죠.”
그 모습을 강세연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갑환이 강세연에게 다가와서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두 분 약혼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네? 약혼이요? 대표님! 정말로 강 관장님하고 약혼하신 거예요?”
나는 그들에게 강세연과 약혼은 사실이며 한국에 다시 돌아온 날 결혼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안재영은 놀랍다며 말했다.
“이야. 계속 평양에 있다가 남한에 와서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구만. 우세진 동무! 왜 내게 아무 말도 안 했소! 서운합네다.”
안재영이 북한말로 나를 놀리자 이덕오가 받아쳤다.
“그러게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게도 비밀로 한 건 좀 서운하네요.”
“저희도요! 서운해요! 대표님!”
나는 그들을 달래 준다고 한참을 끙끙거렸다.
이들이 나를 믿고 의지하는 만큼 나 역시 이들을 믿고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헤어진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와 라운지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다음 비행기에 올랐다.
내 좌석은 비행기 제일 앞단에 위치한 퍼스트 클래스였다.
‘3년 전 미국으로 떠났을 때만 해도 일반석이었는데 그사이 참 많이 바뀌었구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총 12석 정도에 불과한 일등석에 탑승한 승객은 많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3명이 전부였다.
그것조차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여 띄엄띄엄 띄어져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오래지 않아.
뒤쪽에 있는 일등석에서 중년 남성의 고성이 들려왔다.
“실내가 너무 더운 거 아냐? 온도 좀 낮추지? 이거 무슨 사우나에 온 것도 아니고!”
# 4장 진상남
나는 천천히 뒤쪽을 돌아보았다.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승무원을 향해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비싼 돈 다 내고 일등석에 탔는데 완전 개판이구먼! 여기 책임자 누구야! 당장 불러와!”
그를 상대하는 승무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저기 손님. 현재 운영 가능한 가장 낮은 온도로 설정한 상태입니다. 그 이상 낮추면 너무 추워서 정상적인 운행이 어렵습니다.”
“뭐? 지금 어디다 대고 말대답이야 말대답은! 내가 책임자 불러오랬지? 응! 여기 책임자 누구냐고!!”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사무장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다가왔다.
그가 한참 동안 진상 손님을 설득한 끝에 결국 비행기는 무사히 활주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륙 전부터 별꼴이로군.’
나는 주의를 돌리고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미디어의 미래>
미국의 언론학자인 애덤스 제플린이 쓴 책으로 미디어의 미래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담겨 있는 내용이 어려운 만큼 대중적인 서적은 아니었지만.
‘미디어가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해 상세히 실린 책이지.’
나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읽으며 회상에 잠겼다.
책이 나온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지금 당장은 물론 5년 뒤 미래에 써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역시 괜히 주목받았던 게 아니구나. 이번 미국행에 이 책을 가져온 건 좋은 선택이었어.’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큰 감동과 깨달음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책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묻혀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회귀 바로 직전 이 책은 전 세계 미디어의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떡상했다.
자연스럽게 책을 쓴 애덤스 제플린도 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도 별 볼 일 없는 한 주립대학의 이름 없는 언론 학자에서 미디어의 구세주로.
‘한국에서도 메이저 매체에서 이 사람을 자기네 콘퍼런스에 서로 초대하겠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지.’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우라까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당시 이 책을 읽어 볼 여유가 없었다.
‘회귀한 지 3년이 넘어서야 이 책을 볼 생각이 들다니. 그동안 정말 너무 정신없이 지내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보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