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아침을 지나 오후를 앞둔 오전.
차무겸이 출근을 한 이후 깨어난 나는 떨어지지 않는 약 기운에 비몽사몽인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자택 치료와 함께 꼬박꼬박 먹기 시작한 약은 햇살 쨍쨍한 낮에도 기면증을 일으켰다. 그러나 약으로 인한 현상은 아니었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자면 도통 채워지지 않는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수면이 부추겨지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혹시 졸려 한다면 억지로 깨우지 말라는 당부를 차무겸에게 덧붙였다. 그 덕분에 요즈음은 아침마다 주방으로 끌려가 곤혹스러운 식사를 하지 않게 되어서 좋았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구역질하는 걸 목격한 의사가 이후 소화제와 위장약을 함께 처방해준 덕에 이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속이 뒤집어지지는 않았다. 귀에 대한 케어도 꾸준히 받은 덕분인지 이전보다 이명이 많이 줄었다. 적어도 예전처럼 화장실에 널브러져 지내는 일은 없었다.
처음에 차무겸은 제가 없는 시간 동안 누가 이 집에 찾아오는 게 마냥 못마땅한 듯 보였으나, 치료를 받으며 내 상태가 그럭저럭 호전이 돼가는 걸 느꼈는지 이젠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찾아오는 날은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보내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 날에는 그저 퍼질러진 채로 지났다. 늘 그랬듯이.
그러던 차였다.
벽에 부착된 알림 패드가 깜박거렸다.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는 신호였다. 반응이 없으면 가겠지, 싶어서 가만히 있었으나 알림은 끊길 듯 끊기지 않았다. 문을 열어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태세였다. 마지못해 일어나 패드 앞으로 다가간 순간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잠시 굳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찰나간 망설임을 머금었다. 그러나 이대로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무슨 일이야?”
한우현이 문틈 사이의 나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키웠다. 금세 정신을 차린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왜?”
“무겸이가 부탁한 게 있거든.”
그 말을 의심하기에는 그와 차무겸의 가까운 관계를 간과할 수 없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친족이니만큼 그들은 평소에도 왕래가 잦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문을 열었다. 잠시 안진권 때가 생각나서 움찔했지만 곧 그 생각은 흐지부지 흐려졌다. 암영에서 첫발을 뗀 한우현과의 인연도 어느새 몇 년이다. 언뜻언뜻 지켜봐 온 한우현은 김형준이나 안진권처럼 척 보기에도 날티가 나는 남자들과는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차무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포악한 성질머리로부터 기인하는 두려움을 익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머릿속에 똑똑히 박혀 있는 이상 감히 허튼짓을 할 생각은 안 할 테다.
“난 거실에 있을게.”
아무래도 찾는 게 서재에 있을 듯해 그쪽 위치를 알려주고서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잠시 후 한우현은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서 거실에 다시 나타났다.
“어, 저기… 오랜만이다.”
기척을 느끼고 일어서는데, 한우현이 나를 향해 말했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글쎄….”
그는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어지는 시선이 조금 불쾌했다. 김형준이나 안진권처럼 나를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탐욕에 젖어 희번뜩이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잘 지내고 있었던 거지?”
누가 들어도 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신경 쓰는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요 며칠 집으로 찾아오는 의사가 처음, 내 몸 상태를 체크하고서 차무겸의 눈을 피해 건넨 질문이 떠올랐다. 그 사람도, 그리고 지금 눈앞의 한우현도 내게 똑같은 걸 묻고 있었다.
괜찮은 거냐고.
“응, 그럼.”
반사적인 거부감과 그를 포장하는 태연함은 이제 습관이었다.
“보다시피, 잘 지내고 있었어.”
“보다시피….”
한우현은 감정이 잘 잡히지 않는 얼굴로 나를 보며,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나도 모르게 밴드와 상처 자국이 남은 팔을 뒤로 숨겼다. 내게는 이제 일상이지만 타인에게는 그럴 리가 없는 것들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까발려질 때마다 비정상적이게 일그러진 생활이 그 어느 때보다도 뼈저리게 와닿았다. 신물 같은 자멸감이 기도를 아릿하게 찔렀다.
“…김사은,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말해.”
“내가 도움이 왜 필요해?”
태연함의 꺼풀은 감춘 알맹이가 위태로울수록 더 쉽게 벗겨진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까칠한 반응에 한우현이 멈칫했다. 그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젓고 말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왜 그 반응을 보니 속이 뭉그러지는 것만 같은지. 나 자신이 새롭게 다가오는 선택지를 전부 다 내치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이대로 한우현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한들 그게 차무겸에게 속해 있는 것보다 나은 결과를 도출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늘 그렇듯 노력하고 있는 것뿐이야. 애써 합리화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한우현은 더 말을 붙여볼 거리를 찾듯 얼마간 두리번거리다가 끝내 현관 쪽으로 향했다. 배웅을 목적으로 따라서는데 심장이 낮게 고동쳤다. 벗어둔 신발에 발을 욱여넣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임이 보이는 낯이었다. 서류 봉투를 들지 않은 손이 도어 록을 해제했다.
“그럼… 가볼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문 너머로 작아지는 잔상이 망막의 겉면을 진득하게 핥았다. 이내 한우현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그렇게….
덜컥.
거의 다 닫혀가던 문이 돌연 활짝 열렸다.
“마지막이야. 이제 진짜 안 물어볼 테니까….”
“…….”
“정말 도움 안 필요해?”
이전과 달리 갈급하기 짝이 없는 태세로 한우현이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보다시피라고? 너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알고는 있는 거야?”
한우현의 손에서 서류 봉투가 떨어졌다. 얇은 서류 봉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팔랑팔랑 추락했다. 깃털이 떨어진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 안에 아무것도 들지 않아야만 가능할 법한 현상을 보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한우현이 내게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잘 지내고 있다는 애가 왜 이렇게 말랐는데. 안색은 또 어떻고. 너 지금, 여기가 아니라…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차무겸은 오늘 한우현을 부른 적이 없다.
한우현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김사은, 정말로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야?”
그리고 한우현은 지금 나의 의지를 물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나의 의향이고 의사였는지를 묻는 태도에서 그의 다감함과 필요 이상의 섬세함이 드러났다. 나는 흐물흐물 풀어지는 눈동자로 그를 담았다. 그 눈빛에서 무얼 읽은 걸까, 언제나 나의 경고에 한발 물러나기 바쁘던 한우현이 주저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가자.”
“…….”
“나랑 가자. 내가 도와줄게.”
그 말이 이상하게도 설탕을 가득 바른 디저트처럼 달콤하게 들렸다. 그러나 동시에 뒷덜미가 싸늘하게 식었다.
“나, 나는. 난 못 가.”
“못 간다니?”
“내가 가면, 여기서 나가게 되면….”
그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처럼 느껴져도 막상 정신을 차리면 원점이었다. 코가 아플 만큼 짙은 피비린내, 주검처럼 쓰러진 장신의 사내, 이 세상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에게 입혀버린 상처와 위협. 모든 게 잡다하게 꼬여버린 관계가….
멀쩡하던 호흡이 거칠어졌다.
“안, 안진권이 죽은 것 때문에. 내 친구까지 그렇게 될 수도…. 그래서 나는, 그러니까.”
내가 듣기에도 두서가 없는 말이지만, 지금은 고작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 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죽어? 안진권이?”
한우현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처럼 의아함에 잠긴 반응을 보였다. 잠시 눈살을 찌푸렸던 그는 역시나 이상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안진권 멀쩡해.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어.”
“뭐…?”
어벙벙한 반응은 나의 몫으로 돌아왔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차무겸이 분명 죽었다고. 나, 내가 괜한 짓을 하는 바람에 죽은 거라고….”
한우현은 내 말을 곱씹는 듯 잠시 반응이 없다가 곧 하,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차무겸 이 개새끼….”
이어 잘 정돈된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행동과 함께 덧붙이는 신랄한 비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아주 치명적이고 독 같은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왜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차무겸이 내 귓가에 불어넣은 모든 속삭임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걸.
당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게 그밖에 없던 까닭이었다. 기억 속에 똑똑히 잔재하는 안진권의 참혹한 모습, 그런 나를 상황 가운데서 빼내 제집으로 데려온 차무겸, 이후 정보를 알아볼 만한 수단도 부재했다. 핸드폰은 내 수중을 떠나간 지 오래였고 서재에 설치된 컴퓨터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차무겸의 말이 진실일 거라고 믿고 지냈는데….
“살아 있다고, 안진권이….”
“그래. 당장 지난주에도 얼굴을 봤어.”
하, 차마 숨길 수 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고작 한 가지의 감정으로 정의할 수 있는 헛웃음이 아니었다. 차무겸이 세뇌하듯 주입한 탓에 어느새 정말 내 책임처럼 떠안아버린 죄책감의 말소, 가연이가 그렇게까지 절망하진 않았을 거라는 안도와 허망함, 그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던 나 스스로를 향한 멸시.
“나는… 대체 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간 내가 무서워하던 건 무엇일까.
만약 안진권이 살아 있는 걸 알았다면 가연이를 들먹이며 하던 협박이 내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쳤을까. 아니, 나는 분명 코앞에서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안진권의 일로 질겁했고, 그런 상태였기에 가연이를 향한 뾰족한 위협이 따끔하고 말 가시가 아니라 내 목마저도 댕강 잘릴 정도의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게 모순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공포감만 선사하는 차무겸을 동아줄이랍시고 붙잡고 있던 상황은 그만큼 어불성설이었다. 어둠과 다를 바가 없는 그의 품에 안겨서 선명한 핏줄기를 피해 보고자 아등바등한 그 모든 게….
그간의 밤, 속에서 숱하게 꿈틀거리던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완벽히 발아했다.
오직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지리멸렬한 감정은 명백한 배신감과 분노였다.
* * *
“사은 씨, 긴장 풀어요.”
의사의 말에 나는 곱게 내리감고 있던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몸에 아무런 무리도 가지 않는 수면제니까 편히 잠들어도 돼요. 양을 조절했으니 한 시간 이내로 깨어날 거예요. 눈을 뜨면 얘기한 대로 우리 집안 병원일 테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요.”
의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보드랍고 사근한 어투로 달랬다.
‘누나가 도와줄 거야.’
‘누나?’
‘몰랐어? 이미 만났다고 들었는데.’
나는 지난날 한우현의 말을 곱씹으며,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제대로 마주했을 때 묘하게 익숙한 면이 있다 싶더라니, 그녀는 다름 아닌 한우현의 친누나였다. 내게 안진권에 대한 진실을 알려준 한우현은 이 집으로부터, 더 나아가 차무겸으로부터의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무리야. 이 집 보안이 철저해서…. 아무래도 네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는 상황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 그건 우리 누나가 도와줄 수 있어.’
한우현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차무겸에게서 벗어나려면 행선지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감추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 역시도 그랬다. 차무겸은 원체 오냐오냐 자라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면 뜯어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한우현이 피 섞인 친척이라고 한들 그 날카로운 엄벌을 피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로 인하여 또다시 누군가가 차무겸에게 해를 입는 상황을 목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의 탈출은 온전히 ‘나 홀로’ 벌인 일처럼 보이게끔 해야 했다. 지난겨울, 저택을 빠져나와 가연이에게로 달려갔던 그때처럼.
한우현은 물론 그가 나를 못 찾을, 찾는다면 그 시기를 최대한으로 늦추고자 함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는 것이겠지만 그 이유를 하나하나 헤아려볼 여력은 없었다.
“선생님.”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의 날렵한 바늘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한우현의 누나, 한우희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를 도와주세요?”
한우희는 내 질문이 뜻밖이었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가 이내 주사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은 씨가 아니라 내 동생 때문이에요.”
“…….”
“지금까지 뭐 하나 부탁해본 적 없는 애가 갑자기 도와달라고 하니까.”
한우희가 주입할 준비를 마친 주사기를 똑바로 고쳐 쥐고서 내 손목을 감쌌다.
“그리고 사실… 무겸이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고요.”
“…….”
“친동생이 아니라지만 무겸이도 오랜 기간 보고 자라온 만큼 내게 동생이나 다름이 없어요. 그리고 나에게 무겸인 늘 조마조마한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어요.”
“폭탄이요?”
“내가 느끼기로 무겸이는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남들보다 훨씬 강해요. 음… 단순히 강하다기보다는 그걸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수준이랄까. 사실 내 마음 같아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보았으면 했지만, 무겸이 할아버지께서 약물이나 상담 치료를 강력히 반대하셔서 턱도 없는 일이었죠. 결국 그 비뚤어진 성격은 그 누구에게도 교정되지 못한 채 자라왔어요. 그게 내게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로 보였고.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런 사고를 치게 될 것 같았달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우희가 일컬은 ‘사고’의 집약체가 바로 나였다.
“무겸이가 사은 씨를 통제하는 수준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잘 알 거예요. 겨울에, 처음 이 집에 와서 사은 씨를 만났을 때 그 애가 왜 귀를 치료하지 말라고 했겠어요? 그것마저도 사은 씨를 옭아맬 무기로 쓰려던 거예요.”
“…….”
“그게 확실히, 정상적인 사랑은 아니잖아요.”
한우희가 꺼내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신기루 같았다. 목소리의 울림으로 존재하되 내게는 와닿지 않았으니까. 차무겸과 사랑. 그 둘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가 보인 비상식적인 집착증과 통제하에서 나는 사랑받는 사람처럼 행복했던 게 아니라,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질겁만 느끼지 않았던가.
그가 그 새까만 면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나는 점점….
무엇보다 차무겸이 제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것을 허무맹랑하고 우습게 여겼다. 그런 녀석이 나를 사랑한다는 건 허깨비의 속삭임과 유사했다. 내게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흘러가 버릴 무의미한 것이었다.
대화를 곱씹고 있는 사이, 한우희가 준비하던 주사를 손목에 꽂아 넣었다. 침묵 속에서 약이 퍼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동이 튼 뒤에야 찾아오던 수면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이 퍼뜩 들었을 때.
소독약의 냄새가 강하게 콧등을 스쳤다. 머리가 어질거렸다. 관자놀이를 부여잡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VIP가 주로 이용하는 공간인지 병실치고는 호텔방에 가까운 호화스러운 실내가 눈에 스며들었다.
은은하게 당겨오는 이마를 매만지며 몽롱한 의식을 깨우려고 애썼다. 한우희의 말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잠들기 직전 주문처럼 속삭여준 음성 덕분인지 병원임에도 크게 놀라지 않고 다음 단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차무겸에게는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할 계획이야. 오늘 차무겸은 지방 일정이라 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거고 만약 일찍 도착한대도 누나가 어떻게든 붙잡고 있을 생각이고. 그사이 들키지 않게 빠져나와서 제2주차장으로 와.’
한우희가 사전에 말한 모자와 체크무늬의 남방이 침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을 착용하고서 조용히 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문 앞을 지키는 장정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미 손을 써둔 모양인지 인기척은 부재했다. 안도의 숨을 삼키고 한 발을 내디딘 병동 복도는 싸늘하리만치 고요했다.
나는 잰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비상계단을 통해 VIP 병동을 빠져나왔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만 이동해 한우현이 말해준 위치를 복기하며 코너를 돌고 돌았다. 그때쯤 의문스러운 감각이 등 뒤를 덮쳤다. 이상해. 도망이 너무 쉽다. 아무리 한우희가 차무겸의 발목을 잡고 있는다고 해도…. 하나 의문이 기포처럼 스며 올라온다고 한들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윽고 바깥이었다.
화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이 시간에 바깥에 나와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이 부셔 손으로 차양을 만든 채 고개를 돌리다가 제2주차장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을 발견했다.
‘그쪽 주차장에 CCTV 사각지대가 있어. C-23 구역이야. 거기로 곧장 와서 주차되어 있는 차에 타면 돼.’
이곳이 한우현네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말대로 그는 구조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최대한 빠르게 걸어 한우현이 말한 위치로 향했다. C-23 구역은 사각지대답게 구석진 곳이어서 찾는 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선팅이 진한 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뒷좌석 문을 조심스레 열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타십시오.”
움찔하는 나를 향해 사내가 말했다.
낯선 상황과 낯선 사람. 익숙하지 않은 데서 오는 두려움에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물러난다면 나를 위하여 기꺼이 움직여준 한우희와 한우현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내가 차무겸에서 벗어나는 데에 그들은 이토록 애써주고 있었다. 더불어 나 역시 더 이상 차무겸의 곁에 있을 이유도, 마음도 없었다.
아랫입술을 꾹 감쳐 물고 차에 올라탔다.
차는 도로를 달려 어느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비서처럼 보이는 이의 안내를 따라 들어가자 실내에는 진즉 도착한 한우현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떨며 기다리던 그는 내가 나타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이곳까지 무사히 찾아온 것에 안도했는지 그는 힘이 꼿꼿하게 들어가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는 게 어때?”
“나야 상관없지만….”
“사용하고 싶은 방, 맘대로 써도 돼.”
“어… 너는?”
“난 한동안 본가에서 지낼 예정이라 괜찮아. 이 집은 나나 우리 집안 사람 명의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서 차무겸에게 들킬 일도 없을 거야.”
한우현은 나의 불안을 달래주려고 이런저런 애를 썼다. 속에 거뭇하게 출렁대는 불안의 파도가 완전히 사그라들진 않았지만 그의 노력이 뚜렷하게 보여서 애써 담담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사람을 가끔 보낼 테니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며 한우현은 이만 오피스텔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나는 집 안을 둘러보기보다는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기분 좋게 이 집으로 온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도망을 온 것이기 때문에 속 편하게 집 구경을 할 기운도 없었다. 이제 겨우 거대한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침실에서 꺼낸 이불과 베개를 들고 현관 가까이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한우현은 어느 방이든 편하게 쓰라고 했지만 집주인도 아닌데 멋대로 침실을 차지하고 들 수는 없었다. 옷방 겸 창고처럼 보이는 곳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
이제 이명은 어느 정도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어디선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몸뚱어리는 허약한 주제에 정신력은 쇠심줄처럼 질겨서는, 피로한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한우현은 집을 막 나서기 전, 누나에게서 내 비루한 상태를 전해 들었는지 상비약을 부엌 찬장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찬장을 뒤적거리다가 수면제를 발견했다. 한 알을 꺼내 물 없이 삼키고서 다시 창고방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시처럼 예민하게 돋아오르던 신경줄이 약 기운 때문인지 금세 흐물렁하게 늘어졌다. 물에 풀린 물감처럼, 혼몽하게 누그러지는 정신을 그대로 놓았다.
“헉!”
누가 망치로 뒤통수를 깨는 것처럼 아연실색하여 잠에서 깨어난 건, 내 눈앞으로 펼쳐지던 모든 것이 단지 꿈이었음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두 팔로 바닥을 짚고서 상체를 일으킨 채 턱 끝까지 달아오른 숨을 쉴 새 없이 터뜨렸다. 초점이 교묘하게 어긋난 눈동자가 두려움을 머금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가지런히 정돈된 옷가지 아래로 보이는 시커먼 어두움에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더듬더듬 손을 들어 얼굴을 쓸자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꿈속에 한우현이 나왔다.
그의 모습은 자꾸만 뒤바뀌었다. 머리통이 붙잡혀 벽에 무참히 박음질 당해 묵사발이 된 김형준의 모습이 되기도 했고, 탁자 아래 축 늘어져 피를 줄줄 흘리는 안진권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 집으로 쳐들어온 차무겸의 손에 그의 머리가 댕강 잘린 채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는, 습하고 눅눅한 욕실에 불이 꺼진 채 갇혔을 때 들은 물방울 소리와 유사해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주먹 쥔 손으로 가슴팍을 내려쳐도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몸의 부위가 고질적으로 간지러워졌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하는 무릎걸음으로 문가에 다가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탁.
불이 들어오자 어둠이 벌레처럼 몸을 말고 구석으로 기어들어 가듯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꽉 막혔던 숨통이 바늘로 콕 찍은 듯 야트막하게 트였다. 문에 어깨를 기대고 주저앉았다. 암흑은 물러갔을지언정 뇌리에 선명하게 들러붙은 악몽의 꺼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자꾸 피 냄새가 질척하게 풍기는 것만 같았다.
이 집에는 나밖에 없는데.
어디선가, 자꾸만.
* * *
이후로 한우현의 사람이 오피스텔에 종종 들렀다.
자신을 송 실장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들를 때마다 냉장고에 한가득 음식을 채워주거나 영화 혹은 소설책 같은 취미거리를 쏟아놓고 갔다. 한우현의 지시 같았다.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던 핸드폰을 새로 사다 준 것도 그녀였다.
한우희 역시 여전히 내 치료를 맡아줬다. 이전 집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이었으나 이제는 상태가 꽤나 호전됐다고 판단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었다. 그사이 한우희와는 제법 가까워져서 이젠 대화도 곧잘 나누게 됐다.
남매는 내게 차무겸에 관한 그 어떤 소식도 꺼내놓지 않았고 나 역시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뭣보다 내 속에는 야트막한 불안이 이미 싹튼 이후였다. 거센 불길처럼 이는 분노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사그라들게 된다. 충동을 깃들게 하는 감정이 소실되자 그 아래로 드러나는 건 진작부터 지반을 이루던 새까만 두려움이었다.
이제는 떨쳐내려 해도 떨쳐낼 수가 없게 된, 차무겸으로부터 학습되어버린 고질적인 공포심.
뭣보다 이미 전적이 있는 일이다. 그만큼 불안의 파동은 그때보다 더 거셀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차무겸은 이미 내가 어디 있는지 조사를 마치고,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지.
그 소름 끼치는 가정에 맥을 못 추면서도 나를 위해 애써주는 둘을 위해서 진실된 심중을 애써 숨기고 가렸다.
작금 들어 어릴 때도 찾지 않았던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책을 읽다가 한 번씩 틈조차 보이지 않도록 쳐둔 베란다 커튼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럴 때면 소파에서 일어나 커튼을 아주 살짝 벌려 그 사이를 내려다보고는 했다.
높은 위치, 아득한 도심 속에서는 모든 풍경이 무채색이었던 것에 반하여 기껏해야 3층 높이인 이곳의 풍경은 색색깔로 다양하게 보였다.
이걸 눈에 담을수록, 차무겸이 없는데도 나의 시간이 멀쩡하게 흐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가 없어도 나는 충분히 괜찮다는 자기암시 같은 짓이었다. 그게 무익한 짓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관둘 수가 없었다.
오늘 역시도, 습관 같은 짓을 마치고서야 몸을 돌렸다.
소파에 가지런히 놓인 책을 힐끔 보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송 실장이 아마도 한우현의 지시로 채워주고 간 홍차 티백이 한쪽에 빽빽이 쌓여 있었다. 그는 확실히 또래 남자들답지 않게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왜 차무겸의 집에 있을 때는 이런 걸 즐겨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억지로 섭취하는 것처럼 무엇이든지 입에 넣는 족족 쏟아내기 바빴으니까. 그곳에서는 구석에 숨은 생쥐처럼 매사 눈치를 보며 그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기억만 낭자했다.
홍차에 말린 사과를 넣어 만든 애플티 티백을 온수가 담긴 잔에 집어넣었다. 색이 충분히 우러나오길 기다렸다가 은은하게 풍기는 찻잔을 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욱.”
나도 모르게 잔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어제만 해도 상큼하고 달큰하여 바닥을 치던 식욕을 조금이나마 끌어 올려주던 향이 돌연 거북하게 다가왔다. 먹음직스러운 빛깔로 우러난 찻물을 응시하다가 용기를 내 입가로 가져다 댔다. 한 입 간신히 축였다가 허둥지둥 개수대로 향해 뱉어냈다. 변기를 붙잡고 먹은 걸 게워내던 순간으로 회귀한 것만 같았다.
왜, 왜 이러지….
한동안 괜찮아진 느낌이었는데.
나는 찻잔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깨끗한 컵에 물을 받아 마셨다. 이상할 것 없는 물맛조차 속을 메슥거리게 했다. 혼란은 잠시였고 잇따르는 건 지치는 감정이 전부였다. 몸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 이상 현상을 보일 때가 너무도 잦아져서 그런지, 이유를 헤아리기보다는 결과에 지쳐 하는 비중이 조금 더 컸다.
찬장에 있던 수면제를 꺼내 한 알을 까득, 씹었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일찍 창고방으로 들어서서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약을 자꾸 먹으면 내성이 생길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당장 들이닥친 불면증을 해결하는 데 급급했다. 나는 또다시 뇌를 물속에 풍덩 던진 것처럼 얼기설기 풀어지기 시작하는 의식을 느끼고, 수면에 몸을 맡겼다.
“…은아, 김사은.”
어깨를 흔드는 힘이 조심스러웠다.
가까스로 잠재운 신경이 다시 점화된 불씨처럼 타닥타닥 되살아났다. 눈꺼풀 너머로 흐릿한 상이 잡혔다. 두어 번 깜박거리고서야 그게 한우현임을 깨달았다. 그보다도 누워 있는 내 자세 위로 드리운 그의 얼굴에 심장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겼다. 한우현은 이런 내 경계심을 인지하듯 얼른 뒤로 물러났다. 상체를 일으키는 동시에 몸을 조금씩 벽 쪽으로 밀착시켰다.
“미안, 자는지 몰랐어. 방에 불이 켜져 있길래….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걱정돼서.”
“몇 시야, 지금?”
“11시야.”
“…밤?”
“응.”
한우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근데 왜 침실을 놔두고 여기서 자?”
언제나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낮에만 사람이 찾아왔기에 내가 밤마다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는 걸 한우현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하고 싱겁게 답하며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우현이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속을 꾹꾹 억누르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 놓고 간 게 있어서. 사람을 보내기에는 너무 늦어서 직접 찾으러 왔어. 핸드폰으로 연락했는데 답이 안 오길래. 미안해, 내가 자는데 깨웠나 보네.”
“아냐….”
한우현은 정말 볼일이 있었던 것뿐인지 물건을 찾자마자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은 그가 복도 중간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바라보았다. 한우현은 가끔씩,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저렇게 눈가를 곡선으로 휘어 접어 웃고는 했다. 내가 제 영역 안에 안전히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것처럼.
그럼 편안한 그의 표정과 달리 내 마음은 말도 못 하게 복잡스러워지고는 했다.
“이만 가볼게. 잘 자.”
한우현의 등이 보이고, 활짝 열린 현관문이 쿵 소리와 함께 닫혔다.
나는 현관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불이 꺼지고서야 창고방으로 들어왔다. 한우현이 깨우기 전처럼 이불 속에 몸을 밀어 넣었다. 짧은 가을을 따라 날씨는 눈 깜짝할 새에 추워지고 있었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 올리고 천장을 응시하다가, 왠지 모르게 진정되지 않는 맘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발씨를 죽인 채 문가로 다가갔다. 정물이 된 것처럼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손을 움직여 탁, 창고방 문을 잠갔다.
세상에는 열을 봐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를 봐도 열을 알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적어도 내겐 한우현이 그랬다. 한우현이 내게 마음이 있는 걸 알지만 그는 김형준이나 안진권 같은 인간 말종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손을 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진즉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고. 한우현에게서 그런 음침하고 꺼림칙한 낌새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인생 좆같아질걸?’
‘안진권도 이거에 넘어갔지?’
차무겸이 내게 남긴 말이 트라우마를 복기시키는 하나의 저주가 되어버렸다. 애먼 짐작으로 불안을 부추기는 건 멍청하고 미련한 짓임을 안다. 그러나 단지 기우로 치부하며 간과할 수 없는 건, 간혹 어떤 상황 속에서는 가장 위로 떠오르는 게 바로 사람의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향한 한우현의 이성적인 관심을 모르지 않는 이상,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 경각심을 놓지 못할 것이다.
그 뒤로 잠긴 문을 얼마간 응시하다가 더듬더듬 물러났다. 다시 바닥에 누워서도 술렁대는 마음이 쉽사리 제 감각을 찾지 못했다.
잿더미 같은 불안과 함께 잠드는 밤은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 * *
호전되고 있으리라 생각한 몸 상태가 거짓말처럼 다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 끼 정도는 넘길 수 있던 속이 변덕을 부리는 양 시도 때도 없이 뒤집어졌다. 편안히 앉아 책을 보던 일상을 비웃듯이 도통 기력이 없어 매사 축 늘어져 있기 바빴다.
“선생님.”
한우희는 내게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한우현의 마음에 부응할 생각이 없는 만큼, 그녀와도 어느 정도 거리는 지켜야 할 것 같아서였다.
“고막에 문제가 생기면 나타나는 증상 중에… 환청도 있어요?”
왕진 가방을 챙기던 한우희의 손이 우뚝 멈췄다. 돌아오는 눈빛이 유난히 깊었다.
“환청이 들려?”
“조금….”
“최근 들어서 그러는 거니?”
“아니요…. 사실 꽤 오래됐어요.”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이것도 고막과 관련이 있는 문제인지는 몰라서….”
한우희가 한쪽에 짐을 내려놓고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 때에 들리는데? 정도가 심해?”
“정도는 그때그때마다 다르고…. 이명이 들렸을 때랑 비슷해요. 주위가 어두워지거나, 되게 조용한 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무슨 소리가 들려?”
“시계 소리…?”
“시계?”
“처음으로 들린 게… 차무겸이 방에 가뒀을 때인데, 그때 그곳에 시계가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들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시계 소리만 들은 건 아니었다.
어느 때는 물기 하나 없는 공간에서 톡, 추락하는 물방울 소리가 되기도 했고, 고막을 긁어대는 누군가의 깔깔대는 비웃음 소리이기도 했다. 차무겸의 펜트하우스 내 다락방에 갇혔을 때 가장 강렬하게 엄습하여 나를 좀먹던 그것들은 떠나갈 듯 떠나가지 않고 귓전을 망령처럼 맴돌았다.
“역시 제대로 검사를 해 봐야 했는데.”
한우희가 쉽사리 말을 얹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일단 환청이나 환각은 청각과 시각 기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기보다는 심인성 질환에 가까워. 특히 네 경우는….”
“…….”
“한번… 검사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병원에 와볼래?
한우희도 내게 그걸 쉽사리 제안하지 못했고 나 역시도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 돌연 찾아오는 이런 숨 막히는 정적이 그럴듯하던 나의 일상을 깨부수고 그 틈새로 냉랭한 현실을 밀어 넣는다. 맞아,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 있는 처지지, 하고.
“그 외에도… 아,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복용하는 약이 많으니까 슬슬 줄이는 게 어떨지 말하려고 했어.”
“약이요?”
“응. 사은이 네가 주기적으로 먹는 약의 성분이 대다수 독한 거라서, 줄일 수 있으면 줄이는 게 좋아. 약이 독할수록 효과는 빨라도 몸에는 좋지 않으니까. 호르몬도 망치고… 그러고 보니 생리는 하고 있어? 가장 최근에 한 게 언제야?”
“생리는….”
한우희에게 설명하려 되짚어보는 찰나, 머릿속에 서느런 냉수가 예고도 없이 착 퍼부어졌다.
생리…?
그러고 보니 내가 생리를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일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원래 생리 불순이 심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 흔적조차 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생리가 찾아오지 않는 건 나의 피를 식힐 만큼 매서운 가정 하나를 그려냈다. 소용돌이에 끼인 것처럼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느라 바쁘던 상황 가운데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저, 저번 달에요.”
나도 모르게 경직된 입술을 움직여 답했다.
한우희는 이런 나에게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음 말을 전했다. 그러나 내 귀로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별안간 닥친,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일로 인해 소리 없는 혼돈에 잠기고 있었으므로.
한우희가 집을 나설 때까지 억지로 웃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뻔했다. 마침내 문이 쾅 닫히고서야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기대섰다.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으려고 해도 밀물처럼 치고 올라오는 불안감이 그를 끈질기게 방해했다.
뇌리에 또다시 지저분한 낙서가 그려졌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요 며칠간 비리비리하던 상태가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 나아졌던 속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듯 뒤집히기 시작한 게, 설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비탄에 섞인 울분이 나의 의사를 배반하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에. 아무리 기를 써도 속에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불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탁자 위에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가지런히 놓인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잊고 있던 번호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뾰족하게 깎인 손톱 끝을 딱, 딱 물어뜯던 행동이 그쳤다. 핸드폰을 응시하는 시선이 못 박힌 양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
“부탁이 있어.”
한우현은 혹시 와줄 수 있느냐는 연락에 당장 나타났다. 분명 문자에는 ‘시간이 난다면’이라는 조건을 덧붙였는데도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이리로 온 듯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그의 맹목성이 엿보여질 때마다 가슴 안이 건조하게 말라붙었다.
“혹시…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의 위치도 알 수 있을까?”
내 말의 의중을 짐작하지 못하겠는지 그는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지금 그 번호를 쓰고 있으면 기지국을 통해서 위치를 알아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야.”
“그럼 이 번호 주인의 위치를 알아봐 줄 수 있어?”
나는 미리 번호를 옮겨 적어둔 포스트잇을 한우현에게 쓱 내밀었다. 그것을 건네받는 한우현의 표정은 오묘했다. 실낱같은 의구심 하나를 알아챈 듯한 낯빛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갚을 테니까 돈도 조금만 빌려줘.”
“이 사람이 누군데?”
역시나. 잇따른 나의 부탁에 한우현은 내가 제 곁을 떠나려고 한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포스트잇을 구길 것처럼 꽉 움켜쥐고서 물어보는 어투에 조급한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나는 마디가 불거진 한우현의 손 틈새로 비치는 노란빛의 포스트잇을 가만 응시하다가 툭 말했다.
“엄마야.”
한우현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 그니까… 친어머니?”
“응.”
짐작건대 그는 지금까지 보아온 내 모습으로 말미암아 내가 고아쯤 되나 보다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차무겸 말고는 오래 머문 연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기는 했다. 솔직히, 양쪽이 모두 떠나간 상황에서 고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혹시 내가 뭐 불편하게 했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이 이상 너나 선생님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악몽은 떠나갈 듯 떠나가지 않았다.
수면제로 인해 간신히 눈을 붙인다고 한들 전신이 땀으로 젖어 깨어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꿈은 늘 한결같음에도 좀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나선 한우현이 피해를 입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어찌나 여운이 강한지, 깨어나서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만 헐떡거렸다.
그런 한우현을 걱정하면서 동시에 무서워했다.
불완전한 마음이 낳은 강박증을 덜어 보고자 문을 잠그지 않으려고 해도, 지난날 내 위로 드리웠던 한우현의 얼굴이 도통 지워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무엇 하나 가진 것 없이 한우현에게 의존하고 살다가는, 그가 차무겸처럼 나를 깔아뭉갤 때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폐부를 까득까득 갉아댔다.
이미 한 번 겪어 보았고, 내 힘으로 떨쳐낼 수 없는 상황을 잇따라 만들 수도 있다는 가정에 나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생겨났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않는 선에서 눈을 힐끗 아래로 내렸다. 널널한 티셔츠 안으로 납작하게 들어간 배 속이 무얼 잘못 먹은 것처럼 울렁거렸다. 이 안에, 내가 제발 생기지 않기를 바라던 것이 들어앉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시시각각 신경의 모퉁이를 뭉그러뜨렸다.
사람에게 감정은 고삐와도 같다. 그 감정으로 하여금 신중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전에 없이 난폭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고삐를 놓치는 데에 필연적으로 기폭제가 되는 일이 존재하기도 한다.
한우현에게 과연, 나의 임신이 그 고삐를 푸는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박박 긁어모은 수많은 미지수가 뭉쳐진 존재였다.
한우현이 어떻게든 숨기려고 애쓰는 이성적인 관심을 폭발적으로 부풀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저를 기만했다며 도움과 지원을 깡그리 끊고 나 몰라라 나를 내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던져진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며칠간을 허우적대다가 결론을 내렸다.
기회가 될 때 떠나야 한다.
그가 그나마의 아량을 베풀어주고 있는 이때가 적기일지도 몰랐다. 이 생각이 막 고개를 들 무렵,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아줄이 떠오른 것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가장 보류했을 만큼, 가장 자신이 없었던 동아줄이기도 했다. 그게 튼튼할지, 혹은 진작 썩어들어가 터럭이 간당간당한 동아줄일지는….
먼저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이마저도 자신감이 바닥을 쳐서 결국 포기했다. 이왕 문전박대를 당하게 될 거라면 전화를 통한 어쭙잖은 방식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마주한 채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내내 주저하다가 끝내 굳건히 마음을 먹은 마지막 이유.
“요즘 차무겸, 상당히 바쁘게 지내고 있어. 네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는 데에 꽤나 걸릴 거야.”
“…그럴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의견에 있어서 회의적이었다.
“정말로 차무겸이 모를 거라고 생각해?”
“뭐?”
“나는… 반대야. 걔는 이미 내가 네 도움으로 숨어 있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이곳 위치까지 전부 다.”
그간 실체 없는 불안에서 도통 헤어나지 못한 건 그 짐작이 들어맞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게 나라서였다. 지난날 병원에서 있었던, 기괴하리만치 쉽게 진행된 도주에서 느낀 알싸한 불안감이 손끝을 타고 상기됐다.
“그게 무슨….”
“이전에도 그랬거든. 걔한테서 도망쳤을 때, 내가 어디 있는지 뻔히 알면서 찾아오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어.”
한우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떻게든 납득하려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문장을 거푸 되짚는 것처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정말 알고 있다면 왜….”
“기다리는 거야.”
“…….”
“내가 내 스스로의 무능함을 깨닫고 자기한테 돌아올 때까지.”
언젠가의 밤이 떠올랐다.
아직은 그에게 항거할 의지가 남아 있을 적, 그 심지가 결국은 보기 좋게 뚝 끊어졌던 밤. 차무겸이 원하는 대로 수그려야지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눈먼 희망에 기대게 된 시발점. 매번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리고 정신없이 1층으로 내려갔으나 고장 난 것처럼 작동하지 않는 도어 록을 앞에 둔 채 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허망함에 잠겨 있을 때.
‘네가 와.’
소파 앞에 선 그는 당시에도 그랬다.
‘아니면 내가 가는 수밖에 없는데….’
‘…….’
‘거기까지 가게 되면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차무겸은 정말 폭발할 정도로 화가 나거나, 내가 정도 이상으로 위급해지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다.
나의 단조로운 설명에 한우현이 이를 사리무는 게 보였다.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술래잡기는 결국 끝이 정해져 있다는 걸. 특히나 한우현의 곁에서 맞이할 그 끝은 헤아려보지 않아도 혈연관계를 난잡하게 엉클어뜨릴 지옥이 될 게 뻔했다. 어차피 다가올 위기라면 나를 도와준 이들만큼은 그 참혹함에서 빼내고 싶었다. 돌연 쓴웃음이 났다. 이런 내 스스로가 너무나 겁쟁이처럼 느껴져서였다. 결국 대상만 바뀌었을 뿐, 나는 차무겸의 그늘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었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내가 안 괜찮아.”
한우현은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차무겸이 도와줄 때는 다 받았잖아.”
아래로 떨궈져 있던 고개가 번쩍 치들렸다. 되돌아온 말이 나로서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비수를 품고 있었기에 살짝 울컥했다. 차무겸의 원조는 여전히 나의 자존심을 거북하게 뒤집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턱을 들고 바라본 한우현의 표정이, 완벽한 패배자임을 인지하는 것에 가까워서 외려 말문이 막혔다. 그는 제 노력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제를 앞에 둔 이처럼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근데 왜 내가 주려는 건….”
받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생략된 뒷말이 쉬이 유추가 됐다. 짙은 좌절의 기색이 묻어나는 토로에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한우현이 마른세수를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다 죽어가던 눈빛이 일말 정도는 명료해졌다.
“차무겸이 널 옭아매려고 어디서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건지는 알아?”
이런 내가 답답하다는 듯,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라도 내 정신을 깨우치게 하고 싶다는 듯 그가 갈급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너, 암영에 있을 때 깡패가 찾아온 적 있었지?”
한우현이 바닥을 친 감정 끝에 끄집어낸 속엣말이 마음을 출렁, 흔들었다. 그날의 기억이 불시에 되살아났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던 길, 나를 따라오던 검은 차, 거기서 내린 깡패, 아빠의 이름, 금목걸이, 업소….
“그게 누구 짓인지 알고 있기는 해?”
마음이 돌을 던진 호수처럼 거센 진폭으로 요동쳤다.
“물론, 돈을 빌린 건 도박을 일삼는다는 네 아버지가 맞겠지. 하지만 그 일이 모두 우연이었을까? 누가 네 아버지에게 도박자금을 마련해줄 용도로 그 깡패들을 은밀하게 붙였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안 해봤지?”
콜록, 나도 모르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한우현의 입에서 후두둑 쏟아지는 단어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내 아버지가 도박쟁이였던 걸 얘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니, 암영에 있지도 않았던 애가 그 야밤의 소란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의구심이 별안간 고개를 쳐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시 깡패들은 등장했을 때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사채를 썼다가 끌려간 뒤로 볼 수 없게 된 마을의 한 아저씨가 있었다.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끌려간 건 아니었다. 수차례의 전조가 있었다. 아저씨의 집에 찾아와 가구를 부수며 난동을 부린다거나, 까만 문신을 칠한 깡패들이 마을에서 종종 목격된다거나.
그네들은 돈을 위해 양심과 도덕을 죄다 팔아먹은 족속들이다. 그런 자들이, 나에 대한 포기는 왜 그렇게 빨랐을까…?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붙여놓고 멀리서 관망하며 얼추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 들여다보니 어긋나는 것 천지였다. 자각자각 인 균열이 그림의 조화를 죄다 망가뜨리고 있었다. 불씨처럼 피어난 의구심이 금세 집채만 하게 부풀어 신뢰의 밑바닥을 쾅 두드렸다.
적어도, 그때의 도움만큼은 진실되었으리라고 믿었던 내 어린 날의 추억마저 금이 가고 있었다.
“어….”
희부옇게 칠해진 머리는 아둔한 반응만 일궈냈다. 정말로, 사고회로가 고장 난 것처럼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우현이 이런 얘기를 내게 꺼내놓는 이유가 가장 높이 떠올랐다. 그건 부정할 여지 없이 명확했다. 차무겸이 얼마나 악독한지를 각인시키며 자신의 호의를 더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꾹 말아쥐었다.
“…몰랐어. 그런데….”
만약 차무겸의 본색을 모르고 들었으면 아마 이보다 더 동요했을 테다. 그러나 이미 내가 자주 목격해온 수두룩한 모습들이, 잠깐의 아연함 뒤 ‘걔라면 그럴 수 있어’라는 추측을 따라붙게 만들었다. 너무나 많은 기대와 그것이 깨부숴진 실망의 기억들이 낭자했다. 날갯죽지 사이로 새겨진, 쓰라린 글자의 존재감이 돌연히 짙어졌다.
“그래서 안 돼.”
한우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서 덧붙였다.
“걔가 그렇게 지독하니까 더, 안 돼….”
눈을 깜박이던 한우현이 머잖아 무언갈 깨달은 얼굴을 해 보였다. 나의 우려심을 금세 간파한 것이다. 그렇게 지독하리만치 악하게 굴기 때문에 차후 몰아칠 파도가 더더욱 크고 광폭하리라는 나의 불안과 초조함을.
“그러니까 내 부탁 좀 들어줘. 내가 귀찮게 하는 건 이게 마지막일 거야.”
한우현의 눈동자가 서글프게 물들었다. 나에 대한 실망 역시 적잖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니었고, 지금의 나는 그 감정을 하나하나 헤아려 줄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확증은 없으나 심증은 확실하게 기울었다. 차무겸은 또다시 잡을 수 없는 희망을 나의 머리 위에서 잡힐 것처럼 빙글빙글 맴돌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온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연신 불안에 떨어야만 하는, 알량하고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자유를 선사한 것부터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여정은 더더욱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워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달아나는 것만을 염두에 두며 들이마시는 숨은 삼키는 것도 어려울 만큼 역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