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00)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랬는지 별로 개의치 않았답니다. 또 세상이 내게 지랄을 해 대는군 싶었죠.”

지랄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 또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것도. 그리고 그에 대해 세간의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벌어진 순간의 사건일 뿐이랍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그리고?”

“그냥 내 할 일에 집중하세요. 내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감사의 의미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가서 먹는 것보다는 세진 씨가 집에 초대해 줘서 직접 음식을 해 준다면 좋겠군요.”

“저희 집에요?”

“네, 설마 약혼자가 이런 늙은이를 경계하는 건 아니겠죠?”

“하하. 설마요. 그녀도 저희 집에 당신이 방문했다고 하면 무척 놀랄 겁니다. 뭐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도 있나요?”

“언젠가 한국인 친구와 함께 삼계탕이라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무척 맛나더군요. 가능한가요?”

“삼계탕이요? 흐음. 안 그래도 얼마 전 한인 마트에 들러서 삼계탕 재료를 사 뒀는데 설마 저희 집에 CCTV를 설치해 두신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역시 세진 씨와는 잘 통하는 것 같다니까요. 제 아들과 함께해도 괜찮죠?”

나는 웃으며 두 모자를 내 방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아들인 숀 레넌에게 삼계탕을 대접했다.

둘은 어찌나 삼계탕을 잘 먹던지 닭 두 마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즐거운 밤이었다.

* * *

두 사람과 삼계탕을 먹은 지 오래지 않아.

안재영에게 전화가 왔다.

안재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대표님! 없었던 일로 되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나는 없었던 일이라는 말에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고려 일보에서 디지털 전문 매체를 만들기로 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죠. 자회사를 만든다는?”

-네, 그게 그냥 없었던 일로 되었답니다.

“저런. 그럼 제임스 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 말에 안재영이 기분 좋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연봉 문제로 이견이 있었나 보더군요. 그렇게 가니 안 가니, 줄다리기를 하다가 서동탁 사장이 자회사 설립건 자체를 그냥 무마시켜 버렸습니다.

“사장 선임하고 별개로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까?”

-이미 한국의 언론지형이 오프라인 천하가 된 마당에 따로 디지털 전문 매체를 만든다고 달라질 게 있겠느냐는 내부의 목소리가 컸다고 합니다.

“그랬군요. 그래도 아쉽네요. 고려 일보에서 디지털 전문 매체를 만든다면 무언가 새로운 혁신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흥.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온라인과 SNS를 비웃던 서동탁 사장의 모습이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고려 일보에서 준비한다던 디지털 전문 매체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고려 일보는 오프라인 등장 이전까지 대한민국 언론계를 꽉 잡고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칼을 갈고 디지털에 뛰어든다기에 언론 혁신에 한 가닥 희망을 품었던 것이었다.

‘태생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아쉬움을 표하면서 제임스 리의 거취에 관해 물었다.

“제임스 리는 어떻게 한답니까?”

-이미 오프라인에 사표 쓰고 나간 사람 아닙니까. 그냥 백수죠 뭐.

“그래도 한때 아마존 CEO 자리에까지 간 사람입니다. 꼭 고려 일보가 아니더라도 그를 원하는 회사는 많을 겁니다.”

-그렇겠죠. 아무튼, 저희는 절대로 그를 다시 받지 않을 테지만요.

배신자인 제임스 리에 대한 안재영의 태도는 단호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다시 오프라인에 부르고 싶지만, 안재영이 저렇게 단호해서는 어렵겠군.’

고려 일보로의 이직이 무산된 제임스 리는 오래지 않아 한국의 유명 전자 상거래 회사 CEO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 * *

할리우드에는 6대 메이저 영화사가 있었다.

일명 빅식스(Big Six)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북미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등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 월트 디즈니 픽처스, 유니버설 스튜디오, 컬럼비아 픽처스,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바로 그들이다.

그중 컬럼비아 픽처스는 최근 벌어진 해킹 사건으로 한바탕 회사가 뒤집어진 상태였다.

<컬럼비아 픽처스, 회사 기밀 몽땅 유출돼 비상>

<컬럼비아 픽처스 미개봉 리스트 공개…… 영화 팬들 즐거운 비명>

<컬럼비아 픽처스 임직원 이메일 모두 유출…… 후폭풍 거세>

<컬림비아 픽처스를 해킹한 간 큰 범인은 누구? 사건은 오리무중>

단순히 미개봉 리스트와 회사 매출 등 기밀 자료만 공개된 것이 아니었다.

주요 임원 및 감독과 배우.

그리고 다른 영화사 관계자들 사이에 오간 이메일 또한 공개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한 고위 임원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추천할 영화로 흑인 노예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 다룬 영화를 추천하면 좋겠다 등 이메일로 농담을 하여 인종 차별 문제로까지 비화하였던 것이었다.

오바마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 영화는 이미 봤다면서 추천할 다른 영화는 없냐는 위트 있는 글을 올려 많은 공감을 받았다.

해킹 사건이었던 만큼 스노든 역시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였다.

“컬럼비아 픽처스 정도 되는 회사를 대상으로 이 정도의 해킹을 하다니.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기사를 보니 내부자 소행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단순히 내부자가 정보를 유출하기에는 정보의 양이 너무 큽니다. 이건 기술적으로 서버를 탈취해서 빼돌린 게 틀림없어요.”

“당신이 보기에는 범인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스노든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한 영화의 포스터를 보여 주었다.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자극적인 문구가 한글로 쓰인 가운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민들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는 선전화를 빼닮은 표제어와 이미지로 구성된 포스터의 가운데에는 한 여성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그려져 있었다.

‘북한의 지도자인 김설송을 의미하는 것인가?’

스노든은 확신에 가득 차서 내게 말했다.

“북한이 틀림없습니다. 이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공격은 북한 해커의 솜씨죠. NSA에 있을 때도 자주 보았습니다.”

“북한이요? 하지만 증거가 있습니까?”

“제가 방금 보여 드린 영화 포스터가 증거입니다.”

“영화 포스터요?”

“네, 컬럼비아 픽처스에서는 작년부터 <불바다>라는 영화를 제작 중이었거든요.”

“아까 보여 준 영화 제목이 <불바다>입니까?”

“네, 북한의 우두머리를 암살하러 갔다가 실수로 그녀가 핵폭탄 버튼을 눌러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설정의 B급 코미디 영화인데 곳곳에 북한을 비하하는 요소가 많거든요.”

“그래서 북한에서 해킹을 했다?”

“그렇습니다. 거대 영화사를 해킹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일반 해커 집단에서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기밀을 빼돌린 것도 아니고 단순 유포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회귀 전에도 북한에서 자신들을 비하하는 영화를 만든 영화사를 해킹한 사건이 있었지. 하지만 김정은이 아니고 김설송이 집권한 데다, 영화의 내용도 많이 다르다. 과연 북한이 해킹을 했을까?’

나는 즉시 핸드폰의 연락처를 뒤져 누군가의 이름을 찾았다.

김설송이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통화 연결음이 1분을 넘어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상대 쪽에서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니, 이게 누구십네까! 우세진 동무 아닙네까?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도자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가 만만치는 않습네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입네까? 평소 하지도 않던 개인 전화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이번 컬럼비아 픽처스에 대한 해킹 사건. 북한에서 저지른 일입니까?”

김설송은 내 물음에 잠시 답을 하지 않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증거로 다짜고짜 전화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네까? 아무리 우세진 동무라도 이게 엄청난 결례라는 건 잘 알고 이야기하는 거디유?

“물론입니다. 제 나름의 확신이 들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후후. 확신이라. 이쯤 되면 막하자는 거디유.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북한과 위원장님을 희화화하는 영화를 제작 중에 있더군요. <불바다>라는 제목의.”

-뭐 그런 보고가 있었습네다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네까?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힘을 주어 말했다.

“만약 이 사건이 정말로 북한이 저지른 짓이라면. 반드시 사과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아니라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겁네까?

“저희 쪽에 스노든이라는 천재 해커가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북한에서 이번 해킹을 주도한 게 틀림없다고요.”

-고작 해커 한 명의 이야기로 우리를 범인으로 몬다?

“그뿐 아닙니다. FBI에서도 현재 사건을 수사 중인데 북한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습니다.”

-흥! 미제국주의자들의 장난질이 어제오늘 일이랍니까! 우세진 동무는 동포인 우리보다 그들의 말을 믿는 겁네까?

김설송이 강력히 항의했지만, 나의 마음은 어느 정도 확신으로 굳어 있는 상태였다.

‘회귀 전 사건도 그렇고, 스노든의 말처럼 일반 해커 집단에서 영화사를 해킹해서 얻을 이익이 적다. 이번 사건은 북한에서 꾸민 일이 틀림없어.’

나는 차분하게 이번 일이 가져올 후폭풍에 관해 이야기했다.

“위원장님이 취임한 이후 북한은 문호를 개방하고 빠르게 새로운 국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킹 사건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만 심어 줄 뿐입니다.”

-허어.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군요!!

“특히나 미국과 같은 서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불만이 생길 순 있겠지만, 이런 식의 방식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됐습네다!! 지금까지 우세진 동무가 나와 북한에 한 공헌을 생각해서 전화를 받았디만, 더 이상은 안 되겠구만! 다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김설송은 거칠게 화를 내며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옆에 있던 홍지혜가 물었다.

“김설송 위원장과 통화하신 건가요?”

“네, 북한은 이번 해킹 사건의 주요 용의자 중 하나이니까요.”

“아직 북한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잖아요? 김설송은 일국의 지도자입니다. 큰 결례일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북한이 범행을 저질렀다면. 빠른 사과만이 답일 테니까요.”

“이상하네요.”

“뭐가요?”

내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홍지혜를 돌아보자 그녀가 답했다.

“대표님은 대표적인 친북 인사 아닌가요? 왜 갑자기 북한을 의심하는 거죠?”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정황이 보이니까요. 그리고 저를 친북 인사로 보는 건 오해입니다. 저는 진실만 따를 뿐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니까요.”

“대표님을 오랫동안 옆에서 보아왔지만 정말 어떨 때는 이분이 내가 아는 그분이 맞나 싶기도 해요. 지금처럼요.”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잘한 것은 잘한 대로. 그게 저희 오프라인의 사명 아니었습니까?”

내 말에 홍지혜가 오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북한은 개방을 표방한 뒤로 다양한 단체를 평양으로 초대하였다.

그중에는 문화와 관련된 단체가 많았는데, 이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이었다.

나는 취재차 기자 둘을 데리고 직접 평양을 방문하였다.

다른 이들은 말렸지만, 얼마 전 있었던 김설송과의 대화도 걸리고 그녀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북한은 나의 방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는 오프라인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언론의 취재진이 몰려 북한의 변화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는 오프라인뿐 아니라 다양한 언론사의 취재를 허락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진행을 시작하였다.

이번 공연이 열리는 동평양대극장은 1,500석이 모두 매진되는 등 북한 주민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사회자의 소개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는 그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올리자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북한의 국가인 <애국가>였다.

남한의 애국가와는 또 다른 느낌의 애국가.

한참 그들의 연주를 듣고 있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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