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71화 (71/200)

71화. 뉴스 브리핑

슬슬 뉴스가 마칠 시간이다.

[오늘 MTC 뉴스 엔딩 브리핑의 주제는 '비제이와 팬'입니다.]

MTC 뉴스는 매일 마치기 전, 사회적 이슈에 대한 5분 논평을 하며 끝마쳤다.

[인터넷 방송국 아카시아 TV에서 유명한 비제이로 활동하던 서향. 이삼십대 청년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바로 이 서향 씨가 오늘 낮에 팬을 빙자한 스토커에게 쫓기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조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사망할 수도 있었던 응급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현장에 출동한 윤은지 헌터의 응급조치 덕분에 생명을 건졌습니다. 최근 여성 비제이들을 대상으로 범죄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대하여 오늘의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개인 정보 보호법 같은 건 없어? 비제이고 누나 이름이고 다 까발려 버리네."

"쉿~ 시작한다."

[1년 전, 시한부 선고를 받은 26살 박명진 씨는 직장에서도 해고 통보를 받으며 우울증이 찾아왔었는데요. 원룸에서 두문불출하며 인터넷 방송만 시청했습니다. 그때 우연히 시청한 서향의 방송에 흠뻑 빠져들었죠. 특히 튤립이라는 후원을 하면 BJ가 닉네임을 불러주었는데요. '나의 닉네임을 부를 때마다 마치 그녀와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는 말을 일기장에 적어 놓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모아놓은 돈과 원룸 보증금, 심지어 수술비마저 모조리 튤립에 탕진한 채 서향 BJ에게 후원하였습니다. 꾸준한 방송 참여율과 젠틀한 채팅 매너, 무엇보다 많은 튤립을 바친 그는 채팅창을 관리하는 매니저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피해자 탁혜선 씨 역시 채팅방 관리자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악연이 시작됐네."

"나 벌써 가슴이 찡해진다능…!"

내가 한심하듯 나무랐다.

"인마! 뭐가 찡해져!"

"다들 조용히 해! TV 좀 보자!"

[탁혜선 씨는 업무적으로 박명진 씨와 쪽지를 주고받던 중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박명진 씨의 마음은 오로지 서향이었죠. 시간이 갈수록 호감은 집착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아미타불.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요?"

"글쎄다?"

[한편 서향은 많은 튤립을 후원하는 VIP 시청자에게는 특별 대우를 했는데요. 그것은 바로 방송이 끝나고서도 개인 DM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송을 마치고서도 개인적인 시간을 내야 했기에 서향은 동거인이자 피해자 탁혜선 씨에게 그 일을 맡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서향이 아이디를 탁혜선 씨가 썼다는 거네?"

"그렇죠."

[그러던 어느 날, 탁혜선 씨는 그만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서향의 아이디로 박명진 씨에게 DM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Are you kidding?!"

"뭐! 정말?"

"뭔가 조각이 맞춰져 간다능."

[박명진 씨는 서향의 쪽지를 받고 뛸 듯 좋아했습니다. 곧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상황인지라 하늘에서 내린 마지막 축복이라 생각했죠. 몇 달이나 방송이 끝나고도 새벽 늦게까지 DM을 한참 주고받은 박명진 씨의 마음은 커져만 갔습니다. 심지어 탁혜선 씨는 치밀했습니다. 본인인 걸 발각되지 않기 위해 방송하는 동안에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까지 했죠. 순진하게 아무것도 몰랐던 박명진 씨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가 실제로 채팅한 사람은 서향이 아니라 탁혜선 씨라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죠. 커져 버린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탁혜선 씨는 박명진 씨에게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박명진 씨는 냉큼 알겠다며 자신의 사진을 셀카로 찍어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당일이 되었습니다.]

은지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나 더는 못 보겠어. 먼저 일어날게."

"누나."

"시스터. 현실을 외면하면 안 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약속 장소는 신당역 네거리에 있는 한 커피숍이었습니다. 박명진 씨를 사랑했던 탁혜선 씨는 커피숍에 앉아 기다릴 수 없었던지 박명진 씨를 보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횡단보도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신호 대기 중이던 차량의 블랙박스를 입수, 국립과학연구소에 의뢰하여 소리를 증폭시켜보았습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참고로 박명진 씨의 닉네임은 파우스트입니다.]

"오… 오빠."

"쿨럭… 쿨럭… 누. 누구시죠? 저는 바빠서 이만."

"아냐! 잠시만 나라고! 파우스트 오빠!"

"쿨럭. 어떻게 내 닉네임을?"

"오빠. 나 모르겠어?"

"누. 누구신지?"

그녀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 아카시아의 탁혜선이야. 서향이랑 같이 살고 오빠랑 같이 채팅방 관리하던 탁혜선."

박명진의 눈동자에 불안함이 싹텄다.

"네… 네가 어찌 여길?"

"서향이 만나러 왔지? 걔는 오지 않을 거야."

박명진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우리가 만날 거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바보! 몇 달 동안 쪽지를 주고받은 게 나였으니까!"

"우엑! 쿨럭! 쿨럭…!"

"오빠! 괜찮아?"

탁혜선이 박명진의 어깨를 감싸 안자 불쾌한 듯 팔을 치웠다.

"놔! 이거!"

자기를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자 탁혜선은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예쁜 외모 때문에 서향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성격이 좋다고 했잖아! 그 어떤 얼굴이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 성격이 바로 나였다고! 내가 서향이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오빠랑 사랑을 나누었던 거였다고!"

박명진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미… 미친년. 쿨럭… 거짓말하지 마. 바쁘니까 비켜. 어서 커피숍에 서향이 만나러 가야 해. 쿠, 쿨럭!"

탁혜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마! 오빠 사랑이 바로 여기 있다고! 바로 오빠 눈앞에 말이야!"

"아냐! 아니라고!"

탁혜선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독한 말을 쏟았다.

"이익. 서향이 걔가 어떤 년인지 몰라서 물어? 방송만 끄면 남자 BJ랑 침대에 뒹굴고 온다고! 그딴 년보다 깨끗하고 순수한 내가 좋잖아? 응?"

박명진의 눈이 뒤집히더니 품 안에서 식칼을 꺼냈다.

"X발년아! 서향을 모함하지 마!"

푸슉!

식칼로 탁혜선의 복부를 찔렀다.

"어억!"

"이 돼지같이 생겨 먹은 X년아! 터진 조동아리라고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컥. 오… 오빠."

눈이 뒤집힌 박명진은 수차례 칼을 찌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푸슉. 푸슉.

"서향이는 그런 여자가 아냐! 네가! 네가! 어찌 감히 날 갖고 놀 수가 있어! 오돌토돌한 피부에 육중한 체구의 너 따위 하찮은 돼지 새끼를 누가 좋아해? 남자들이 혐오한다고! 죽어! 죽어! 죽기 전 소원이 서향이 만나보는 거였어! 살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나의! 나의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근데 네가 어찌 나를 속여! 으아악!"

푸슉. 푸슉.

"악! 악! 악!"

그렇게 한참을 찌르던 중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응? 넌 누구야? 소원? 그래. 있지. 서향이가 나 보기 부끄러워서 괜히 저러는 거야. 분명 날 사랑한다고! 저딴 돼지 같은 년이 아니야! 우리 서향이한테 사랑한다는 말만 들으면 돼! 계약? 계약하면 서향이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야? 크아아아!"

[그는 갑자기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웃옷을 벗었습니다. 등에는 아랍어로 8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경찰은 단순한 문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내 그는 만나기로 약속한 커피숍을 샅샅이 뒤졌지만 서향은 당연히 없었죠. 그리고 골목길로 사라졌습니다.]

"오… 오빠. 가지 마… 오빠의 사랑은 나인걸…."

[피해자 탁혜선 씨는 칼에 찔린 와중에도 박명진 씨를 향한 외길의 순애보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박명진 씨는 서향을 쫓아 북악산에서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던 중 송현 길드와 구동훈 헌터부 장관에게 현장에서 사살당했습니다. 온라인 사랑이 주는 허와 실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남은 미스테리입니다. 박명진 씨는 탁혜선 씨를 만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위험한 식칼을 들고 갔을까요? 아마, 서향이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을 하지 않았을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MTC 브리핑이었습니다.]

TV를 껐다.

우린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못 했다.

* * *

한 달이 지났다.

- 꾸엑!

- 꾸에에에엑!

구울이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태극검…."

"매화검법…."

썩둑~ 뎅겅~

"……."

레이드에 들어온 냉철이와 엘리가 미쳐 날뛰고 있기 때문이다. 둘이 저러는 모습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은지 누나가 학을 뗀 듯 말했다.

"일주일 만에 레이드 오더니 아주 신났네."

레이드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응. 누나. 우린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플레이 ~ 플레이~ 엘리쨩!"

상경이가 손을 흔들며 엘리를 응원했다. 피에 굶주린 엘리와 냉철이는 오늘도 내기를 했다. 송현사에서 나랑 종종 하던 놀이였다.

"열다섯 마리!"

"후후. 열여덟 마리입니다!"

"뭐? 크오오! 선라이즈 캐논!"

쭈웅! 콰아앙!

구울 10마리가 노란빛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호호홋! 스물다섯 마리!"

냉철이가 항의했다.

"엘리 시주! 마석의 힘은 반칙입니다! 순수한 내공으로만 하기로 했잖아요."

"오늘은 그런 말 없었거든!"

"으음? 그 말 후회하게 해 드리죠."

눈꼬리가 실룩 치솟은 냉철이가 손바닥을 펴더니 동그란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블랙홀 이스탄불!"

구체를 마물을 향해 집어 던졌다.

레이드에 있는 모든 것들이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와아아아압!~

- 꾸웨에엥!

- 에에엑!

마물도 빨려가고 나무마저 빨려가고, 그리고,

"으어어어! 사람 살려!"

"미친놈이다!"

다른 길드원들도 블랙홀에 빨려가고 있었다.

"냉철이! 멈춰!"

내가 저지하자 그제야 멈췄다. 그래봤자 상황은 이미 종결.

"쉰 하고도 네 마리. 제가 이겼네요. 후후. 마석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으아아아아!"

엘리가 참지 못하고 냉철이를 향해 칼부림을 했다.

챙! 챙! 챙!

난 말리기를 포기했다.

"누나. 상경아 우린 마석이나 줍고 나가자."

"저래도 괜찮을까?"

"파오후! 문어 머리가 반칙 했다능!"

"피차일반이야."

둘이야 싹쓸이하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정작 문제는,

"어이. 대통령 슬레이어. 우린 뭐 먹고 살라고 그렇게 마석을 쓸어가는 거야? 응?"

다른 길드로부터의 원성이었다.

"오호호~ 죄송해요. 로얄 길드분들의 명성을 저희가 실추시키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약소하지만 이것으로 화를 풀어 주실 수 없을까요?"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는 미모의 은지 누나가 미인계를 펼치자 로얄 길드원의 화가 풀어졌다.

"고, 공짜로 마석을 이렇게 주다니 험험. 잘 받겠습니다만 앞으론 이러지 마세요."

"네! 죄송합니다!"

맨날 둘이 저렇게 치고받고 내기를 하니 우리랑 같은 레이드에 참가한 다른 길드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날 저녁, 철퇴가 내려왔다.

- RRRRR.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성웅 시주. 잘 지내?"

헌터협회장 아지 스님이다.

"네. 스님."

"시무룩한 목소리 보니 대충 무슨 말 할지 감이 잡히나 보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할게. 당분간 송현 길드는 레드 게이트 레이드 참여 금지야."

"스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번엔 못 봐줘. 협회 이사진의 결정이야. 너희들이 그간 마석을 하도 독식해서 다른 길드들의 생계가 힘들어진다는 항의와 제보가 빗발치고 있어. 그러게 작작 했어야지. 엘리 시주랑 냉철이가 또 내기해서 그래?"

"음, 그렇죠. 뭐."

"송현사를 대표하는 송현 길드면 법현 대사께 누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당분간 조용히 지내줘. 그럼."

"네. 들어가세요."

- 뚜. 뚜. 두.

아아. 흐물흐물 아지 스님이 속세에 물들고 있다.

삶이 고단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