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통일 물밑 협상 (3)
한 좀비가 내 팔을 붙잡고 이빨을 흉측하게 들이밀었다.
"으악!"
당황해하며 팔로 급하게 떨쳐 내려 했지만, 녀석의 이빨은 무자비하게 내 살점만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 꾸웨에에~
"누나아아~~"
"해부학 실습 2교시 두부(頭部) 과부하!"
퍼엉~
- 꿰에엑!
좀비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피가 내 얼굴에 튀었다.
"우와악!"
"성웅 씨. 미안! 어쩔 수 없었어."
"고, 고마워 누나!"
정신 바싹 차려야겠다. 놈들의 숫자가 비정상적으로 많다.
아무리 서든 게이트라지만 너무 서든하다.
솩! 솩! 솩!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점프하여 날아오는 좀비의 정수리를 바닥까지 찍어 내렸다.
촤아악.
경추, 흉추, 요추의 뼈들이 차례로 와르르 밖으로 삐져나왔다.
더러운 살점과 내장기관이 분비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어 다음 녀석의 목도 베어 넘겼다.
- 꾸에에에.
- 끄아아아!
"이러다간 끝도 없겠어!"
나와 은지 누나가 죽이는 속도로는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누나 안 되겠어. 뒤로 빠져."
난 멀찍이 떨어진 뒤, 단전의 호흡에 집중했다. 손끝에 기를 모았다.
"크리퍼 쏨(Creeper Thorn)!"
그린 게이트 기멜(Gimel)의 에너지파를 쏘았다. 손바닥에서 가시가 쏘아져 나갔다.
콰앙. 콰앙!
이내 수백 개의 황톳빛을 머금은 가시가 바닥에서 솟구쳐 나왔다.
- 끄아아아!
게이트에 출몰한 망령계의 마물들을 사정없이 꼬챙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주먹을 쥐며 외쳤다.
"익스플로전(explosion)!"
쾅! 쾅! 쾅!
쿠오오오오.
주변에 있는 망령계 마물들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 두두두둑~
마석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폭발로 인한 연기를 뚫고 한 인영이 내게 느닷없이 돌격해왔다.
도끼를 든 스켈레톤 병사였다. 두려움 따윈 없이 전력을 다한 양날의 도끼를 거침없이 찍었다.
- 카강!
"으으윽!"
맞받은 난 뒤로 밀려났다. 스켈레톤 따위에게 밀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곧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 마기(魔氣)!"
스켈레톤 병사가 마기를 발산한 것이었다.
우우웅.
쏟아지는 스켈레톤 병사의 병장기들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순 없어."
은지 누나 역시 작금의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는 듯 말했다.
스켈레톤 병사가 도끼를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려고 했다.
난 하단부에 힘을 주어 도끼를 발로 짓눌렀다.
두 손으로 도끼를 잡고 낑낑거리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크아압!"
쾅!
머리통이 깨져버리더니 뼛가루가 사방에 튀겼다.
그 와중에도 게이트에선 마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꽤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지만, 권능을 써야 할 때가 왔다.
"누나! 잠깐만 부탁해! 유운검법 운판교!"
"성웅 씨! 어디 가?"
난 구름다리를 높이 펼쳐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다다다닥!
손에 쥔 반혼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수라 마석이고 뭐고 일단 게이트부터 닫아야 했다.
게이트를 갈라버리는 반혼검의 네 번째 권능.
마문일섬(魔門一殲).
내공(內功)을 잔뜩 끌어올렸다. 몸이 부풀어지듯 힘이 용솟음쳤다.
구름다리를 바라보는 망령계 마물들이 아우성쳤다.
활을 든 스켈레톤 병사가 마기를 담아 구름다리를 건너는 내게 쏘았다.
슉~! 슉~!
"이크!"
요리조리 피하며 지척까지 왔다.
마침내 최후의 도약을 했다. 하늘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저 마문을 가르기만 하면 된다!
"반혼검 네 번째 권능! 마문일… 커억!"
난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별안간 누군가 내 옆구리를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
철퍼덕~ 데굴데굴~
"으으으…"
재수 없게도 난 망령계 마물들이 모인 정중앙에 떨어졌다. 좀비가 이빨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광역! 두부(頭部) 과부하!"
내 주변 스무 마리의 스켈레톤 병사들의 머리가 펑펑~ 터져버렸다. 은지 누나가 길을 터줬다.
"헉. 헉. 성웅 씨! 어서 나와!"
"고마워!"
신형을 쏘아 밖으로 나왔다. 나를 차버린 녀석이 누군지 힐끔 바라봤다.
한 노인이 보였다.
"끌끌~ 어이 젊은이 조금 가려웠지? 미안혀. 몇 년 만에 게이트에서 나올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지금 게이트를 자르면 안 되거든."
반혼검의 권능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인영(人影)을 본 나는 어떨떨했다. 쭈글쭈글한 주름, 몇 올 남지 않아 발라당 까져버린 머리, 축 처진 기다란 흰 눈썹을 실룩였다.
대나무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 있는 노인이었다. 당장 눈을 감아도 호상 대우를 받을 노인이었다.
내가 이 노인한테 다리 한 방 맞고 나가떨어졌다고?
키도 작았다. 잘 봐줘도 150cm 정도였다. 영감의 흰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는 허리를 툭툭 치더니,
"아이고~ 곧 죽을 노인네가 뭐 그리 잘생겼다고 뚫어지게 쳐다보나? 소싯적에 잘 나가긴 했지. 껄껄껄!"
"여… 영감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에끼! 영감이라니. 으… 음 그래. 나이가 지긋하니 영감 소리 들을 때도 됐지. 껄껄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다. 살아온 세월이 말해준다. 그는 대나무로 만든 호리병 마개를 뽁~ 하고 따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캬~ 역시 술이 최고야. 청주(淸酒)라고 들어는 봤나?"
- 우웨에엑!
- 크아오오!
노인이랑 말하는 와중에도 망령계 마물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왔다.
"성웅 군. 멀뚱히 보고만 있을 건가? 헌터라면 응당 마물을 잡아야지."
아니나 다를까? 눈앞까지 왔다.
제기랄. 저 영감한테 정신이 팔린 새 삽시간에 포위당했다.
저 영감은 적일까? 아군일까? 도와줄 꼬락서니가 아니니 최소한 아군은 아니다.
"이크~"
날아오는 화살을 간신히 피했다.
노익장은 여유롭게 벽에 걸터앉더니 내가 싸우는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영감 주변으로 좀비가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 꾸에에엑.
어떤 검술을 펼칠 것인가? 스켈레톤 병사를 한 마리 베면서 유심히 봤다.
좀비가 노인을 잡아먹을 듯 덮친다.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내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철푸덕~
"아이고~ 늙은이 살려!"
그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좀비의 턱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달려 물리기 직전이었다.
"……."
"거… 거기! 처자는 뭐하는가! 어서 구해주지 않고! 늙은이 송장을 그리도 보고 싶은가?"
은지 누나 역시 멍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의 권능을 발로 차 막아버린 영감이 고작 좀비 한 마리에 오만 울상을 짓는다.
은지 누나는 손을 펼쳐 영감이 붙잡고 있는 머리통을 없애버렸다.
퍼엉~
"으아아~ 얼굴에 좀비 피가 튀었네! 처자는 어이쿠! 좀 점잖게 죽일 순 없나?"
"아, 죄. 죄송합니다. 어르신."
기껏 구해줬더니 피가 튀겼다며 원망한다. 내가 쭈굴탱이 영감을 보고 쏘아붙였다.
"보통 고맙단 말을 하지 않나요?"
노인은 혼비백산 옷자락으로 피를 닦으며 난리를 부렸다.
- 꾸에엑.
노인이 만만해 보였는지 좀비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그는 대나무 지팡이마저 놓더니 두 손으로 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좀비들이여! 오지 말게! 오지 말게! 이… 이보게 아리따운 처자! 그리고 성웅 군! 나 좀 살려주게나! 제발!"
나 역시 포위되어 있어 쉽사리 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은지 누나가 나았다.
은지 누나는 노익장 주변 좀비와 스켈레톤의 머리를 터뜨렸다.
펑! 펑! 펑!
- 꾸엑~
- 크아악!
광역 두부(頭部) 과부하는 막강한 내공을 잡아먹는다. 그럼에도 전력을 다해 영감을 구해주던 찰나였다.
피슈웅~
"아아악!"
은지 누나가 스켈레톤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버렸다. 화살이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아으으윽."
그녀의 어깨에선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누나! 괜찮아?"
"으, 응. 그보다 할아버지가…."
괜찮지 않다.
"으아아아! 살려주게나!"
"누나. 일단 뒤로 좀 피해."
노익장을 덮친 좀비들 때문에 노인의 모습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난 좀비들로 덮인 영감의 자리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죽었을 것이다.
스팀 롤러의 압착기처럼 좀비들에게 짓눌려 버렸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기(氣)가 느껴졌다. 확실히 예사 노인이 아니다.
"아냐. 살아있어."
그것도 명명백백한 노기(老氣)가 말이다. 풍파가 구름을 향해 솟아올랐다.
- 퍼엉~
영감이 있던 그 자리에 폭발이 일어났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좀비들이 일제히 붉은 폭죽같이 팡팡~ 터졌다.
살 껍데기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루를 만들어 버렸다. 한동안 영감이 있던 자리엔 피의 폭포가 형성됐다.
촤아아. 주루루루룩.
피의 폭포가 걷히자 노인의 몸은 좀비의 피 때문에 빨개졌다. 그는 손으로 얼굴의 핏물을 닦으며 구시렁거렸다.
"아이고~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험한 꼴 보면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알아서 살 수 있었잖아요!"
저 영감! 일부러 위기에 처한 척하면서 우리의 빈틈을 만들어 망령계 마물들의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가 등이 가려운지 대나무로 벅벅 긁으며 웃었다.
"화경에 접어들어서 얼마나 대단한 내공을 가졌나 시험 좀 해봤지. 늙으면 잔잔바리한 호기심이 늘어나는 법일세. 껄껄~"
내가 화경에 진입한 것도 알고 있다.
"당신 대체 뭐하는 노인네요?"
축 처진 하얀 눈썹이 실룩였다.
"껄껄~ 유교 사상이 말라비틀어진 친구구먼. 내가 자네보다 100살은 더 먹었을 텐데 그런 망발이라니? 아니면 SSS급이면 위아래가 없어도 되나?"
"배… 백 살?"
섬뜩!
연이어 노인의 눈빛에 몸이 얼어 붙어버렸다. 사람을 한두 명 죽여본 눈빛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묵힌 살벌한 눈빛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어이. 젊은 친구. 고대의 보패니 뭐니 그딴 거 들고 설쳐도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 해. 안 그런가? 응?"
단지 눈빛만으로 잠시지만 날 제압했다. 이런 고수가 세상에 존재했다니….
바들바들.
이가 떨렸다. 이런 고수가 여태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이제야 왜?
하해(河海)처럼 깊은 눈동자.
더욱 최악인 건 영감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란 사실이다.
저벅. 저벅.
그때 게이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하나같이 옆으로 우르르 비켜났다. 모세의 기적을 보는 듯했다.
"어… 어찌 이럴 수가…."
마물을 조종하다니?
보랏빛의 법복이 치마처럼 바지 하단까지 내려왔다.
"독선. 찾았다."
얼굴에 살점이 붙어 있긴 하지만 앙상한 몰골에 푸르스름하게 뜬 낯빛이 결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목소리 또한 낮고 울리는 섬뜩한 저음이었다.
"오오~ 단테 이게 몇 년 만인가? 물건을 찾았다고? 호오~ 어디 보자고."
단테란 자가 손바닥을 펴자,
순백의 빛나는 돌이었다. 모래와 자갈 사이의 자그만 크기였다. 투명한 빛에 보기만 해도 취할 정도의 아름다운 물건이다.
"껄껄! 모니석(牟尼石)을 찾다니. 내 자네가 해낼 줄 알았네. 이제 당분간 레드 게이트는 출몰 안 하겠구만 그래!"
모니석? 그리고 레드 게이트가 출몰을 안 해? 무슨 말이야?
"제법 곤란했지."
단테라 불리는 자의 법복은 긁히고 헤져 닳은 흔적이 역력했다. 어떤 녀석이랑 싸워서 빼앗은 것 같다.
독선이 지팡이를 들고 모니석을 툭툭 치며 날 보고 말했다.
"자네도 이 모니석이 있어야 고질병이 나을걸세. 껄껄껄!"
"……!"
내가 겪는 후유증도 알고 있다.
"내 오늘 기분이 좋아서 알콩달콩한 커플은 살려둠세. 다만 다음에 볼 때는 얄짤 없을 터이니 목숨 보존들 잘하게. 껄껄"
"독선. 자넨 언제 나왔나?"
나와? 어디서 어딜 나와?
"나야. 며칠 안 됐지. 이계에 눌어붙어 살려고 했는데 필광이가 하도 나오라며 징징대길래 말이야. 낫살이나 먹어서 응석이라니 에잉~ 쯧쯧."
조필광!
그의 대나무 검을 보니 한자로 기(己)라 적혀있었다. 단테라 불리는 자의 구슬 역시 경(庚)이라 새겨져 있었다.
"너희 십간령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