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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156화 (156/200)

156화. 버마에서 (5)

"끄엉. 끄엉. 훌쩍."

"그만 좀 울고 후딱 걸어!"

내가 버럭 소리치자, 상경은 야멸찬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다.

"마스터는 너무 인간미가 없다능. 난 열불이 치솟아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능."

상경은 타피산에서 끔찍한 악몽을 떨어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린 빨리 올라가서 냉철이도 찾고 영약도 먹고 흑마침도 탈환한 후, 겸사겸사 골든 트라이 앵글도 쳐부수는 거야. 그래야지만 타피산 같은 참극이 다신 벌어지지 않을 거야."

"크흑. 끄엉. 훌쩍."

"땍!"

나 역시 분노에 치를 왜 안 떨었을까? 그러나 냉정을 되찾아야 했다. 그럴수록 원래의 목적을 잊으면 안 된다. 아직 이런 살육의 현장에 익숙하지 않은 상경은 적잖이 혼란스러워했다.

난 지도를 가리켰다.

"그만 울고, 그러니까 이 강물만 쭉 따라 올라가면 된다고?"

"흑. 그렇다능. 현재 우리 위치는 시탕 강(Sittang River)이라능. 물줄기를 따라 걷기만 하면 군대도 마약 캐는 주민들도 안 만나고 수도 네피도에 도착한다능."

상경은 지도만 보고서 일대가 마약이 캐기에 적절한지 아닌지 단박에 알았다.

"에?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자 상경은 지식을 뽐내듯 구구절절 읊었다.

시탕강은 560km의 물줄기를 이뤘으며 우리가 있는 곳은 관엽수림과 열대 우록림(雨綠林)의 지역이란다. 북부의 카친 산지와 동부의 샨 고원은 고도가 높아서 온대적 영향을 많이 받는단다.

당연히 난 무슨 말인지 모른다.

"뭐 어쨌든 군대랑은 안 마주친다는 거지?"

"휴~ 그렇다능."

"며칠이나 걸어야 해?"

"대략 일주일?"

"뭐? 미쳤어?"

"귀찮으면 나 좀 업고 경공술을 쓰라능."

"싫어. 무겁잖아."

"그럼 잔말 말고 걸으라능."

"칫!"

연비가 제로에 수렴하는 대화를 나누며 물가를 거닐었다. 함상경은 해리성 장애처럼 인격이 수시로 바뀌곤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마스터."

"왜?"

"타피산에서 학살하고 군인들이 우릴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지?"

"응. 산 곳곳에 수십의 군인들이 우릴 관찰하기만 했지."

놈들은 주민들만 죽인 후 멀찌감치 도망치다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망원경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감시만 했다.

"공격도 안 할 거면서 왜 그랬을까?"

"당연한 말을 왜 해? 공격하면 내 손에 다 죽으니까 그런 거지."

별안간 호통 소리가 귀청을 뜯었다.

"인간! 틀렸다!"

잠잠하나 싶었는데 천유희로 변했다.

"우왁! 깜짝이야! 소리 좀 줄여."

"에잉~ 쯧쯧. 그럴 거면 애초에 근처에 오지도 않았지. 굳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의 인원으로 과인을 몰래 염탐했겠느냐?"

"영감이 아니라 날 지켜본 거라고."

"흥. 어쨌든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다. 병졸들은 과인을 단지 훔쳐보려고 한 게 아니다."

"으잉? 자세히 좀 얘기해봐."

천유희는 중원 시절 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어린 시절, 산속 촌락엔 하루가 멀다 하고 산적들이 들끓었다. 어찌 보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게 궁핍한 백성들이었지. 백성들의 봉기가 일어나고 금괴와 군량을 약탈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지. 물론 황실에서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지. 현령에게 칙명을 내렸다. 열흘의 기간을 줄 테니 뺏긴 군량을 찾고 훔쳐 간 백성은 척살하라고 말이다."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 현령은 황제에게 보고를 했지."

현령은 뺏긴 군량과 금화를 반밖에 찾지 못했다. 황제가 물었다.

"어찌하여 반밖에 되지 않느냐?"

그러자 현령은 이렇게 답했다.

'어찌 금괴와 군량이 반밖에 되지 않느냐?'

'폐하. 무려 반이나 찾았습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못마땅한 황제는 결국 금의위를 파견시켜 금괴와 군량을 찾도록 명했지."

"호오~ 어떻게 됐는데?"

"금의위가 찾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

"숯에 그을려 타 죽은 백성."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기에 금의위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현령이 하는 말을 믿어야만 했다.

"끌끌, 그리고 현령은 거금을 쓸어 담았지."

"뭐?!"

"나머지 반의 금괴와 군량은 현령이 먹고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니라. 백성들을 도륙하고 태워 죽임으로써 말이다."

등골이 싸늘해졌다.

"놈들이 우릴 감시한 이유가?"

"우리가 자리를 떠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증거인멸?"

우리의 동선을 파악하여 시체를 다른 식으로 죽었다고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껄걸~ 이제야 알았느냐?"

"당장 돌아가자 영감!"

"으아아~ 인간! 이거 놔라!"

난 천유희를 걸머쥐고 다시 타피산으로 되돌아갔다.

* * *

"또푸짜욱."

"또푸짜욱?"

이상하게 생긴 두부 샐러드를 바라보며 엉성한 발음으로 따라 했다.

얄틴 장관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자 통역관이,

"저희 미얀마 남서쪽 지방엔 국수와 두부로 유명한 까웅다잉 마을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병아리콩으로 만든 샐러드라고 하네요."

누리끼리한 넓적 당면 같은 것이 두부란다. 옻칠한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어 보았다.

'우웩! 맛없어.'

더는 먹을 수 없다.

이런 구동훈의 마음도 모르고 얄틴 장관이 어떠냐며 묻는다. 식당 연회장에는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상당수 초대되었다.

찰칵. 찰칵.

"아. 하. 하~ 시, 시원하고 정갈한 맛이 부드러움을 잘 살려주네요."

맛있다는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얄틴 장관이 많이 먹으란다.

'언제 다 먹냐?'

한숨을 푹 꺼뜨릴 때였다.

드르륵.

정장 재킷 안쪽에 휴대폰이 떨렸다가 멈추었다. 얄틴에게 눈인사를 한 번 건네주고 슬쩍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 얄틴 장관.

일명 늙은 여우. 63세의 나이로서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중. 당선 유력. 야심가로서 냉혹하고 정적들 숙청을 스스럼없이 자행한 인물.

그리곤 별표를 해놓고 중요하다는 듯,

☆ 특이사항 : 골든 트라이 앵글과 밀접한 관계. 장치오 측근으로 추정됨.

눈이 번쩍 뜨였다.

'골든 트라이 앵글!'

구동훈은 손을 부르르 떨며 휴대폰을 보느라 떨군 고개를 한동안 들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구동훈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얄틴 장관이 그를 향해 방긋 웃음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타피산에서 무슨 일어 벌어진 건지 당장 서둘러 가야만 한다.

'성웅이는 무고한 사람을 절대 죽이지 않아. 심지어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말이야.'

구동훈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얄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얄틴 장관님. 배가 부르네요. 이제 슬슬 가실까요?"

늙은 암탉 얄틴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구 장관님. 이제 막 식사가 시작된걸요. 그리고 전 아직 배가 고픈걸요?"

"으음."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아까 밥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외교적 결례고 뭐고 나발이고 간에 무조건 현장으로 즉시 갔어야 했다. 식당까지 5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동안 뱅글뱅글 돌았다.

이판사판이다.

구동훈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얄틴의 낯짝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천천히 드시고 오십시오. 전 수행원들과 함께 먼저 타피산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식당에 온 외교단들 모두 분위기가 싸해졌다.

"구동훈 장관."

얄틴 장관이 구동훈을 게슴츠레 쳐다보며 말했다.

"자리에 앉으세요. 1975년부터 이어져 무려 50년이 넘는 양국의 수교를 기껏 식사 한 끼에 물거품으로 만들 작정입니까?"

과연 늙은 암탉답게 정치색 짙은 발언으로 그를 자리에 앉히려 했다.

'더는 끌려다니면 안 된다.'

뭔가를 다짐한 구동훈이 그 자리에서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얄틴의 낯짝이 일그러진다.

"자, 장관님. 왜 이러십니까? 어서 일어나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찰칵. 찰칵.

아니나 다를까?

미얀마와 외신 기자들이 신이 난 듯 카메라를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구동훈은 무릎 따윈 얼마든지 꿇을 수 있다는 듯 간절히 애원했다.

"부탁드립니다! 대규모 미얀마 군인들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일분일초라도 서둘러 진상규명을 정확히 하여 양국의 오해가 없도록 빠른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파르르.

오른 눈 애교살이 미친 듯 경련을 일으킨 얄틴 장관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손으로 떨리는 경련을 멈춘 뒤, 한쪽 무릎을 꿇어 구동훈의 손을 잡았다.

말마따나 보는 눈이 많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구 장관님을 모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귀국의 사정에 대해 생각을 짧게 했었네요. 알겠습니다. 구 장관님의 뜻대로 하지요. 그러니 어서 일어나세요. 이러니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호호."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안색은 파리해지고 있었다.

얄틴 장관은 기자를 물리고 전화를 하고 온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들은 헬기를 타고 타피산 입구에 도착했다.

내려서 또다시 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30분 동안 달렸다. 엉덩이에 멍이 들었을 지경이다. 도중에 차가 파도처럼 출렁여서 멀미도 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니 탄내가 났다. 저 멀리 회색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마을을 커다랗게 둘러쌌다.

"다 왔네요."

얄틴 장관이 처음과는 다르게 딱딱한 어조로 읊조렸다.

더는 억지웃음을 짓거나 허례허식의 짓 따윈 안 했다.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구동훈이 주먹을 꾹 쥐었다. 얄틴의 인상이 구겨질수록 구동훈에게는 유리하다는 증거다.

감식반들을 모아 서둘러 시체를 확인했다. 어찌 된 일인지 10구의 시체만 있었다. 심지어 탄화 흔적을 보아 태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국팀은 곧장 수색에 돌입했다.

십 분이 지났을 무렵,

"구 장관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 이근수가 구동훈을 불러들였다.

"근수 씨. 어떤가요?"

이근수가 손을 턱에 괴더니,

"확실히 군인들 사인은 검에 의한 자상이 맞아요."

"아…."

구동훈은 눈을 찔근 감았다.

'역시 성웅인가?'

그러나 이근수는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시민들 시체입니다. 살점이 모두 녹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대개가 총상과 뾰족한 발톱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근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시민들만 칼에 죽지 않았습니다."

'역시!'

군인은 죄다 칼에 썰렸고,

시민은 총상과 물어뜯기거나 날카로운 손톱에 베여 죽었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철저히 조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구동훈이 구부린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얄틴 장관은 주변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한지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시민들 시체는 세 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얄틴 장관님. 총 34구의 난민 시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뇌에 버퍼링이라도 걸렸는지 잠시 멍 때린 얄틴이 매서운 눈길을 취하며 군인 한 명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붉은 군복을 입은 군인이 다가오더니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통역관님. 뭐랍니까?"

"음, 그게 말이죠. 피해자 현황 파악 도중, 군인이랑 민간인의 숫자가 엇갈린 모양이라고 합니다."

구동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절로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핑계다.

"저희 감식반에 따르면 시민들은 뾰족한 발톱에 의한 자상과 총상만 있을 뿐이지. 검에 의한 상처는 없다고 합니다. 귀국의 감식팀의 진단은 어떻습니까?"

얄틴 장관의 눈에 경련이 다시금 파르르 떨리더니 미얀마 감식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찐발롱니메이!"

그러자 다른 군인이 붉은 군복 옆으로 허겁지겁 다가와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고, 통역관이 설명했다.

"본국 감식팀 역시 한국과 동일한 의견입니다. 그러나 여기 많은 난민 시체들의 발톱 흉터 또한 고성웅 헌터와 같이 온 함상경 헌터의 소행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아무말 대잔치다.

"뭔 말 같잖은 소리야? 힘도 쥐뿔도 없는 헌터라고."

사람은 하도 어이가 없으면 피식, 웃게 된다. 구동훈이 딱 그랬다. 절로 나오는 실소와 함께 한숨을 푹 꺼뜨렸다.

"촬영팀들. 지금 이 장면들. 촬영 다 하고 계시죠?"

"네. 장관님! 물론입니다."

MTC 방송국 촬영팀들은 신이 난 듯 사건 현장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으려는 듯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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