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설송 위원장은 이번 해킹 사건에 대해 자신들의 소행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저희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습니다. 저희는 김설송 위원장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때 한 중년 기자가 손을 들며 크게 외쳤다.
“CEO님. 북한에 손해 배상을 청구할 생각은 없습니까?”
그러자 웰러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이후 어떤 손해 배상도 청구하지 않을 것을 밝힙니다.”
“이유가 뭐죠? 그들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저희 쪽에서 먼저 선을 넘어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만약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죄를 묻지 않기로 한다면 앞으로 비슷한 해킹 사건에 대해서도 피해자 입장에서 난처한 경우가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웰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서 저희는 다른 것을 북한에 부탁하려고 합니다.”
“다른 부탁이요?”
“지금까지 북한은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외부와 격리된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죠.”
“그 말씀은?”
“네, 우리는 이번 일에 대한 대가로 저희 컬럼비아 픽처스의 차기 영화에 북한을 배경으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웰러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튜브 댓글 창은 시청자의 댓글로 넘쳐났다.
<와! 완전 신박한 방법이다!! 여태까지 외부에서 영화 찍는다고 북한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음?>
<스파이더맨 다음 편은 북한이 배경이다!!>
<이것이야말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것 아닌가! 컬럼비아 픽처스가 신의 한 수를 뒀군>
나 역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북한은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된 국가였다. 만약 북한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화제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색다른 연출도 가능하겠지.’
웰러의 기자 회견이 끝나자 이번에는 북한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서 웰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해 줘서 고맙다는 기사를 발표하였다.
덧붙여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던 해커의 안위에 대해서도 밝혔다.
<(중략) 그는 현재 안정을 위해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북한당국은 그에게 어떠한 처벌을 할 생각이 없다. 그는 이후 미림대학에 교수로 복직할 예정이다>
나는 그가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던 게 떠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북한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한 나는 인천 공항에 입국하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곧바로 뉴욕행 비행기를 탔어야 했으나.
예비 장인인 강규현 TP 그룹 회장이 어떻게든 자신을 보고 가라며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조갑환 홍보 본부장을 인천공항에 보내 나를 설득시켰다.
“본부장님. 여긴 출국장인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비행기 티켓 끊고 들어왔습니다.”
“아니, 타지도 않을 티켓을 끊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 퍼스트 클래스로 끊어 뒀습니다. 저 때문에 다른 누가 비행기를 타지 못할 일은 없을 겁니다.”
“위약금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퍼스트 클래스를 당일 예매로 끊었다가 당일 취소하면 위약금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의 철두철미함에 감탄하는 한편 강규현 회장의 의중을 물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저를 보시겠다는 겁니까?”
“회장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네? 그런 이야기는 없지 않았습니까? 제가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최근 건강 검진을 하셨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혹시 병명을 알 수 있습니까?”
내 말에 조갑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병명을 알고 있지만 절대로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었다.
“회장님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연 씨는요?”
“지금 자택에서 회장님 내외분과 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휴. 알겠습니다. 가시죠.”
나는 조갑환이 준비한 고급세단을 타고 인천 공항을 빠져나와 평창동에 위치한 강규현 회장의 집을 방문하였다.
풍채가 좋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핼쑥해 보이는 한 노인이 눈에 보였다.
강규현이었다.
“회장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우리 사위 왔는가.”
“도대체 어디가 불편하신 거예요?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후후. 갑환이가 참 충성심이 있지. 이야기 안 해 주던가?”
“네. 회장님께 직접 들으라고 하더군요.”
“췌장암 3기라네.”
“네?!”
췌장암 3기라니.
췌장암은 완치가 어렵기로 유명했다.
진단 이후 5년 생존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3기라면 항암 치료 말고는 제대로 된 대응법이 없었다.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강규현의 얼굴은 씩씩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회장님.”
“회장님은 무슨 아버지라 부르게.”
나는 지금껏 강규현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약혼식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란 표현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나는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네, 아버님.”
“그래. 얼마나 좋은가. 하하. 미국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보기 좋구먼. 역시 내 사위 될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과찬이십니다.”
“자네가 내년 초에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라고 그랬지?”
“네, 아마도 그쯤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자네 정말로 TP 그룹에는 관심이 없나?”
나는 그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원래였다면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을 테지만.
‘그 역시 고민이 많겠지. 힘들게 기업을 키워 왔는데, 자식은 세연 씨뿐이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은 사람은 예비 사위인 나 혼자다.’
그의 고민을 이해하기에 섣불리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를 걱정해서 냉큼 받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TP 그룹은 국내 재계 서열 3위의 대기업이다. 오프라인만으로도 머리 아픈데 TP 그룹까지 관리하는 건 불가능해.’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강규현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내 잘 아네. 오프라인을 키우기도 벅찬 게지?”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래그래. 내 더 이상 묻지 않겠네. 세연이랑은 잘 지내지?”
“물론입니다. 매일 연락하고 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내 하나뿐인 딸이라네. 잘 좀 부탁하네.”
그는 강세연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세연이 눈물을 꾹 참는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나는 그를 소파에 앉히고는 물었다.
“3기면 수술이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항암 치료 중이십니까?”
“그렇다네. 1차 치료 중이지. 살이 많이 빠졌지?”
“네, 처음 뵙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췌장암이 불치병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 담당 의사는 요즘은 완치율이 많이 높아지고 있다더군. 열심히 해야지.”
“네, 반드시 이겨낼 수 있으실 겁니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내시고, 좋은 거 많이 챙겨 드세요. 운동도 꼭 하시고요.”
“허허. 순간 내 주치의인 줄 알았네그려. 알았네. 우리 세연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오래 살아야지. 손주 녀석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아버지!!”
강규현의 말에 강세연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털털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내가 빨리 결혼하라고는 안 하마. 다만 손주는 좀 빨리 보여 주면 좋겠구나.”
* * *
강규현 내외와 식사를 마친 나는 강세연과 함께 동네를 걸었다.
어느덧 11월.
북한산 아랫자락인 평창동의 11월은 다른 동네보다 조금 더 추웠다.
강세연이 내게 꼭 기대며 중얼거렸다.
“세진 씨. 언제 돌아올 거예요?”
“내년 3월 전에 돌아올 겁니다.”
“3월이라. 휴. 아직도 많이 멀었네요.”
“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렇죠?”
“네, 췌장암은 절망의 암이래요. 진단이 곧 사망 선고와 마찬가지인.”
“아까도 아버님이 이야기하셨지만, 요즘은 의료 기술이 좋아져서 완치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가족들이 의연해야 환자도 힘을 얻죠.”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최근 오노 요코와 숀 레넌을 집에 불러 삼계탕을 차려 준 이야기를 건넸다.
강세연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혹시나 해서 닭 두 마리를 요리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정말 잘 먹던데요?”
“와. 대박. 저는 세진 씨보다 거기 오래 살았지만, 그냥 가끔 인사하는 게 다였는데 집에 들여서 밥까지 먹였다고요? 정말 대단하네요.”
“지금은 좋은 이웃이에요. 가끔 서로 집에 들러서 말 상대가 되어주고요.”
“이번에 세진 씨 갈 때 같이 가고 싶지만, 아버지가 저러니 어쩔 수가 없네요. 아쉬워라.”
“뭘요. 옆에서 아버지 많이 간호해 주시고 응원도 해 주세요. 저도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세진 씨. 바쁜 사람 불러다 안 좋은 모습만 보여서.”
나는 괜찮다며 강세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평창동의 밤이 깊어갔다.
* * *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강세연과 함께 인천 공항으로 이동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찌 알았는지 공항에는 백철웅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누고는 물었다.
“대통령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쩌긴요. 우 대표가 떠난다는 첩보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죠.”
“안 바쁘세요?”
“바쁘기야 우 대표만 하겠습니까.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배웅이라도 할까 싶어서 왔습니다만 영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영광입니다.”
“강규현 회장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벌써 보고가 올라갔군요.”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재벌 총수가 아닙니까. 그런 건 미리미리 챙겨둬야죠.”
“제가 한국에 없으니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병환만 아니었다면 우 대표가 온 날 바로 청와대로 불렀을 겁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아니까 저희 쪽에서도 나름 배려를 한 겁니다.”
아침 7시였지만 공항에는 꽤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았던 관계로 우리는 장소를 옮겨 인천 공항의 VIP실로 이동했다.
오프라인의 성장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
백철웅이 본론을 꺼냈다.
“사실은 우 대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 4장 남수단
백철웅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혹시 남수단에 갈 수 있겠습니까?”
“남수단이요? 2011년에 수단으로부터 독립된 아프리카의 신생국이요?”
“맞습니다. 현재 그곳에는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의 한빛부대가 파견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올해 초에 파병을 나가지 않았습니까.”
아프리카 내륙에 위치한 수단은 오랫동안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져 심각한 내전을 겪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