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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96화 (96/200)

96화. 마왕 이프리트 (1)

우르릉. 콰아앙.

북부 산맥에 거대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연기가 아르카디아의 붉은 달을 뒤덮었다.

거대한 빙벽의 얼음덩어리가 녹고 잘게 부서지자,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났다.

"모두 피해!"

"으아아아~"

빙벽 근처에 있던 이들이 부랴부랴 대피 소동을 벌였다.

데비루의 포복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팔에 상처가 나도 아랑곳 않았다.

모니석이 없었지만 우직하게 기어갔다. 이젠 안쓰러워 보였다.

그리고 처절했다.

그러나 처절하고 끈기가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때론 현실은 쓰라리게 냉혹한 법이다.

추와아아!

수증기로 가득 찬 빙벽 사이로 붉은 이무기가 별안간 튀어나왔다.

"……!"

아니. 이무기가 아니다.

굵직한 붉은 팔이다. 그 팔에선 용암이 흘러내렸으며 고온의 열이 지면을 녹아내렸다.

뚝. 뚝.

용암의 팔이 바닥을 기는 엘프를 움켜쥐었다.

취이이익.

데비루의 살점이 녹아들었다.

"으아아아!"

쿠르릉.

수증기를 뚫고 거대한 빌딩이 걸어 나왔다. 붉다 못해 빛나기까지 한 악마 같은 존재.

데비루를 쥔 채 한 발자국을 조심스레 옮겼다. 발걸음 하나에 지진이 일어났다.

아르카디아 대륙 북부의 마왕.

"이, 이프리트…."

불의 마왕이 깨어났다.

"크아아아악!"

데비루의 몸은 실시간으로 녹고 있었다.

치이이이.

한없이 높디높았던 얼음 빙벽은 액체가 되어 수증기와 함께 녹아들더니 야트막한 산이 되었다.

"아아…."

드워프와 엘프 모두 원초적인 공포에 빠졌다. 패닉 그 자체다.

사이즈가 적당히 커야 용기를 내지. 워낙 엽기적인 크기인지라 덤빌 엄두도 안 났다.

근처에만 있어도 몸이 녹을 지경이다. 애초에 싸움이란 걸 할 수 없는 존재다.

검게 물든 이프리트의 안광이 빛나더니 한차례 포효를 했다.

- 크오오오오!

오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분노가 터진 건지 이프리트의 함성이 귀청을 뒤흔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에 분출되었다. 건식사우나가 자동으로 조성되었다.

쿠와아~

"뜨거워! 살려줘! 으아악!"

"어억!"

빙벽 근처에 있던 몇몇 엘프와 드워프는 용암에 녹아 내리거나 지독한 화상을 입었다.

그저 마왕의 포효에 몇십 명의 종족이 녹아내렸다.

끔찍했다.

아비규환을 보던 사파엘이 어금니를 깨물더니 무언가 굳게 결심한 듯 좌중을 향해 외쳤다.

"전원 즉시! 도망친다!"

몇몇은 사파엘의 명령을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으나, 정신을 차린 대개의 엘프는 용기 있게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장로님. 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엘프의 숲을 지키다가 죽으렵니다!"

"저 역시 명예로운 엘프가 되고 싶습니다!"

"맞습니다! 저흰 끝까지 남아 이프리트를 죽이겠습니다!"

이구동성, 절대로 자기의 세계를 버릴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파엘이 핏발 선 눈으로 호통을 쳤다.

"지랄 염병들 말거라!"

욕지거리가 담긴 일갈을 토해내자 좌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 우둔한 엘프들이여! 종족이 멸망 당하게 생겼는데 긍지고 명예고 어디 있느냐! 허구한 날 과일만 처먹고 검술과 마법 수련을 게을리하니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난 거 아니냐!"

"자! 장로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저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엘프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사파엘은 호통을 이어나갔다.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낀 데비루가 결국 인간계의 조필광과 결탁하여 게이트를 열고 도망가려고 하는 참사를 낳지 않았느냐! 이 사태가 온전히 데비루 탓이겠느냐! 우리 모두의 탓이니라! 현실에 안주하며 노력을 하지 않는 너희들을 얼마나 원망 했겠느냐!"

"……."

"자. 장로님."

"지금부터 우리 엘프는 바뀔 것이다! 과거의 낡은 방식을 뜯어고치고 우리만의 생존방식을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대대손손 엘프들의 피를 이을 수 있도록 살아남는 것이다! 부탁이다! 대륙 남부로 도망쳐라! 가서 새로운 엘프의 숲을 꾸미고 터전을 만들어라!"

"으. 으."

사파엘의 일갈에 엘프 및 드워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했기 때문이다. 가슴에 꽂힌 나태했던 수많은 세월을 반성했다.

"어서!"

사파엘이 마나 확성기를 통해 크게 외쳤다.

"네! 알겠습니다!"

"전원 퇴각하라!"

"끝까지 살아남거라!"

우르르르르르~

대피의 물결이 일어났다.

과거에 안주하며 살아오다 비극을 마주한 엘프는 뿌리 깊은 반성을 하며 남쪽으로 튀었다.

드워프들의 이목이 조르바에게 쏠렸다.

조르바는 시큰둥한 어조로,

"뭘 봐?"

사파엘 같은 명연설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드워프의 로드이시여! 저희 종족에 길이 남을 말씀을…."

"세 치 혀만 나불거리는 엘프와는 급이 다른 말씀을 해주십시오."

"뭬라?"

조르바의 주름살이 지렁이의 향연을 만들었다. 그의 광대뼈가 좌우로 늘어지며,

"닥치거라! 드워프의 땅을 버리고 엘프의 숲에서 과일만 처먹은 주제 잔말이 많구나! 이프리트에게 죽을 것이냐?! 중부로 도망칠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놈들은 지금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배틀 엑스를 휘저으며 다가오자 드워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필사의 도주를 벌였다.

"끼오오오! 도망쳐!"

"이. 익."

"모두 후퇴!"

"으아아아!"

드디어 드워프, 엘프 할 것 없이 게이트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사. 살려줘어어!"

한편, 데비루는 용암의 손에 몸통이 녹아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였지만 생존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필사의 발버둥을 치며 이프리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부질없었다.

치이이익.

이프리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할수록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이프리트는 데비루를 잡은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부글부글.

입을 벌리자 목젖 위로 마그마가 들끓었다.

데비루가 울며불며 아등바등거렸다.

"모, 모쟈. 팻시…. 미안."

- 끄아아.

콰직!

이프리트에 먹혔다.

최초의 십간령 데비루가 죽었다.

비장한 유언을 남기고 죽는, 그런 거창한 류가 아니었다.

죽음이란 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급작스럽고 허망하게 찾아올 때도 있는 것이다.

데비루를 먹어 치운 이프리트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도망치는 자들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이제 우리 차례다.

- 우오오오!

버티지 못할 열풍(熱風)이 한차례 크게 불었다. 사파엘이 초조한 기색을 토해내며 퇴각을 재촉했다.

"다들 서둘러! 이프리트가 공격을 하려고 한다!"

좌중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타는 듯 후끈거렸기 때문이다.

화르르르.

그때였다.

거대한 이프리트가 큼직한 손바닥을 펼치자 용암 국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어 구체로 점차 커지더니 용암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누가 봐도 좋지 못한 징조였다.

"서. 설마 저걸?"

아니겠지. 끔찍한 상상은 하기 싫었다. 제발 던지지만 마라.

- 크오오.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적중했다. 이프리트가 팔을 앞으로 뻗어 용암 덩어리를 던져버린 것이었다.

피난 행렬을 벌이는 수백의 유사 인종이 잿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다.

"으아아아아!~ 용암이 날아온다!"

"끼아! 아버지! 어머니!"

피슈우웅!

커다란 붉은 용암이 잔해물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쏜살같이 날아왔다.

정통으로 맞는 즉시 후폭풍과 함께 전멸은 고사하고 시체조차 찾지 못할 파괴력이었다.

"으아아악! 살려줘!"

패닉 상태에 빠진 종족들에겐 설득력이 없었다. 워낙 거대했고 범위는 넓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흐. 흑. 싸워보지도 못하고."

"억울해! 억울하다고!"

솨아아아아!

용암 덩어리가 지척에 도달할 때쯤이었다.

슈욱~

그때, 한 인영이 불덩어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누가 봐도 자살 행위였다.

사파엘이 절규했다.

"뭐하는 짓이야! 죽어! 죽는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용암보다 짙은 시뻘건 검을 들고 불덩어리를 칼로 찌르며 외쳤다.

반혼검 첫 번째 권능.

"반혼흡성신공(班魂吸星神功)!"

쿠와아아앙!

내가 뛰어든 거다.

그들이 허망하게 죽는 걸 보고만 있기 싫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반혼검을 들고 권능을 써버린 것이었다.

쿠우우!

용암 덩어리와 정면충돌하자 뜨겁다는 기분을 지나 몸뚱어리가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았다.

화끈한 열기에 고개를 돌리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뜨거워!"

"크라이오스 쉴드(cryos shield)!"

사파엘이 내게 마법을 걸었다.

치이이익.

육체의 테두리에 극저온의 냉각얼음이 생성되었다.

용암의 열기가 차단되었다.

죽다 살았다.

"휴. 사파엘 고마워…."

그러나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사람 살려! 사파엘 한 번 더 걸어줘요!"

"……."

더불어 내 몸은 용암 덩어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끼아아아아!"

"저 멍청이가!"

십간령 데비루와 싸우며 써버린 내공과 몸에 난 상처들의 여파로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했다.

슬슬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 권능을 써버린 것이었다. 잠깐이나마 희망을 가졌던 종족들이 다시금 절망에 빠졌다.

"크라이오스 쉴드!"

다시 몸에 냉기가 돌았다.

"제발 살려줘!"

"피해! 어서 피해!"

이대로라면 모두가 죽고 만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꺼내기 싫은 오버파워.

"크림슨 차크라!"

[인간이여! 오랜만이다!]

창세삼정의 어두운 권능을 꺼냈다.

심연의 마기가 내 영혼 속에 침투하며 막대한 양의 마공이 샘솟았다.

무리한 상태에 자주 쓰다 보니 마기가 내 영혼을 갉아먹으며 육체를 장악하려고 한다.

"크오오오오!"

커다란 용암 덩어리가 꿀렁이더니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최대한 빨리 흡수했다.

"으아아아!"

얼음 방어막에 균열이 생기며 거의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

"아. 안 돼! 조금만 더!"

세상이 어찌 이리 야멸차단 말인가!

간발의 차이로 크라이오스 쉴드가 먼저 작살 날 것 같다. 그럼 내 육체도 작살 나겠지.

그때였다.

"익스트림 썬더!"

금빛의 도끼가 날아오더니 내가 들고 있는 용암 덩어리를 후려쳤다.

콰과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더니 용암 덩어리를 수 갈래로 찢어 버렸다.

쾅~ 쾅~ 쾅~

찢긴 용암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마치 메테오(Meteor) 같아 보였다.

- 크오오?

간발의 차이로 이프리트의 불덩어리를 반혼검에 담을 수 있었다.

이프리트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헉. 고마워요. 조르바!"

조르바가 배틀 엑스의 도끼를 위로 치켜들며 자랑했다.

"자네 정말 무식하구먼?"

"근데 그 무기는 뭐예요?"

"엣헴. 고대의 보패! 뢰역근(雷疫釿)이라고!"

"어쩐지 빛깔이 곱다 했어요."

사파엘이 끼어들었다.

"성웅! 방심하지 말게! 이프리트를 보게!"

- 크오오오.

이프리트가 쉴 새 없이 다시금 불덩어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라며, 난 그 자리에서 반혼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반혼검의 두 번째 권능,

"반혼반탄신공(班魂反彈神功)!"

수와아아아아아!

있는 힘껏 이프리트를 향해 반혼검을 휘두르자 부메랑 모양의 용암이 매섭게 이프리트를 향해 쏘아져 갔다.

- 우오오오오?

오랜 봉인에서 깨어난 이프리트는 작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가 쏜 용암 덩어리가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탄생 이후 이런 적은 없었는지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의 눈빛이 더 크게 일었다.

검붉은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호기심 있게 빛났다.

부메랑 용암이 이프리트가 손에 쥔 용암 덩어리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콰아아아앙!

대폭발이 일어났다.

"으아아아~"

"꺅!"

"대륙이 무너진다!"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지면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면은 파도라도 되는 것처럼 출렁였으며, 산기슭의 암석이 흘러내리더니 산 전체가 주저앉기 시작했다.

데비루에게 입었던 상처가 덧나며 호흡마저 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폐부를 녹일 듯 달구었다.

양 구체의 에너지 충돌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인지 폭발 효과가 끔찍할 정도였다.

- 끄오오오오오!

이프리트의 비명이 아르카디아 대륙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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