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밀러의 연기 지도하에 우리의 연기는 점점 노련해졌고 호흡은 일사불란해졌다.
소피아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가 실제로 배우로서 생활하고 있지만 이건 뭐 진짜 영화를 찍어도 손색없을 수준이에요. 감독님 밑에서 많이 배우네요.”
“정말로 영화를 찍을 겁니다. 러닝 타임이 길진 않겠지만요.”
“정말 대단해요. 저는 지금 엄청난 블록버스터 영화에 캐스팅된 여배우의 심정이에요.”
“하하. 소피아 씨. 저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그저 불쌍한 꼬마를 위한 단순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지원했는데, 제 연기 실력이 이렇게 늘 줄은 상상조차 못 했죠.”
“맞아. 그동안 수많은 오디션에서 탈락했는데 앞으로는 곧바로 붙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고맙습니다. 감독님.”
그들은 밀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또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나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미스터 우도 너무 고마워요. 처음에는 저희처럼 연기자도 아닌 일반인이 왜 배트맨을? 이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나도 나도! 연기를 나보다 더 잘하더라고. 이참에 배우가 될 생각은 없습니까?”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내가 손사래를 하자 이를 지켜보던 밀러가 아쉬움을 표했다.
“제가 보기에도 미스터 우는 연기에 재능이 뛰어납니다. 정말로 연기를 해 볼 생각은 없나요?”
“아쉽지만 연기는 제 관심 분야가 아니라서요.”
“그것 참 아쉽군요. 저번 아이폰5S 광고를 찍을 때도 카메라 앞에서 너무 자연스러워서 사실 깜짝 놀랐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카메라를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데 말이죠.”
“이전에도 한 번 광고를 찍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미스터 우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마음 바뀌면 알려 주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기억해 두겠습니다.”
밀러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다른 배우들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제가 여러분들을 지도하는 건 저를 위해서이지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 작품에서 수준 낮은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요.”
“동기야 어쨌든 덕분에 많이 배운 건 사실이니까요.”
“맞아요. 감독님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만 같습니다. 혹시 다음에 작품 찍을 때 알려 주시면 꼭 찾아가겠습니다.”
밀러는 호탕하게 웃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스터 우. 다음에 오프라인 웹소설이나 웹툰 원작 영화를 만들 때 이 친구들을 초대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야 좋죠. 다들 수준급의 연기실력을 갖추고 있고요.”
“하하. 들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최고의 작품에 미리 캐스팅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히트할 작품을 말이죠.”
“그건 그렇고, 샌프란시스코에는 언제 갈 예정입니까?”
“이벤트 일주일 전에요. 실제 현장도 둘러봐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으니까요.”
“그렇군요. 저희도 현장에서 리허설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연습은 오늘까지?”
내 말에 밀러가 엄격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지만 역시나였다.
“아뇨. 제가 떠나기 직전까지는. 매일매일 지금과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연습을 계속할 겁니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시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지만 누구 하나 싫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연기 연습은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까.
* * *
나와 소피아, 벤자민, 프랭키는 이벤트 사흘 전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현장에서 미리 리허설하기 위함이었다.
한 달가량 쉬지 않고 손발을 맞춘 덕분이었을까.
낯선 환경이었음에도 우리는 한 점의 실수 없이 리허설을 끝낼 수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에서 연습을 해 왔던 것처럼.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이벤트 당일이 다가왔다.
* * *
샌프란시스코는 이른 아침부터 도시 전체가 들떠 있는 느낌이었다.
지역 언론은 물론 오프라인에서는 전날 밤부터 오늘의 상황극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지한 상태였다.
한동안 특별한 뉴스가 없었던 탓인지 미국민 모두가 이번 상황극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헤헤. 백혈병으로 고통받았던 꼬맹이에게 멋진 이벤트를 열어 준다지? 하와이에 있어서 직접 보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너무 기대된다. 오프라인에서 생방송해 준다니까 아침부터 유튜브 고정해 두고 기다리는 중>
<이거 영화로도 만들어진다던데? 괜히 내가 더 긴장된다>
<설마 제리가 이번 상황극에 대해 미리 알지는 않았겠지? 제리의 아빠가 적절히 대처했으면 좋겠군>
다행히 제리는 이번 상황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제리의 아버지가 인터넷은 물론 TV를 끈 상태로 전날 일찍 잠을 재웠기 때문이었다.
‘산타클로스가 자신의 부모님이라는 걸 아는 순간 모든 환상이 깨져 버리는 법이지.’
제리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위치한 인구 천여 명의 작은 도시 툴레이크를 출발.
오전 11시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제리의 아버지가 약속된 장소인 가게에 도착하자 무전기가 울렸다.
“제리가 아버지와 함께 가게에 도착했다. 모두 스탠바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번 이벤트를 총괄 기획하는 팀 밀러였다.
제리가 도착한 가게 옆에는 유서 깊은 호텔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 로비에서 무전을 기다리며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충실했다.
제리가 배트맨 마스크와 의상을 사고 가게를 나오는 순간.
상황극은 시작되었다.
* * *
리들러와 펭귄맨으로 변한 프랭키와 벤자민은 호텔 로비에서 소피아를 납치하고는 그녀를 호텔 입구로 끌고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진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리얼했다.
벤자민이 큰소리로 외쳤다.
“아하하하! 이런 고급 호텔에서 지내는 걸 보면 이 여자는 엄청난 부자인 게 틀림없어!”
“맞아, 펭귄맨. 그녀를 납치한다면 분명 큰돈을 받아낼 수 있을 거야.”
“꺄아! 도와줘요. 배트맨!!”
소피아가 큰소리로 외쳤지만 배트맨이 나올 리 없었다.
밀러와 그의 팀들은 내가 아이폰5S 광고를 찍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근거리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이미 상황극에 대해 알고 있던 시민들 역시 스마트폰을 들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찍어 대었다.
프랭키는 무자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케헤헤헤. 배트맨은 여기 없어. 그러니 얌전히 우리를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그들은 호텔 앞에 준비한 차량에 소피아를 태우고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이윽고 호텔 옥상에서 하늘로 배트맨을 부르는 대형 등이 켜지고.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이 지역 방송국과 오프라인 카메라를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배트맨! 긴급 상황이다. 빨리 이곳에 출동해 주길 바란다. 인질이 잡혔다. 그리고 혼자 오지 말고 꼭 배트 키드(Bat Kid)를 데리고 오길 바란다.”
나는 촬영 스태프의 신호를 받고는 재빨리 호텔 로비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가게 입구에 서서 이 상황에 당황하던 제리에게 다가갔다.
제리는 배트맨 복장을 한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놀래서 동공이 2배는 커져 보였다.
“제리! 빨리 배트맨 복장으로 갈아입으렴. 위험에 빠진 시민을 구출해야지!”
내 말에 제리는 당황하며 나와 자신의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민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배트 키드! 배트 키드! 배트 키드!!”
제리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나는 웃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제리. 어서.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니?”
내 말에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망토로 그의 몸을 감싼 뒤 제리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제리는 빠르게 배트맨으로 변신하였다.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의 반응이 폭발하였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배트 키드의 이름을 불렀다.
“배트 키드! 어서 그녀를 구해 줘!!”
“배트 키드 사랑해요! 나의 영웅!!”
“배트 키드! 너무 멋져!!”
유튜브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심한 어린 배트맨의 표정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꼬맹이 표정 봤어? 와 진짜 감동이다. 너무 진지하잖아!>
<마치 자신이 정말 배트 키드가 된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아. 귀엽다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용감히 배트 키드를 하겠다는 제리가 너무 멋져. 그는 정말로 영웅이 될 자격이 있는 친구야>
곧 배트맨의 상징이자 이동 수단인 배트모빌이 가게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배트모빌의 등장에 제리는 감격했는지 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제로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 등장한 모델을 가지고 왔으니 놀랄 수밖에.’
나 역시 실물로 배트모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밀러에게서 실제 배트모빌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물로 보니 그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나는 준비된 키를 눌러 차량의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이 탈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제리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와! 아무도 없는데 스스로 움직이나요?!”
“배트모빌은 배트맨이 부르면 언제든 스스로 찾아오지.”
내가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제리는 큰 감동을 한 모습이었다.
방금 대사는 따로 연습한 적 없는 애드립이었다.
밀러가 웃음을 참으며 카메라를 돌리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그를 외면하고는 제리를 안고 배트모빌에 태웠다.
그리고 문을 열어 둔 상태로 교통이 통제된 시내를 여유롭게 달렸다.
“배트맨! 배트 키드! 배트맨! 배트 키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나와 제리를 열광적으로 응원해 주었다.
성인이라면 이 이질적인 모습에 의구심을 가질 만한 상황이었지만.
어린 제리에게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응원도.
그리고 최첨단 배트모빌을 타고, 자신이 동경했던 배트맨과 함께 악당을 무찌르러 가는 이 상황이.
그저 너무 즐겁고 꿈같은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 * *
우리는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 시청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퍼레이드를 즐겼다.
시청 앞에 도착하니 소피아가 시청 입구에 묶여 있고 리들러와 펭귄맨이 이쪽을 보고는 당황하며 소리치는 게 보였다.
“뭐, 뭐야! 배트맨과 배트 키드가 나타났잖아! 우린 이제 죽었다.”
“우는소리 하지 마, 펭귄맨! 우리는 패배를 모르는 고담시의 악당들이지 않나. 돌격!!”
리들러와 펭귄맨이 이쪽으로 돌진하자 나는 제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배틀 키드. 마음속으로 저들을 물리치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외쳐. 배트 파워! 라고 말이야.”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무엇인가를 빌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배트 파워!!”
그러자 큰 폭발과 굉음이 울리면서 리들러와 펭귄맨이 뒤로 나자빠지는 게 아닌가.
커다란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이것이 가짜가 아닌 실제임을 알렸다.
밀러가 샌프란시스코시의 허가를 받아 설치한 영화용 특수 폭탄이었다.
‘실제로는 아무 살상 효과도 없고 그저 화려하게 폭발하는 게 다지만 제리에게는 실제로 배트 파워가 존재한다고 느낄 만한 요소지.’
제리뿐 아니었다.
이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시민들 역시 방금의 폭발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곧 시청에서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리들러와 펭귄맨을 체포했다.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영화처럼 멋진 상황극에 경의를 표했다.
상황극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리들러와 펭귄맨이 체포되자 시청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나와 제리를 향해 손뼉을 쳤다.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인 다음 어서 저쪽으로 가 보라고 제리의 등을 밀었다.
그는 잠시 부끄러워하더니 당당히 시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모두 제리를 향해 따뜻한 박수를 쳐 주는 가운데.
제리가 단상에 서자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소리 높여 외쳤다.
“샌프란시스코 시민 여러분. 오늘은 정말로 역사적인 하루입니다. 위험해 처한 샌프란시스코를 배트 키드인 제리가 구한 날이죠. 시는 이날을 영원히 배트 키드의 날로 기록할 것임을 널리 선포합니다!”
“제리! 제리!”
“배트 키드! 배트 키드!”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배트 키드의 날을 선포하는 것을 끝으로.
상황극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