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그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접시를 받아들였다.
접시에서 올라오는 술 냄새를 맡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괜찮으니 조금만 마시라고 손동작을 취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마시는 척만 하고 접시를 내려놓자 유승재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에이. 뭐야. 요셉 군. 자네의 우리 클럽에 대한 애정은 겨우 이 정도인가? 이거 실망이 큰데?”
그의 말에 선배들은 물론이고 같은 신입생들끼리도 요셉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너 살겠다고 우리를 배신하냐는 무언의 메시지.
그러나 요셉은 아무런 말 없이 접시를 옆자리 선배에게 넘겼다.
유승재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케이. 요셉 군. 그 이름 기억하겠습니다. 자 다음!”
* * *
공포의 술잔 돌리기가 끝나자 신입생 중 몇몇은 벌써 바닥에 쓰러지거나 구토를 하는 등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유승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순서를 진행했다.
“자. 여러분! 드디어 우리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되는 순서입니다. 한국은 징병제 국가인 거 아시죠? 그중에서도 최고봉이 바로 귀신 잡는 해병대인데, 오늘은 그 해병대 교관님들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그중에는 저희 버룩 칼리지의 졸업생도 계십니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2층에서 나와 같이 대기하고 있던 교관 12명이 우르르 1층으로 내려갔다.
빨간색 팔각모를 쓴 그들은 중앙홀을 커다랗게 둘러섰다.
그 일사불란한 모습에 클럽에 모인 모든 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유승재가 말했다.
“클럽의 전통이었던 ‘유리 천장’에 대해서는 그동안 야만적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해서 저는 오늘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였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
모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유승재를 바라보았다.
유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해병대 출신 교관들의 일명 ‘얼차려’입니다. 그중에서도 PT 체조 8번은 아주 유명하죠!”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교관들이 바닥에 눕더니.
양손을 펼치고 다리를 직각으로 올리더니 구호에 맞춰 왼쪽으로 한 번.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비틀어주었다.
시선은 다리와 반대 방향으로.
그 모습을 보자 과거 훈련소 때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신이 난 유승재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선배들은 모두 뒤로 빠지고! 신입생들을 앞으로 나…… 어?”
갑자기 교관 한 명이 유승재 쪽으로 다가가더니 그를 제지했다.
하동원이었다.
그는 무섭게 인상을 쓰더니 소리쳤다.
“자 지금부터 클럽 소속 모두는 자세를 잡고 눕습니다. 실시!!”
유승재를 비롯한 클럽 선배들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 * *
“하나!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됩니다! 둘! 다리 똑바로 높이고!”
몇몇 선배들이 항의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곧 교관들의 위엄에 묵살당했다.
교관들은 정말이지 귀신이 따로 없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더니 그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군.’
별장 가득 신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모두가 녹초가 되어 바닥에 쓰러지자 하동원의 입이 씰룩거렸다.
“이번에는 신입생들은 빠지고 선배들만 남습니다. 모두 실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입생들이 교관 뒤로 빠지고.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며 주변을 살피던 선배들에게 하동원은 PT 체조의 숨겨진 꽃인.
PT 11번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
교관들은 시범으로 PT 11번을 보여 주었다.
보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PT 11번은 절대 쉽지 않은 동작이었다.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PT 8번과 다르게 PT 11번은 숨겨진 지옥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 군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승재는 눈물을 질질 짜면서 하동원에게 애원했다.
“서, 선배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거 같은데 저희는…….”
“클럽 회장이면 가장 솔선해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만 짜고 자세 바로잡습니다! 끝에 남학생! 잔머리 굴리지 말고 더 높이 뜁니다!!”
유승재가 새로 도입한 해병대 출신 교관의 PT 체조 시간이 끝나가고.
선배들은 패잔병처럼 게거품을 물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몇몇 여학생들은 울면서 교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2층에서 천천히 1층으로 내려온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제가 마지막 차례인데, 도저히 연설할 분위기가 아니군요.”
그 한마디에 쓰러져 있던 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간신히 자리에 앉더니 신입생들에게도 자리에 앉으라 지시했다.
‘더 이상 추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빙그레 웃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배들 대다수는 얼굴이 노래져 있었고, 신입생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요셉만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뜨겁고 격한 자리인 줄 모르고 승낙했는데, 군대 생각도 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재미라는 말에 몇몇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황당한 사건들을 많이 겪었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끈끈하게 뭉치는 걸 심정적으로는 이해합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군기를 잡는 건 참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군기를 잡다 보면 폭력이 더해지고, 까닥 잘못하면 큰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말을 내뱉었다.
“여러분. 혹시 지금 행복합니까?”
“아니요! 죽겠습니다!”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살려 주십쇼!!”
학생들의 애원에 나는 미소를 보였다.
“그렇죠? 여러분들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폭력적인 방법은 결코 좋은 해법이 아닙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 결코 여러분들은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없습니다. 제 말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시죠?”
“네!!!”
젊은 아시안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은하수로 가득한 포코노의 밤하늘을 메웠다.
* * *
포코노에서 돌아온 나는 몇 개의 칼럼을 썼다.
<신입생 신고식은 좋은 의미보다는 그 해악이 훨씬 더 크다. (중략) 이미 올해 몇 명의 학생이 대학 신고식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지식의 전당인 대학에서 더 이상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벌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쓴 칼럼을 본 대학가는 빠르게 반응했다.
대다수의 대학에서 모든 교내 동아리의 신고식을 금지하는 한편, 과거에 있었던 신고식 내 폭력 사건들에 대해서도 조사에 착수한 것이었다.
기사를 보던 홍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대표님은 언론사 사주가 아니라 슈퍼 히어로까지 겸하시는 건가요?”
“이번 사건은 자칫하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다수의 한국인 가해자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고요.”
“대표님이 글만 쓰면 어떤 단체든 즉각 반응하니 신기할 정도예요. 그런 덕분인지 이전보다 훨씬 많은 편지가 대표님에게 도착했고요.”
홍지혜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내 자리 위에 잔뜩 쌓인 편지를 가리켰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하나씩 읽었다.
여전히 대다수는 별 볼 일 없는 사사로운 일들이었지만, 사회 깊숙이 숨겨진 비리나 불합리도 많았다.
“다른 직원들도 함께 편지를 보면서 취재할 거리가 있나 함께 살펴주세요. 이런 게 진짜 민중 속의 고민을 찾는 게 아니겠습니까.”
“네네. 누구 말씀이라고요. 그런데 대표님. 괜찮으시겠어요?”
“왜요?”
내 말에 홍지혜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강세연 관장님 아버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그녀는 내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넸다.
거기에는 강규현 회장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기사가 보였다.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기사를 바라보자 홍지혜가 넌지시 말했다.
“미국은 이제 저한테 맡기시고, 한국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표님이 곁에 있어 주신 덕분에 오프라인의 입지는 무척이나 탄탄해졌어요. 이제는 저 혼자 맡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미국을 홍 지사장님에게 맡긴다고 해도 곧바로 한국에 돌아갈 순 없습니다.”
“왜요?”
“유럽도 손봐야 하니까요.”
홍지혜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북미에서 오프라인이 언론사는 물론 IT 플랫폼으로써도 탑티어를 찍을 동안.
유럽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떠날 때가 온 것 같군요.”
# 5장 유럽
홍지혜의 배웅을 받고 비행기에 오른 나는 새해를 기내에서 맞았다.
‘오프라인을 만든 지도 벌써 5년째로구나.’
복잡한 기분이었다.
회귀 전만 하더라도 퍼스트 클래스는커녕.
비행기로 해외 출장은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단 빨리 해외 일정을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이번 유럽 출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였다.
8시간을 비행한 항공기는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을 잠시 들렀다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오후 5시도 되지 않았는데 베를린에는 깊은 밤이 찾아왔다.
‘독일의 겨울은 혹독하다더니 정말 어둡군.’
그런 생각을 하며 출국장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 둘이 나를 반겼다.
박창후와 그의 아내인 김지인이었다.
박창후는 산적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았다.
“수염을 기르셨군요?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하하. 덩치 큰 독일인들 사이에서 쫄지 않으려고 기르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삼국지의 장비처럼 보이네요.”
“헉. 저는 관우라고 생각하고 기르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부부와 가벼운 농담을 하며 그들의 집으로 이동했다.
박창후 부부가 머물고 있는 집은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5층 규모의 자그마한 아파트였다.
유럽답게 고풍스러운 자태가 돋보였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김지인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안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었지만, 독일에 왔으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하는 법.
김지인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고, 박창후가 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정인데 며칠 쉬다가 오시지 그랬어요? 이렇게 갑자기.”
“유럽 상황이 제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말이죠.”
“휴. 여기는 미국과는 또 사정이 다릅니다. 은근히 같은 EU 소속이 아니면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또 기존 5대 언론 재벌 그룹의 시장 점유율이 워낙 높고요.”
“얼만데요?”
“60% 정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기존 언론 재벌 그룹의 점유율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오프라인을 통해서 기사를 보고 있죠.”
“일본은 바로 옆 나라고요. 여기는 유럽의 중심인 독일이잖아요.”
박창후는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성과가 없으니 채근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곧 김지인이 우리를 부엌으로 불렀다.
그녀는 돈가스처럼 보이는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는 말했다.
“슈니첼이라고, 독일의 가정식 요리랍니다. 한국의 돈가스와 비슷하죠.”
“생김새도 돈가스와 비슷한데요?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