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버마의 끝자락에서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국정원이 탔고 뒷좌석 가운데는 얄틴 장관이 포박된 채 좌우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이근수가 다친 어깨를 부여잡고선 국정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후, 요원님들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희는 꼼짝없이 죽을 처지였습니다."
"아휴~ 무슨 말씀을요. 저희는 그저 구동훈 장관님의 전화를 받고 간 건데요. 오히려 국정원 직원으로서 미리 챙기지 못한 점이 면목 없습니다."
"에이~ 무슨 겸양을 그리 떱니까~ 하하하."
그들은 이제 웃고 농담을 주고 받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감식반을 태운 승합차는 도심지를 벗어나 개활지로 가고 있었다.
"요원님. 저희 공항으로 가는 게 아니었나요?"
"아뇨. 공항으로 갔다간 대기 중인 미얀마 군대들이 가만있을 리 없죠. 얄틴 장관을 포박한 저희들이 오히려 무력으로 진압당할 겁니다. 저흰 청와대에서 보낸 전세기를 타고 이동할 계획입니다."
"아아. 네."
법의관 이근수는 미심쩍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구동훈이 미리 말을 해줬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차 머리를 공항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활지로 빠진 승합차는 비포장도로에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노면이 최악이다.
근방엔 아무리 봐도 전세기가 착륙할만한 곳이 없다. 이근수의 불안은 점차 커져만 갔다.
인적이 없는 평평한 개활지를 지난 자리엔 뿌연 모래가 피어올랐을 뿐이다.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얄틴이 영어로 중얼거렸다.
"……?"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대한민국 수행원들 또한 대개가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얄틴의 혼잣말에 의문을 던졌다.
그리곤,
끼이익.
개활지에서 승합차가 멈췄다.
불안한 이근수가,
"요원님들?"
철컥.
조수석에 앉은 한국 남자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권총을 들이밀었다.
"국정원 같은 소리 하네. 병X들아. 닥치고 내려."
드르륵.
"꺄악."
승합차 문이 열리고 수행원들이 강제로 내려왔다.
부릉, 부릉.
검정색 승합차량 몇 대가 더 오더니 한국 수행원들을 모조리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얄틴이 소리쳤다.
"어서 밧줄이나 풀어!"
"네!"
국정원이라 사기 친 자들이 얄틴을 감싼 밧줄을 풀었다. 사복 차림에 총을 든 용병들이 얄틴 뒤에 섰다. 얄틴이 수행원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검지와 중지를 펴자 안경을 낀 녀석이 담배를 갖다주고 불을 붙였다. 회색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긴 얄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짜 X되는 줄 알았네. 내가 추적 시계 전원이라도 못 켰으면 어떡할 뻔했어?"
"면목 없습니다."
얄틴이 손목에 찬 시계를 벗더니 달랑 흔들며 한국 수행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요즘 시계는 위치추적도 되고 음성통화 및 녹음도 되니 얼마나 좋아? 안 그래? 푸하하!"
뭐가 그리 고소한지 이 순간을 즐기려는 듯 한참을 웃어 재꼈다.
얄틴은 노련했다.
그녀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시계에 위치추적까지 달았다. 성웅의 무력을 알아본 그녀는 일부러 그놈과 멀어지길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것이다.
MTC 촬영팀과 정부 수행원들은 뒤늦게야 덫에 걸려든 걸 깨달았다.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지?"
"이, 이럴 리가 없어."
"젠장. 완전히 속았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욱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 이근수가 절망 어린 표정으로,
"구동훈 장관님이 통화한 국정원들은?!"
"아아, 그놈들?"
자칭 국정원이라 속인 한 한국인이 승합차 뒷문을 열자,
털썩.
피가 범벅이 된 시체 두 구가 바닥에 떨어졌다. 얄틴이 이죽거렸다.
"보다시피?"
이미 정체는 발각되었으며, 통화 위치추적으로 국정원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얄틴의 사병들은 한국 측 국정원들을 죽이고 대신 마중을 온 거였다.
"저것들 가진 것 다 뺏어."
"넵!"
얄틴 경호원들이 MTC 방송국 촬영 장비를 모조리 뺏었다.
"안 돼!"
퍽. 퍽.
"으으악!"
박상태 카메라 감독이 필사적으로 카메라를 끌어안고 버텼다. 이 자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철컥.
싸늘한 금속이 박상태 머리에 닿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 틈을 타 용병이 카메라를 뺏었다. 다른 나머지 자들도 총구를 보자 어쩔 수 없이 놓았다.
[탕. 탕.]
카메라 액정에 버튼을 누르자 선명한 고화질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타피산에 벌어진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얄틴이 담배를 뻐끔 피면서,
"휴~ 이게 세계 언론에 퍼졌다고 생각해봐? 완전 끔찍하지 않냐? 삭제 버튼이 어디 있더라?"
그녀는 흥얼거리면서 버튼을 마구잡이로 조작했다.
"안 돼! 이 X발 것들아!"
"상태 씨! 위험해요!"
박상태가 얄틴에게 달려가자 얄틴은 카메라를 응시한 채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알틴이 검지를 당겼다.
리볼버 격철이 뒤로 튕기며 불꽃이 튀겼다.
- 탕!
어찌할 틈도 없었다.
박상태의 이마 정중앙에 붉은 액체가 터져나왔다.
풀썩.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몸을 몇 차례 부르르 떨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감독님. 감독님!"
법의관 이근수가 박상태의 몸을 흔들었지만 쉼 없이 피만 뿜어댈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표독한 눈길로 이근수가 얄틴을 노려보았다.
"으으으아아!"
"어차피 다 죽을 거 뭐하러 아등바등거려?"
몇몇 수행원들은 무릎을 꿇고 손이 닳도록 빌었으며, 대개는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만행의 고발이고 뭐고 죽음이 코앞이 닥친 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본인이 생존하는 것이다. 알량한 애국심을 위해서 반항하려는 이는 없었다.
법의관 이근수를 제외하곤.
철컥. 철컥.
용병들이 소총을 들고 한국 수행원들을 겨냥했다. 용병들이 얄틴을 힐끗 바라봤다. 사격 명령을 기다리는 거다.
박상태를 껴안은 이근수가 얄틴을 째려보며,
"지옥에 가서도 네놈들을 저주할 거다."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얄틴이,
"어이. 안 쏘고 뭐 해? 내일 죽일래?"
얄틴의 말을 알아들은 통역관은 '살려주세요.'라는 절망 어린 말만 내뱉었다. 이미 표정은 저승을 유영하고 있다.
두두두두두!
얄틴의 한 마디에 소총 총구에서 미친 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끼야아악!"
그때였다.
"화평주(火平柱)!"
수행원들 주변으로 땅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틈 사이로 불의 기둥이 치솟았다. 용병들이 쏜 탄환은 불기둥에 가로막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화르르르.
"으아악! 뭐야!"
불기둥에 갇힌 한국 수행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기 바빴다. 얄틴과 용병들은 불기둥과 멀찍이 떨어졌다. 그들의 눈동자는 놀라움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초자연계 불의 각성자?!"
"서, 설마…."
얄틴의 눈매가 와락 일그러졌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익히 들었다.
저벅. 저벅.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 사이에서 유유히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남색 뉴스보이캡 모자로 눈매를 가렸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그리고 얼굴엔 가면을 썼다. 검정색 가죽 차림이라 그런지 가냘픈 몸매의 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누구냐!"
세상엔 그늘진 조직이 있다. 골든 트라이 앵글조차 건드리지 못했던 비밀 조직.
조필광도,
헌터국도,
골든 트라이 앵글도 그들의 전력은 고사하고 본사가 어딘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상의 어두운 일들에 깊숙이 관여한 채 필요할 때만 나타난다는 세계 최강의 헌터 집단. 누군 악의 축이라 말하지만, 정의의 사도들이라 찬양하는 이들도 있다.
얄틴이 중얼거렸다.
"을지회(乙支會)"
몇 년 전부터 바깥세상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병장기도 없이 격술로 막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근데 이 아이가 최근에 초자연계 불의 아수라 마석까지 먹었단다. 그 힘은 너무 강해서 아무도 막지 못한다고만 알려졌다. 그 불의 아이가 지금 얄틴의 눈앞에 나타나 버린 거다.
얄틴은 쿤사 장치오의 지시사항이 떠올랐다.
'얄틴.'
'네. 쿤사시여.'
'네년이 만날 일도 없겠지만 혹시나 을지회 멤버를 마주치게 된다면 가급적 건드리지 말거라.'
'천하의 쿤사께서 뭐가 두려우신지요?'
'두려운 게 아니라 귀찮아질 뿐이다.'
그녀도 한 국가의 장관이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일반인하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국가 전복 반란군과 카자흐스탄 IS 집단을 초토화시킨 사상 최강의 집단.
개중에서도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걸로 유명한 각성자.
"홍매(紅梅)."
"얄틴. 날 알고 있네?"
붉은 매화란 뜻을 지닌 홍매는 원래는 불같이 성격이 괴팍하여 지어진 별칭이었으나 얼마 전, 불의 아수라 마석을 먹어 버리자 홍매는 그녀를 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얄틴도 말로만 들었지. 을지회 단원은 난생처음 마주치는지라 내심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죽 차림의 홍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여유마저 보였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였다.
얄틴이 말했다.
"을지회 심기를 거스를 짓은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심기는 이제 거스르게 될 거야."
"뭐라?"
뭔 억지로 사람을 궁지에 밀어 넣으려고? 얄틴이 눈살을 찌푸리자,
탕! 탕! 탕!
용병 한 놈이 소총으로 홍매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맞춰버렸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꺾였다.
"우하하! 네 이년! 맛이 어떠냐!"
추종본능이라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한 놈이 어떤 행동을 취하면 뒤따라 같은 행동을 보인다.
두다다다! 탕! 탕!
다른 용병들도 조준간 연발로 맞춰놓고 사정없이 홍매의 육체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얄틴이 버럭 소리쳤다.
"쏘지 마! 쏘지 말라고! 이 등신 새끼들아!"
세계는 아직 초자연계에 대해 무지렁이들이 즐비했다. 작심하면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맞출 수 없는 그들이 가진 고유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개활지에선 화약 냄새가 들끓었다.
용병들이 사격을 멈추었다.
씨익, 하고 홍매가 섬뜩하게 웃었다. 그녀의 가녀린 육체가 언제 총알에 맞았냐는 듯 제자리를 찾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총으로 맞혔잖아!"
"이, 이런 염병!"
홍매가 얄틴의 비굴한 눈동자를 보며,
"얄틴. 내가 말했지? 심기는 거스르게 될 거라고."
"이익! 홍매. 잠깐 얘기를 좀 하지."
얄틴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닥쳐."
라며, 주머니에서 뺀 검지를 위로 들어 올리자,
화르르.
"으아아악!"
"아아악!"
용병들이 있던 그 자리에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아아…."
차원이 다른 힘이다.
찰나의 연소과정에 모든 용병들은 뼛조각만 남겼다. 얄틴은 이대로 있다간 본인도 죽을 목숨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승합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악셀을 힘껏 밟았다.
부와아앙.
공회전 소리만 날 뿐 차는 일절 앞으로 가지 못했다.
"어, 어째서!"
"얄틴."
얄틴이 앞을 보니, 홍매가 승합차 보닛에 한쪽 발을 올리고 막고 있었던 거다.
"으어어어."
그녀가 한쪽 손을 불길로 만든 후 어깨를 뒤로 젖히며,
"시동 끄고, 내려."
얄틴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호, 홍매. 보다시피 난 분명히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어. 그런데 용병 새끼들이 일방적으로 쏜 거란 말이야. 홍매. 너도 봤잖아. 응?"
"상한 내 기분은 어떻게 할 건데?"
"미안하지만 돈으로 어떻게 안 될까? 나 돈 많아."
"그럼 네가 죽인 저 한국인은?"
"아…."
40대의 카메라 감독 박상태를 가리켰다. 홍매가 바닥에 떨어진 리볼버 권총을 주운 후,
툭.
한국말로,
"어이, 법의관 아저씨."
"…!"
"내가 죽일까요? 아저씨가 죽일래요?"
"제가 하겠습니다."
이근수가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집었다. 홍매는 팔짱을 끼고 무신경하게 이근수를 봤다. 얄틴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이근수에게 삭삭 빌었다.
"플리즈 헬프미! 헬프미!"
"닥쳐! 이 X발년아!"
이근수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리볼버 총구에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애걸복걸하며 손을 뻗은 얄틴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총알은 얄틴의 가슴에 구멍을 만들었다.
"커어억. 억. 억."
"허억. 헉. 헉."
도둑질도 처음이 어렵다.
한번 해보면 별것 아니란 걸 깨닫게 되고 다음은 쉽다.
얄틴은 아직 죽지 않았다.
가슴팍에 피를 철철 흘러넘치고 있지만, 권총 한 방에 즉사하진 않는다. 이근수는 떨리는 손으로 조준을 정확히 한 다음 과녁을 향했다. 얄틴은 죽기 직전까지 삶을 포기 하지 않았는지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며 빌었다.
"프, 플리즈 헤,헤헬…."
"죽어!"
탕! 탕! 탕!
"컥, 컥. 컥."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얄틴의 몸이 한 번씩 들썩였다. 남은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근수는 미친 사람이 된 것처럼 방아쇠를 당겼다. 얄틴은 가슴, 머리부터 여러 군데 벌집이 된 채 죽었다.
딸깍. 딸깍.
총알이 다 떨어지자 홍매가 이근수에 들린 리볼버를 가져와 권총을 그 자리에서 조각조각 해체하고 버렸다. 이근수는 바닥에 엎드려 박상태 감독을 향해 울부짖었다.
"감독님! 어흐흑. 크흑. 으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