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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92화 (92/200)

92화. 엘프의 숲 (3)

"푸하하! 여기서 죽을 텐데 뭔 개소리냐!"

피슝!

데비루의 레이피어가 감옥의 철창 사이를 파고들어 조필광을 향해 찔러 들었다.

이완해 눈알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으아아아!"

조필광은 놀라기는커녕 다가오는 레이피어를 향해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찌를 테면 찔러 보라는 거다.

'음?!'

레이피어의 날이 검은자 위에 1mm도 남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왔음에도 조필광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보통 강단이 아니고서야 강짜를 부릴 수 없다.

'……!'

오히려 모골이 송연해진 데비루가 레이피어의 궤적을 돌렸다. 데비루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초개처럼 던진 목숨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겁쟁이 쭉정이였나?"

"남자란 자고로 결단력이 좋아야 하네. 한 번 마음 먹은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행해야 하는 법."

노려봤다. 자신만만하고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저 눈빛.

"왜 피하지 않지?"

"왜 피해야 하지?"

데비루는 조필광에 흥미가 생겼다. 레이피어를 칼집에 넣으며,

"크크. 곧 죽을 새끼가 허세 부리기는."

데비루는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었지만 저 호기로운 사내와의 대화는 꽤 흥미로웠다. 지겨운 엘프의 숲에 여흥 거리를 쉽게 죽이긴 아까웠다.

"좀 전에 나보고 우물 안 개구리라고 했나?"

"잘 들었군. 그래. 우물 안 개구리지."

"무슨 뜻이지?"

"푸흐흐흐."

조필광은 대답을 하지 않고 옅은 웃음만 보였다. 데비루는 조필광이 어서 말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데비루.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

"내가 여기서 살아나가나 못 나가나 말일세."

궁지에 몰리니 미쳤나 싶었지만 조필광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따분한 엘프의 숲에만 갇혀있던 데비루는 조필광이랑 말을 섞을 때마다 묘하게 흥분되고 다음 말이 기대되었다.

"좋다! 만약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면 필광이 넌 내게 무엇을 줄 텐가?"

"내 목숨을 주지."

"원래 넌 죽을 목숨이잖아. 내겐 득이 되는 게 없는데?"

"말했다시피 난 살아서 나간다."

"좋아. 그렇다고 치고, 만약 살아서 나가면 내가 조필광 네놈에게 무엇을 해줄까?"

"내 부하가 되거라."

"뭐? 푸하하!"

데비루는 감옥이 떠날 정도로 쩌렁쩌렁 크게 웃었다.

"웃어? 난 목숨을 걸었고, 넌 져도 대기업 직원이 될 수 있다고."

조필광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은 심드렁한 낯짝으로 퉁명스레 말했다.

"대기업? 그게 뭔데?"

"죽이고 싶은 놈 마음껏 죽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 집단. 타인의 방종에 눈을 감아 주는 집단.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다."

"……!"

데비루의 가슴은 알 수 없게 꿈틀거렸다.

"하하. 데비루. 방금 말한 건 빙산의 일각이라고. 아직 말해줄 게 산더미라고. 여기서 놀라면 어떡하는가? 대기업 직원이 되면 가장 좋은 게 뭔지 아는가?"

"뭔데?"

데비루는 조필광의 언변에 슬슬 넘어가고 있었다.

"다양한 여자를 만날 수 있지."

"저, 정말인가?"

데비루는 엘프들의 규율을 극도로 혐오했다. 오직 한 여자만과의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 파격적인 말인가?

"양주에 흠뻑 취한 채, 침대에서 쭉쭉빵빵한 여인네들에 둘러싸여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그만한 피로가 풀리는 게 없지. 그래. 인간계에 대기업 직원은 이러고 논다네. 그러니 자네는 내기에 지면 이득이라는 거지."

억지 화법 같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조필광은 밤새 달콤한 말로 데비루를 구워삶았다.

그 후, 데비루와 함께 보초를 선 엘프 두 명이 조필광을 불안하게 힐끔 감시했다.

윙크를 한 번 해주고선,

"데비루. 나와 함께 인간계로 가지 않을 텐가?"

데비루가 열망의 눈망울로 핏줄을 부릅 세웠으나, 이내 단념했다.

"그럴 순 없다."

"왜지?"

"엘프의 숲을 벗어나면 기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랬다.

엘프 숲에서의 나무가 내뿜는 산소는 신성하고 오염 물질 하나 없다. 또한 악의 기운을 퇴치한다.

이십사도의 권능은 태생이 악(惡)이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엘프들의 힘과 마법의 자양분이었다. 대신 그들은 신성한 산소에 적응이 되었기에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한다.

숲을 나가는 순간, 더러운 오염 물질이 폐 속으로 침투하여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살점이 썩으며 기력이 쇠약해진다.

조필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별걱정을 다 하는군."

"응. 무슨 방도라도?"

"걱정 말게나. 나와 십간의 서약을 맺으면 데비루 자넨 인간의 효험을 얻게 되네. 숲이든 인간계든 자네는 이 힘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거짓말!"

"내 목숨을 걸고 보증하지."

조필광의 확고한 말에 데비루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게 되었다.

"정말인가? 그럼 십간의 서약인지 당장 맺자고."

이젠 데비루가 재촉했다.

조필광이 고개를 저었다.

"서약을 맺으려면 아수라의 힘을 사용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조필광은 전신을 둘러싼 금마석을 가리키며 씁쓸한 몰골을 자아냈다.

전신을 휘감은 금마석을 풀라는 거다. 데비루가 벌벌 떨고 있는 보초 엘프를 향해 말했다.

"야, 열쇠 가져 와."

"데, 데비루 님. 장로님이 아시면…."

- 푸슉!

"커, 으억."

보초 엘프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데비루가 피 묻은 손으로 조필광에게 걸린 족쇄를 풀어주었다.

철컹.

"어우야.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필광. 어서 십간의 서약을 맺자고."

"흐흐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 *

"탈옥한 이방인과 데비루는 그렇게 인간계로 넘어가 버렸지. 곧장 게이트는 닫혀 버렸고 말이야."

사파엘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결국, 조필광은 내기에 이겼고 데비루를 부하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데비루는 인간계에 얼마 있지 못하고 돌아왔지. 처참한 상태로 말이야. 망연자실한 표정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어째서요? 원하는 걸 마음껏 하지 않았나요?"

"엘프의 숲을 벗어나도 괜찮다는 조필광의 말은 거짓말이었거든."

결국, 인간이나 엘프나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진실을 보는 능력 따윈 없었다.

책임 없는 쾌락을 향한 데비루의 본능이 이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조필광의 말은 허무맹랑한 거짓이었단 걸 알 수 있었는데 말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조금씩 긁어주며 넘어오게 만드는 조필광의 언변은 실로 악마적이었다.

"그럼 데비루는 어디 있죠?"

"수십 년째, 지하 감옥에 있네. 조필광을 넣었던 곳에 지금 본인이 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데비루.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사파엘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 전에 자네 얘기를 하다 말지 않았나? 아까부터 자꾸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하던데 말이야."

"네? 그게 무슨? 아…."

"조르바는 어디 있나?"

"네?"

불현듯 치고 오자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엘이 웃었다.

"진즉에 다 알고 있었네. 자네가 드워프의 향을 맡았듯이, 나 역시 자네의 체취에 섞인 타인의 향을 맡았다네. 이방인 여자 하나랑 조르바랑 같이 있었군. 그래."

"다 알고 있었으면서…."

뒷걸음을 치자, 사파엘이 손을 위로 올렸다.

쿠루룽!

커다란 벽이 땅에서 솟아올라 뒤를 막아버렸다. 손짓 하나에 말이다. 이게 마법이란 말인가?

"조필광 떨거지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겠나?"

이루엘의 대거(Dagger)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이방인은 믿을 게 못 돼!"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내가 초조할수록 사파엘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허허허~ 더운 날도 아닌데 땀은 왜 철철 흘리는가?"

난 온몸에 염분을 마구 쏟아냈다.

"다한증이 있어서요. 와하하!"

난 애써 크게 웃었다.

"어디서 개수작을!"

퍽!

"으앗~"

참다못한 이루엘이 내게 발길질을 날리자 뒤로 콰당 넘어졌다. 그녀는 내 위에 올라타 날카로운 단검을 목덜미로 겨누었다. 수틀리면 바로 그을 기세다.

그 위로, 사파엘이 고개를 내리깔며 싸늘한 눈매를 뿜었다.

"불게."

"안 불어!"

그들이 내게 베푼 호의는 어쩌면 조르바를 알아내려는 수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종족 불가침조약을 독단적으로 무시한 드워프 로드에게 손해 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네."

으, 응? 양 종족 뭐?

드워프 로드?

믿기진 않겠지만 옛날엔 두 종족은 서로 한 곳에 살았었다.

다만, 앙숙이었다. 육식, 채식 기본적인 식습관부터 외모나 취향, 말투 등 하다못해 들숨 날숨까지 달랐으며 서로를 부정했다.

사사건건 부딪쳤다.

둘 다 태생적으로 악한 종족은 아니었지만, 같이 있으면 수학 공식처럼 백프로의 확률로 싸우곤 했다.

개인 간 주먹다짐이 패싸움으로 번지자 서로 별거를 하자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양 종족 불가침조약.

골자는 간단하다. 북대륙을 반으로 나누어 서로의 영역에 얼씬도 하지 않는 것. 중부의 제국 부대와 이방인들의 대규모 침략에만 피치 못하게 힘을 합칠 것.

끝.

몇백 년간, 불가침조약은 잘 이행되었으나,

20년 전 깨져버렸다.

"조필광! 네 이노오옴!"

사파엘은 그때의 일에 치를 떨었다. 드워프족의 뒤통수를 친 조필광 일행이 엘프의 숲으로 왔다. 문제는 복수를 한답시고 남은 드워프족들이 조필광의 족적을 쫓다가 엘프의 숲까지 침범한 것이었다.

조필광이 엘프의 숲으로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추적자들은 죽을 치고 기다린 거였다.

사실 척박한 드워프의 땅에 지내다가 달콤한 엘프의 숲엔 먹을 것도 많아서 좋았더랬다.

원정대장 이오타라는 드워프는 엘프의 숲에 여러 가지 보수를 해주며 은근슬쩍 엘프의 숲에 눌러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이 약한 사파엘은 쫓아내지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을 받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쫓아낼 방법은 오직 단 하나.

드워프의 로드에게 불가침조약의 맹세를 지키라며 손해 배상 청구와 함께 엘프의 숲에 기생하고 있는 드워프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엘프의 숲에 엘프들만 사는 것. 사파엘의 야망이었다.

- 두두두두두두두두.

"……."

난쟁이들의 발자국 행렬이 난데없이 이어졌다.

"사파엘 장로. 그렇게 우릴 싫어했다니!"

"이, 이오타 님!"

엘프의 숲에서 드워프들이 튀어나오며 각자 서운한 멘트를 던지기 시작했다.

"장로님. 저희 드워프들이 목책과 지하 감옥도 수리해주고 온갖 윤택한 철강제련을 알려준 것이 못마땅했습니까?"

"장로님. 실망입니다."

"그, 그게 아니라.…."

뒷담화 까다가 걸린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다. 사파엘의 얼굴이 샛노래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장로님! 침입자입니다!"

"뭬라?!"

초소 경계병이 사파엘에게 보고했다. 한 드워프가 엘프의 숲에 침공했다. 펜스를 가뿐히 뛰어넘은 의문의 드워프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조르바!"

그러나 조르바의 시선은,

"이오타아아! 네 이노노옴!"

그는 황금 도끼를 들고 이오타를 향해 돌격했다. 일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퍼퍼퍼퍽!

이오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종족을 배신하고 무리를 이끌고 엘프의 숲에 빈대같이 기생하다니! 네놈이 종족의 망신을 제대로 시켰구나! 선조를 뵐 면목이 없도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오타는 얼굴이 울퉁불퉁 부어가면서 항변했다.

"쿨럭. 로. 로드이시여! 진정하시옵소서! 전 오로지 조필광을 없애기 위해!"

"로드? 네놈은 더 이상 드워프가 아니라 썩어빠진 변종이니라! 우린 네놈 같은 드워프를 둔 적이 없다!"

내가 사파엘을 보며,

"로드?"

사파엘이 덧붙였다.

"조르바는 드워프의 우두머리. 로드(Lord)일세. 몰랐는가? 그를 찾기 위해 여태 드워프의 산맥을 돌아다녔지."

한낱 술주정뱅이가 로드라니.

드워프의 로드인 조르바는 일렬로 세워 엘프의 숲에 들러붙은 종족의 배신자들을 곤죽이 되도록 한참이나 두들겨 팼다.

퍽퍽퍽! 퍽퍽!

"끼오오!"

"로드이시여. 살려주시옵소서!"

"크오오! 종족의 배신자들이여! 로드의 이름으로 널 처단하노라!"

퍽! 퍽!

한동안 조르바의 폭주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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