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붉은 깃발에 핀 불꽃
라오스 반메오 산(山)
더러운 군침들을 흘린다.
"와우~ 이게 웬 떡이냐?"
"흐흐, 그동안 너무 굶주렸다고. 오늘 음기 좀 채우겠는데?"
"저기 머리 곱다랗게 땋은 년은 내 꺼니까 건들지 말아."
"난 아랫도리가 벌써 텐트를 쳤다고. 푸흐흐."
"낄낄. 더러운 변태 새끼."
장치오의 마지막 무전을 받은 인근 선발대가 반메오 산에 도착했다.
[반메오에 숨은 계집들을 전원 사살하라. 그리고 고성웅 일당을 뼈까지 씹어먹어라.]
뒤로는 계속해서 놈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녀석들은 본연의 임무는 까먹고 그저 성욕에 불타오르기만 바빴다. 이들은 냉철이 목숨을 걸고 구했으나 오히려 단체로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개 중 한 놈이 불퉁거렸다.
"그런데 쿤사는 왜 얘들을 죽이라는 거지?"
소녀들의 목숨을 걱정하는 걸까?
하지만 녀석은 고상하게 인권을 운운하는 게 아니었다.
"두고두고 벗겨 먹지를 않고? 차라리 나한테 맡기면 안 되나? 잘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끌끌."
그저 오랫동안 반인륜적인 행위를 하고 싶을 쓰레기일 뿐이다.
"꺄악!"
한 놈이 개 중 반반해 보이는 소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갔다. 대충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친 뒤 웃통을 벗고 바지의 지퍼를 풀고 내리던 찰나,
"에잉~ 쯧쯧. 무인이라면 정기신(精氣神)을 다스리고 모아야 하거늘, 오히려 정(精 : 정액)을 뱉지 못해 안달이라니."
"헙. 누구냐!"
우스꽝스레 바지가 무릎에 걸친 채 고개를 돌렸다. 상대는 귀에 통역 이어폰을 낀 뚱보였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전형적인 오뚜기 몸매였다. 뚱보는 제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벼 파더니 귀지를 후 불며 말했다.
"나? 본좌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유희라고 한다. 인면수심으로 가득 차 버린 네놈의 명줄을 끊으러 왔지."
"뭐라는 거야? 이 돼지 새끼가?"
놈이 바지를 올리며 천유희를 씹어 죽일 듯 다가갔다. 천유희는 악마 같은 미소로 화답하며 거리를 좁혀 주었다. 강간 미수범은 돼지 녀석을 어떻게 쳐죽일까 달콤한 상상을 했고 천유희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때였다.
"코노 빠가야로!"
촤라라락.
일본도 카타나가 춤을 추더니 강간 미수범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미시마 기업의 차기 오너.
흑발의 머리칼을 찰랑이는 슌스케였다. 슌스케는 비릿한 조소로 천유희를 보았다. 조각조각 분해된 녀석을 한참이나 바라본 천유희가 대로했다.
"억! 쪽바리 네 이놈! 감히 본좌의 먹잇감을 탈취하다니!"
"이이에(틀린 말입니다). 악을 멸하는 데 있어, 귀하와 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지랄이 풍년이네. 아주. 골든 트라이 앵글 조지기 전에 본좌가 오늘 핏덩이인 네놈부터 참교육을 시켜주겠다."
사실 반메오 산으로 급히 오면서 슌스케와 천유희는 내내 티격태격했다. 비슷하면서도 상극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천유희가 두 팔을 걷고 슌스케에게 갔으며 슌스케 또한 발도 자세를 취했다. 그때 한 소녀가 두 사이를 막았다.
"천유희 님. 진정하십시오."
"계집. 넌 빠져."
"계집이라니요? 최미연이라고 합니다. 명색이 같은 길드원인데 이름 정도는 기억해 주실 때도 된 것 같은데요."
"흥. 계집은 계집일 뿐이다."
"은지 언니는 이름 불러주던데…."
"……!"
제아무리 천유희래봤자 치료사인 윤은지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비정상인들의 모임인 송현 길드에서 유일한 정상인이자 분위기 메이커이며 실세인 윤은지.
하물며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VIP 병동 중에서도 에이스였다. 진상 달래는 스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윤은지는 전투도 되지만 무엇보다 치료도 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치명상을 입었을 시 삐쳐서 치료를 안 해주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기에 천유희는 윤은지에게 최소한의 존중은 해주었다. 최미연은 발키리로 변하지 않은 이상 그저 그런 하급 헌터다. 최미연은 차별당한 과거를 잊지 않고 오늘 날을 잡았다. 아무 말 못 하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천유희에게 말했다.
"서운하네요."
최미연의 눈망울에 액체가 가득 고였다. 천유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평생을 동정으로 지낸 천유희에게 있어 여자의 눈물이란 극약과 다름없었다.
"……!"
"뭐라고 말씀 좀."
그때였다.
"어이! 싸우지 좀 말고 와서 좀 도와! 힘들어 죽겠어!"
"일단 해결 좀 하고 나서 보자고요!"
구동훈과 팻시아가 울상을 터뜨렸다. 말마따나 골든 트라이 앵글의 병력들은 계속하여 들이닥쳤다.
"저기 저! 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우릴 쏘아보고 있는 장치오의 졸개들을 쳐부수러 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아~"
천유희가 적의 무리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최미연이 그런 천유희를 보며 혓바닥을 내밀며 웃어 보였다.
소녀 천 명.
말이 천 명이지. 웬만한 운동장에는 모아놓지도 못할 숫자이다. 그 수 많은 소녀를 고작 다섯 명이 지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덧붙여 천 명의 소녀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베트남 하이퐁 미군기지까지 간다라? 상식적으로 실행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치오는 삼황오제 말고도 강력한 수하들이 많다. 바티칸 성기사와 일본 미시마 기업이 최미연과 슌스케를 지키기 위해 출격하였다지만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장치오 졸개들을 죽이는 속도보다 졸개들이 밀어닥치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송현 길드원들 제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소녀들까지 지켜가면서 싸우는 건 애당초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예상은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탕탕!
"꺅."
"아악. 아, 아퍼."
소총의 난사에 소녀들 대여섯이 죽어버렸다.
"이, 이 새끼들이!"
눈에 쌍심지를 켠 구동훈이 놈에게 가려 했지만 이미 골든 트라이 앵글은 사방을 포위한 상태였다. 각자 맡은 포지션에 벗어났다간 대량의 학살극이 벌어진다.
독 안에 든 쥐였으며,
일행들은 위기에 처했다.
소녀들의 숫자는 줄어갔고 상황은 시산혈해의 난투극이 되어갔다. 시간은 놈들의 편이었다. 무력이 얼마나 압도적이든 인해전술 앞에선 장사 없기 마련이다.
"헉헉. 미친 새끼들. 숫자가 안 줄어드는데."
"헥헥헥. 장관 이 녀석아. 고작 나부랭이 따위에 지쳐버렸느냐? 어이 쪽빠리! 무서우면 냉큼 도망쳐 엄마 치마폭에 숨거라!"
"저는 무섭지도 지치지도 않스무리다아. 하아. 하아."
다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어느새,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었다. 여느 때라면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작금의 하늘은 피에 번진 섬뜩한 재앙을 예고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일행은 생각한다.
해가 지고 뜨면,
이 중에 얼마나 살아남을까?
그때였다.
지지직.
확성기 앰프에서 파열음이 찢기더니 이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렸다.
[동작 그만!]
그 소리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행동을 멈췄으며, 마이크를 쥔 사내에 시선을 던졌다.
지직.
[나는 골든 트라이 앵글의 지휘관인 아지르 대위다. 송현 길드원. 너희들은 모두 포위됐다.]
"……!"
아지르 대위.
밀리언 마켓 검문소를 담당한 장교이다. 장치오에게 막말로 무전을 하고, 보패 흑마침의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룽추와 몸싸움을 벌였으며, 삼황오제인 라바에게 죽을 뻔했던 녀석이다. 그가 죽지도 않고 돌아왔다. 그것도 골든 트라이 앵글을 진두지휘하며 말이다. 블루 게이트 야차의 난동에 지휘관 대부분이 죽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또라이 아지르는 현장의 최고참이자 지휘관으로 벼락출세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출세에 부풀었다. 그는 블루 게이트 야차의 폭동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다. 워낙 극적으로 살아남아 몰골은 꾀죄죄하지만 지금 품위 따위 가릴 때가 아니다. 악의 축인 송현 길드원만 깡그리 체포한다면 꿈에 그리던 장군으로 갈 수 있다.
그렇기에 송현 길드원의 시체보다는 생포하는 게 중요하다. 아지르가 단호한 어조를 뱉는다.
[투항하라.]
최미연은 이미 발키리를 써버려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였으며, 근접전의 슌스케 또한 가까스로 카타나만 쥐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팻시아, 천유희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는 모두를 탈진하게 하였기에 더는 싸울 수 없다.
절망적이다.
저벅. 저벅.
구동훈이 대표로 앞에 나섰다.
"후웁."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구동훈의 목에는 핏대가 세워졌다. 그리고 공력을 가득 담아 아지르의 제안에 화답했다.
"지랄, X까지 마! 개X끼야!"
당당하게 외쳤지만,
구동훈은 생각한다.
'태을 어르신.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저는 괜찮지만 죄 없는 수많은 소녀들은…. 이들은 어떻게 한답니까?'
오늘 이 자리가 묫자리가 될 것이다. 구동훈이 목걸이에 걸린 회중시계를 매만졌다. 한순간도 이 회중시계를 벗은 적이 없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회중시계를 만지는 게 습관이다. 성웅의 할아버지인 고태을이 주었다. 구동훈에게 고태을은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이자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회중시계 뒷면엔 의(義), 선(善), 악(惡)이 각인되어 있었다.
'태을 어르신 이게 뭡니까?'
'의와 선을 행하고 악에 휘둘리지 말라는 기다.'
'이걸 왜 제게 줍니까?'
'줄 사람 없어가 준다. 와? 싫나? 그럼 다시 돌려도고.'
'어이쿠. 낙장불입입니다요~.'
'껄걸, 욘석.'
회중시계를 만지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죽더라도 양심에 어긋나는 일 없이 떳떳하게 전사하리라.
유유상종이다.
아지르는 구동훈의 표정을 보고 동종의 또라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말로 해서 될 놈이 아니다.
생포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PZH(Panzwehaubitze) 부대. 일발 장전.]
아지르는 장교다.
그냥 장교가 아니라 현재 육군의 지휘관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명 살상 무기에 대한 사용 권한을 갖고 있다. 군대는 소총과 수류탄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대량 살상 무기로 언제든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조잡한 능력을 가진 헌터 따위를 앞세워 시간을 질질 끄는 건 옳지 못하다.
한 번에 끝내리라.
독일제 탱크가 끼익, 바퀴를 앞으로 굴리더니 앞에 등장했다.
"저, 저건…. 말도 안 돼."
구동훈이 PZH를 보고 절망적인 표정을 자아냈다. 기체의 중량만 55톤에 이르며 전장은 12m에 육박한다. 그 괴물이 155mm의 탄을 쏘아댄다.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는 양산형 탱크가 아니다. 각 나라에서 구매하려고 혈안이 된 고가의 한정판 자주포(自走砲)다.
위잉. 철컥.
거대한 괴물 기체에 탄이 장착되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일행과 소녀에게 저 포탄이 투하된다면 죽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시체가 남을지를 걱정해야 한다.
그러한 탱크가 열 대나 분산 배치되어 송현 길드와 소녀를 정조준했다. 헌터부 장관 구동훈이 모를 리가 없다.
"다들 미안."
최후의 사과를 던진다. 다들 고개를 저으며 미안해하지 말라 한다. 힘이 고갈이 난 팻시아는 위치로 변하지도 못한 채 포효를 내던지며 최후의 일격을 받을 준비를 했다.
천유희는 활짝 웃으며 보랏빛 마지막 마공을 쥐어짰다. 슌스케는 최미연의 앞을 막고 양손으로 카타나를 굳게 쥐었으며, 최미연은 슌스케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슌스케는 미연의 최후의 떨림을 느꼈다.
아지르가 붉은 깃발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발사 준비.]
꿀꺽.
아군이고 적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긴장했다. 아지르가 손만 내리면 수십 발의 탄이 내리꽂힐 것이다. 지축이 흔들리고 피륙이 쏟아질 것이다.
군중은 침묵했다.
소슬한 바람이 아지르의 깃발을 곧게 폈다.
아지르가 깃발을 내린다.
아니.
내리지 못했다.
아지르는 뜨거운 열기를 피부로 느꼈다.
"뭐, 뭐야!"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포격 명령을 내려야 할 붉은 깃발이 붉게 타버렸다. 붉은 깃발에 핀 불꽃에 화들짝 놀란 아지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