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풍비박산
- 크아아앙.
곰 두 마리가 수풀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구동훈은 눈썹을 씰룩이더니,
"씨X. 뭐야. 저 백곰들은? 여긴 멧돼지, 고라니, 늑대에 하물며 이젠 곰 새끼마저 튀어나오네. 녹전은 사파리냐?"라며 철삽을 바닥에 스르릉 끌며 생사를 도외시한 채 아빠 곰으로 다가갔다.
놔두려다가 자살방조죄에 미필적 고의라는 죄명이 씌워진다. 나는 곰과 구동훈 사이를 두 팔을 뻗어 가로막았다. 철삽을 굳게 쥔 구동훈이 거친 말을 토했다.
"뭐야. 땅꼬맹이. 꺼져."
죽일까. 공력이 들끓었다.
"아오! 시간 없으니까 헛소리 작작 하고 도망이나 쳐요!"
"뭐? 헛소리? 하하! 염병하고 자빠졌구나. 날 묶고 지내니까 지가 X나 센 줄 아네? 땅콩만 한 게 아주 유쾌, 상쾌, 통쾌했지? 옳지. 그래. 말 나온 김에 오늘 네놈부터 손봐주마."
이젠 사방이 적이다.
- 부웅~
구동훈이 나약한 힘으로 철삽을 휘두르는 걸 가뿐하게 피하자 뒤에선 엄마 곰이 도약을 하며 내게 흉측한 발톱을 드러냈다. 냉큼 몸을 던져 옆으로 굴렀다.
- 와지지직!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마당 평상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고단한 수련 뒤에 찾아온 꿀맛 같은 쉼터였던 마당의 평상이 박살 났다.
아니.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같이 가루가 되었다. 이 집에 더 부서질 게 아직 남았다니 감회가 새롭다.
구동훈 이 양반은 마당 평상이 부서진 걸 보자 버럭 화를 내었다.
"X 같은 곰 새끼가 감히 짐의 수라상을 박살 내? 모가지를 따주마아아아~"
선불 맞은 멧돼지마냥 어미 곰을 향해 돌진했다.
- 다다다다다!
"제발 미친 짓 그만하고 도망쳐요!"
별안간 철삽을 들고 무한돌진하는 구동훈 위에 검은 인영이 들이닥쳤다.
- 으허허어엉!
아빠 곰이 불현듯 점프를 하여 동훈이 형을 향해 덮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다급하게 구동훈을 잡으려고 뒷덜미에 손을 뻗었는데 아차 싶었다. 목에 봉무령이 걸려있었지!
- 뚝.
"안 돼!"
봉무령이 풀려버렸다.
- 크르르릉~
부지불식간에 늑대 알레프로 변해 버린 구동훈은 피하기는커녕, 덮쳐오는 아빠 곰의 품으로 날렵하게 점프했다.
"동훈이 형~!"
- 딱!
둔탁음이 허공을 갈랐다. 아빠 곰의 발톱은 허공을 내저었고 알레프로 변한 구동훈은 단단한 머리로 곰 이마를 들이박았다. 순간적인 전투 판단 능력이 뛰어났다.
- 으허어엉!
- 쿵~
아빠 곰은 이마를 부여잡고 육중한 몸을 비틀거리더니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파괴력도 좋다.
- 으허어엉!
엄마 곰이 복수를 하려고 눈을 부라리며 잽싸게 구동훈의 머리통으로 손톱을 찔렀다.
- 사삭~
구동훈은 무릎을 굽혀 공격을 피하고선 곰의 복부를 향해 손을 갈고리 형태로 취했다.
전신과 어깨를 짓쳐 들며 뾰족한 공세 자세를 펼치더니 이내 엄마 곰의 가슴팍을 헤집었다.
- 촤촤촤촥!
난 화들짝 놀랐다.
"조공(爪功) 오비통철(烏飛通鐵)!"
얼마 전, 야수 늑대 알레프와 목숨을 건 난타전 중, 내가 최후에 썼던 무공이었다.
그런데 알레프로 변한 구동훈이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써버렸다. 복사라도 한 듯이 말이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공은커녕 기초 체력도 제로에 수렴하는 양반이 저걸 어떻게 써?
- 크허어어엉!
엄마 곰이 가슴에 붉은 피를 잔뜩 흘리며 아빠 곰 옆으로 물러섰다. 뜻하지 않은 치명상을 입어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렇겠지, 같은 편인 나도 사태파악이 안 되니까 말이다.
이쯤 되면 해볼 만한 건가?
- 크르르르르.
구동훈은 살기 짙은 소리를 내며 아빠 곰을 째려보았다. 아빠 곰 또한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둘이 동시에 도약을 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정면충돌했다.
- 깡!
- 크오오오!
주변에 먼지가 날리며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았다.
- 툭툭.
핏방울이 떨어졌다. 눈을 부릅뜨니 피를 철철 흘린 쪽은 다름 아닌 구동훈이었다.
- 크르르르릉.
아빠 곰이 구동훈의 발톱을 박살 내고 앞가슴마저 파고들었다. 애초부터 곰이랑 힘 싸움을 한다는 게 어리석었다.
"동훈이 형!"
- 우오오오오오!
아빠 곰이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구동훈은 가슴 늑골 뼈가 보일 정도로 치명타를 입었다.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훈이 형을 향해 아빠 곰은 앞발을 높이 치켜세웠다.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뛰어가서 막기엔 이미 늦었다.
"에라 모르겠다!"라며, 다급하게 공력을 칼에 넣어 집어 던졌다. 저번 알레프를 상대할 때처럼 아빠 곰의 머리에 적중하길 기대하며 말이다!
- 휘리리릭~ 깡!
기대는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아빠 곰은 내 칼을 손쉽게 튕겨내었다.
내 유일한 무기인 장검은 머나먼 수풀 속으로 행방불명 됐다. 잠깐 시선을 끈 것 치고는 뼈 아픈 대가였다.
나는 달음박질하며 상처 입은 엄마 곰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아빠 곰이 엄마를 지키러 오겠지?
- 크허어어어엉!
는,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다.
아빠 곰은 나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고 구동훈의 몸통을 향해 비수와 같은 발톱을 내리꽂았다.
"안 돼!"
- 팅~
- 우어어엉~~
동훈이 형 안녕! 응?
의외로 비명의 주인공은 아빠 곰이었다. '퍽'이나 '콰직'의 타격음이 아니라 금속 마찰음이 내 귓가에 닿았다. 뭐지 싶어 동공에 힘을 주고 사태를 파악했다. 아빠 곰의 두 발톱은 반 토막 나버렸고 구동훈은 벌벌 떨며 몸을 엎드려 있었을 뿐이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야수 늑대 알레프 엉덩이에 퇴철각(腿鐵脚)을 날렸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을뿐더러 도리어 공격한 내 발만 죽어라 아팠을 뿐이었다.
늑대 알레프같이 등짝이 철판이다! 저 양반!
- 우드득~
그 사이 엄마 곰은 몸을 일으키더니 최후의 힘을 발휘하며 나무 하나를 뿌리째 뽑았다. 산림보존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녀석들이다.
"너… 서…설마 그걸… 나한테?"
불길한 예측은 언제나 일타 강사급 적중이다. 커다란 나무가 뱅글뱅글 돌며 날 덮쳤다. 사이즈가 너무 커서 피할 겨를도 없었다.
- 쿵!
"으아아악!"
가슴이 빠개지는 통증과 함께 난 저만치 붕 날아가 버렸다.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무릎을 꿇었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엄마 곰은 물불 안 가리고 달려오더니 가속도를 이용해 발톱을 빠르게 휘둘렀다. 정신없던 찰나라 피할 시간도 없었다.
맞으면 즉사다!
- 쿠웅!
"크허어어억!"
발톱에 긁히지는 않았지만 발등에 찍혀버렸다. 난 한 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한 치만 더 늦었어도 발톱에 정통으로 찢겨 죽었을 것이다.
"커억… 커억…."
내가 매번 재빠르게 피하는 걸 겪고 도망가지 못하게 커다란 물체를 집어던져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채 전의를 상실하기 직전이었다. 의식이 흐려진다. 내공을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쉽사리 되지 않았다. 체내의 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도…동훈이 형. 어…어서 도망쳐요…."
최후의 힘을 짜내 구동훈에게 말했지만, 그는 엎드린 채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하필 이때 주화입마가 풀려버렸나 보다.
부상당한 엄마 곰 대신 발톱 잘린 아빠 곰이 내 앞에 성큼 다가왔다. 처음 구울을 봤을 때만 해도 섬뜩했는데 지금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니 실로 장족의 발전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말이다.
"허억… 콜라 따개 주제."
아빠 곰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큼직한 손바닥으로 나를 움켜쥐었다. 먹음직스럽게 보였는지 이빨을 벌리며 이죽거렸다. 수족이 묶인 난 아빠 곰을 향해 침을 뱉었다.
"퉷!"
- 와드득!
"으아아아아악!"
세게 쥔 것도 아닌데 온몸의 뼈가 가루가 되는 것 같았다. 아빠 곰이 웃는다. 그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아 당장이라도 찢어 갈겨 버리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아빠 곰이 입을 벌리더니 날 삼키려고 했다.
"하하…."
허망하게 이렇게 죽는가?
그때였다.
아빠 곰이 지붕 위를 바라보더니 별안간 눈알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호흡이 발정기에 다다른 듯 할딱거렸다.
- 흐엉! 흐엉! 흐엉!
뭐야? 변태같이 왜 이래?
갑자기 아빠 곰은 최후의 만찬을 앞두고 미친 듯이 우리 집을 향해 돌진했다.
아빠 곰은 멈추지 않았다.
다이렉트로 우리 집을 들이박아 버렸다.
- 콰앙!
- 와르르르~
어처구니없게 집이 무너져 내렸다.
구동훈의 살림파괴에 이어 아빠 곰이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야이! 곰 새끼야! 너 가만 안 둬!"
아빠 곰의 손아귀에 잡힌 채로 발버둥 쳤지만 내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새끼의 아킬레스건을 박살 낸 악의 원흉인 나를 죽이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뜻이다.
아빠 곰은 남은 발을 뻗어 뭔가를 쥐었다. 오렌지색이 빛나는 물체를 쥐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 몸은 파르르 떨리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너! 백마침! 그 더러운 손으로 건들지 마! 건들지 말라고 이 새끼야!"
난 목청에 피가 나오도록 소리를 질렀다.
아빠 곰은 백마침이 뭔지 아는 듯 비릿한 조소를 내었다.
백마침이 없으면 세계각지로 괴물들이 튀어나온다. 인류의 군대가 총출동하여 막을 것이고 자연스레 전쟁이 발발하겠지. 녹전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괴물에 의해, 군홧발에 의해 짓밟혀 피바다를 이룰 것이고.
전쟁과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송현사에 승려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보고도 막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빠 곰이 이빨을 드러내며 백마침을 서서히 입안으로 가져갔다. 삼키려는 건가? 부러뜨리려는 건가? 알 수는 없지만 인류의 재앙이 코앞에 닥쳤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바락바락 외쳤다.
"하지 말라고! 이 개X끼야!"
그때였다.
아빠 곰의 그림자가 뒤틀려지기 시작했다. 웬일? 내 눈이 잘못된 건 줄 알고 눈을 깜빡이며 다시 봤지만 분명히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스멀스멀~
그림자는 곰의 실루엣과는 다르게 제멋대로 움직였다. 곰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어안이 벙벙한 채 지켜봤다.
- 으오?
이윽고 곰의 그림자는 동그랗게 변했고 지면 위로 아지랑이같이 피어올랐다. 물리법칙을 무시한 초자연적인 현상에 아빠 곰도 나도 할 말을 잃었다. 피어오른 아지랑이는 이내 사람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꾸물꾸물~
지점토 빗는 소리에 잿빛의 실루엣이 살굿빛의 사람 피부색으로 변했다.
세상 낭창한 소리가 들려왔다.
"성웅 친구. 무공 수련을 많이 하셔야 되겠네요?"
"냉철이!"
난 소리를 질렀다.
그림자에 튀어나온 인영은 다름 아닌 냉철이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검집에 칼을 꺼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곰의 어깨를 잘라버렸다.
- 촤악!
향긋한 매화향이 사방에 퍼졌으며 두부 썰듯 너무나 손쉽게 잘려나갔다. 난 덕분에 풀려났다. 냉철이의 검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한쪽 팔을 잃은 아빠 곰의 어깨에선 막대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 으오오호어엉!
냉철이는 절도 있고 신비로우며 손가락 하나하나에 흘러나오는 기운이 가공스러운 초식을 펼쳤다.
화산파(華山派])의 검법이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화혈우(梅花血雨).
차가운 검초가 아빠 곰을 난도질했다.
- 촤차차착!
- 크어어어어엉!
정신없는 초식을 펼치자 아빠 곰이 피의 비를 뿌렸다.
곰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특히 옆구리가 걸레짝이 되어 너덜너덜해졌다. 단 일합에 아빠 곰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물들어갔다.
생존본능이 고수를 알아본 것이다.
"성웅 시주~"
"성웅 시주~"
전황이 뒤집혔다.
산 오르막길에서 송현사의 승려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전투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듯하다.
냉철이는 칼등에 곰의 피가 묻은 걸 보더니 눈에 경련을 일으키며 칼끝을 사선으로 내렸다.
- 촤악~
칼에 묻은 백곰의 피가 마당에 잔뜩 뿌려지며 냉철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을 잃은 채 절규하는 아빠 곰을 뚫어지게 봤다.
"백곰 시주께서 제 하나뿐인 친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드셨나요?"
그의 눈빛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