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게이트를 삼킨 자
"이, 이 무식한 새끼!"
거대한 폭발의 여파는 성웅뿐만 아니라 야차에게까지 번졌다.
위이이잉.
야차는 푸른빛의 팔각(八角)의 방어막을 생성했다. 다시금 건물과 산은 허허벌판의 평야가 되어버렸고 근방의 생명체는 뼛조각도 찾지 못한 채 가루가 되었다.
녀석은 움직이는 재앙(災殃)이다.
워낙 압도적인 파괴력에 장치오를 구하려고 출동한 부하들이 가까이 올 수 없었다. 사정거리 이내 접근 시 즉각 사망이라는 걸 알기에 말이다. 단지 멀찍이 떨어져서 초조하게 바라만 볼 뿐이다.
"으아아아아."
"지구 종말이야. 인류가 멸망한다고!"
살아남은 관광객과 상인 및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냅다 도망쳤다.
성웅은 반혼검을 꾹 쥐었다.
'여기서 도망칠 순 없다. 무조건 잡아야 한다.'
성웅은 거대한 재앙 덩어리인 야차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덤벼라. 이 괴물아."
비장한 각오로 말했지만 정작 야차의 시선은 성웅에게 있지 않았다. 인간 따윈 죽든 말든 안중에도 없는 마물 야차는 눈앞의 성웅은 본체만체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퍼드득, 날아올랐다.
"얼레?"
성웅의 손아귀에 있는 마문함이 일 순위가 아니었던가? 몸체보다 기다란 야차의 푸른 날개가 좌우로 펄럭거리자 강한 바람이 일렁였다.
야차는 계속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괴물의 눈동자는 여유로움이라기보다는 촉박한 듯 정신없어 보였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
위이이이잉.
하늘을 바라보니 야구장 크기의 블루 게이트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게이트가 사라지고 있어?'
모종의 이유로 게이트가 닫히고 있었고 야차는 그걸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트는 해당 마물이 소멸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야차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닫히고 있다. 즉, 누군가 인위적으로 닫고 있다는 얘기였다. 인간계에 온 야차는 다시 블루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야차는 인간계에 오자마자 마문함을 부수어 버리려고 했던 것이었다.
다른 그 무엇보다 마문함은 최고의 우선순위일 텐데 야차의 저런 행동은 단 한 가지밖에 추론할 수 없었다.
마문함보다 더 급한 존재가 와 있다.
야차가 블루 게이트와 대지를 번갈아 보며 혼돈에 빠진 사이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정신없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늙은 검객만이 피하지 않고 우두커니 있던 자리를 고수했다. 성웅은 느꼈다.
'강하다!'
초로의 검객은 싸늘한 시체 같은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시체로 보이는 녀석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약한 기가 느껴졌지만 죽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가까울 정도다. 쓰러진 자는 검은 머리카락이 눈을 덮을 만큼 길렀으나 성웅은 그를 똑똑이 알아볼 수 있었다.
"냉철아!"
냉철이었다.
성웅은 순간 너무 화가 나 피가 역류하는 듯싶었다.
촤악.
바닥으로 고공 낙하했다.
"고성웅이다. 죽여라!"
출동한 군대와 용병들이 분노로 충혈된 시뻘게진 성웅을 향해 발포를 명령했다.
"비켜! 이 자식들아!"
몸에서 모든 내공이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콰아앙!
전신의 혈류가 타동 되며 엄청난 힘을 부여했다.
푸슉. 푸슉.
"케, 케켁."
놈들은 피가 뿜어나오는 자기의 목을 부여잡더니 뒤로 풀썩 자빠져버렸다. 그리고 냉철을 헝겊 인형 다루듯 질질 끌고 있는 노인 앞으로 갔다. 당장이라도 베고 냉철을 차지해야 했지만, 성웅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상대는 일전에 합을 나누었던 사내이다.
성웅에게 일대일 대결에서 패배를 안겨준 노인. 대나무 향이 짙게 밴 검을 차고 다니는 자.
서겅.
그 노인이 다짜고짜 대나무 칼집을 벗겨내자 검강이 쏘아져 날아왔다.
촤아악.
직감적으로 코가 바닥에 닿을 만큼 엎드리자 싸늘한 검강이 머리칼을 베며 지나갔다.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잔디밭에 흩어졌다.
'일부러 맞추지 않았어.'
위험의 신호가 성웅의 귓가에 앵앵거렸다.
"껄껄, 고성웅이. 저번보단 실력이 나아졌군. 그래."
언제 그랬냐는 듯 노인은 대나무를 지팡이 삼아 유유자적하게 성웅에게 걸어왔다.
결코 만나기 싫은 상대.
"대나무 검선 채독선.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가 너무 거친 데 그래?"
조필광의 십간령이자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검객. 그의 대나무에는 기(己)가 각인되어 있었다.
성웅은 남북 물밑 협상 때 그놈에게 뚫린 배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깼다. 성웅의 검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훼한 채 일격에 쓰러뜨린 괴물.
하필 이때 만나다니.
최악 중의 최악이다.
채독선이 구부정한 허리를 도닥이며 말했다.
"고성웅이. 자네 친구는 내가 잘 보살펴 주고 있었다네. 끌끌. 감사의 인사는 넣어두게."
"영감탱이가 치매에 걸렸나? 닥치고 냉철을 내놔. 어디 손끝 하나라도 대 봐."
"어이쿠 무서워라."
채독선은 너스레를 떨며 입술을 올려 보였다. 그러다가 채독선은 하늘에서 방황하는 야차를 바라보더니 제안을 시작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하마. 필광이가 네놈에게 거래를 제안하더군. 푸흐흐."
"영감 따위랑 할 거래는 없…."
성웅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냉철을 건네주마."
"……!"
"곧 죽겠지만 말이다."
"뭐라고! 이 영감탱이가!"
성웅이 버럭 화를 내자마자 채독선이 주머니에 환약(丸藥)을 꺼내며 보란 듯이 말했다.
"그놈의 성질 좀 죽이게. 말마따나 냉철은 곧 죽을 거야.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말이지. 어때 갖고 싶지 않나?"
"이익."
실처럼 얇은 숨을 가까스로 쉬는 냉철을 바라보았다.
"대신 무얼 원하지?"
냉철과 또 치료할 환약을 동시에 준다고 한다. 그럼 그 대가는 무엇이란 말인가?
채독선은 여유롭지만 단호한 어조로 읊조렸다.
"새삼스레 알면서 묻나? 네놈이 가지고 있는 마문함 그리고 흑마침."
"……!"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나 막상 들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대의 보패를 주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역시 수읽기는 조필광이 한 수 위였다. 조필광은 굳이 삼황오제와 장치오를 상대하려 들며 보패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냉철을 미리 빼돌려 지금과 같은 상황에 거래로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웃기지 마."
"강짜 부릴 때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채독선의 말마따나 지금은 한가하게 거래 협상할 시간 따윈 없었다. 냉철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며 야차는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른다. 그리고 야차의 에너지파로 건물에 함몰된 장치오를 구하기 위해 골든 트라이 앵글의 수하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채독선은 인심 쓰듯 한 가지 옵션을 더 붙였다.
"더불어 서비스로 야차 괴물도 쫓아내 주지. 캬~ 이 정도면 완전 내가 손해 보는 장사인데 말이야."
"뭐?"
저 괴물 야차를 쫓아내다니?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작금의 상황은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핵무기랑 수만의 헌터를 때려 부어도 야차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채독선은 유능한 변호사처럼 답변을 술술 늘어놓았다.
[그오오오오.]
그들의 대사를 듣기라도 했듯 푸른 하늘에서 야차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독선이 재촉했다.
"자자. 시간이 없다고 이 친구야. 빨리 결정하게나. 나랑 싸우고 냉철과 환약을 가져갈 텐가? 아니면 조용히 마문함과 흑마침을 내놓고 냉철을 살릴 텐가?"
스르르릉.
채독선의 대나무 검에서 날이 점차 밝아져 갔다. 백마침으로 게이트를 조종하는 조필광에게 흑마침까지 쥐여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도 하기 싫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줘서는 안 되지만 빌어먹게도 그 무슨 일이 터져버렸다. 법현 대사님을 무슨 낯짝으로 볼까.
"으으으!"
냉철의 숨은 끊어져 갔다. 생각은 짧아야 한다. 성웅은 반혼검을 검집에 넣었다.
"이익! 냉철이랑 환약부터 넘겨!"
채독선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어른이랑 거래하는 데 버릇없게 굴지 말고 마문함이랑 흑마침부터 내놔. 냉철을 죽일 셈이냐?"
놈은 여유로웠고 성웅은 초조했다.
"동시 교환하자."
"좋지."
대척점에 선 그들은 보패와 냉철을 교환했다. 냉철을 받아든 성웅은 냉철을 편안하게 눕히고 공력을 불어넣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친구 녀석이 반 시체가 돼서 나타났다. 아무리 흔들어도 그는 의식이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겁이 벌컥 났다.
혹여나 죽으면 어떡할까?
"안 돼! 냉철아!"
바락바락 붙잡고 외쳤으나 그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혈을 집으니 끊길 듯 말 듯 희미하게 뛰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죽지 않은 게 용한 정도다. 성웅은 채독선에게 받은 환약을 냉철에게 먹이려고 했으나 의식이 없어 동그란 환약을 삼킬 수조차 없었다.
약을 손으로 으깨어 가루로 만들어 억지로 목젖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에잉, 쯧쯧. 손발이 많이 가는 녀석이구먼."
보다 못한 채독선이 물병을 던져줬다. 냉철이의 뒷목을 잡고 물도 같이 먹여주었다. 목젖을 타고 가까스로 넘겼다.
잠시 후, 거의 뛰지 않던 심장이 점차 뛰기 시작했다.
채독선은 그런 성웅을 바라보며 묘한 눈동자를 일렁이며 중얼거렸다.
"끌끌. 친구 앞에선 고대의 보패고 뭐고 다 소용없구먼. 한 시진은 되어야 깨어날 것이다."
'성웅아. 이럴수록 침착해야 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였다.
콰아앙!
두두두두.
골든 트라이 앵글의 수하들이 성웅을 보더니 미친 듯이 돌진했다.
채독선은 그런 무리들이 귀찮다는 듯,
"자~ 그럼 이 늙은이는 용건이 끝났으니 가보겠네. 내 손에 죽기 전까지 몸 관리 잘하게나. 껄껄!"
말을 끝으로 채독선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내 저 멀찍이 능선 위에 뿅하고 나타났다.
채독선은 보법도 능히 일류 고수였다. 그는 거침없이 산 위를 올라갔다. 날아가는 건지 올라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신법 또한 짜증 날 정도로 기가 막혔다.
성웅은 냉철을 업고 냅다 달렸다. 전속력으로 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창세삼정 도와줘! 운운신법!"
고강도의 공력을 힘입어 발을 딛자 저 멀리 훌쩍 날아갔다. 미친 듯이 달리고 신법을 하염없이 펼쳤다. 사방에는 총알이 무수히 날아들었다.
두다다다다.
피슝. 피슝.
"크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총알 하나가 어깻죽지에 닿았다.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오며 통증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달렸다.
냉철이를 반드시 살릴 것이다.
"냉철아! 냉철아!"
도망치면서도 등에 매달린 냉철을 애타게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허억, 헉. 헉…."
삼십 분쯤 미친 듯이 달렸을까?
울창한 숲에 들어섰다.
숨을 헐떡이며 주변의 기척을 느꼈으나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냉철을 눕혔다.
반혼검을 뽑아 들고 경계를 했으나 근방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거대한 마물 야차도 멀찍이 있었다. 채독선을 쫓아가고 있었다.
골든 트라이 앵글이나 야차나 목표는 고대의 보패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성웅을 계속 쫓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채독선을 본 장치오 수하들은 방향을 틀어 채독선을 쫓기 시작했다. 덩달아 야차도 채독선에게 푸른 에너지파를 쏘았다.
쿠와와아아앙!
산이 움푹 꺼지는 충격파가 발사됐다. 나무뿌리마저 뜯겨 나갔다. 대지의 진동이 멀찍이 떨어진 성웅에게마저 느껴졌다.
에너지파는 채독선에게 적중했다.
"크으으윽!"
성웅은 냉철을 감싸 안아 보호했다. 다시금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근방의 생물은 모조리 싹이 말라버렸다. 바닥은 평야가 되다 못해 지진과 거대한 싱크홀이 듬성듬성 생겼다. 이 정도의 파괴력이면 제아무리 채독선이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폭파에서도 채독선은 끄떡없어 보였다. 이내 그는 흑마침을 꺼내 한 인영에게 주었다. 흰머리를 가지런히 쓸어넘긴 그의 노년의 신사였다.
사자를 닮은 그는 아래의 무리들을 바라보며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조필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