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김설송의 호위 무사.
김금철이었다.
동평양대극장의 관람홀 3층에는 고위 간부만 입장할 수 있는 발코니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만큼 관람홀 내부가 한눈에 보이는 발코니석.
그렇지만 그 위에 또 하나의 비밀 공간이 있다는 건 북한 내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김금철은 최고위층만 입장할 수 있다는 VVIP실로 나를 안내했다.
두꺼운 방문이 열리고.
김설송이 호화스러운 의자에 앉아 홀로 와인을 마시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음을 인지하고서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와인을 삼켰다.
“오랜만입니다. 위원장님.”
“무대 바로 앞 1층에서 보면 현장감이 느껴져서 좋았겠습네다.”
“4층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건 놀랍군요. 따로 유리창은 보이지 않던데.”
“유리가 보이면 뻔히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인데 우리가 바보입네까? 특수 유리로 밖에서는 벽처럼 보일 뿐 전혀 드러나지 않습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물었다.
“현장에 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이쪽으로 부르신 건 달리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이겠죠?”
김설송이 김금철에게 사인을 보내자 김금철이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VVIP실에는 나와 김설송 단 둘뿐이었다.
그녀는 내게 와인을 권하며 말했다.
“뉴욕에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네까? 그저 이런 공연 하나 취재하려고 온 건 아닐 께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들으면 섭섭해할 소리군요.”
“긴말하고 싶지 않습네다. 용건이 뭡네까?”
“위원장님께 실례를 범한 것 같아 사과도 드릴 겸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흥. 실례인 걸 알기는 하는 겁네까? 전화로 저를 추궁하다니! 중대한 외교 결례입네다.”
“네, 위원장님. 전화로 그런 이야기를 드린 건 제 실수였습니다.”
내가 사과하자 김설송이 딱딱한 표정을 풀고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미국 생활은 어떻습네까? 그 유서 깊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고, 폭탄 테러범도 잡고. 우세진 동무의 활약상은 여기 평양에서도 아주 인기입네다.”
“제 이야기가 평양에서 인기라고요?”
“저런. 몰랐습네까? 동무는 로력영웅이지 않습네까? 이미 북한에서는 저 다음가는 유명 인사입네다. 그런 사람이 해외에서 멋진 활약을 보이니 북한 주민들도 관심이 많습네다.”
“정보를 통제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요 외신 채널은 열어 놓았습네다. 이제 북한에서도 세계의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습네다.”
“그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나는 김설송과 북한의 개방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인터넷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북한에서도 남조선 기업들의 도움으로 광통신 케이블이 빠르게 깔리고 있습네다. 이제는 집집마다 인터네트를 통한 망유람도 가능합네다.”
“큰 변화입니다. 북한 주민들도 시대의 변화를 직접 체감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혹시 예전에 말씀하셨던 인민군 소속 해커부대는 여전합니까?”
해커라는 말에 김설송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분위기 좋은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겝네까?”
“민간에도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있다면 군대는 더 강화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121부대에 대한 정보는 국가 기밀입네다. 우세진 동무에게는 밝힐 의무도 없고, 밝혀서도 안 되지 않겠습네까? 무슨 사달이 나려고.”
121부대는 북한 정보기관인 정찰총국 산하의 해커부대로, 이번 컬럼비아 픽처스 해킹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나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정중하게 말했다.
“전화로 위원장님께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다만 제가 당시 했던 이야기는 진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아직도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겝네까?”
“위원장님 생각해 보십시오. FBI를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이 북한을 범인으로 지목한 순간,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도 일부에선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볼멘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갔습네까?! 우리는 해킹을 하지 않았습네다!”
“후에 북한이 범인임이 입증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개방을 위해 했던 위원장님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고, 국제 사회의 싸늘한 시선만이 돌아올 테죠.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고요.”
김설송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위원장님. 정말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과거의 북한이 아니지 않습니까!”
김설송의 눈빛이 폭풍우를 항해하는 배에 탄 사람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 *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평양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VVIP실을 떠나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김설송이 나를 붙잡았다.
“우세진 동무. 아까 내게 했던 말 진심입네까?”
“물론입니다, 위원장님. 제가 왜 위원장님에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잠깐 시간 괜찮습네까?”
“네, 저녁 일정은 따로 없습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는 어디론가 이동했다.
곧 <김일 군사대학>이라는 간판이 적힌 곳으로 들어간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여긴?”
“과거 군 지휘자동화대학으로 설립한 곳으로 우리는 그냥 미림대학이라 부릅네다.”
“미림대학이요?”
“여기가 평양 미림동에 있기 때문에 그리 부릅네다.”
“그렇군요. 밖에 간판은 김일 군사대학으로 적혀 있던데.”
“명칭이야 부르기 나름 아니갔습네까. 가시죠.”
우리는 미림대학 교장의 안내를 받으며 대학건물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만 대학이지 군사 시설에 가까웠다.
김설송은 나의 긴장을 덜어 주고 싶었는지 농담을 걸었다.
“우세진 동무가 다녔던 남조선 대학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네까?”
“그렇네요. 대학보다는 군부대 느낌이 듭니다.”
“그럴겝네다. 사이버 부대 육성을 위해 지어진 곳이니 군 소속입네다.”
“여기가 121부대의 본대입니까?”
“후후. 그건 말해 줄 수 없습네다. 자. 잠시 이쪽을 봐 보시라우.”
김설송이 말한 쪽을 들여다보니 창문 너머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이들 여럿이 수업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까지 교육을 받는 겁니까?”
“미림대학의 목표는 빠른 시일 내에 뛰어난 사이버 전사를 육성하는 겁네다. 일반 교육기관을 생각하면 곤란합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칠판에는 분필로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사이버 부대의 존재 의의에 대해 크게 3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
사이버전 수행을 위한 군사적 대응과 북한 내부의 기밀 보호.
그리고 그 위로 최고 존엄의 수호가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최고 존엄의 수호라면?”
“그렇습네다. 나를 비롯한 우리 일가에 대한 보호입네다.”
“역시 이번 영화사 해킹 건은?!”
내 말에 김설송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같습네다만 내가 지시한 것은 아닙네다. 미림대학을 갓 졸업한 녀석 중에 충성심이 과한 친구가 있었디요.”
“녀석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우세진 동무 눈앞에 있습니다.”
“네?!”
교실에는 학생들과 칠판 앞에서 이들을 가르치는 젊은 교사뿐이었다.
“설마.”
“맞습네다. 저 젊은 선생이 바로 그 해커입네다.”
오래지 않아 수업 종이 울렸다.
학생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오자 나는 김설송의 허락을 받고 홀로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교사는 언뜻 보아도 학생들과 크게 나이 차가 없어 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우, 우세진 동무 아닙네까? 여긴 어떻게?”
“이번 컬럼비아 픽처스 해킹 사건의 범인이 바로 당신입니까?”
“그걸 어떻게?!”
그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문밖에 있는 김설송과 김금철.
그리고 교장을 바라보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는 어떻게 되는 갑네까?”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젊은 교사는 체념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울먹였다.
“내래 그저 배운 대로 했을 뿐입네다. 최고 존엄을 수호하는 건 우리의 존재 의의입네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은 변화일로를 걷고 있지 않습니까.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위에서는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네다! 오히려 제 동기들은 제게 잘했다고 칭찬을 했디요!”
“올해 몇 살입니까?”
“스물셋입네다. 작년에 결혼해서, 아내는 임신도 했습네다. 우세진 동무!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내부에서 따로 지시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갑자기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살려 달라 애원했다.
“죽고 싶지 않습네다! 제발 저 좀 살려 주시라우, 동무!!”
곧 다른 이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를 붙잡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설송에게 물었다.
“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세진 동무의 말처럼 사과해야 한다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네까.”
“설마 일개 개인에게 모든 죄를 넘길 생각입니까?!”
“하하하. 어린 녀석이 울고불고 애원하니 마음이 약해지셨습네까? 이번 일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를 하라고 이야기한 건 제가 아니라 동무입네다!”
“그는 인민군 소속이지 않습니까. 개인에게 모든 죄를 돌린다면 외부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쩌란 말입네까. 인민군 전체가 전 세계에 납작 엎드려 사과라도 하란 말입네까?”
김설송은 심기가 불편한 듯 말끝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나는 고민하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이런 의견을 전했다.
* * *
<북한, 해킹 사건 범죄 인정…… 재발 방지 약속>
<김설송 위원장 “이번 사건은 우리의 잘못……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신경 쓰겠다”>
<범인은 김일 군사대학 소속 교사…… 상부 명령 없이 독단으로 처리>
김설송은 간밤에 긴급 기자 회견을 열어 이번 해킹 사건의 범인이 북한군의 소행이라며 컬럼비아 픽처스에 사과의 뜻을 전했다.
또한 이번 일은 상부의 지시 없이 이뤄진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쓰겠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여론은 크게 둘로 갈렸다.
<잘못했으면 처벌도 받아야지! 사과하면 다냐!!>
<북한 말을 믿느니 우리 집 멍멍이 말을 믿겠다. 김설송은 당장 위원장 자리에서 내려와라!>
<이게 북한식 꼬리 자르기인가. 말단 한 명 아오지탄광 보내고 모른 척? 역시 북한답다>
반면 북한이 확실히 변한 것 같다며 긍정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끝까지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었을 텐데 먼저 자신들의 범행을 인정하다니 부칸이 진짜 변한 것 같음>
<사실 컬럼비아 픽처스는 북한에 고마워해야 하지 않음? 영화는 형편없더니만, 북한 덕분에 노이즈 마케팅 제대로 했잖슴?>
<살면서 북한이 먼저 사과한 경우 처음 본다. 진짜로 나 죽기 전에 통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키는 당사자인 컬럼비아 픽처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내부에서 검토 중이라는 짧은 답변만을 남긴 채 이번 일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김설송의 사과 이틀째.
컬럼비아 픽처스는 긴급 기자 회견을 열고 이번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기자 회견은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나는 노트북의 음성을 키우고 화면에 집중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이어 터지면서 컬럼비아 픽처스 CEO인 피터 웰러가 화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사과로 기자 회견을 시작했다.
“회사의 중요 정보가 노출되어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저희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오늘 기자 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또 사과를 전했다.
예상외였다.
“아무리 코미디 영화라고는 하지만 북한의 실상을 다르게 표현하는 영화를 제작한 점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표현의 자유를 떠나 한 나라의 명예와 긍지를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그의 말에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사정없이 쏟아졌다.
그는 한동안 말을 아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