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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인데 내공이 좀 많네요-197화 (197/200)

197화. 최후의 십간령 (1)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안이 벙벙한 양측 진영 복판에 홍련의 불꽃이 원으로 새겨졌다.

화르르르.

전위적인 현상에 군중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한 줄기 불의 기둥이 솟아올랐으며 기둥 위에는 한 소녀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짝다리를 집고 있었다.

캡 모자를 꼭 눌러 써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뽀얗고 밝은 피부이다. 그녀는 시건방진 표정으로 불의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크오오오.

불의 기둥은 짙은 열기를 내뿜은 채 상승하더니 초고층 아파트만큼 치솟았다. 불의 기둥이 멈추었다. 캡모자의 소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아지르가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다.

[너너너넌 누구냐?!]

소녀가 말한다.

"나?"

소녀는 피식 웃는다.

모자를 벗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고운 머릿결이 찰랑인다.

그리고 답한다.

"홍매 고나윤."

성웅의 동생 나윤이었다.

그리고 불의 아수라 능력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지르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구시렁거렸다.

나윤은 시선을 아래로 던지며,

"장관님. 오빠 새끼는 어딨어요?"

여전히 성웅을 찾고 있었다.

"성웅이? 지금 장치오랑 싸우고 있는데?"

"으휴~ X신 새끼가 가지가지 한다. 하여간 멀쩡하게 살질 못해요. 단명할 팔자지."

"……."

긴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고운 입에서 거친 어휘를 자연스레 구사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군중은 불의 여신 나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전위적인 불의 연출에, 아름다움과 귀여움이 공존하는 그녀의 미모에 넋을 놓았기 때문이다.

얼빠진 좌중을 훑어본 나윤이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꺼뜨리고선,

"저기~ 장관님. 여긴 제가 맡을 거니까 다들 버스 호위나 하세요."

"네가 여길 맡아? 그리고 버스?"

나윤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고 일행은 나윤의 불가해한 말이 소화되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구동훈이 생각이 정리됐는지 나윤을 향해 외쳤다.

"나윤아. 네가 오빠 닮아서 정신이 살짝 나갔나 본데 어서 피해! 모두 죽어! 지금 포탄이 떨어진단 말이야!"

그때였다.

부르르릉.

울퉁불퉁한 산을 타며 멀리서 소녀를 태울 버스 수십 대가 접근했다. 반(反) 장치오 연합 부대가 힘을 합쳐 버스를 보낸 것이다. 물론 아지르는 보고만 있지 않았다.

[저저저런! 미친년을 봤나! 발사! 발사! 다 쏴 죽여버려!]

세계 최강 자주포인 PZH 2000을 본 고나윤이 비릿하게 웃으며,

"X밥 새끼가 고작 깡통 가지고 깝치는 거야? 기도 안 차네."

"뭐?"

화르르르르.

열 대의 자주포 주위에 붉은 원이 새겨졌다.

"…?"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나윤이 말한다.

"화평주(火平柱)"

쿠와아아앙!

열 대의 PZH 자주포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가스레인지 불이 아니다. 용암에 가까웠다. 무려 1,000도에 육박하는 화산 폭발 급의 초고온의 열이 땅을 꿰뚫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 광경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고 느껴지겠지만 현장은 지옥이고 아비규환이다. 그리고 자주포가 발사하려던 탄은 그 자리에 연쇄 폭파했다.

콰직! 쿠와왕! 쾅! 쾅! 쿠와아앙!

"으아아아아악!"

수천 조각으로 갈라진 불꽃과 자주포의 파편은 마하 속도로 사방으로 퍼졌다. 인근 장치오 군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어떤 시체는커녕 핏방울도 볼 수 없이 기화되어 타버렸다. 열 대의 자주포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 보너스로 파편에 의해 추가 목숨까지 보내버렸다.

"부, 불의 마귀인가?"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이야?"

"무, 무서워."

놈들에겐 나윤은 아수라 그 자체로 보였다. 공포의 전염성은 바이러스보다 빠르다. 하나둘 전투 의지를 상실하더니 그것은 전체로 확산되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놈들은 공포에 떨었다.

나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불의 기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저벅. 저벅.

나윤이 앞으로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놈들은 뒤로 열 걸음 물러섰다.

"으아아~! 사람 살려!"

급기야 골든 트라이 앵글은 총을 내려놓고 도망치기 바빴다.

"이, 이봐! 어디들 가는 거야! 군명에 의한 불복종은 즉각 처형감이라고!"

아지르가 절규하며 외쳤으나,

"어이. 어딜 봐?"

어여쁜 음성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무서웠다.

"고고고고나나유윤."

아지르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어느새 아지르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현장에 골든 트라이 앵글은 한 놈도 없었다. 살아있는 놈 중에는 말이다. 아지르가 디딘 곳을 중심으로 원형의 불이 그려졌다.

"으어어어."

아지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살려줘."

그저 살려달라는 말 말고는.

"화평주."

"으아아아악."

불길이 치솟고 아지르의 시체는 뼛조각 하나 없이 불타버렸다.

* * *

대한민국 송현사.

스와아악.

황금으로 물든 대검이 은발 사내의 팔을 절단시켜버리자 선혈의 피가 솟구쳤다. 서리검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으으으."

은발 사내는 남은 팔에 모든 기운을 집중시켜 빙(氷)의 능력을 쏟아냈다. 곽목휘가 처절하게 외쳤다.

"우흐읍. 아이스 핑거."

손톱마다 서리가 끼더니 살벌한 얼음이 맺혔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갖고 놀던 풋내기들이었는데 역전되었다. 이들이 그간 얼마나 독하게 무공을 갈고 닦았는지 곽목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사출되려던 아이스 핑거에도 문제가 생겼다. 덥석, 하고 동시에 곽목휘의 손을 움켜잡은 이가 있었다.

"유, 윤은지."

윤은지가 마린 장갑을 낀 채 곽목휘의 손을 와락 잡은 것이다. 윤은지는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엘리의 무공은 수준급이지만 곽목휘와 일 대 일로는 무리다. 하물며 내공이 한참이나 부족한 윤은지가 막강한 공력에다가 얼음의 힘까지 더해진 아이스 핑거의 손을 잡다니? 보패 마린장갑은 단순히 공력을 부풀려주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영대 오빠 얼릴 땐 즐거웠었지?"

윤은지의 죽은 남자 친구인 조영대는 어떻게 죽었는가? 야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언데드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발악하다가 곽목휘의 얼음에 꽁꽁 얼어버려 분해된 뒤 비참하게 죽지 않았는가? 윤은지는 그날을 잊지 않았다.

"권능. 역륜(逆輪)"

우지지지지직.

"……!"

곽목휘는 헛숨을 들이켰다.

방출되어야만 했던 아이스핑거의 냉기가 곽목휘의 몸 안에 스며드는 게 아닌가? 찰나의 시간이었다. 손바닥이 얼어붙고 손목 그리고 팔꿈치까지 삽시간에 꽁꽁 얼어버렸다. 이대로라면 몸뚱어리 전체가 얼어버린다. 곽목휘는 부랴부랴 마린 장갑에서 손을 뺐다.

그러나 분명 마린 장갑의 손길을 벗어났지만, 빙결의 물결은 내리내리 흐르며 곽목후의 어깨 아래 상완이두근까지 얼려버렸다.

"으아아아아아!"

쾅.

곽목휘는 급히 송현사 사찰의 배흘림기둥에 제 팔을 스스로 처박았다. 쨍그랑, 남은 팔마저 떨어져 보내고 나서야 얼음의 물결은 멈추었다. 제 능력에 제가 당한 셈이다.

"어이, 곽목휘 아저씨~ 양팔은 어디 엿이라도 바꿔 먹었나?"

"……!"

롱기누스를 든 이태곤이 휘파람을 불며 곽목휘의 이마에 정조준했다. 다급히 피하려 했으나, 금빛의 바스타드 소드가 그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어디 움직여 봐. 목만 놔두고 줄행랑치는 꼴사나운 네놈을 보게 해주지."

탁탁.

그리고 수십의 바늘이 곽목휘의 전신에 꽂혔다.

"으읍."

"빙(氷)의 능력이 빠른지. 아니면 나의 해부학 실습 종합세트가 빠른지 궁금하면 어디 발버둥 쳐 보든가?"

윤은지가 살벌한 경고를 하며 나섰다. 채독선은 죽었고 곽목휘는 양팔 절단에 제압까지 당했다.

송현 길드의 완승이고,

십간령의 완패다.

"대사님. 찾았습니다."

정태수는 채독선과의 싸움이 끝난 후, 조필광이 타고 온 헬기 블랙호크에 가서 커다란 함을 들고 왔다.

보패 마문함(魔門函).

"태수 시주. 함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끼이익.

마문함을 열자 안에는 한 소녀가 잠들고 있었다. 푸른 머리칼의 소녀. 백마침과 흑마침을 삼킨 여인. 늙지 않는 비극의 십간령.

그리고 게이트를 삼킨 자.

성모 율리아였다.

"푸허허허허!"

조필광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탕한지 아니면 실성한 건지 구별되지 않는 쩌렁쩌렁한 웃음이 장내를 뒤덮었다. 입가에는 피를 잔뜩 흘린 채 말이다. 각혈을 한 것이다.

혼계 아수라 마석 섭취자는 연결된 자들의 사망 시 섭취자도 내상을 입는다. 라스콜과 장치오는 무수히 많은 마석을 먹어 내성이 있지만 조필광은 육체적으론 한낱 평범한 노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 하나하나의 죽음이 본인에겐 치명타이며 수명을 갉아먹는다. 조필광이 쇳소리로 읊조렸다.

"크으크으. 법현이. 대단하군. 대단해. 결국 모든 걸 가지는구먼. 아주 자식 농사를 잘 지었어. 풍년이구먼. 내 십간령을 초토화 시켰구먼. 끌끌."

십간령과의 싸움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팻시아의 부친이자 엘프인 데비루는 성웅에게 죽었으며, 나막신 나타, 대나무 검객 채독선, 네크로멘서 단테, 미치광이 과학자 황의소, 그리고 미치광이가 만들어 낸 혈의 이리야 또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성모 율리아, 빙의 곽목휘는 전투를 할 수 없다.

"형님. 두 명이 남지요."

"파계승 녹야랑 육자성."

"녹야는 어디 있습니까?"

조세리가 사라졌을 당시, 조필광은 녹야와 함께 테일러 호텔에 반강제적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묵주의 보패를 가진 승려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조필광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성소 병원 지하 연구실이군요."

"……."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조필광은 술술 털어놓았다.

"미완성 인격체의 십간령 육자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요."

법현을 왜 생불(生佛)이라 부르는가? 그는 최초로 게이트를 연 고대 승려의 후손이다. 그 후손만이 성부를 가진다. 게이트로부터 세상을 지켜야 할 굴레를 뒤집어쓴 자이다. 법현에게 숨기는 건 어찌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세리…. 아니 영란."

영란.

이 한마디가 주는 파장은 얼마나 대단한가? 조필광은 전례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법현이 네 이놈! 감히! 감히 네놈 입에서 그 말을 하면 안 되지! 이 악마 새끼!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 모른 척한 주제 과연 그 말을 꺼내는 게 가당키나 한가!"

성웅의 친구이자 성녀 조세리는 조필광이 성전 의식 때 데리고 온 아이일 뿐이다. 죽은 친손녀와 너무 닮아서 오랫동안 두고두고 보려고 한 아이.

그럼 왜 세리로 지었는가?

친손녀 영란의 영어 이름이다.

손녀 영란 또한 자기의 이름 대신 세리란 말을 더 좋아해서 세리라 불렀을 뿐이다. 조필광은 성녀 조세리에게 단 한 번도 영란이라 불러본 적이 없다.

영란은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란은 조필광에게 금기의 단어였다.

조필광의 역린을 건드렸음에도 법현의 표정은 온화하기만 했다.

"형님은 영란을 지키려고 십간령 육자성을 만들려고 한 거죠."

"이! 이!"

조필광의 희끗희끗한 수염이 미친 듯 떨렸다. 누구에게나 최후의 수는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패를 들켰다.

"단념하시죠."

"단념?"

"보시다시피 채독선 시주는 업장소멸되었고 형님의 최측근인 곽목휘 시주도 양팔이 절단된 채 포박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파계승 녹야 또한 시간이 지나면 제압됩니다."

그 시간은 얼마만큼인가?

일주일? 며칠? 몇 시간?

아니다. 그 시간은 지금이며 현재진행이다.

조필광의 미간이 좁아진다.

"서, 설마?"

"대한민국 공무원은 놀고먹지 않습니다. 개 중에서도 직업의식이 너무 투철한 분이 계시지요. 저조차도 부담스러울 만큼 말이죠."

법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대한민국 공무원 중 최강의 무력을 지닌 자는 누구인가?

천애 고아. 고등학교 때, 조폭들을 쥐어패고 다니다가 퇴학을 당했으며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경찰대를 졸업한 자.

"그 망나니 경찰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버, 법현이 네 이놈!"

대한민국 요직의 꽃인 경찰청 헌터국 국장이 되었다.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형님의 불법 지하 연구실로 들어갔습니다. 아, 지금쯤 도착했겠군요."

"으으으! 커어억!"

조필광은 화를 삼키려다가 다시금 피를 한 모금 토했다. 채독선이 죽어서 내뱉는 각혈이 아니다. 또 하나의 십간령이 명을 달리해버린 것이다.

"서서서설마?!"

법현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대한민국 공무원이 일 처리 하나는 빠르죠?"

성격은 개차반에 용의자들 과잉진압. 천상천하 유아독존.

염(念)의 각성자.

치안감 정래한이 성소 병원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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