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연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큰소리로 외쳤다.
“물론이죠! 오늘 저녁도 여기서 함께 드시고 가세요!”
* * *
홍지혜가 회신을 보낸 지 오래지 않아 ‘메이크어위시’는 오프라인의 뉴욕 사무실에 들렀다.
대표인 수잔 린치가 직접 방문하였다.
그녀는 2명의 직원과 함께 방문했는데 세 사람 모두 선(善)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더니 나쁜 일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얼굴들이로군.’
내가 린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너무 선한 얼굴이셔서 저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하하. 그런 이야기 자주 들어요. 저뿐 아니라 저희 직원들 모두요.”
“면접 볼 때 선한 얼굴 기준으로 사람을 뽑나요?”
“그럴 리가요. 저희가 비영리 재단이다 보니 월급이 그리 많지 않답니다. 대신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에 진심인 분들만 채용하고 있죠.”
“농담입니다. 세 분 얼굴을 보니 좋은 재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혹시 이번 건과 별개로 저희 쪽에서 정기적으로 후원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네요.”
“어머! 정말인가요? 후원은 언제나 대환영이죠. 오늘 직접 오길 참 잘한 것 같네요. 호호.”
린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보였다.
홍지혜도 따라서 웃으며 말했다.
“오프라인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에도 관심이 많아요. 지금도 여러 곳에 후원하고 있고요.”
“네,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연락을 드린 것도 있고요. 이런 부탁을 아무 데나 드릴 순 없잖아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저희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될까요?”
내가 바로 본론을 꺼내자 린치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메일 내용은 보셨나요?”
“물론입니다. 5살 꼬마 제리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시다고요?”
“네. 맞아요. 잘 아시겠지만, 항암치료라는 게 성인이 해도 무척 힘들거든요. 그런데 제리는 무려 생후 18개월부터 얼마 전까지 항암 치료를 계속하였답니다.”
“무척 힘든 시간이었겠네요. 제리도 제리의 부모님도요.”
“그렇죠. 다행히 최근 완치가 되어서 회복하고 있답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신 거죠. 아멘.”
그녀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제리의 소원이 뭔지 아세요?”
“메일에는 배트맨이 되고 싶다고 적혀져 있더군요.”
“맞아요. 정말 어린 아이다운 순수한 소원 아닌가요? 배트맨이라니.”
“그래서 한 편으로는 저희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메이크어위시’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더군요.”
내 말에 린치와 그녀의 직원들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대표님도 궁금하시죠? 저희 직원들이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어떻게 하면 제리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 하고요.”
“이벤트를 계획하고 계시는 건가요?”
“오! 맞아요. 역시 감이 좋으시군요. 저희는 제리를 위해 일종의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법무부, 경찰, 샌프란시스코 시민뿐 아니라 오프라인과 같은 언론사의 도움이 절대적이랍니다.”
“네? 법무부와 경찰, 시민들의 도움뿐 아니라 언론사의 도움도 필요하다고요? 도대체 뭘 계획하고 계신 거죠?”
홍지혜의 물음에 린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는 실제로 도시에 악당이 등장하고, 이를 배트맨이 된 제리가 소탕하는 대형 이벤트를 계획 중에 있거든요.”
“아하. 그런 식으로 제리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거군요!”
“그렇죠.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혼자 진행할 수는 없으니 전문 배우가 직접 배트맨을 연기하고, 제리와 함께 악당을 물리치려고 계획 중이에요.”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그런데 이벤트는 어디서 열리나요? 제리의 집?”
“아뇨. 제리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말이죠.”
샌프란시스코라는 말에 나와 홍지혜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뉴욕 다음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거대 도시였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이런 대형 이벤트를 연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교통 통제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 샌프란시스코시와는 이야기가 된 겁니까?”
“물론이죠. 시는 물론이고 경찰과 호텔, 지역 언론 등과도 이야기가 되었어요.”
“지역 언론과도 이야기가 되었다면 관련해서 기사를 쓴다는 이야기인가요?”
“맞아요. 정말 악당이 나타난 것처럼 기사를 써서 배포할 거예요. TV 뉴스에도 실시간 중계될 거고요.”
“그런데 오프라인에 연락하셨다는 건?”
“오프라인은 전국지잖아요? 유튜브에서 방송도 하시고요. 이번 이벤트를 전국에 보도한다면 제리도 정말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녀는 그제야 오프라인을 직접 방문한 이유에 대해 실토했다.
‘최근 부정적인 뉴스들만 잔뜩 있어서 모두 지쳐 있는 상태다. 이런 긍정적이고 희망찬 뉴스를 오프라인에서 보도한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지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혹시 이번 이벤트를 영상으로 찍어서 보도뿐 아니라 영화나 혹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등으로 제작하는 건 어떠세요?”
“영화나 다큐멘터리요?! 저희야 정말 너무 좋죠. 그런데 저희가 예산이 따로 없는데 어쩌죠?”
린치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나는 손을 저으며 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예산은 저희 쪽에서 댈 테니까요. 능력 있는 감독님도 알고 있고요.”
“오! 정말요?! 그래 주신다면 저희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이왕 이벤트를 한다면 정말 실제처럼 하면 더 좋지 않겠어요? 제가 아는 감독님이 시각 효과를 연출하는데 아주 뛰어난 분이세요. 그분에게도 도움을 요청해 볼게요.”
“아멘. 정말로 하늘의 도움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린치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보였다.
그녀는 기도를 드리다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혹시 대표님께서 직접 배트맨이 되어 제리와 함께 악당을 물리칠 생각은 없으신가요?”
“네? 제가 배트맨을요?”
내가 아이폰5S의 광고를 찍을 때 촬영을 맡았던 팀 밀러는 시각 효과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였다.
그는 ‘블러 스튜디오’라는 VFX(시각효과) 제작 업체의 대표이기도 했는데, 이곳은 게임이나 영화 업계의 트레일러 영상을 만드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나는 그가 건넨 명함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곧 밀러가 전화를 받았다.
-팀 밀러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안녕하세요, 감독님. 우세진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앗! 오프라인의 미스터 우?!
“네. 접니다. 별일 없으시죠?”
-물론이죠. 갑자기 무슨 일이신가요?
그가 흥미를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에게 ‘메이크어위시’가 계획하고 있는 이벤트에 대해 알려 주었다.
-백혈병을 앓았던 꼬마 아이를 위한 대형 이벤트라. 무척 흥미로운 프로젝트로군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감독님 측에서 이번 이벤트에 참여해 주실 순 없을까요?”
-저희가요? 어떤 식으로 말이죠?
“스케치 영상과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스케치 영상과 다큐멘터리 영상이요? 흐음. 사실 저희는 CG가 전문이지 실사 촬영은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찍은 아이폰 광고는 아이폰5S로만 촬영을 진행해서 무척 성공적이지 않았습니까?”
-그건 제게도 신선한 도전이었으니까요. 아무튼 지금 말씀 주신 이벤트도 무척 흥미롭긴 하군요.
그는 이번 이벤트에 참여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슬쩍 배트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던졌다.
“최근에 배트맨과 관련된 영상을 하나 제작 중이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언론사의 취재 범위를 무시하시면 곤란합니다. 저희의 눈과 귀는 세계 곳곳에 있으니까요.”
-순간 소름 돋았습니다. 업체와는 비밀 유지 계약을 했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소식을 알고 계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곧 출시 예정인 배트맨 아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배트맨: 아캄 오리진’의 예고편 영상을 만들고 있었다.
“배트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 이번 이벤트를 촬영하실 때도 이해가 빠르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촬영은 그렇다 치고. 연출은 어떻게 됩니까? 시놉시스나 전문 배우는 있습니까?
“기본적인 시놉시스는 있지만,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감독님이 조금 더 꼼꼼하게 꾸며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하하. 이건 뭐 갈수록 태산이로군요. 그럼 배우는요?
“배트맨은 제가 연기할 예정입니다. 악당과 인질은 섭외가 된 상태이고요.”
-네? 미스터 우가 직접 배트맨을 연기한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건 꼭 제가 찍고 싶군요. 저 이외에 다른 사람이 미스터 우를 찍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죠.”
그는 흔쾌히 이번 이벤트에 참여하겠다며 승낙하더니 이내 A4 100장으로 구성된 시놉시스를 보내왔다.
시놉시스를 본 홍지혜가 혀를 내둘렀다.
“‘메이크어위시’가 만든 시놉시스가 애들 장난이라면 이건 완전히 박사 과정 논문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마치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가 그려지는 것 같아요!”
“그렇죠? 시각 효과뿐 아니라 연출에 있어서는 엄청난 재능을 가진 분 같습니다. 나중에 꼭 오프라인 원작의 웹소설을 이분에게 맡겨서 영화로 만들고 싶군요.”
“네네. 저도 너무 궁금하네요. 그런데 대표님, 배트맨 연기 괜찮으시겠어요? 여기 시놉시스 보면 대사도 그렇고 연기도 꽤 많이 요구되는데요?”
“팀 밀러 감독이 도와준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되겠죠.”
“후후. 그렇게 연기는 싫다고 하셨으면서 왜 배트맨 역할을 수락하셨어요?”
“선한 일이잖아요? 오프라인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회사가 아니라 좋은 일도 한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었거든요.”
* * *
이벤트는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 앞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매일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다섯 시간씩 혹독한 연습의 시간이 이어졌다.
밀러는 배트맨 역할을 맡은 나를 비롯하여 악당 역할, 인질 역할을 맡은 배우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고는 직접 연기를 지도했다.
그는 실제로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서 사용한 복장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가 가져온 리얼한 복장을 보고는 환호성을 지르자 밀러가 씩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지인한테 빌린 겁니다. 실제 배트맨 영화에서 사용된 복장이라 잘 돌려줘야 하니 아껴서 입어 주시길 바랍니다.”
“엄청나군요! 펭귄맨을 연기하면 된다고 그래서 동네 마트에서 펭귄맨 복장을 샀는데, 이런 걸 진짜로 입을 줄은 몰랐어요!”
연기자 지망생이자 이번 이벤트에서 펭귄맨 역할을 맡은 40대 배불뚝이 남자 벤자민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펭귄맨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같은 연기자 지망생이자 리들러 역을 맡은 30대 근육남 프랭키는 자신의 복장이 마음에 드는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는 의상을 자랑했다.
“원래 리들러는 그다지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니지만, 초록색 정장이 너무 멋지네요. 저랑도 잘 어울리지 않나요?”
“잘 어울려요, 프랭키. 조금 더 악당 같은 표정을 보여 주면 좋겠군요.”
“이렇게요?”
그가 비굴한 웃음을 보이자 벤자민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만족을 표했다.
무명이지만 실제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인질 역의 소피아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부럽네요, 정말. 펭귄맨, 리들러 복장이 너무 근사해요. 저도 악당역으로 지원할 걸 괜히 인질 역을 맡았네요. 그런데 주인공인 배트맨 씨는 의상 안 입으시는 거예요?”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모두 내 쪽을 쳐다보았다.
“입을 겁니다. 그런데 설마 이 복장을 입은 채로 연습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왜요? 입고 하면 더 몰입도도 있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소피아의 말에 나는 한 손에 든 배트맨 복장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전신의 근육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배트맨 복장은 분명 멋졌다.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그러나 모두들 배트맨 복장을 탐내기라도 하듯 내가 가진 의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탈의실로 이동, 배트맨 복장을 입어 보았다.
전신에 딱 붙는 의상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배트맨이 지금 바로 이 공간에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배트맨 복장도 입어 보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 일이로군.’
그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가는데.
사람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배트맨으로 변한 내 모습을 보고는 근사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와우! 진짜 배트맨은 고담시가 아니라 뉴욕시에 있었군요!”
“너무 멋져요! 배트맨 의상 정말 잘 어울리는데요?”
“완벽합니다. 완벽해요! 저 지금 흥분한 거 보이시죠? 이번 프로젝트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자자! 이제 다들 준비된 것 같으니 그럼 처음부터 연습해 보죠. 리들러와 펭귄맨이 호텔에서 소피아를 납치하는 장면에서부터요.”
팀 밀러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다시!’를 연발하며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약속된 12시가 지나서, 새벽 1시가 되고.
모두 녹초가 된 상태로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처음 복장을 입었을 때의 설렘과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런 걸 1달이나 해야 해?’라는 걱정스러운 표정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