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00)

* * *

각 언론사는 종일 이 재미있는 상황극을 소개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백미는 그날 저녁에 있었던 미국 법무부 장관의 발표에 있었다.

그는 기자 회견을 자처하고는 이런 재치 있는 발언을 하였던 것이었다.

“국민 여러분. 미 법무부는 오늘 배트 키드가 검거한 리들러와 펭귄맨를 기소하였습니다. 이들은 인질을 납치하는 등 샌프란시스코의 안위를 심각하게 위협한 악당들이었습니다. 미 법무부는 이들을 검거한 배틀 키드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짧은 영상을 작성하여 트위터 백악관 계정에 남겼다.

<오늘 활약 너무 멋졌어, 제리! 앞으로도 고담시를 잘 부탁해>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주연을 맡았던 크리스천 베일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처음에는 뉴스를 보고 이게 뭐지 싶었는데 오프라인에서 전체 영상을 살펴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소년은 누구보다 용감했고 당당했다. 우리는 이를 본받아서 멋진 사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제리, 백혈병 완치된 거 축하한다!>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이날 상황극을 생중계로 방영한 오프라인.

오프라인 US는 이날 영상을 보려고 접속한 이들로 평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트래픽을 보였다.

다행히 스노든이 있어서 위험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스노든은 내게 서버 상황에 대해 보고하며 특이상황을 함께 전했다.

“대표님. 풀영상 못지않게 사람들이 몰리는 게시판이 하나 있습니다.”

“게시판이요? 기사가 아니라?”

“네.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인데 배트맨의 정체에 대해 작성한 글입니다.”

“배트맨의 정체요? 어디에도 내가 배트맨이라는 사실을 알린 적이 없는데?”

“네. 그런데 작성자는 배트맨의 얼굴과 발음, 신장과 몸매 등을 근거로 배트맨은 대표님이 틀림없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댓글도 재미있는 게 맞다, 아니다로 나뉘어 크게 다투고 있습니다.”

내가 배트맨이라는 사실은 향후 제작될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밝힐 예정이었다.

‘그전까지는 비밀로 해 두고 싶었는데 역시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없나.’

원래 서양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애플 광고를 찍는 등 내 얼굴이 자주 미디어에 노출되자 이제는 복면을 써도 내가 누구인지 맞히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었다.

나는 스노든과의 전화를 끊은 뒤 오늘 촬영을 함께했던 이들과의 뒤풀이에 집중했다.

한 달 동안 같이 동고동락하며 연습했던 까닭일까.

우리는 오늘 상황극이 성공리에 끝난 것을 축하하는 한편, 이 프로젝트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특히 소피아는 눈물까지 드러내며 슬픔을 보였다.

“그동안 매일 여러분들과 함께 연기 연습하는 재미로 살아갔는데,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나도. 다시 무한 리허설을 반복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걱정 말아요. 벤자민. 앞으로는 한 번에 붙을 테니까.”

“하하. 그랬으면 좋겠군. 그나저나 미스터 우. 아까 배트모빌에서 제리를 내려주면서 뭐라고 그런 거야? 한참 제리의 귀에 대고 속삭이던데.”

벤자민은 내가 제리와 헤어지면서 했던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언제나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라고. 그러면 언젠가 너의 꿈이 꼭 실현될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해 줬어.”

내 말에 소피아가 끝끝내 억눌러두었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우에엥!! 너무 감동적이잖아! 어쩜 좋아. 미스터 우. 나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랑!”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남으로 이어지고.

나는 머지않아 이들을 다시 만날 것 같다는 느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피아를 달래 주었다.

# 3장 오노 요코

더 다코타 중앙에는 청동으로 된 분수대가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종종 이곳으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때때로 오노 요코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 근처로 다가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보았다.

“반갑습니다. 요코. 처음으로 인사드리네요. 우세진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였음에도 요코는 그다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우리 이곳에서 몇 번 눈으로 인사한 사이죠?”

“맞습니다. 이곳에는 동양인이 드물어서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하긴 더 다코타는 인종 차별로 몇 번 구설에 오른 적이 있었죠.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세진 씨가 이곳에 입주한 게 무척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분수대 주변을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말을 건 상대였는데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안했다.

“어제 기사 봤습니다. 채프먼의 가석방 신청에 반대하셨다고요.”

“오. 그런 건 그다지 기삿거리도 아니에요. 이미 수차례 반대를 했고요. 설마 그가 감옥 밖으로 나오는 걸 찬성하시는 건 아니죠?”

요코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설마요. 그가 감옥 밖으로 나와서 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에서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만 해요.”

채프먼은 요코의 남편인 존 레넌을 살해한 자였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복역 중인 그는 여러 번 가석방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요코 또한 늘 그의 가석방을 반대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레넌의 가족은 물론 전 세계 팬들 또한 큰 상실감을 맛보아야만 했죠. 그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영감 또한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고요.”

“후후. 존의 팬이었나요?”

“지구상에 그와 비틀스의 팬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내 말에 요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진 씨. 저는 여러 의미에서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어떤 점이죠?”

“단순하게는 이곳에 지금 동양인은 저와 당신뿐일걸요?”

“그렇군요. 제 약혼녀도 이곳에 집이 있지만, 현재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그 패기와 당당함이 좋습니다. 마치 젊었을 적 저와 존을 보는 것 같거든요.”

“그것참 영광이군요.”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답니다. 무기력한 상태죠. 만약 세진 씨만 괜찮다면 가끔 놀러 와서 이 늙은이의 말 상대가 되어 준다면 좋겠군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나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당신이 제게 해 줄 이야기가 무척 궁금하군요.”

“재미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히려 세진 씨가 내게 해 주는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을걸요.”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헤어졌다.

단순한 겉치레 인사로만 생각했던 그녀의 제안.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었다.

* * *

계속된 합병과 채용으로 인해 이제 오프라인의 전체 구성원은 대략 1천 5백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워싱턴포스트의 구성원 500여 명의 합류가 컸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개발자 수만 해도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오프라인에서 개발직군이 가지는 영향력은 무척 커졌다.

‘이제는 단순히 언론사가 아니라 IT 회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은데 하필 왜 지금.’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이메일에서 몇십 분째 눈을 떼지 못했다.

국제본부장인 제임스 리에게 온 메일이었다.

<존경하는 우세진 대표님께. 오프라인의 성장을 위해 미국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중략)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오프라인을 나가 새로운 도전에 응하려고 합니다. 그간 저에게 해 주신 관심과 응원을 잊지 않겠습니다. 몸은 떠나지만, 마음만큼은 늘 오프라인과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제본부장 제임스 리 올림>

미사여구가 많을 뿐 명백한 사직서였다.

구성원의 수가 늘어났으니 이직하는 자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임원만큼은 늘 한결같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프라인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고, 그들의 존재는 일개 직원 한 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부사장이자 본사의 운영을 전담하고 있는 안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부사장님. 우세진입니다. 제임스 리 본부장에게 온 메일, 부사장님도 보았나요?”

-네, 대표님. 안 그래도 내부에서 그것 때문에 골치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오프라인을 떠나서 갈 곳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요.

“여러 가지 설이라니. 메일에는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정해진 겁니까?”

내 물음에 안재영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네, 여러 소식통에 의하면 고려 일보에서 새로 디지털 전문 매체를 만드는데 거기 사장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려 일보요? 거기서 새로 디지털 전문 매체를 만든다고요?”

-네, 단순히 내부에 디지털 팀을 따로 두는 게 아니라 온라인뉴스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자회사를 설립한다고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고려 일보 영향력은 어느 정도죠?”

-대다수가 오프라인에 접속해서 뉴스를 보니까 사실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기성세대들은 신문을 구독해서 보지 않습니까.”

-그것도 옛말입니다. 제가 아는 분들은 대부분 오프라인에 접속해서 기사를 보니까요.

안재영의 말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이번 고려 일보의 디지털 전문 매체 설립은 무척이나 큰 사건이었다.

매체로서의 영향력을 잃어가던 고려 일보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오랜 준비 끝에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오프라인이라면 이를 갈던 고려 일보에서 오프라인의 본부장을 사장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급하긴 급했나 보군.’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아마존 CEO 출신인 제임스 리에게는 그의 출신만큼이나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안재영 역시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찌라시에는 그가 오프라인을 떠나 고려 일보의 새 자회사로 간다는 말이 사실인 양 떠돌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의 명성에 먹칠이 될까 우려스럽군요.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가 뛰어나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걱정하는 건 그가 우리가 가진 노하우를 비롯한 여러 기밀을 고려 일보에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부사장님도 아시겠지만 그게 따라 한다고 쉽게 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무언가 속이 쓰리네요. 제가 고려 일보에서 오프라인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이곳은 작은 스타트업이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곳이니까요. 그런 곳에서 다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고려 일보로 이동이라니. 제임스 리에게는 실망감이 큽니다.

“한때 아마존의 CEO를 했던 사람입니다. 연봉도 올려 받겠지만, 본부장 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도 있겠죠.”

-그런 거라면 저는 언제든지 부사장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있었는데, 말 한마디 없이 떠난다고 하니 서운하군요.

“부사장이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무튼 그가 오프라인을 떠난 뒤로도 계속 행적을 주시해 주세요.”

* * *

복잡한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나는 집 앞에 위치한 센트럴 파크를 홀로 산책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이곳을 홀로 산책하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근처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가 보였다.

나는 말없이 스트로베리 필즈 중앙에 새겨진 존 레넌의 대표곡 제목인 ‘이매진(Imagine)’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노 요코였다.

“무슨 고민이 있나요?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군요.”

“오. 부인. 산책 중이셨나요? 그냥 회사 일로 생각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요? 무척 고민스러워 보이는데 세진 씨만 괜찮다면 제가 말 상대가 되어 드리죠.”

“후후. 그래 주시겠습니까?”

나와 요코는 스트로베리 필즈 한쪽에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반대쪽 벤치에는 한 중년 남성이 우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기타로 ‘이매진’을 연주했다.

요코가 내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세진 씨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표정은 처음이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회사에서 작은 골칫거리가 생겨서요.”

“골칫거리요? 어서 말해 봐요. 이 늙은이가 어디 가서 흘리고 다니진 않을 테니.”

나는 그녀에게 제임스 리의 사직에 대해 알렸다.

그녀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사람이 떠났을 때의 그 기분은 제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죠.”

“존 레넌과 그를 비교하는 건 무언가 어색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아녜요. 당신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능력도 있고 열정도 있는.”

“회사 구성원 모두가 제게는 소중하죠. 물론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더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내 말에 요코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광장 중앙에 새겨진 이매진 글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뛰어난 사람을 품게 될수록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짊어지게 되죠. 저 역시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광장 중앙으로 움직였다.

“제가 레넌과 사귀면서 전 세계 비틀스 팬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었던 건 잘 아시죠? 심지어 그를 훔쳐 간 마녀라는 비난도 받아야만 했죠.”

“그런 정신 나간 소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후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죠. 심지어 레넌이 죽었을 때도 저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이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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