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밀리언 마켓 D-1 (4)
보랏빛 마공이 요리조리 독사처럼 라스콜을 추격했다. 일종의 유도탄이다.
바위를 밟고,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올랐으나, 견후추살은 라스콜의 흔적을 귀신같이 쫓아갔다. 백(白)의 기를 머금은 라스콜이 견후추살을 찍어 눌렀을 때였다.
"아프잖아! 이 새끼야!"
"……!"
관짝에 맞아 널브러졌던 구동훈이 바닥의 모래를 집고 라스콜의 눈알에 뿌렸다. 일류 무공자라고 해도 부지불식간의 공격엔 무방비였다.
"으아아악!"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라스콜이 비명을 질렀다. 문제는 라스콜의 후미를 잡은 내 눈알에도 들어갔다는 거다. 보이지도 않은 눈으로 까딱했다간 구동훈도 원 플러스 원으로 벨 수 있었다. 결국,
"인간! 뭐 하는 짓인가!"
라스콜을 끌어안고 얼굴에 안면 박치기를 했다.
퍽! 퍽!
"크허어억! 끼오옥!"
무지막지하게 촌스럽고 원시적인 공격에 라스콜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우오오오!"
공중으로 점프한 천유희의 안광에 살기가 파다했다. 무릎을 오므리며 음흉한 살기를 토했다. 나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여, 영감. 하지 마. 하려던 거 멈춰."
천유희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닥쳐라앗!"
굽힌 무릎을 일자로 활짝 펴며 라스콜의 등짝을 내리찍었다. 나도 같이 충격을 입었다.
- 퍽~
"끄아아악!"
"우왁! 영감! 노망났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몸을 돌렸다.
쿠웅~
라스콜을 쿠션 삼아 바닥에 무사히 착지했다.
"끄허어어억."
쿠션이 된 라스콜은 허리가 반쯤 접힌 채 꼴사납게 자빠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제 피를 마시려 했다. 주기적으로 피를 마셔야 저 힘을 유지할 수 있나 보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이 라스콜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어림도 없다! 키햐아아!"
팻시아가 입을 벌리자 라스콜이 마시려 했던 피가 깡그리 그녀의 입으로 흡수되었다.
촤르릅.
"아아아…."
안색이 창백해진 라스콜의 동공에 지진이 일더니 의식을 잃었다. 천유희가 용맹하게 다가서며 그의 숨통을 끊으려 마공을 잔뜩 끌어 올렸다.
"이걸 콱! 그냥!"
"영감! 참아. 취조해야 해."
"인간! 비키라고!"
"영감!"
내가 천유희의 눈을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누구보다 녀석을 죽여버리고 싶다. 찢어 버리고 싶다. 가까스로 마음을 억눌렀다.
"죽여도 내가 죽여."
"…칫."
피를 먹지 못하도록 손발을 포박했다. 혹시 몰라 등짝을 벗겨보니 이십사도의 문양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휑한 등은 사막의 가뭄처럼 쩍쩍 갈라져 가냘픈 살갗만 보였을 뿐이다. 죽을지도 모르니 우리가 두들겨 팬 곳은 응급 치료했다.
"으으으…."
밤이 돼서야 놈은 깨어났다. 병약한 놈은 좀전의 사투를 기억하지 못했다. 함상경, 천유희 콜라보를 보는 것 같다. 아니 이 둘은 기억이라도 공유하는데, 라슈라프는 아예 먹통이었다. 팻시아가 동시통역을 맡았다. 놈은 하염없이 울었다.
"엉엉.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이름은?"
"라, 라슈라프입니다. 엉엉."
"울지 마! 콱!"
"성웅 오빠!"
아프간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단다. 겁도 많고 몸도 약해서 동네 애들한테 두들겨 맞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처음 본 자가 따라오기만 하면 돈을 준다고 했다. 무작정 따라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돈 같은 건 없었다. 대신 모진 고문을 당했다. 몇 날 며칠을 말이다. 라슈라프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으나 그들의 이유 없는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으허어어억! 아악!"
라슈라프는 말하던 중, 악몽이 떠올랐는지 달팽이처럼 몸을 구부리고 하염없이 벌벌 떨었다. 팻시아가 따뜻하게 그의 몸을 감싸고 다독여주자 금방 나아졌다.
라슈라프는 말을 이었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자유의지마저 희미해질 때쯤, 순백의 옷과 히잡을 두른 자가 나타났다. 그가 말을 하면 그대로 따라 해야 했다. 쿠크리로 손가락을 긋더니 떨어지는 피를 먹으라길래 먹기도 하고 영혼을 바치니 뭐니 알아듣지도 못할 주문도 외웠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라슈라프의 뇌에 몇 가지를 각인시켰다.
"뭔데?"
"뭐냐능?"
라슈라프를 향해 기대 어린 눈망울을 보였다.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말했다.
"그 전에 저도 여, 여러분들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 안 해줄 수도 있어."
"동양의 여러분들은 왜 이런 일을 하는지요?"
"냉철이와 흑마침을 되찾기 위해서야."
"흑마침이요?"
똑똑.
내가 함을 두들기며 말했다.
"여기 있잖아."
일동 경악이 담긴 얼굴로 날 바라봤다. 개 중엔 구동훈이 가장 억울해하는 표정이다.
"서, 성웅아? 농담하는 거지?"
"아닌데? 이 안에 든 거 흑마침 맞아."
구동훈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송현사 시절을 지낸 동훈이 형은 장관까지 하면서 시간 나는 대로 찾으려고 했던 거다.
"저, 정말이야? 그 말로만 듣던 흑마침이 이 함에 담겨있다고? 그, 그럼 이 함은 관짝이 아니라…?"
내가 태연하게 답했다.
"응. 마문함."
마문함(魔門函)
흑마침과 백마침을 넣어 봉인한 보패로, 개봉 즉시 지상에 게이트가 열린다. 아니, 열렸다. 동훈이 형이 내 멱살을 거칠게 잡으며 흔들어댔다.
"이 자식아! 알면 형한테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나 바보 만든 거냐아아!"
"으아아악! 옛날에 할아버지랑 대사님이 다 알려줬잖아! 특이한 관짝에 염소 목걸이라고 수없이 알려줬는데 허투루 들은 형이 바보지!"
"뭐? 바보? 이 몸은 한국대 출신에 송현사 1기 졸업생이라고! 내가 그런 걸 까먹을 리가 없어!"
"켁켁! 형! 게다가 반혼검까지 울었으면 보나 마나 마문함에 흑마침이지! 뇌는 뭣 하러 달고 다녀!"
"두 사람 다 그만 하라느응!"
그 후 몇 분간 산속에 비명이 울렸다.
하긴, 동훈이 형은 말로만 들었으니 제대로 알 리가 없다. 반대로 난 조세리의 히스토리아에서 분명히 보았다. 라스콜이 염소 목걸이로 이 마문함을 여는 걸 말이다. 게이트의 시작과 끝을 가리킨다. 백마침과 흑마침이 고이 잠든 걸 이 썩을 테러리스트가 열어 버린 거다. 게이트의 야수는 인류의 악한 마음을 실물로 발현한 최악의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
"그래서 목적이 뭔데?"
진중한 나의 물음에,
"이 관짝을 열면, 푸른 게이트의 마물이 나온댔어요. 음음…."
"그리고?"
"이 함과 침을 갖기 위해 많은 자들이 등장한댔어요. 으음. 개 중 푸른 머리칼의 소녀를 보면 망설일 것 없이 제 피를 뜯어 먹으라고 했어요. 저의 역할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이죠."
푸른 머리칼의 소녀라? 헌터인지 뭔지 범주가 넓다. 아무튼 확실한 건,
"장치오가 목적이 아니야."
라스콜은 장치오가 최종 타겟이 아니다. 거대한 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흑마침을 유인구로 쓸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라슈라프는 죽지 않기 위해서인지 묻지도 않은 말들을 허둥지둥 쏟아냈다. 필사적으로 뇌의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다가 제 손뼉을 치더니,
"아아! 또 기억났어요."
다들 라슈라프의 헛소리에 지친지라 눈꺼풀이 닫혀왔다.
"으음, 뭔데?"
"여러분들과 같은 늙은 동양인이 부하들을 대동하고 온다고 했어요. 열 명의 초강자들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십간령!"
"조필광!"
나와 구동훈이 동시에 말했다.
잠이 확 깼다. 동훈이 형의 안색도 시퍼렇게 변했다. 송현사의 악몽을 떠올렸다.
"제, 제가 아는 건 끝입니다."
라슈라프는 손짓과 몸짓을 다 해 아는 걸 전부 토한 듯 보였다.
"라슈라프는 어떡하냐능?"
"딱히 쓸모가 없는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라슈라프는 효용 가치가 제로다. 들을 얘기 다 들었고, 라스콜 본인이 등판하지 않는 이상 그저 병약하고 나약한 녀석일 뿐이다. 그렇다고 제 피를 스스로 먹고 등판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폭력적인 작업을 거쳐서 토사구팽시키는 게 모범적인 답안지다.
"우와앗! 살려주십시오."
내 눈을 봐서일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넙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이봐. 더 아는 거 없어?"
"으허허억!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해코지도 안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다. 이미 이 땅에 수많은 인명을 학살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짓이다. 수족을 묶어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일이면 밀리언 마켓이 개최한다.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다.
"마스터. 뭐 하냐능?"
"자려고. 보면 몰라?"
일단 모든 고민은 자고 나서 생각하는 거다.
"라슈라프는 어떡하고?"
"보고 내일 풀어줘야지 뭐."
"에에에?!"
"서, 성웅아! 잠깐 얘기 좀 하자. 쟤가 연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봤어? 태을 어르신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고 생각해봐. 너 이럴 수 있어?"
"엥? 갑자기 할아버지 얘기가 왜 나와? 죄 없는 사람 죽이는 것 아니랬어. 형도 신경 끄고 자."
구동훈은 내 결정을 쉬 받아들이지 못했다. 보라의 털을 곤두세우며 손톱을 길쭉하게 뻗었다.
"저 친구를 살려두면 태을 어르신 볼 낯짝이 없어."
현직 장관의 말이다.
"미쳤어? 저 녀석은 그냥 이용만 당한 놈이라고. 한 번 살인에 맛 들이더니 아주 싸이코패스가 다 되었네."
"밑져야 본전이야."
"그냥 살인이야. 좋은 말할 때 이불 뒤집어쓰고 자."
"산속에 노숙인데 무슨 이불?"
"해 본 말이지. 그냥 자라고."
"……."
"마문함과 흑마침 말고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야."
"뭐?"
조그맣게 튀어나온 바위에 외투를 벗어 베개로 쓴 내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말했다.
"이십사도는 와해됐어."
누우려던 구동훈이 벌떡 몸을 직각으로 세웠다.
"뭐?!"
"아~ 거참. 소리 좀 줄여. 다른 특별한 이유가 아니야. 수장인 라스콜이 등판했다는 게 그 반증이야. 우리가 없앤 사도들도 몇 명 있었지만 결국 본인이 몸을 빌려 직접 나섰잖아."
"다른 사도들을 믿지 못할 정도로 본인이 나서야 했다는 건가?"
"빙고."
손가락을 튕기며 활짝 웃었다.
"이번 밀리언 마켓도 흑마침에 가까운 물건이 나타나면 장치오가 직접 확인하려 들 거야."
다른 보패도 아니고 태초의 보패다. 결코 다른 사람을 시킬 리가 없다. 잘만 이용하면,
"냉철이도 구할 수 있겠어. 장치오가 붙잡고 있다면 말이지."
다음 날,
- ♩♪♬~
팡파르와 드럼, 기타가 어우러진 신명 난 멜로디가 훼이싸이를 감돌았다. 꽤 흥겨운 축제 분위기다.
일순 뚝, 하고 모든 음악이 멈췄다.
"……."
해외 관광객과 마켓 페스티벌 참가자들의 수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잠시 후,
- 두구! 두구! 두구!
시상식 발표 직전의 트레몰로 화음이 점차 대중들의 귓가에 꽂히기 시작하며 관중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연단에 진행자가 버럭 나오더니, 격정에 찬 목소리를 억누르며,
"자!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와아아아아아!"
"루크다! 루크 폴로!"
"꺅! 오 마이 갓~ 홀리 쉿!"
미국의 개그맨 출신이자, 세계적인 MC로 자리매김한 루크 폴로다. 미국의 CBS에서 '루크 폴로 랩소디'란 토크쇼로 10년간 자리를 지키다 은퇴한 후 세계 각지를 떠돌며 강연 및 사회 진행을 맡았다. 그의 언변은 유머와 감동을 동시에 이끌어내어 세계 각지 축제 및 연설회에 초대받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가 오늘 밀리언 마켓 사회 진행자로 초대받아 머나먼 라오스 훼이싸이로 오게 되었다.
수많은 군중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연단으로 향했다. 그는 영어와 라오스어를 간간이 섞여가며 말을 이었다. 이미 루크 폴로의 천변만화한 표정은 세계 공용어 수준이었다.
"간단하게 퀴즈 하나 드려볼까요? 미얀마, 라오스, 태국 이 3개국의 대통합을 이룬 최초의 장군이자 쿤사가 누굽니까?!"
일동 외쳤다.
"장치푸!"
"그럼 몽타이군과 샨족의 위대한 독립가로서 세상의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끝까지 저항한 분은요?"
"장치푸!"
모두 질세라 장치오의 친부인 장치푸를 외쳤다.
"하하! 너무 쉬웠나요? 그럼 위대한 장치푸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아 가시고 대를 이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위대한 장군! 쿤사 장치푸의 업적을 그대로 승계하여 골든 트라이 앵글을 더욱 풍족하고 윤택하게 일궈낸 빛과 소금 같은 쿤사는 누구지요오옷?"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장치오!"
진행자가 손을 귀에 갖다 대고 장난스레,
"뭐라고요? 제 귀에 들리지 않는데요? 다 함께! 뭐라고요?!"
"장! 치! 오!"
"장! 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