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비서실장의 고뇌
법현 대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린 냉철은 곯아떨어졌다. 구동훈이 냉철의 볼을 툭툭 쳤으며 팻시아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구동훈을 노려봤다.
"얼레? 내, 냉철아. 죽은 거 아니지?!"
철썩철썩.
"장관님! 지쳐서 자는 거예요. 알면서 따귀를 왜 때려요!"
위치(Witch)로 각성하여 라바를 죽인 팻시아는 언제 다쳤냐는 듯 쌩쌩했다. 물론 윤은지의 치료도 한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동훈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냉철이 이 녀석! 너무 무책임하잖아!"
"충격기라도 없냐능? 어서 깨워야 한다능."
"상경 오빠!"
함상경마저 눈빛을 부라리며 짱알거렸다. 사실 냉철은 곯아떨어지기 직전, 이들에게 부탁을 하고 뻗어버린 것이다. 냉철은 장치오 친위대에게 당하기 전, 긴 시간 동안 해외에서 놀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냉철을 이대로 자게 놔둬선 안 된다. 반드시 깨워야 한다. 냉철의 부탁은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서겅.
"끄억."
일본도 카타나의 울림이 들리며 트랄라 약을 복용한 괴물의 가슴을 후벼 판 소년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의를 수호하는 나 슌스케! 반드시 성웅 사부 친구의 유언… 아니, 부탁을 수행하겠으무리다!"
슌스케가 눈빛을 번뜩 빛내며 말했고, 옆의 최미연은 정의감에 불타오른 채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였다. 블루 게이트 야차가 만들어 낸 인간의 시체, 트랄라 약을 복용한 반쯤은 괴물이 된 시체가 폐허가 된 건물 안과 밖으로 곳곳에 널려있었다. 더불어 그들은 골든 트라이 앵글의 잔당을 상대하기도 몹시 바빴다. 블루 게이트 야차의 공격에 수천의 장치오 사병들이 즉사하였으나 각지에 밀려드는 놈들은 끝이 없었다.
시체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이들 다섯은 훼이싸이에 남았다. 법현 대사가 위험에 처했다고는 하나, 블루 게이트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폭력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으며 장치오마저 흉흉하게 버티고 있었다. 고성웅 혼자 남겨두고 갈 수 없는 상황이다. 일행은 냉철을 제일 먼저 한국으로 데려간 후 치료하려 했지만, 이놈이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무력으로 끌고 가면 혀 깨물고 죽겠단다. 냉철은 아직 타국에 해야 할 일이 남았단다. 그리고 그 일을 일행에게 떠넘긴 채 기절해 버렸다.
실로 무책임의 결정체이다.
"빠샤!"
"까울~."
구동훈이 야수의 발톱으로 통신병이 등에 멘 디바이스를 탈취했다. 통신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상경아. 이걸로 전화 걸 수 있겠어?"
"으이익! 서, 설마?"
구동훈은 마음을 정했다.
냉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으이그. 상경아. 말 안 해도 알아. 누군들 하고 싶니? 누가 성웅이 친구 아니랄까 봐. 하여간 오지랖이 글로벌적이란 말이야."
상경은 한숨을 푹 꺼뜨렸다.
이제 대한민국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플백 사이즈의 통신 디바이스를 살펴본 상경이가 칩을 뜯어보더니,
"으음. 오래는 아니지만 몇 분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능."
구동훈이 결연한 어조로,
"전화 돌려."
"……아흐으."
* * *
대한민국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비서실장 임성일이 집무실에서 수화기를 들며 식은땀을 닦아 내렸다.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는 캄보디아 외교 국제 협력부 장관. 골든 트라이 앵글에 반쯤은 걸친 캄보디아에서도 사상사가 속출했다. 대개가 장치오 부하였다.
물론 가해자는 고성웅과 그 일당.
그들이 한 달 가까이 지내오며 박살 낸 골든 트라이 앵글 사병은 수만에 달했다. 그것도 핵심 요직의 부하들만 족쳤으니 말이다.
고로, 캄보디아는 당연히 그 책임을 대한민국에 떠넘기고 있었으며 임성일 비서실장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훼이싸이 사태가 일파만파로 세계 각지로 뻗어져 나가고 있었다.
"아니죠. 장관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저희가 지금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잖습니까? 물론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저희가 백번 천번 사죄해도 모자라지만 사상 최악의 블루 게이트 마물이 출연한 시점에…. 아, 괴물이 다시 사라졌다고요? 아무튼 지금 잘잘못을 가리는 건 시기상조라 봅니다."
10분을 더 해명한 뒤 가까스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손잡이는 땀이 흥건해서 미끈거릴 정도다. 임성일 비서실장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퀴퀴한 눈동자는 조만간 관이라도 알아봐야 할 만큼 살아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었다.
대통령의 그림자이자 권력의 이인자. 대통령 비서실장.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살아있는 권력이지만 요즘같이 국제적으로 위태로울 때는 총알받이로만 제격이다. 연이어 숨 쉴 틈도 없이 각국의 대사와 장관들이 빗발친 항의 전화를 걸어왔다.
얼마 전, 고성웅의 타피산 만행으로 인해 구동훈과 함께 미얀마에 현장 조사를 떠났던 한국 수행원들이 모조리 실종됐다.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유족들에게 적당히 배상금만 물어주고 끝내면 된다. 근데 문제는 미얀마의 얄틴 장관도 함께 실종됐다. 이건 문제가 다르다. 자국 공무원의 죽음과 타국의 장관 실종은 개념이 다른 문제이다. 불행 중 다행은 얄틴 장관의 생사여부를 모른다는 점이다.
얼마 전, 구동훈에게 전화로 타피산 만행 진실의 영상을 받았다.
타피산에서 군인에게 죽은 죄 없는 시민들이 묻힌 장면을 말이다. 그리고 불타버린 양귀비로 현장 증거를 없애려는 얄틴 장관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임성일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고성웅이 죽인 것은 미얀마의 시민이 아니라 타피산의 군인이라는 걸.
자, 그래서 어쩔 건가?
타국의 시민을 죽이면 무죄고,
타국의 군인을 죽이면 유죄인가?
아니다.
냉엄히 꼬집자면 시민을 죽이는 게 죄가 더 가볍다. 복잡하긴 하지만 외교적으로 풀 수 있다. 그러나 군인을 죽였다는 건 전쟁의 불씨를 키우는 격이다.
스케일이 다르다.
분단된 한반도 주제에 세계에서 마약을 가장 크게 팔아먹는 최강 장치오를 상대로 동영상 원본을 틀어서 잘잘못을 가리자고 하면 어떻게 될까?
미국이 도와줄까?
중국이 도와줄까?
아니다.
그냥 미친 짓이다.
이건 여러모로 고성웅만 욕먹게 하고 손절하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구동훈에게 경고했다.
더는 사고 치지 말고 닥치고 귀국하라고. 근데 귀국 안 했다. 말을 지지리 안 듣는다. 귀국은커녕 타지에서 깽판만 부린다는 소식이 타국 외교부 입에서 듣게 만든다. 임성일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솔직히 고성웅 네놈이 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냐? 적당히 까불다가 객사할 거라 단언했다.
근데 뭐?
골든 트라이 앵글의 수장인 장치오의 친위대를 박살 냈다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그것도 장치오의 메인 연례행사인 밀리언 마켓에 블루 게이트까지 출몰시켜서 아주 아수라장을 만들었다고?
이쯤 되면 고성웅은 걸어 다니는 게이트 수준이다.
아주 점입가경이다.
고성웅의 등장에 세계는 급변했으며 이젠 비서실 전화기만 울려도 트라우마가 걸릴 지경이다. 책상을 두 손으로 집은 비서실장 임성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X. 고성웅."
고성웅.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왜 그는 죽지 않은 것인가?
임성일은 억울했다.
고성웅이 싼 똥을 왜 자기가 치워야 할까? 정확히 말하자면 치우지도 못했다. 성웅이 싼 똥을 목구멍에 쑤셔 넣는 수준이다. 왜 임성일 본인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타국의 장관과 수장에게 뭇매를 맞아야 하나?
이러려고 비서실장이 된 게 아니었다. 얼마 전, 홧김에 대통령에게 사표를 냈건만 이 위기가 끝날 때까지는 안 받아 준단다. 고성웅은 감당이 안 되는 재앙 덩어리다.
"아아. 사고라도 적당히 치던가. 으읍? 이건 뭐야?"
콧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뭔가 흘러나온다.
손가락을 살포시 갖다 대니 코피다. 선혈의 피가 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흘러넘친다. 이제 전화기만 봐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물끄러미 전화 코드를 뽑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였다.
삐이, 하고 사내 인터폰이 울렸다. 여비서가 말했다. 그녀는 사이보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비서다.
[비서실장님. 구동훈 장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뭐? 구 장관이? 어서 연결해!"
뭐랄까? 임성일은 지옥 같은 직장 생활에 한 가닥이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연결하겠습니다.]
"여, 여보세…?"
지지직.
어디 80년대 시골에서 안테나 올리고 전화하는 것처럼, 잡음이 심했다.
- 지지직. 여. 보. 세. 지지직.
빌어먹을 들리지 않는다.
뭔 놈의 전화기를 쓰길래!
"구 장관?! 구 장관! 나 임성일이야!"
대통령 비서실장 임성일은 애타게 구동훈을 불렀다.
- 야. 함지직 경. 이거 통화되는 거 맞어? 거지 같직. 데? 파. 오. 후. 1분도 안 남았다능. 지지직. 뭐? 이런 씨X! 아차. 죄송합니다. 비서실장님. 지직. 구동 지직. 입니다.
"……."
비서실장 임성일은 똥줄이 탔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어디서 구닥다리 통신기기를 용케 구해다 쓰는 걸까? 임성일은 아무렴 괜찮았다.
'구동훈. 제발 좋은 소식을 갖다줘. 타피산 만행에 의한 정의 실현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네놈들이 벌인 짓에 타당한 이유를! 각국의 지랄 맞은 놈들에게 카운터 날릴 수 있는 걸 말이야! '
더는 사표도 반려가 되고 국제 사회의 표적이 되어 동네북 신세가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잠시 후, 음질이 괜찮아졌다.
- 실장님. 시간 없으니 간단히 용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저희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분발 중입니다.
"아,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네."
구동훈은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냉철의 전언이기도 했다.
- 갈 곳 없이 장치오에게 억류된 동남아 소녀들을 구하러 갈 것입니다. 라오스의 루앙남타 동북 쪽에 위치한 반메오란 산인데 버스 대절해서 수십 아니, 능력 닿는 대로 보내주십시오. 산까지 올라오셔야 합니다. 버스에 탑승한 소녀들은 곧장 베트남 하이퐁에 주둔 중인 미군 수송선에 모조리 실어서 한국으로 망명할 소녀들입니다. 아, 참고로 상대는 골든 트라이 앵글의 창치오입니다. 외교적 문제나 금전적 문제들 해결 좀 바랍니다. 지지직. 지직.
냉철은 예전 이십사도인 성매매 포주를 죽임으로 곳곳에 널린 억류된 소녀를 구출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리고 구출한 소녀들을 일일이 돌볼 수 없어서 장치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반메오란 산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녀들을 지키려다가 삼황오제인 이황에게 당해버린 것이었다.
- 뚜우~ 뚜우~.
통화가 끊겼다.
이 병X이 방금 뭐라 지껄인 건가? 까먹고 싶었지만, 전화기는 자동녹음 기능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녹음 기능이 없더라도 이미 임성일의 뇌리에 각인되듯 박혔다. 다만 임성일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구 장관! 구동훈 야! 야 이 개새X야! 네 말만 하고 끊으면 어떡해!"
임성일 비서실장은 수화기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메아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들리는 거라곤 오직 자신의 거친 심장 소리뿐이다.
두근. 두근.
"구 장관. 구 장관? 야! 야! 구동훈 이 새끼야! 차라리 날 죽여! 으아아아악!"
쾅! 쾅!
인터폰을 마구 부쉈다.
"씨X! 국무총리도 있고 안보실장도 있고 국방부 장관도 있고 외교부 장관도 있는데 왜 지X 맞게 나한테만 전화를 걸어!"
벌컥.
경호원과 사이보그 비서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경호원이 말했다.
"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권총! 권총 어딨어! 씨X. 내가 뒈져 버리면 해결돼! 하여간 송현사 출신 꼴통들은 뭐 하나 멀쩡하게 해결하는 게 없어!"
사이보그 비서가 답했다.
"서랍 밑에 두 번째 칸에 보시면 있습니다."
"흥? 내가 장난인 거 같지?"
그는 서랍을 열고 권총을 잡고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곧장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이 세상이여 아디오스!'
딸깍.
"응?"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 딸깍.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이보그 비서가,
"탄창을 끼우셔야 합니다."
"우오옷!"
탄창에 손을 갖다 대려고 할 즈음 경호원들이 임성일을 붙잡았다.
"실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놔! 이 새끼들아! 놓으라고!"
경호원이 비서실장을 어깨에 들쳐 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