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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147화 (147/200)

147화. 구제불능의 인격

"허억, 허억. 헉."

정신없이 신법을 펼쳐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200km 넘게 떨어진 곳이다.

송현사.

스님들은 이미 일찍 잠이 들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아미타불."

누군가 환한 미소로 불렀다.

"대사님."

법현 대사다.

그를 보자마자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서럽다.

힘이 있어도 사는 게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작금이 너무 서러웠다.

상경이를 온전히 살릴 수도 없었으며 경찰청에 가서 겁박이나 받았다. 친동생 나윤에게 저주 섞인 말도 들었다. 이런 자신이 한심해 죽고 싶었다.

"이래저래 수고하셨습니다."

법현 대사는 모든 걸 알고 있다.

보지 않아도 말이다.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억울한지.

"대사님. 전 최선을 다했는데 왜 돌아오는 게 이것뿐인가요? 칭찬이나 보상 따윈 바라지도 않았지만…. 너무, 너무하잖아요."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켰다.

법현 대사는 활짝 웃으며,

"오늘 같은 날은 울어도 됩니다."

"으아아아아앙!"

"하하, 성웅 시주.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애네요."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이나 울었다. 목이 메어 쉴 때까지,

동이 틀 때까지.

헌터란 아무리 강해져도 지키지 못하는 게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미움을 받을 수 있다.

* * *

해는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나도 어느새 27살이 되었다.

호텔 방문이 벌컥 열렸다.

"사부! 금일도 대련 부탁드립니다!"

"아아. 또? 귀찮아."

"슌스케. 오늘 넌 나랑 한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어어!"

도망치려는 슌스케를 옷자락을 잡아 정태수가 호텔 연무장으로 끌고 갔다. 아마 피곤죽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면 다행이고.

"에휴~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룸서비스 대신 호텔 뷔페나 먹으러 가려고 연무장을 지나치던 중,

"헉, 헉."

미연은 오늘도 수련 중이었다.

체내의 발키리를 꺼내지 않고도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성내동 사건 후,

슌스케와 최미연은 송현 길드로 입사했다. 레드와 오렌지 게이트가 출현할 때마다 은지 누나가 이 둘을 죽지 않을 정도로 굴렸다.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 시 사망.

이건 엘리의 방문에 적힌 문구다. 저 문을 열었다간 바스타드 소드가 온몸을 찢어 버릴 것이다.

엘리는 임독양맥을 타동한 후, 혼자 방에 틀어박혀 내공심법을 운용 중이다.

윤은지 방은 닫혀 있었다. 오늘 전직 간호사 모임이 있다면서 옷을 화사하게 차려입고 나갔다.

호텔 식당에는 사람들이 줄을 일렬로 가지런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젤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꺅! 고성웅 헌터님!"

"사인 좀 해주세요!"

사람들이 내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기껏 정렬해놓은 순서가 나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트위스트 로우 포니테일로 머리를 뒤로 넘긴 호텔 여직원이 다급히 다가와 내게 억지웃음을 보였다.

"호호, 고 헌터님. 여긴 어쩐 일로? 객실로 가 계시면 저희가 룸서비스를 해드릴 텐데요."

저번엔 여유롭게 먹었는데 하필 피크타임인걸 깜빡했다.

"으윽.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접시에 광어 초밥을 올리며 겨자를 담는 중이었다.

그리고,

- RRRRR.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 여기 남대문 경찰서입니다.]

또 남대문 경찰서다.

"금방 가겠습니다!"

이런 우라질! 밥도 못 먹고 또 뒤치다꺼리다! 초밥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곧장 뛰어갔다.

남대문 경찰서.

그는 옷이 꾀죄죄한 노숙자랑 시비를 붙고 있었다.

"이놈의 미천한 노숙자가 감히 어디 신성한 본좌의 옥체를 건드리는가! 진정 지옥불을 구경해야만 정신을 차리겠느냐!"

노숙자에겐 악취가 진동을 했다.

"나이도 어린 놈의 새끼가 어른한테 말이 그게 뭐야? 노숙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엉?"

담당 형사가 날 보더니 지겹다는 듯,

"고 헌터. 왜 이리 늦게 와?"

난 머리를 90도로 바싹 숙였다.

"죄송합니다."

"올해 들어 대체 몇 번째야? 아무리 골드문 사건 이후, 정신이 망가졌다지만 매번 이러면 우리도 봐주기 힘들어. 정래한 국장님이 특별히 봐주라고 안 했으면 진즉에 철창감이야."

"죄, 죄송합니다."

난 연신 고개를 숙였다. 형사가 보기도 싫다는 듯 손을 훠이 저으며,

"빨리 가서 수습해."

난 곧장 함상경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빡~.

상경이 눈을 부릅뜨고 날 쏘아보았다.

"으아악! 인간! 감히 이 몸에게 손을 대다니!"

"영감. 닥치고 사과해."

난 상경에게 영감이라 말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어허! 천마신교의 교주에게 사과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 말거라!"

상경은 상경이되,

천유희였다.

난 발로 가슴팍을 후려 차 버렸다.

"크아아악! 이, 인간!"

"천마신교 교주고 뭐고 나발이고 아예 주화입마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엎드리라고."

담당 형사가 눈빛을 부라리며,

"고 헌터. 수습하라고 불렀지. 경찰서에서 누가 폭행하라고 했어? 같이 유치장에 들어갈래?!"

"죄송합니다. 흥분하다 보니 그만."

함상경, 아니 상경의 몸을 장악한 천유희가 빈정거렸다.

"X발. 무슨 이런 하찮은 몸뚱어리가 다 있어. 이 새끼는 숨만 쉬면서 살았나."

"제발, 닥쳐! 어르신. 죄송합니다."

머리칼이 얽히고설킨 꾀죄죄한 노숙자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으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붉으락푸르락하며 천유희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뭘 봐? 이 거지새끼야."

"뭐, 이, 익!"

난 부랴부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이 노숙자도 내 돈 몇 번 받아먹은 이력이 있는지라 가볍게 넘어가리라 믿었다.

"어르신. 약소하지만 이거 받으시고…."

딱~.

"아얏!"

노숙자가 손등을 때렸다. 신사임당께서 경찰서 사방을 비산하다가 추락했다. 주변 형사들이 신사임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 어르신!"

노숙자는 컨셉을 바꾸었다.

"내가 지금 푼 돈 받자고 이러는 줄 알아? 노숙자라며 무시하고 때리고 돈 주면 만사 오케이야? 네놈은 지금 날 기만하고 인권유린을 했어!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적당 껏 해! 난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억하심정이 잔뜩 쌓인 그는 오늘 수를 낼 것처럼 보였다.

"네? 돈이 필요 없으시다면?"

"난 저 무뢰배 녀석이 고개 숙이고 정중히 사과하는 꼴을 봐야지만 속이 후련하겠어! 정신 나간 손주뻘한테 더는 이런 수모는 못 견디겠다. 이 말이야!"

노숙자가 돈을 포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한다.

자본주의 세상에 돈을 포기하는 것만큼 복잡한 일도 없다.

서서히 꼬여간다.

아니나 다를까? 천유희의 광활한 웃음소리가 남대문 형사과를 쩌렁 울렸다.

"크하하하! 사과? 니미럴 염병! 돈 한 푼도 없이 길거리를 전전긍긍하며 남에게 시비를 붙어 푼돈이나 좀 잡아먹는 기생충 같은 새끼에게 사과라니? 나 천마신교의 교주! 천유희는 죽었으면 죽었지. 미천한 네놈에게 사과 따윈 결단코 할 수 없다! 오히려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개밥으로 주겠다!"

"이! 이! 이노오옴~! 형사님. 협의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깜빵에 처넣어주쇼!"

이번엔 노숙자도 물러나지 않을 기세다. 일이 꽈배기처럼 꼬여만 간다. 평소에 돈만 잘만 받아 잡수시더니 오늘따라 왜 이래?

골머리가 썩을 무렵이었다. 형사의 안색도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아! 거참! 두 분! 별것도 아닌 시비에 일 크게 벌일 겁니까? 마 형사! 둘 다 유치장에 집어넣어! 쌍방폭행죄야."

"휴~ 네. 선배."

덩치가 곰만 한 마 형사가 천유희와 노숙자를 끌고 가려고 할 때였다. 노숙자의 안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보시오. 형사 양반. 쌍방폭행이라니? 난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세상사 누군들 안 억울한가?

형사는 매몰차게 굴었다.

"같이 때렸으니 쌍방폭행이죠. 거, 두 분 있잖아요. 합의를 안 하면 개별로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나올 수도 있어요."

"으,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벌금도 형벌의 종류이므로 전과자가 될 수도 있다고요. 서류에 빨간 줄 그어진다는 얘기죠."

"으허억! 놔. 이 팔!"

노숙자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간만 되돌린다면 내가 준 돈다발을 당장이라도 받고 합의서에 서명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때였다.

털썩, 하며 누군가 무릎을 꿇었다. 천유희가 무릎을 꿇더니,

"제가 잘못했다능."

순간 노숙자가 흠칫 놀랐다.

"뭐. 뭐? 다시 한번 말해봐."

"제가 잘못했다능!"

"말투가 왜 그래?"

"아하하. 이 친구가 드디어 반성을 하나 보네요! 어르신."

내가 변호했다.

느닷없는 사과에 노숙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난 눈치껏 접인신공을 펼쳐 바닥에 떨어진 신사임당님을 끌어모았다.

"어르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원만한 합의가 어떠신지요? 제가 저 무뢰배를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노숙자의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험험. 왜 이러나 자네?"

라며, 노숙자는 안주머니를 더욱 넓혔다.

"에이~ 어르신. 출출하실 텐데 한우랑 약주값 좀 더 보태 넣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다음부턴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노숙자는 여름이 다가오는 날인데도 두툼한 녹색 점퍼를 입고 안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었다.

"뚱보! 욘석아! 내가 천하의 SSS급 헌터인 성웅이가 손주 같아서 봐주는 거야. 알겠어?"

"네. 알겠다능."

노숙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어이, 형사 양반. 여기다가 합의 사인하면 되는 거지?"

"네."

담당 형사는 한 손으론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런 일이 진저리 난다는 표정이다.

"험험! 노숙자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고!"

큰소리를 우렁차게 외치며 퇴장했다.

"그럼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 헌터. 한 번만 더 이러면 상습 폭행죄로 검찰에 바로 기소 때릴 거야. 더는 우리 선에서 안 끝날 줄 알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난 형사의 으름장을 듣고서야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최근 내 일상은 혼이 섞인 구제불능의 영감을 뒤치다꺼리하는 거다. 다시 상경이의 눈이 희까닥 뒤집히더니,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크아아! 노숙자 네이노오옴!"

별안간 달려드는 상경이, 아니 천유희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이 양반아! 나이를 몇백 살이나 잡쉈으면 조신하게 좀 있어! 아직 경찰서도 안 벗어났어!"

"뚱보 이놈이 내 허락도 없이 무릎을 꿇어? 이익! 감히 천마신교의 명예에 먹칠을!"

딱 잘라 결과만 말하자면,

상경은 천유희와 혼이 뒤죽박죽되었다. 나도 덩달아 정신이 뒤죽박죽될 것만 같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나저나 영감. 아직도 마공이 안 모여?"

천유희는 희멀건 죽에 살인자의 눈알을 섞은 요상한 눈빛을 발하며,

"어이. 인간. 뚱보 심장이 꿰뚫린 날에 사마혈 제대로 뚫은 거 맞아?"

"그거야 영감도 직접 봐놓고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그리고 최종 시술은 영감이 직접 했잖아."

"우라질 썩을. 하필 뭐 이딴 육체에 들어와서는."

애꿎은 돌멩이만 툭툭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법현 대사 가라사대,

상경의 신체 골격은 마공을 익히면 안 되는 최악의 체질이란다. 운동을 아무리 해도 살이 안 빠지고 마공심법을 닦아도 단전은 고요하기만 하단다.

덕분에 난 창세삼정의 내공만 남길 수 있었다. 어두운 권능도 사라졌다. 대신 천유희 영감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하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송현사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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