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00)

“세진 씨가 그렇게 생각해도 그룹 대표인 아빠 생각은 다를걸요?”

“다른 사람 손에 넘기는 게 꺼림칙한 거라면 저 말고 세연 씨가 대표가 되면 되잖아요?”

“하하. 지금 농담하는 건 아니죠? 저는 그럴 역량도, 생각도 없어요. 어휴. 그런 걸 도대체 어떻게 맡아서 키우란 말이에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내 말에 강세연이 기분 좋은 듯 쾌활하게 웃었다.

그녀는 눈에서 눈물이 났는지 한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바로 그런 점이 저나 아빠가 세진 씨한테 푹 빠진 점이 아닐까 싶어요. 어쩜 그렇게 욕심이 많은 듯싶다가도 또 욕심이 없는지.”

“선택과 집중이죠. 저한테는 오프라인과 세연 씨가 그렇고요.”

“피. 알았어요. 아빠한테는 제가 잘 돌려서 말해 볼게요.”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저 지금 길가의 사람들이 모두 저를 보고 웃고 있는 게 좀 부담스러운데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요?”

“어머. 둘만의 장소로 가고 싶다는 뜻인가요?”

“그럼 승낙한 거로 알고 모시겠습니다. 마님.”

나는 급히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길가의 사람들은 내가 떠난 뒤로도 한동안 택시가 떠난 쪽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광고에서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 * *

강세연이 머무는 곳은 센트럴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더 다코타(The Dakota) 빌딩이었다.

세계적인 록 밴드인 비틀스의 존 레넌이 살았던 곳으로 특히 그가 자신의 광팬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곳으로 더욱 유명했다.

그의 부인인 오노 요코와 아들인 숀 레넌은 아직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강세연에게 물었다.

“남편이 죽은 곳인데 여기에 계속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전에 존과 요코는 집 앞에 있는 센트럴파크를 자주 산책했다고 해요. 공원 입구에 있는 스트로베리 필즈에는 아직도 존의 노래인 ‘Imagine’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죠.”

“세연 씨는 여기서 오노 요코를 본 적 있나요?”

“자주는 아니지만 멀리서 몇 번 뵌 적은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고풍스러운 창문 밖으로 푸르른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근방의 건물들은 무척 고풍스러워 보이던데 세연 씨는 이곳을 어떻게 구한 거예요?”

“몰라요. 가족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아빠나 회사가 구매했겠죠?”

“그런가요? 제가 알기로는 이런 곳들은 매매 이런 개념이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사고판다고 하던데.”

“와. 맞아요. 코압이라고 해서 건물 소유주에게 조합의 지분을 구매하는 거예요! 잘 아시네요?”

나는 회귀 전 뉴욕 아파트의 주거 개념에 관해 쓴 기사를 떠올렸다.

뉴욕에서 ‘아파트’라고 하면 한국과 달리 매매가 아닌 렌트의 개념이었다.

한국식 매매는 ‘콘도’를 의미하였고, 해당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구매하는 것이 바로 ‘코압’이었다.

그리고 이곳, 더 다코타처럼 센트럴파크에서도 서쪽에 위치한 고급빌딩들은 대체로 ‘코압’을 통해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아니면 코압은 못 하는 거 아닌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빠가 무언가 조치를 하지 않았을까요? 대리인을 내세웠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렇군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헤에. 혹시 세진 씨 여기에 관심 있는 거예요?”

“이런 곳에 살면 괜찮겠단 생각을 잠시 했어요. 지금 제가 머무는 곳하고 비교하면 너무 좋거든요. 숲이 보인다는 게 참 좋군요.”

내 말에 강세연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맞아요! 아무리 회사와 가까운 게 최고라지만 거기는 창밖으로 빌딩 숲밖에 안 보이잖아요! 관리실에는 제가 말해 둘 테니까, 저 한국 돌아가면 세진 씨가 여기서 머무세요.”

“아닙니다. 여긴 세연 씨 부모님 집이지 세연 씨 집은 아니잖아요. 제가 하나 사 둬야겠어요.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미국에 집이 있으면 편할 테니.”

“네? 여기를 산다고요?”

강세연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세진 씨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긴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아니면 코업이 어려울 거예요.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라고 하더라도 입주 심사는 무척 까다롭다고요. 세계적인 팝스타는 물론이고 뉴욕 부지사도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말처럼 더 다코타의 입주는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수많은 유명 인사가 더 다코타에 입주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이곳은 편안했고, 나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말이 나온 김에 나는 관리실에 연락해 더 다코타에 입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곧 관리실에서 회신이 왔다.

* * *

더 다코타에 입주하기 위한 심사는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10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인터뷰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왜 내가 이 아까운 시간을 여기에 낭비해야 하냐고 말하는 것처럼.

그중 가장 상석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스터 우. 이곳은 미국의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아니라면 입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입주하고 싶다는 이유가 뭐죠?”

“저는 오프라인뿐 아니라 워싱턴포스트의 사주이기도 합니다. 많은 금액을 미국의 세금에 내고 있죠.”

“세금을 많이 내는 것과 시민권 혹은 영주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만.”

그는 조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투덜거렸다.

그러는 나는 고개를 젓고는 답했다.

“잘 아시다시피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역시 원래는 외국인이었습니다. 미 정부는 그들 부부를 추방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둘은 치열한 투쟁 끝에 영주권을 취득하였죠.”

“그래서 말씀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저는 반정부 인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막대한 세금을 내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고, 거대 언론사의 사주입니다. 이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말을 끝내자 심사위원들이 분주하게 의견을 나눴다.

그들로서도 거대 언론사 사주이자 유명인사인 나를 단칼에 내치는 것은 불편한 행동일 터이다.

오래지 않아 제일 상석에 앉은 위원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숙.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미스터 우. 이것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도전입니다. 유례가 없는 일이죠. 아시겠습니까?”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미스터 우를 받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쌓아 왔던 역사와 규칙을 스스로 위배하게 되는 꼴이 됩니다. 우리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죠.”

“네.”

“다만 저희도 그렇게 고지식한 곳은 아닙니다. 외국인이더라도 대리인 등을 통해 서명하면 입주가 가능합니다.”

그의 말은 대리인을 통해 입주를 신청하면 받아들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제 명의로 이곳에 거주하고 싶군요.”

“뭐라?!”

“제가 범죄자도 아니고 대리인을 통해 편법을 써서 거주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미스터 우! 저희는 당신의 입주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사위원회의 역할일 테니까요. 다만.”

“다만?”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저로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겠죠. 왜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는 언론사 사주를 거절하는 것인지. 그리고 대리인을 통한 편법을 강요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위원장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는 끝내 나의 입주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미스터 우의 더 다코타 입주를 허가하겠습니다.”

* * *

나는 하루 휴가를 내고 기존에 살고 있던 집에서 더 다코타로 짐을 옮겼다.

짐이 많지 않았기에 이사는 금방 끝났다.

강세연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사를 도와주겠다며 한국행 비행기를 취소하였다.

나는 차에서 마지막 짐을 꺼내 방으로 옮기고는 손을 털었다.

“휴. 대충 정리되었는데 잠시 공원 산책이나 다녀올까요?”

“좋죠. 산책하고 근처에서 같이 브런치나 먹어요. 제가 살게요.”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홍지혜에게서 문자가 왔다.

<대표님. 재미난 메일이 왔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대표님 새집도 구경할 겸 지금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문자를 본 강세연의 표정이 구겨졌다.

강세연과 브런치를 먹고 집으로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 홍지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홍지혜를 맞이하러 나갔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와! 대표님 여기로 이사하신 거예요?”

“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뇨. 방금 왔어요. 그런데 여기 엄청 유명한 곳이잖아요? 비틀스의 존 레논이 살았던 집!”

“맞아요. 지금 홍 지사장님이 서 있는 부근에서 총에 맞아 죽었죠.”

내 말에 홍지혜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불만 어린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예요.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아니, 정말로 거기서 죽었어요.”

“휴. 기분이 묘하네요.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죽은 곳이라니.”

“그래서 더 유명해진 면도 있지만요.”

“여기 계속 있다간 꿈에 존 레논의 유령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네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그녀는 나를 다그치고선 더 다코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실내 곳곳을 살피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안은 처음이에요. 밖은 유럽의 대저택처럼 생겼는데 내부도 무척 화려하네요!”

나는 홍지혜를 데리고 방으로 이동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홍지혜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와와! 대표님 정말 너무 멋져요! 창밖으로 바로 센트럴파크도 보이네요! 너무 아름다워…… 앗! 과, 관장님?”

홍지혜는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강세연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녀는 나와 강세연을 번갈아 보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관장님 와 계셨는지 몰랐어요. 한국으로 떠나신다고 들었거든요.”

“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설마요! 제가 눈치 없이 방문한 것 같아서요. 계신 줄 알았더라면 연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흐음. 그게 더 수상하네요. 제가 있으면 안 되고 없으면 방문해도 괜찮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아 맞다! 대표님에게 말씀드릴 게 있어서 급히 왔어요.”

홍지혜가 급히 내 쪽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리자 강세연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홍지혜에게 사과 주스를 한 잔 건네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한 자선 단체에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보냈거든요.”

“어린이 자선 단체요? 무슨 내용인데요?”

“말씀드리고 가도 괜찮죠?”

홍지혜가 강세연의 눈치를 보며 묻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우리 저쪽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세연 씨 괜찮죠?”

내 말에 강세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은 홍지혜는 가져온 노트북을 꺼내 내게 한 통의 이메일을 보여 주었다.

<친애하는 미스 홍에게. 안녕하세요. 저희는 난치병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 제단 ‘메이크어위시’입니다. 이름 그대로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죠. 저희는 한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합니다. 아이의 이름은 제리. 현재 5살로 생후 18개월이 되었을 때 백혈병 진단을 받았답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그 힘들다는 항암 치료를 계속 견뎌야만 했죠. 다행히 최근 치료를 마치고 회복에 들어선 상태에요. (중략) 제리의 소원은 배트맨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는 제리의 소원을 꼭 들어주고 싶어요. 오프라인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언론사입니다. 혹시 저희와 함께 제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겠어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다면 연락 주세요.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고 말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메이크어위시 대표 수잔 린치>

옆에서 나와 함께 메일 내용을 지켜본 강세연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무척 흥미롭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메이크어위시’의 이름은 저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어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자선 단체요!”

“네, 관장님. 그런 곳에서 무슨 이유로 저희에게 메일을 보냈는가 저도 궁금했는데 취지나 내용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러게요. 이런 내용이라고 미리 말씀 주셨으면 저도 오해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전에는 미안해요.”

“아네요, 관장님. 대표님 집으로 갑자기 불쑥 찾아온 제가 실수했죠.”

“호호. 저라도 아는 사람이 더 다코타에 입주했다고 하면 궁금할 것 같아요. 항상 밖에서만 스치듯 지나가는 곳이잖아요?”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 호호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대판 싸울 것처럼 그러더니 신기하군.’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홍지혜에게 물었다.

“다 좋은데 그래서 우리와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오프라인이 이와 관련해서 보도하거나 취재를 해 달라는 내용 아닐까요?”

“취재와 보도라. 보도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가야죠. 당장 회신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미팅 날짜를 알려 달라고 하세요.”

“네, 대표님. 그리고 저 여기 좀 더 구경해도 괜찮죠?”

홍지혜는 나와 강세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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