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신입생은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는 선배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합니다! 크게 다친 이들이 많지만,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쉬쉬하고 넘어가죠!”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네? 뭐가요?”
나는 동그랗게 눈을 뜬 요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들도 분명 과거에는 신입생이었을 터. 당시의 고통과 두려움을 생각한다면 없어져야 할 악습 아닙니까?”
“저도 그것까지 모르겠어요. 오래된 전통이라고만 들었어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더니. 그래서 기득권이 무서운 겁니다.”
나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얼마 전 요셉이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편지 곳곳에는 그의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약 내가 오늘 당신을 만나러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죠?”
요셉의 얼굴이 근심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학교를 자퇴할 생각이었습니다.”
“자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자퇴라니.
이 학교 입학이 그리 쉬울 리 없지 않던가.
나의 물음에 요셉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거든요. 선배들의 구타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요.”
“아니, 학교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없고요?”
“놉! 그랬다가는 저는 낙인이 찍혀서 그 어떤 학교나 단체에도 들어가지 못할 거예요. 아시아계는 생각보다 좁거든요.”
요셉이 말한 신입생 신고식은 버룩 칼리지 내에서도 아시안 학생들의 모여 있는 한 사교 클럽이 주최하는 행사였다.
학교의 정식 단체도 아니고 단순한 사교 클럽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요셉의 말처럼 학생들은 출신별로 서로 뭉쳐서 다니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중 아시아계는 특히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인종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나름의 자구책이겠지만, 부작용도 컸다.
‘자퇴하더라도 소문이 나면 그 꼬리표가 끝까지 따라다닌다는 뜻이겠군.’
처음에는 그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본 뒤 요셉의 선배들에게 가볍게 훈계를 하고는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버룩 칼리지 신입생 사망 사건’
중국계 신입생이 사교 클럽의 신고식에서 집단 구타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오래 전 사건이었지만 기억에 떠오르는 건 한국인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서 한국인 학생 4명이 살인죄를 받았고, 12명은 폭행죄를 받는 등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는 고민하다가 요셉에게 물었다.
“혹시 클럽 내에 한국인 학생들이 많습니까?”
“한국인 학생이요? 네. 적진 않습니다. 중국인이 가장 많지만요.”
“클럽의 회장은 누군가요?”
“아! 맞아요. 지금 클럽 회장이 한국인이에요.”
“그래요?”
나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렸다.
* * *
“유학 생활이 힘들진 않나요?”
“하하. 전혀요. 저희 학교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나름 미국에서는 제일가는 명문대 중 하나거든요. 늘 이곳에서 공부한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는 요셉이 소속된 아시아계 사교 클럽의 회장인 유승재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다양한 한국인을 인터뷰한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대번에 승낙했다.
유승재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설마하니 우 대표님께서 직접 제게 인터뷰 연락을 주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진짜 영광이에요.”
“영광은 뭘요. 학교생활은 어떤가요? 듣기로는 아시안 사교 클럽의 회장도 하고 있다고 하던데.”
“와 역시! 듣던 대로 기자들의 정보 수집력은 대단하네요. 맞습니다. 제가 현재 클럽의 회장입니다.”
그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주욱 내밀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텅텅 쳤다.
“학교에 들어오면서 얼핏 보았더니 아시아 출신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네, 꽤 많은 수가 재학 중이고 저희의 유대감은 그 어느 대륙보다 깊습니다. 왜 그런 속담도 있잖아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차별이 심한가 보죠?”
“학문을 배우는 대학이다 보니 티 나게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알게 모르게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학교 수업과 클럽 운영을 병행하려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쉽지 않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정말 많거든요. 다음 주에는 신입생 신고…… 아니, 환영회도 있어서, 준비할 게 많네요. 하하.”
“신입생 환영회라면 클럽의?”
“네,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을 선배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저희의 전통 행사입니다.”
후배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는 말에 코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신입생 환영회라. 아련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네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학교 근처 술집에서 술을 죽어라 마셨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여기는 어떤가요?”
“하하. 저희도 기본적으로는 술자리예요. 즐거운 파티죠.”
“그래서 술만 마시는 건가요?”
“이것저것 프로그램이 있기는 한데…….”
나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오! 어떤 프로그램들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오랜만에 대학에 와서 그런지 예전 생각도 나고요. 젊어진 기분?”
내 말에 유승재가 일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저희 때는 신입생 군기 잡는다고 선배들이 후배들의 주량(酒量)을 테스트하는 시간을 가졌죠. 부어라 마셔라. 하하. 아련하네요.”
내가 아련한 표정을 짓자 유승재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선배들은 새로 들어온 후배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게 마련이니까요.”
“여기는 어때요? 저희 때는 커다란 사발에 각종 술을 가득 담고는 옆으로 돌렸죠. 맥주, 소주, 막걸리. 으. 생각만 해도 쏠리네요.”
내가 일부러 과한 제스처를 취하며 미간을 찌푸리자 유승재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열. 그런데 그럼 그 술은 신입생만 먹나요?”
“그럴 리가요. 테이블에 있는 모두가 마시죠.”
“네? 그럼 신입생들의 주량을 테스트하기 곤란한 거 아닌가요?”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일종의 불문율인데, 선배들은 가볍게 입만 적셔요. 마시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더 마셔도 상관없지만 그런 사람은 없죠. 혹시 옆자리에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다면 모를까.”
“아! 그래서 신입생들이 거진 술을 마시는?”
“맞아요.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는데 술이 남았다? 그럼 또다시 시작이죠.”
“크아. 죽이네요. 저희도 이번 환영회 때 도입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네요!”
나는 그가 방심한 틈을 노리고 재차 물었다.
“그래서 클럽에선 어떤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데요?”
“저희는 술로 기를 죽이진 않고요. 유리 천장이라고 해서 조금 폭력이 동원되기는 하는데…….”
“괜찮아요. 기사로 안 쓸 테니까 말해 보세요.”
기사로 쓰지 않는다는 말에 유승재는 드디어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유리 천장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벽이라는 뜻이잖아요?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서 있는 인간 벽을 지나가면서 선배의 무서움을 배우게 됩니다.”
“어떻게요?”
“인간 벽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몸으로 미는 거죠. 흥분하다 보면 발길질이 나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심한 건 아니고요. 신입생들은 그걸 돌파해야 합니다.”
“일종의 게임이로군요?”
“그렇죠! 조금 거칠긴 한데 모두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에요. 하하.”
나는 그의 웃음 속에서 악마를 보았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지만 사람을 괴롭히고 복종시키고 싶어 하는.
그 저열한 마음을.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 새로운 제안을 던졌다.
“승재 씨는 아직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죠?”
“네, 안 그래도 언제 가야 하나 고민 중에 있어요. 안 가면 좋겠지만. 하하 이것도 기사로 쓰진 말아 주세요. 아무튼 그렇다고 한국인이 국방의 의무를 소홀히 할 수도 없잖아요.”
“내가 지금 승재 씨 이야기 듣고 생각난 건데, 이런 건 어때요?”
“뭐요?”
유승재가 궁금하다는 듯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신입생 환영회가 일종의 군기 잡기라면. 그리고 승재 씨를 비롯하여 한국인 학생들이 제법 많다면. 군기 잡기의 최고봉은 해병대 캠프가 아닐까 싶은데.”
“해병대 캠프요?”
“네, 원래대로라면 해병대 훈련을 간접 체험하는 방식이지만 여긴 미국이니까 해병대 출신 교관이 와서 훈육을 하는 거죠. 얼차려도 주고.”
“후, 훈육이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괜찮은 방법일 것 같은데. 이전에 안 해 본 방법이니까 신선하기도 할 거고, 그래서 지금 회장에 대한 인기도 오를 수 있고.”
인기라는 말에 유승재의 눈이 뒤집혔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강아지처럼 반복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 대표님 말이라면 믿어도 되겠죠! 그거 당장 이번 신고…… 환영회에 도입해야겠습니다!”
* * *
나는 해병대 출신의 오프라인 직원들의 추천을 받아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해병대 출신 교관들을 모집하였다.
순식간에 12명의 교관이 모였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올해 41살의 하동원이었다.
다부진 체격의 그는 실제로 버룩 칼리지 회계학과 출신으로 현재 골드만 삭스에서도 잘나가는 회계사였다.
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그는 어눌한 한국말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롷게 만나 뵙게 되어 반캅습니다.”
나는 영어로 답했다.
“별말씀을요. 한국어가 불편하시면 영어로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렸네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 모교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인 신고식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문제로군요. 제가 졸업할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만.”
“버룩 칼리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아시안 학생들만의 문제도 아니고요. 잘 아시겠지만 2011년에는 플로리다 농공대 밴드부 신입생이 신고식에서 집단 구타로 사망했고, 얼마 전에는 토슨대 치어리더팀 폭력행위가 도마에 올랐죠.”
“부끄러운 일입니다. 육체와 정신을 갈고닦아야 할 대학에서 이 무슨.”
“그래서 여러분을 부른 겁니다.”
* * *
뉴욕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의 포코노 지역.
포코노는 ‘두 산 사이의 개울’을 뜻하는 인디언어로 이곳은 산세가 험해서 캠핑과 스키로 유명한 휴양지였다.
포코노 지역에서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고급 별장에서는 지금 아시아계 사교 클럽의 신입생 신고식이 한참이었다.
참석한 인원만 해도 신입생 28명에 기존 회원 22명으로 50여 명에 육박했다.
“자 지금부터 단합 차원에서 술잔 돌리기가 시작됩니다. 술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마음껏 들이켜세요!”
유승재는 커다란 접시에 위스키, 럼, 고량주, 소주와 맥주를 한껏 섞은 정체불명의 폭탄주를 가득 담았다.
그러고는 이를 들이키는 척 과장된 몸짓을 취하더니.
입술에 살짝 묻히기만 하고는 이내 옆자리에 앉은 신입생에게 돌렸다.
“많이 들이켤수록 옆에 앉은 선배들이 편안해집니다. 이를 잊지 마세요.”
선배, 신입생, 선배, 신입생 식으로 앉은 테이블에는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맨 처음 술을 마신 유승재가 저리 조금만 마신 거로 봐서는 신입생들에게 많이 마시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유승재의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접시를 들이켰다.
“크아!”
그는 그 거대한 접시에 담긴 술의 약 10분의 1 정도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괴성을 지르며 옆으로 넘겼다.
선배들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봤죠? 적어도 이 정도는 마셔야 우리 클럽의 신입생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진짜 멋진 친구네요.”
연이어 비슷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선배들은 간에 기별도 안 될 정도로 아주 조금만.
신입생들은 양껏 술을 몸 안으로 퍼붓고는 괴로워했다.
환영회(?)의 마지막 순서로 짧은 발표를 진행하기로 한 나는 연사 자격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유승재가 따로 마련해 준 2층의 대기실에서 나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괜한 걸 알려 줘서 신입생들에게 고통을 주게 되었군.’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유승재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대단하다, 이번 신입생들! 아직 테이블의 절반도 돌지 않았는데 벌써 접시의 바닥이 보이네. 하하. 자 다음 선수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마침 다음 순서는 내게 편지를 보낸 요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