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통일 물밑 협상 (1)
다음으로 내 소개를 했다.
"전 송현 길드 마스터 고성웅이라고 합니다. 식물인간일 때 목소리를 들은 적 있었죠. 그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고 마스터 좋으라고 한 소린 아닙니다."
"에에…."
맥빠진 표정을 지은 내 앞으로 안경을 낀 사내가 불쑥 나타나 부연했다.
"참고로 저희 마스터가 사회성이 없는 점 깊은 양해 바랍니다."
"하하하~"
"아하하."
난데없이 웃음바다가 되자 정태수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태곤!"
"아. 네넵. 잘못했습니다요."
이태곤이 두 손을 들며 졌다는 시늉을 했다. 내가 웃으며 화답했다.
"그런 우직함에 정태수 마스터를 추천했죠."
이전 김명일 경위와 함께 병원에 찾아왔었다.
둘이 같이 왔으니 당연하게도 정태수는 김명일 편을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김명일의 완패였다. 정태수의 올곧은 면을 계산 못 한 것이다.
"아이고~ 다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네리움 서브 마스터 이태곤이라고 합니다."
안경의 사내가 불쑥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는 머리를 어깨까지 길렀다.
항상 웃는 표정이지만 담백한 인상이다. 정태수가 운동으로 단련된 사내라면 이 자는 모략에 능해 보인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오신 윤은지 헌터 되시나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태곤은 잡은 은지 누나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하트가 은지 누나에게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누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동훈이 형이 손뼉을 마주치며,
"자! 인사는 다들 나눴나요? 캬~ 세계 최초 SSS급 헌터 성웅이에 대한민국 비네리움 길드 두 분까지! 라인 업이 환상적이군요. 이만하면 북측에 꿀리지는 않겠죠.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할까요?"
비네리움의 길드는 정태수가 혼자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다.
비네리움이 곧 정태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빛나게 하는 단어는 바로 무패의 헌터.
누군가와 일대일로 겨뤄서 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에 호승심이 일었으나 지금은 북측에 집중할 때다.
여태 싸우며 전력을 다한 적이 없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 힘이 어느 정도일까?
"성웅 씨. 무슨 생각해?"
"아, 아냐."
그 후 우린 차를 타고 1시간 조금 넘게 지나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위치한 신축 남북 청사 회담장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는데 이미 회담장 입구 저 멀리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구동훈이 말했다.
"통일부 직원들은 미리 와있었네? 어서 가서 인사드리자."
통일부 장관이 동훈이 형을 보자마자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며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구 장관님. 먼 길 와주셨네요. 반갑습니다."
190cm 가까이 되는 체격에 가운데 머리숱이 송송 빠진 사람이다. 목소리 톤이 굵직하고 우렁찼다.
구동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이용태 장관님. 볼 때마다 신수가 좋아지시는 게 어디 좋은 영약이라도 드시나 봅니다? 좋은 건 나눠 먹어야 합니다."
"아이고~ 물론입죠. 그리고 헌터님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용태 통일부 장관이 시원하게 인사하자 우린 목례 했다.
따로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할 급이 아니었다.
"자. 어서 들어가시지요."
남북 청사 회담장은 5층에 있었다. 준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건물 안은 썰렁했다.
가구가 미배치된 공실도 여럿 보였다.
5층에 내려 모퉁이를 돌아 가장 큰 회의실로 향했다.
입구엔 포맥스 재질로 큼직하게 제작한 '남북 청사 회담' 안내판을 대문짝만하게 달아놓았다.
구동훈이 손가락을 갖다 대자 문이 열렸다.
치잉.
널찍한 회의실이 보였다.
"여기가 통일의 서막이 시작되는 곳이지요. 기대되네요. 벌써부터 하하!"
테이블은 양측이 마주 볼 수 있도록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입구 측에는 태극기가, 창가 쪽에는 북한의 인공기가 걸려있었다.
"자리 위치는 누가 정한 건가요?"
"저와 대통령님의 생각입니다."
"으음. 그렇군요."
동훈이 형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보통 출입문과 떨어진 곳이 상석(上席)이다.
대한민국에서 회의를 주관하는데 북한 쪽에 상석을 내준 것이다.
참여국에 대한 배려인지 애초부터 북한에 퍼줄 의향인지는 알 수 없다.
생수와 유리잔이 3개씩 배치되었다.
남측은 통일부 장관, 차관, 헌터부 장관이다.
그럼.
마침 구동훈도 궁금했는지.
"이 장관님. 북측엔 누가 참여합니까?"
이용태 장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저희도 아직 모릅니다. 망할 녀석들 미리미리 좀 보내라니까. 사람 애먹이네요."
"네? 장관님도 모르신다고요?"
남과 북이 코앞에 만나기 직전인데 누굴 만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거 느낌이 싸하다.
"네. 저희는 인원을 미리 북측에 통보했는데 북측에서는 묵묵부답입니다."
"곤란하네요. 날짜도 며칠 전에 멋대로 정하고 말이죠. 너무 끌려다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하하하. 구 장관님. 큰일을 앞두고 너무 예민해지지는 말자고요."
고위급 관료들은 자리에 착석했는데 우리 헌터들의 자리가 없었다.
동훈이 형이 물었다.
"저기 헌터분들의 자리가 없는데요?"
통일부 장관이 곤란한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헌터분들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일어서 있어 주실 수 있나요? 경호로 오신지라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야 그렇다 치지만 대형 길드 마스터 정태수는 얘기가 다르다.
아마 통일부 장관도 정태수의 눈치를 보고 양해의 말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죠."
정태수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동훈이 형이 감사를 표했다. 그도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오지 않았으리라.
이태수가 우스꽝스레 곁눈질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감사합니다."
이용태가 정중하게 말했다.
은지 누나와 상경이는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와 상경 씨가 이런 데 와도 돼?"
"걱정 마. 어차피 우린 자리만 채우면 되니까."
시간이 흘렀다.
30분이 지나도 북측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용태 장관이 슬슬 짜증을 냈다.
"북측 인솔하는 우리 애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짜증을 내자 뒤에 있던 비서가,
"아까부터 인솔팀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아오! 만나기 전부터 비협조적이구먼!"
결국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다.
회담장은 이용태 장관의 식식거리는 숨소리 말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일부 장관은 밖에 나가서 "예, 대통령님. 북측 인솔에 문제가 있는지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걱정 마십시오."라는 말을 여러 방식으로 바꾸어 변명했다.
전화를 한 통씩 받고 올 때마다 이용태 장관이 1년씩 늙어가는 게 보였다.
이쯤 되면 회담이 진행 되도 잘 풀리지 않을 분위기다.
은지 누나의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졸던 중이었다.
빵빵.
밖에서 난 자동차 경적 소리에 잠에서 깼다.
"움냐."
오늘은 회담장 출입구부터 철저하게 통제를 했는데 웬 미친놈이 클랙슨을 누르는가?
다들 무시하자 또다시 경적이 들렸다.
빠아아아앙.
5초 정도 작심하고 눌렀다.
어느 간 큰 놈인지 궁금해서 창가로 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밑에서 황토색 군복을 입은 아저씨가 손짓을 하며 오라는 시늉을 했다.
"기 통일부 장관 동지! 날래날래 우리를 데리고 가달라우."
늦게 온 주제 1층으로 내려와 데려가 달란다. 시건방지기 짝이 없다.
구동훈이 난감한 듯 이용태 장관을 바라봤다.
"어떡하죠?"
"어휴! 왕년의 성격이었으면 그냥 다 때려치우는 건데! 일단 밑으로 내려가죠. 여기까지 와서 협상을 망칠 순 없으니까."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층 입구로 내려갔다. 3대의 세단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북측의 인원은 단 3명뿐이었다. 황토색 인민복을 입은 40대 후반의 남자가 말했다.
"아~ 고저 남조선 인솔하는 동무 나마이들 운전이 속 터져가 내가 운전대를 잡았소. 괜찮지라요?"
남측에서 인솔하기로 한 세 명의 보좌관이 뒤에서 뻘쭘하게 있었다. 그들의 안색이 누렇게 떴다.
"하하. 물론입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가 많이 막혔던지요?"
이용태 장관이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묻는다.
인민복 장군이 이쑤시개로 치아를 긁으며 말했다.
"차는 씽씽 뚫렸슴미다. 그저 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남조선 국밥이 별미래가 한 그릇 먹고 왔슴미다."
X새끼가!
순간 욱하는 심정을 감추느라 애썼다. 구동훈과 이용태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나보다는 훨씬 스마일을 잘 지었다.
두목으로 보이는 북한군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쑤시개로 치아를 들쑤시며 쉴 새 없이 뇌까렸다.
"캬~ 남조선 국밥은 조미료를 수태 때려 박아서 기린가? 아주 별미라요! 별미! 자자~ 앞장 서시라요."
"……!"
시작 전부터 호구가 잡혔다.
대놓고 늦게 왔단다. '네놈들이 어쩔 건데?'라는 뉘앙스를 조미료보다 더 많이 담았다.
아니나 다를까?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용태 장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실내는 금연…."
이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후우~ 남조선에는 금연구역이 많다고들 하는데 여기는 괜찮지라요?"
이용태 장관은 이미 협상이고 뭐고 한 소리 지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표정이다.
"네. 편하신 대로."
놈의 만행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협상 테이블에 다리를 턱하고 올려놨다.
"……!"
북측의 리더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래 하지불안증후군이 있어서 다리 좀 올리갔소. 그 다리에 벌레 들어가는 기분이지라요."
"이익."
구동훈이 일어서서 따지려고 들었으나 이용태가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다시 앉혔다.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남측을 본 태락겸이 피식 웃더니,
"근데 남조선 동무들은 수태 많이 오셨슴미까? 저 보시라요. 나랑 헌터 동지 단둘만 왔잖슴미까?"
"장군님!"
손을 뿌리치고 구동훈이 일어섰다. 북측은 물밑 협상이고 뭐고 관심 없다. 누가 봐도 시비 걸러 온 것이다.
구동훈이 사고 치기 전에 이용태가 정중하게 요청했다.
"장군님. 엄연히 물밑 협상이긴 하나 대대손손 오늘의 협상을 기억하게 될 수도 있을 중요한 날입니다. 오랜 분단의 아픔을 뒤늦게나마 씻을 초석을 놓을 날이기도 하고요. 조금만 예의를 차리시는 게 어떨까요."
쾅. 쾅. 쾅.
태락겸이 책상을 치며 웃었다.
"푸하하하하! 예의? 용태 장관이 그런 말 씨부리샀다간 북측에선 바로 총살인 거 아심미까? 내래 이래 봬도 백두혈통의 자손이라우. 우리 북조선에서 서열로 꼽자면 10위권 안에 드는데 뭐 예의?"
그는 이쑤시개를 입 한구석에 넣고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쑤시개를 입안에 쑤셔 넣고 목젖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아아.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구만 기래. 쩝쩝. 다들 아시갔지만 소개 할라이 귓구멍 파고 똑똑히 들으시라요. 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헌터부 상장 태락겸이라우."
인민헌터부 쓰리스타 태락겸.
견장에 회색 별 3개가 반짝거린다. 통일부 장관인 이용태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나머지 분들은 어찌하고 세 분만 오셨습니까?"
"으하하~ 고걸 인제 물어보니 기래? 내래 위대하신 수령 동지의 말만 전하면 되는데 많이 올 필욘 없잖슴까? 혹시 몰라 세계 최고의 헌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라요? 아하하하!"
북한 최고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헌터란다. 감히 내 앞에서 말이다.
학을 뗀 이용태 장관은 서둘러 본론을 꺼내려 했다. 협상이 최우선이다.
이용태 장관도 자포자기했는지 더는 웃지 않았다.
"네. 심플하고 좋네요. 그럼 이제 협상 진행을…."
쾅~
태락겸이 테이블을 다시 손바닥으로 치더니 말을 잘랐다.
"아! 기래! 간만에 분위기 달아오르는데 업무 얘기하지 말라우! 고저 남조선에 얼마 전 SSS급 헌터가 탄생했다고 해서 누군지 궁금했는디 바로 저 동무구만 기래."
태락겸이 나를 깔보듯 쳐다봤다. 질 수 없지.
난 손가락을 콧구멍에 넣어 코딱지를 파냈다. 동훈이 형이 눈을 흘겼다.
미친 짓 하지 말라는 거다.
난 대꾸도 멀리 창밖만 바라보았다. 태락겸이 어이없다는 듯,
"와~ 위대한 인민공화국의 장군님이 묻는데 대꾸도 안 하고 듬직하구만 기래! 고저 나이도 어린 게 SSS급이라니 믿기지 않슴미다! 반갑소 헌터! 동지. 이름이?"
난 표정을 와락 구기며 답했다.
"아저씨. 이름이고 뭐고 책상 위에 올린 발부터 내려요."
"뭐,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