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00)

비행기는 어느새 이륙을 마치고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딱히 아침 시간도 아니고 점심시간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

나는 승무원을 향해 빙긋 웃고는 말했다.

“지금 별로 배가 안 고파서 이번 식사는 패스하겠습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콜라면 됩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승무원이 건넨 콜라캔 뚜껑을 따서는 입으로 가져갔다.

톡톡 튀는 청량감과 상쾌한 목 넘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었다.

그때였다.

“아니 이게 뭐야? 아침 메뉴에 왜 황탯국이 없어?!”

아까 그 진상남이었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식사를 세팅하는 승무원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도대체 이 메뉴를 정한 사람이 누구야! 이거 제대로 한 거 맞아? 엉? 사무장 오라 그래!!”

그는 테이블 위에 세팅된 접시를 통로에 던지며 불만을 표했다.

다행히 재질이 튼튼했던지 접시는 깨지지 않았지만, 일등석 구역은 서먹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어디선가 사무장이 달려와서는 다시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손님. 저희 메뉴는 일류 세프들의 추천을 받은 식단입니다. 어떤 것이 불만이 있으실까요?”

“흥! 일류는 개뿔! 도대체 아침 메뉴에 황탯국이 없는 게 정상인 건가? 국적기면 이런 건 기본 아닌가?”

“죄송하지만 기내에 황탯국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면 황탯국 말고 다른 음식을 준비해 드리면 안 될까요?”

사무장은 프로답게 진상남의 만행을 한껏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진상남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라면이나 가져와 봐. 얼큰한 거로.”

“네. 손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장은 싱긋 웃으며 자리를 떴다.

‘저 정도면 보살이 따로 없군. 국내 승무원들은 지나치게 친절한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더니 저런 건 제대로 된 대처가 아쉽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읽고 있던 <미디어의 미래>에 집중했다.

그러나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

진상남이 또 진상을 부렸기 때문이다.

“아이씨! 야! 내가 푹 익혀서 가져오랬잖아! 이게 도대체 뭐야!”

“얼큰한 라면을 주문하셨지 푹 익히라는 말은 없으셨습니다.”

“됐고, 다시 하나 끓여 와! 푹 익혀서! 이번엔 실수하지 말고!”

얼마 후.

그는 두 번째 도착한 라면은 너무 싱겁다며 불만을 제기하더니 세 번째 도착한 라면은 건더기가 적다며 투덜거렸다.

나도 모르게 혈압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뭐 저런 미친 새끼가 다 있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사무장이 진상남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기 손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정말로 맛있는 라면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 말 정말이지? 또 내 입맛에 맞지 않아 봐라. 아주 기내를 뒤집어 놓을 거야! 엉?!”

나는 일어서려는 걸 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무장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괜히 나서기가 좀 그렇군.’

네 번째 라면은 진상남의 입맛에 맞았는지 그는 별다른 불만 없이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루루! 쩝쩝!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되는 탓에 음악도 나오지 않는 헤드폰을 써야 했지만.

* * *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식사가 제공되었다.

식전주와 함께 접시 위에 놓인 푸아그라 테린이 무척 이색적이었다.

‘일등석이라 그런지 메뉴도 참 고급스럽군.’

식전주로 나온 셰리의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운데.

“야! 이딴 걸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으이구. 라면이나 끓여와 봐. 아까 마지막에 먹은 라면처럼 잘 끓여서.”

이번에도 진상남은 어김없이 승무원을 향해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를 하였다.

5분여가 흘렀을까.

진상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내 자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앞에 있는 승무원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새끼들아! 지금 나 무시해? 왜 가져오라는 라면을 아직도 안 가져오는 거야!”

그는 승무원을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세게 휘둘렀다.

명백히 상대에게 손찌검하려는 동작이었다.

테이블에 음식과 음료가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급히 옆에 놓인 책을 잡고서는 그의 복부를 향해 던졌다.

퍼억!

총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의 모서리가 제대로 그의 옆구리에 들어갔다.

“아야야야.”

진상남은 승무원을 때리려는 동작을 멈추고는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복도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야!”

“아이고 저런. 죄송합니다. 손이 헛나가서. 괜찮으신가요?”

내가 진상남을 향해 괜찮냐며 묻자 그가 고개를 이쪽으로 획 돌리더니 소리쳤다.

“넌 또 뭐야! 이씨! 응?”

그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보이고는 중얼거렸다.

“오, 오프라인 우세진 대, 대표님?”

“네. 제가 오프라인 우세진입니다. 저를 아시나요?”

“물론이죠. 국내 최고 언론사 대표 아니십니까. 아이고.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기고만장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굴하게 변했다.

“미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가요? 죄송합니다. 식사하면서 책을 보다가 그만 실수를 저질렀군요.”

“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하.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옆구리를 매만지며 조용히 뒤로 사라졌다.

앞에 있던 승무원이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혹시 괜찮으면 2층에 있는 바(bar)로 사무장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사무장님이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먹던 음식을 치우고 가운데에 위치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비즈니스 클래스 구역을 지나 끝에 위치한 바에 들어서자 승무원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잭콕 한 잔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텀블러를 흔들더니 내게 칵테일을 내놓았다.

그녀가 만든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사무장이 바에 들렀다.

“부르셨습니까?”

“혹시 사무장이 맞으시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제 뒤에 있던 진상 손님이 승무원에게 손찌검하려고 해서 제가 좀 주의를 줬습니다.”

“아.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승무원들을 대표해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정말 큰 일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사무장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내게 감사를 표했다.

“별말씀을요. 혹시 그가 대기업 임원입니까? 넥타이를 하고 있던데.”

“아 그건…….”

“개인 정보라서 어렵다?”

“네. 아무리 저희를 도와주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어렵습니다.”

“철저하군요. 그런데 그 철저함을 다른 곳에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사무장이 잘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 * *

길었던 14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뉴욕에 도착하였다.

내가 짐을 정리하여 자리에서 일어서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옆구리에 <미디어의 미래>를 한 대 맞은 뒤로는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진상남이었다.

“헤헤. 우 대표님도 업무차 방문하신 건가요?”

“아. 네. 그런데 그쪽도 업무로?”

“네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개인 돈으로 이런 비싼 좌석을 타겠습니까. 다 회삿돈이지.”

“그래요? 분명 저는 비싼 돈 내고 일등석에 탔다고 들었는데 회삿돈이었군요.”

“하하하. 들으셨나요? 회삿돈이 곧 제 돈이고 제 돈이 회삿돈 아니겠습니까.”

그가 어색하며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자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회사의 대표 임원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엄연히 회삿돈과 개인 돈은 별개입니다. 지금 아주 위험한 발언을 하시는군요?”

“아. 그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대표님이신가요?”

“아, 아뇨. 임원입니다. 임원. 잠시만요.”

그는 자신의 수트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자신의 명함을 내게 건넸다.

<주식회사 마루 전무이사 김황조>

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주식회사 마루라면 재계 순위 10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대기업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제가 거기 상무이사입니다. 안 그래도 우 대표님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뵙다니 인연인가 봅니다. 하하.”

“그렇군요. 그런 곳의 전무이사치고는…….”

“네?”

나는 그와의 대화를 끊고는 말없이 앞으로 나갔다.

탑승교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덩치 큰 남자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가득 서 있었다.

내가 그들을 지나치자 뒤에서 따라오던 김황조가 나를 불렀다.

“저기 우 대표님! 다음에 기회 되면 한잔하시죠! 제가…… 앗! 뭐야! 니들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 뭐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뒤를 돌아보자 덩치 큰 남자들이 김황조를 구속하고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리고 사무장이 그들과 무언가를 이야기하였고, 김황조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멀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빙그레 웃고 있자 나를 발견한 사무장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뭘요. 그가 기내에서 했던 행위는 명백히 항공기의 안전이나 운항을 저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고하는 게 당연한 도리죠.”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신고까지는 생각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분은 저희와 자주 거래하는 대기업 고위 임원이시거든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그렇게 너무 수동적으로 나가면 이런 일이 또 반복될지도 모릅니다. 아닌 건 확실히 대응해야죠. FBI에 신고하기 전에 기내에서 미리 구금조치를 하는 게 더 정확한 조치였습니다.”

“네. 대표님. 조언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큰 도움 받았습니다.”

나는 나를 향해 90도로 인사하는 그를 뒤로한 채 입국장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수많은 인파를 살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익숙한 얼굴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우 대표님! 여기예요, 여기!”

홍지혜였다.

오랜만에 보는 홍지혜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오랜만이네요. 홍 지사장님. 별일 없었죠?”

“물론이죠. 대표님도 별일 없으셨죠?”

“네, 올 때 아주 경미한 사건이 있었지만요.”

“경미한 사건이요?”

나는 그녀에게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려 주었다.

홍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형적인 갑질이네요. 고객은 왕이니 서비스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마인드.”

“내리자마자 FBI가 끌고 갔으니 그냥 끝나진 않을 겁니다. 그나저나 점심시간이네요. 식사했어요?”

“아직 안 했죠. 대표님 오면 얻어먹으려고요.”

“하하. 미국에 계시더니 아주 뻔뻔해지셨네요. 미국은 홍 지사장님 구역이니 저한테 사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