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고성웅의 몸값
내 바이털을 본 은지 누나가 엄마를 밖으로 안내했다.
"호호! 어머님. 저랑 밖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와요. 성웅 씨가 좀 쉬고 싶은가 봐요. 제가 사드릴게요."
엄마는 은지 누나에게 잡혀 나가면서도 서운한 말을 했다.
"못난 놈!"
······.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건데?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은지 누나랑 커피를 마시러 갔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돌아온 은지 누나가 말했다.
"성웅 씨. 유한 스님이 어머님과 나은이를 데리고 송현사로 가셨어."
뭐? 갑자기 왜?!
"아마 성웅 씨가 반혼검을 움직이니 뭔가 일이 생기려는 모양인가 봐."
그 일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음습한 밤이 되었다.
불길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사자의 발걸음이었다.
치잉
기계식 문이 열렸다.
고요한 병실에 묵직한 음성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성웅아. 지난밤에 내 십간령(十干靈) 중 하나가 다녀갔더구나. 반혼검을 움직여 네 아비인 태랑이를 살리려 한 건 의식이 있다는 거겠지."
이 병원의 주인. 조필광이다.
역시 내가 의식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답답했지? 늦었지만 너의 할아비이자 나의 죽마고우이기도 한 태을이가 죽은 건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
거짓말하지 마!
"물론 네가 믿으리라곤 생각 안 한다. 그리고 네가 오해를 할까 봐 확실히 말해두마. 알다시피 센카쿠 게이트와 독도 대첩 때 백마침은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었다. 장난치려는 의도도 없었지. 십간령 중 하나의 간절한 부탁이었단 것만 알아두게나."
반혼검을 움직여 글자를 적으려다가 관뒀다.
"좋은 벗을 사귀었더구나. 윤은지 간호사라고, 그가 왜 자네를 좋아하는 줄 아나? 단지 헌터라서? 아니 사실 윤 주임은 헌터를 혐오하지. 싫어해. 각성자에 대한 증오마저 보여. 그런데 너를 왜 좋아하는 줄 아느냐? 바로 네가 이완해를 죽였기 때문이지."
뭐. 뭐라고?
"이완해 대신 바닥에 떨어진 아수라 마석을 주워주려다가 용병의 총에 맞고 이완해의 발길질에 죽어간 군인. 기억나나? 바로 윤 주임의 친오빠야. 윤성환."
'······!'
"껄껄~ 근데 네가 이완해를 죽여버렸으니 널 애지중지하게 챙긴 건 당연한 것이지."
그는 날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잡설이 길었군. 이제 터놓고 얘기 좀 해 볼까? 내가 여태 널 살려 둔 이유 말이야. 병신 팔푼이처럼 누워있는 널 죽이고 고대의 보패 반혼검을 가지지 않는 이유를 말이야."
궁금했다. 그가 왜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고 있는지.
"첫째, 네가 태을이 손자라서 더는 죄를 짓기 싫더구나."
지랄하지 마! 그렇게 휴머니즘으로 가득 찬 네 녀석이 아냐. 목적을 위해서라면 주위의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는 너의 방식은 모를 줄 알아?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조필광은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둘째, 너와 네 가족을 건드리거나 죽이면 법현이가 자결해 버린다지 뭐냐."
뭐, 뭐?
"껄껄. 법현이가 말 안 했나 보군. 네가 살아있는 이유가 그거야. 법현이가 망자의 서, 상권을 내게 줬네. 그것도 모두 해석을 한 채로 말이야! 껄껄!"
법현 스님! 무슨 짓을!
"법현이가 자결을 하게 되면 망자의 서 하권을 찾아도 의미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난 하권이 꼭 필요하거든. 그리고 망자의 서 상권엔 재밌는 내용이 있더군. 반혼검 주인이 죽으면 반혼검도 슬픔에 잠겨 한동안은 깊은 잠에 든다고 말이야. 그래서 일단 네가 살아야 반혼검에 대한 연구도 할 수 있어. 내 걸로 만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넌 살아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처음 듣는 얘기다. 그래서 750년 넘게 주인 없이 땅바닥에 기나긴 시간 동안 있었구나.
똑똑.
밖에서 내 병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
치잉.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입장했다. 조필광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자~ 윤 주임 결정은 정했느냐?"
"······."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은지 누나···.
"결정할 때까지 옆에서 생각하게.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내 손녀딸 때문이다. 세리가 성웅이 네놈이 살아있어야지만 자기의 병도 고칠 수 있다 했거든. 너 하나 죽이는 데 왜 이렇게 장애물이 많은지 모르겠어. 정말. 신경질 나게."
기억났다. 창세삼정을 가진 나만이 고칠 수 있다고. 그녀는 무슨 병이길래 그리 애타게 날 불렀을까? 조영대같이 하반신 마비도 아니고 멀쩡하던데.
"성웅아. 세간의 사람들이 나를 치밀하고 철저하게 계산대로 움직인다고 평가하던데 사실은 막 나가는 타입이야. 끌끌."
올 게 왔다.
단지 말만 전할 뿐이라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놈을 어찌해야 할까 골머리를 썩이던 어느 밤이었지. 누군가 내 집무실에 면담을 요청하러 왔더군. 바로 윤 주임이었지. 어디 하찮은 일개 간호사가 당돌하게 내 사무실을 허허허!"
오만방자하다.
"그러나 평소 평판이 좋은 직원이라 말 상대나 해주기로 했지. 그런데 대뜸 마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것도 서든 게이트의 아수라 마석을? 으하하하하!"
툭. 툭.
그는 서든 게이트의 아수라 마석을 던지며 기고만장하게 웃었다.
"호기심이 생기지 뭐야? 내가 제안을 했지. 독극물 주사를 성웅이 네게 넣으면 즉시 이걸 주겠다고 말이야."
이 새끼가 진짜!
화가 들끓어 올랐다.
"여러모로 좋더군. 내가 직접 죽이는 것도 아니니 태을이한테 죄책감도 덜어서 좋고 반혼검도 내가 죽인 게 아니니까 날 주인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물론 법현이가 자결해 버리면 곤란하지만 어디까지나 곤란한 수준이지."
뭐? 그럼 망자의 서 하권을 구하면 해독은?!
"법현이 말고 고대어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거든. 근데 좀 특이한 종자라서 말이야. 법현이 꼬드기는 게 훨씬 낫지."
이 X새끼는 세상 모든 걸 장난감처럼 보는 개 악질이다!
"잡담은 그만하고 하이라이트로 넘어가도록 하지. 윤 주임."
"네. 이사장님."
"결정은 했나?"
찰랑찰랑.
유리병에 든 독극물을 은지 누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아··· 아직."
"이런~ 닥터 조가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런 여유라니? 서두르지 않으면 남자친구가 괴물로 변할 거라고! 허허허! 어서 이 마석을 수액화 시켜서 닥터 조에게 먹여야지! 왜? 살리기 싫은가?"
은지 누나 안 돼! 저 녀석의 계략에 말려들지 마!
"하··· 하겠습니다!"
그러자 조필광은 놀라운 목소리로,
"오오~ 이런 배은망덕한 년을 보았나? 친오빠의 원수를 갚아준 대통령 슬레이어인 위대한 헌터를 죽여버리겠다고? 사랑에 눈이 멀었어! 크하하하!"
"······!"
사람의 마음을 갖고 노는 데 아주 도가 튼 나쁜 놈이다.
"성웅 씨··· 미안. 나 어쩔 수가 없어. 성웅 씨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대 오빠가 죽어. 그냥 나 이번만 눈 딱 감고 나쁜 년 될게. 나 죽고 지옥 가서 성웅 씨한테 지은 죄 달게 받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응? 이번 한 번만 곱게 죽어줘 제발. 부탁이야!"
"껄껄! 성웅아! 이렇게 애원하잖나? 그냥 시원하게 죽어드리게."
내가 자충수(自充手)를 두었다.
유리창에 새긴 '조필광 아수라 마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바로 조필광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조영대만 살리면 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녀는 못 할 짓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간과했다. 나와 그녀의 사이가 때론 조영대보다 더 견고하리라는 믿음, 그런 착각이 날 스스로 죽음으로 몰게 했다.
난 단지 그녀에게 있어 아는 남자일 뿐이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이기어검술을 펼치려 들었다.
촤라라락! 꽁꽁!
반혼검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 했다.
빙의 곽목휘가 옆에 나타나 반혼검을 얼려버렸다.
"크허허! 드디어 반혼검을 움직이는구나. 초조하지? 살려고 발버둥이구나. 편하게 죽음을 맞이해."
'이익!'
그녀와의 3년 넘게 쌓은 추억은 견고한 성이 아니라 허울 좋은 모래집이었다.
조필광이란 파도에 단박에 무너졌다. 그는 사람의 심리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다.
그녀가 알코올 묻은 솜으로 내 팔을 소독했다. 차갑다. 이제 곧 따끔한 바늘이 꽂히겠지.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성웅 씨.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 행복하게 살아야 해. 알겠지?"
날 죽이려 드는 행동치고는 말투가 아니다.
"이거 맞으면 따끔할까? 아프겠지? 고통은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다. 뭔가 아니다. 뭔지 모르지만 막아야 한다는 본능이 날 향해 마구 속삭였다.
"성웅 씨. 안녕."
그녀의 손에 막대한 기가 몰려들더니 눈코 뜰 새 없이 곧바로 움직여버렸다! 멈춰! 누나!
푸슉!
뾰족한 주삿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간 소리가 들렸다.
적막이 감돌았다.
"음, 윤 주임의 선택은 그거였나? 다소 흥미가 떨어지는 답안이군."
조필광이 흥미로운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나의 피부가 아니다.
어떻게 된 거야?
"조필광 당신도 싫고 헌터도 싫고 다 싫어!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 당신만 없으면 돼! 죽어!"
누나가 조필광에게 주사기를 꽂았던 것이다.
퍼억! 쿵!
"꺄악!"
곽목휘가 발길질로 그녀를 차버렸다.
뽁~ 하는 소리와 함께 조필광의 목에 꽂힌 주삿바늘이 뽑혔다.
"말했다시피 난 성웅이가 죽으면 여러모로 피곤해져. 사실 독극물이 아니라 포도당을 넣었더니 기운이 샘솟는구나! 으하하하하!"
당했다! 그녀는 조필광을 죽이고 마석을 빼앗아 조영대를 살리려 했을 것이다. 그게 모두를 위한 최선이었다. 그걸 조필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아. 신선하고 좋아. 정말 오랜만에 내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야. 용기 있었어. 윤 주임."
그러나 싸늘한 음성으로 변했다.
"대신 대가는 죽음인 건 알고 있지?"
대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위험하다. 그녀가 위험해.
곽목휘가 그대로 서리검을 은지 누나에게 향했다. 은지 누나는 막기는커녕 공격을 했다.
"해부학 실습 3교시! 7개 목뼈의 가출!"
빠드드드득!
조필광이 손에 들고 있던 아수라 마석을 떨어뜨리며 신음을 토했다.
"으어어억!"
조필광의 목뼈가 뒤틀리며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뒷목을 부여잡은 채 고통을 호소했다.
"크. 크윽. 이··· 이년이!"
그녀를 공격하던 곽목휘가 서둘러 방향을 틀어 투명 실을 잘라버렸다.
그녀는 곽목휘의 발길질에 맞길 기다렸던 것이다. 동시에 조필광에게 투명 실을 연결한 것이었다.
짧은 찰나에 이런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전사다!
"이사장님. 괜찮으십니까?"
"크으으···. 역시 흥미로워."
조필광이 신음에 젖으면서도 끄떡없자 은지 누나는 화들짝 놀랐다.
"목뼈 7개를 모조리 부러뜨렸는데 어···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그러나 심각한 부상만은 분명했다.
사람은 통상 목뼈가 부러지면 죽는다.
"크··· 정말 재밌는 친구일세. 휘야. 난 가서 치료나 좀 받아야겠다. 마무리하고 와. 병원 난장판 될 것 같으니까 싸우는 자리는 옮기도록."
"네."
조필광이 등을 돌려 이동하려고 하자 어디서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필광 X새끼야!"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청 헌터국 형사과 김명일 경위였다.
"허허. 경위님이 여긴 어쩐 일로?"
조필광이 태연자약하게 말했으나 내심 초조했을 것이다.
"죽을 새끼가 여유 부리기는! 네놈 허점만이 보이길 기다렸다. 얼마 전 죽은 내 마누라가 널 기다리고 있다! 너 때문에! 네가 죽였어!"
오렌지 게이트의 곰!
삽시간에 야수계 베스(Beth)로 변하더니 산만 한 덩치에 천장이 무너졌다.
살벌한 곰의 기가 병실을 장악했다. 조필광은 예정에 없던 일에 적잖이 당황했다.
"허허. 그게 어찌 제 탓이란 말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필광에게 주먹을 아니! 손톱을 휘갈겼다.
"크윽!"
파파팍!
그러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피의 바람개비가 김명일의 손을 묶어버린 것이었다.
김명일을 봉쇄한 냉랭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어눌한 한국말로 싸늘하게 경고했다.
"비. 켜."
"혈(血)의 이리야여 왔는가?"
이리야까지 왔다.
한편 은지 누나는 떠나기 전 내 손을 맞잡았다.
"헤헤. 성웅 씨 이따가 봐."
쨍그랑~
그녀는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갔다.
"귀찮군."
곽목휘가 은지 누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조필광의 열 명의 수하 중 두 명이 나타났다.
십간령 빙(氷)의 검(劍) 곽목휘.
십간령 혈(血)의 풍(風) 이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