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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89화 (89/200)

89화. 고기 찾아 삼만리

조필광은 제집같이 소파 상석에 착석했다.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훤칠하게 생긴 남자가 음료를 가져오며,

"아이고~ 조필광 이사장님. 친히 누추한 곳에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음료에 독극물은 안 탔으니까 편히 드시면 됩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조필광이 응수했다.

"허허허! 감히 국내 제일의 호텔을 누추하다고 하면 우리 엘리 양이 서운할 것 같은데?"

엘리가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게,

"안 서운한데?"

"하하. 세계를 호령하시는 이사장님한테는 누추하시겠죠. 온갖 범죄를 저질러도 매스컴에선 이사장님을 추켜세우느라 바쁘더라고요."

"껄껄. 그놈의 혓바닥은 더욱 길어졌구먼. 길드가 풍비박산 나서 남의 호텔에 얹혀사는 꼬라지 주제에 말이야."

"힘들 땐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웃음 아닌 웃음을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던 조필광이 어느 한 여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는 과장스런 동작을 선보이며,

"어이구~ 이게 누군가? 윤 주임. 아니. 이젠 윤은지 헌터가 아닌가? 자네가 간호사 때려치우니까 VIP 병실 분위기가 말이 아니야. 대신 자넨 안색이 많이 좋아졌구먼 그래. 허허허!"

"……!"

윤은지의 마린 장갑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조필광을 볼 때마다 옛 연인인 조영대가 떠올랐다. 결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옛 연인이 얼음이 되어 마디마디 조각났던 악몽은 죽을 때까지 앉고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한(恨)이 뿌리 깊이 남아있었다.

보패 마린 장갑을 당장이라도 조필광에게 뻗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 모습을 눈치챈 조필광이 배려하는 어투를 보였다.

"허허! 아직도 서운한 마음인가 보군. 곽목휘를 데리고 왔다가는 자네가 큰일 치를 것 같아서 특별히 스님을 모셨지."

윤은지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당신을 병원에서 확실히 죽여야 했는데 아쉽네요."

윤은지가 눈매를 날카롭게 하며 말하자 조필광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허! 정말이지. 그땐 윤 주임의 일격에 화들짝 놀랐지 뭔가?"

"시끄럽고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사라져."

엘리가 조필광을 쏘아붙였다. 유리잔을 대화의 리듬에 맞춰 톡톡 치던 조필광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래. 다들 성격이 지랄맞게 급하니 용건을 말하도록 하지."

꿀꺽.

여유롭게 입가를 늘이던 조필광이 얼굴을 굳혔다.

"내 손녀 세리를 왜 미싱 게이트로 보냈나?"

좌중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윤은지가 뚱하게 되물었다.

"당신 손녀가 게이트로 간 이유를 왜 우리한테 찾지요?"

"이년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조필광이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쾅!

탁자를 손으로 내려쳤다. 함상경이 자리에서 펄쩍 뛰며 놀랐다.

"으어어억!"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어디 시치미를! 한 시간 전, 미싱 게이트로 성웅이와 내 손녀 세리가 들어간 사실을 자네들도 모르지 않을 터!"

테이블이 무너져 내렸다. 줄줄 흐르는 음료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천하의 조필광도 유일한 피붙이인 손녀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선 참을 수 없었는지,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찌릉. 찌릉.

파계승 녹야의 목에 걸린 묵주가 검은빛으로 출렁이며 구슬 마찰 소리를 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정태수가 손을 뻗어 묵주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두 힘이 교차점에 닿던 찰나,

콰지지직! 우우웅!

주변에 파동이 출렁였다.

조필광이 손을 들었다.

"녹야. 멈춰라."

조필광은 가까스로 흥분을 참으며 말했다. 녹야가 아쉽다는 듯,

"아미타불. 마음먹을 땐 굳게 결행하셔야 합니다."

"시간은 많아."

짝!

조필광이 손뼉을 쳤다.

"비싼 테이블인데 미안하구먼. 내가 두둑이 보상하지. 어쨌든 이에 대해 어디 해명할 사람이 없는가? 없으면 피로 대신해야 할 걸세."

조세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싱 게이트에 들어갔을 리 없다는 확신이다.

이태곤이 나섰다.

"영감님. 성격 진짜 화끈하시네. 이봐요. 우리는 우리 살기도 바빴다고요. 성웅이는 서든 게이트를 자르느라 필사적이지 난 시민들 구하느라 똥줄 빠졌지. 그러던 중 성웅이가 막판에 골렘의 손에 의해 게이트 안으로 끌려가는 게 끝입니다. 당신 손녀가 어딜 가든 우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고요."

조필광은 그저 노려만 보았다. 더 해명하라는 거다.

"아! 정말! 답답하시네. 중요한 건 말이죠. 누군가에게 강압적으로 끌려간 게 아니라 자의적으로 들어간 겁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봤다고요."

조필광의 막무가내는 멈추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네놈들과 성웅이가 수작을 부렸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나!"

이태곤이 답답한 듯 대꾸했다.

"에휴~ 이사장님. 성웅이가 무슨 수작을요? 오히려 세리가 필사적으로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 따라갔는데 말이죠. 무엇보다 저희는 조세리에게 아무런 앙금도 없습니다. 아니, 앙금이고 뭐고 누군지도 몰라요.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우리한테 괜히 윽박지르는데 평소에 착하게 사시던가요? 우리가 당신 화풀이 대상이 될 만큼 만만해 보이나요?"

"끌끌. 이태곤 네놈의 혓바닥을 보니 명은 길지 않은 것 같아. 조만간 요단강 건너겠어."

이태곤이 머리를 긁적이며 롱기누스를 손에 거머쥐었다.

"하하~ 애석하게도 평소에 욕을 부지런하게 먹어서 장수할 팔자입니다."

조필광이 모두에게 말했다.

"자네 보패만 믿고 까불다간 언젠가 큰코다칠걸세. 아무튼 이유를 불문하고 세리를 내 앞에 데려오게. 만약 세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내 그 즉시 이 자리에 있는 모두! 그리고 송현사 땡중 새끼들 모두! 갈기갈기 찢어서 개밥으로 주지. 나 조필광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조필광의 눈빛은 그 어떤 눈빛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인이었다.

모두 식은땀을 흘렸다. 조필광이 자리를 박차며 몸을 돌렸다.

"녹야. 그만 가지. 음료는 잘 마셨네."

바닥 러그는 음료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녹야가 입맛을 다셨다.

"아미타불. 아쉽습니다. 정태수 마스터. 시간 나면 우리 대련이라도 하지요."

무인 정태수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 걸 알았는지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언제든지."

지배인이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조필광이 보이지 않는 한 인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보게 상경이. 황 박사가 자넬 많이 보고 싶어 해. 끌끌."

"……?"

"……?"

뚱딴지도 이런 뚱딴지가 없다. 조필광과 함상경 사이에 교차점이 있다니?

"표정을 보니 자네의 과거는 아무도 모르나 보군. 그래. 재미있군. 재미있어. 으허허허!"

"헤이. 필광. 뭔 개소리야 그게?"

"그건 당사자한테 물어보도록. 그만 가지."

- 위잉.

승강기 문이 닫히고 조필광은 사라졌다.

녹야가 말했다.

"그때 왜 상경이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는 게 많아서 나중에 후환이 될지도 모를 텐데요?"

"저런 벌레 같은 새끼한테 내 시간을 투자하라고?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성웅이를 동료로 만들었는데 봐주지. 끌끌. 그것보다는 내 손녀나 찾을 걱정이나 하지."

"아미타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싱 게이트에는 갑(甲)의 데비루가 있잖습니까?"

"바로 그자 때문에 내가 이리도 속을 썩이는 걸세. 세리의 몸에 흠집이라도 나기만 하면 모든 걸 쓸어 버릴 거야."

* * *

"야! 뚱보! 너 조필광이란 무슨 관계야!"

"상경 씨! 일로 와서 얘기 좀 해!"

"나는 할 말 없다능!"

의심의 눈초리가 함상경에게 쏘아졌다. 상경이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엘리가 문을 부숴 버리려는 걸 이태곤이 말렸다.

"됐어~ 그만해~ 뭔가 사정이 있겠지. 지금 급한 건 성웅이랑 조세리야."

"아오! 퍽! 퍽! 제깟 게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엘리는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조세리는 둘째치고 우선 저희도 성웅 씨를 찾아야만 해요. 5년 만에 열린 미싱 게이트를 무슨 수로 들어가죠? 어디 아는 사람 없나요?"

알 리가 없다. 그들은 게이트를 여는 권능에 관해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정태수가 한마디 보탰다.

"일단 법현 대사님한테 여쭤보는 게 어떤가?"

* * *

"조르바. 술 좀 그만 마시고 정신 좀 차려봐요. 얘기 좀 해요."

"드르렁 ~ 코오~"

사람은 오래 지내봐야 안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낀다. 조르바를 처음에 볼 때는 동족을 멸살 당한 분노에 복수만을 꿈꾸는 고독한 전사로 보였다.

아니다. 그냥 주정뱅이다.

눈만 뜨면 오크통에 럼주를 끼고 퍼마시는 게 일과다. 가끔 대장간에서 허드렛일을 하지만 정확히 뭘 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조르바는 대장간보다 텃밭을 더욱 아끼며 사랑한다. 붉은 달 아래에선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오직 몇몇 종류의 벼과의 식물만 자랐다. 사탕수수의 즙을 짜내 허구한 날 술을 만들어 퍼마시는 데 전력을 쏟는다. 에티오피아 같은 열대 지역도 아닌데 빌어먹게도 쑥쑥 자란다.

"난쟁이 똥자루 양반아! 쥐어 패버리기 전에 당장 일어나라고!"

참다못한 세리가 조르바의 턱수염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드르렁 ~ 코오~"

미동도 없다. 내가 조세리를 붙잡고 말렸다.

"조세리. 진정해. 이래 봬도 우린 얹혀사는 처지라고."

"아휴~ 내가 정말 못살아!"

세리가 관자놀이를 뱅글뱅글 돌리며 신세 한탄을 했다.

"글로벌 바이올리니스트인 내가 지금 이게 뭔 꼴이니? 고성웅. 내 옷 좀 보라고! 엊그제만 하더라도 천만 원 어치의 장인 드레스를 입는 유명인사였다고! 단독 연주회로 NBA 탑선수 및 유명 래퍼들이 나만 보면 군침을 흘렸어! 근데 이 꼴 좀 봐봐. 사람이니? 짐승이니? 길거리에 넝마주이나 덕지덕지 꿰매어서 하루하루 간간이 연명하고 있다고! 아휴~ 내 팔자야. 이 와중에 집주인이란 양반은 허구한 날 술이나 퍼먹고 자빠졌으니 내가 못 살아!"

"……."

어렸을 적, 엄마가 아빨 보며 신세 한탄하는 장면이 겹쳐졌다. 나는 말없이 눈을 내리깐 채 조세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움츠러들었다.

나 역시 입고 있던 옷은 해진 지 오래라 거지가 따로 없다. 12사도 이스가리옷의 패션을 보고 비웃었는데 내가 딱 그 꼴이다. 이제야 놈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도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여야지.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

세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야. 오늘 점심 뭐야?"

"응? 수. 수프."

"뭐! 수으프으으?!"

"으. 응."

간담이 서늘하다. 귀에 잔소리가 날아와 꽂힐 것이다. 뭐라 변명하지?

"고성웅."

"응."

"우리가 수프를 며칠째 먹고 있지?"

"어. 어. 그게."

식은땀을 흘리며 얼버무리자,

"크게 대답 안 할래!"

"대. 대략 4일째 되는 것 같…"

두다다다다!

땅이 꺼질 듯, 세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미쳤어! 나 이제 수프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고! 숨 쉬어도 수프 냄새만 나고 이젠 똥을 싸도 수프만 주르르 나온다고! 천하의 조세리가 이렇게 살아야 해? 당장 내 눈앞에 고기 가져와. 알겠어? 알겠냐고!"

"으. 응."

"그럼 앵무새같이 조동아리만 끔뻑거리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퍽~

"우아앗~"

세리가 내 엉덩이를 발로 차며 바깥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쿵쿵.

"야! 야! 조세리. 문 열어!"

"닥치고 고기 나올 때까지 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아이고. 허리야."

처량하게 하늘을 보니 붉은 달이 반겨주었다. 미싱 게이트는 모종의 이유로 해가 뜨지 않는 세상이다.

고로 시간 개념이 없었다. 낮과 밤의 경계를 알 수 없기에 '대충 며칠이 흘렀겠군.'이라 추론할 뿐이다.

"그나저나 고기라."

조세리 역시 나한테 무리한 요구를 한 줄 알면서도 밖으로 쫓아냈다. 진짜 성질머리가 지 할애비랑 판박이다.

척박한 대륙 북부에 육류는 없다. 중부 쪽으로 가면 제국이나 공국도 있고, 각종 열대 나무도 꽃 피는 싱그러운 곳이라던데….

머드(mud) 골렘은 흙.

스톤(stone) 골렘은 돌멩이.

아이언(iron) 골렘은 철.

본(bone) 골렘은 뼈.

참 답도 없는 북부다. 건설 업자들의 구미에 맞지. 당장 고기를 구해야 하는 내 쪽에선 절망적이다.

그때였다.

저 멀리 지면의 암석들이 붕 뜨더니 괴물의 얼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척! 척!

만화에서나 보는 합체를 로봇마냥 돌덩이들이 얽히고설켜 뭉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 본 터라 익숙했다.

이윽고 완전한 하나의 마물을 탄생시켰다.

두둥~

스톤 골렘(Stone Golem).

꼬르륵~

잡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또 얼마나 많은 칼로리를 소모해야 할까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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