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숨긴 귀환자 104화
12. 봄날은 간다(4)
진우가 다시 돌아오자 유지태 중위가 보고서를 내며 사인을 받았다. 사인을 다 받은 후 조심스럽게 불렀다.
“부부대장님.”
“어. 그래.”
“오늘 혹시 회식합니까?”
“회식? 해야지. 그런데 우리 헬퍼분들은 어디 있지?”
“아까 보니까. 위병소 옆 주차장으로 열심히 달려가시던데 말입니다.”
“그래?”
진우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통화음이 가고 박진철이 전화를 받았다.
-어, 진우야. 왜왜?
수화기 너머 박진철의 목소리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형, 어디야?”
-어, 우리? 우리 지금 집인데.
“집이야? 왜?”
-왜? 왜 전화했어?
“아니, 오늘 회식하자고.”
-회식? 아 참 그렇지. 우리 게이트 들어갔다가 나왔지. 너무 빨리 끝이 나서 그런 줄도 몰랐다.
“그래서 회식 안 할 겁니까?”
-회식해야지. 어떻게 안 하냐. 그럼 우리 집 앞에 거기로 와. 돼지고깃집!
“에이. 거긴 너무 멀어요. 애들 오늘 외출밖에 안 돼서 거기까지 가면 힘들어요.”
-그래? 다시 군부대 들어가야 해?
“내가 준 차는 뭐 하고······.”
-차 하나 가지고 더럽게 생색내네. 알았어. 시간 맞춰서 갈게. 끊어!
뚝! 뚜뚜뚜뚜······.
진우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 한다고 이리도 급하게 집에 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진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 생각에 진우가 피식 웃고 말았다.
모든 일과를 마친 진우는 오늘 게이트에 참여한 병사들을 데리고 회식 장소로 나갔다. 이미 한 차례 회식을 해서일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안미숙과 박진철은 중간에 합류를 했다. 그런데 옷도 갈아입고, 깔끔하게 목욕까지 한 상태로 나타났다.
“뭐야. 씻고 왔어요?”
진우는 옆에 앉은 박진철을 보며 물었다. 박진철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나 깔끔 떠는 거 알잖아. 우리 미숙이도 그렇고.”
“뭐, 형은 그렇다고 치고······. 누나는 피 한 방울 안 튀었는데 왜?”
“야! 나 마지막 보스 몬스터 잡을 때 피 살짝 튀었거든?”
안미숙이 바로 말했다.
“아, 그랬어요? 아니, 나는 딴 것 하다가 땀이 나서 씻고 온 줄 알았죠.”
그 말에 순간 두 사람이 움찔했지만 이내 박진철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하. 너는 참······. 별소리를 다 한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다들 식사는 마쳤다. 그런데 유지태 중위가 진우에게 말했다.
“참, 부부대장님.”
“응?”
“소개팅 말입니다.”
“어.”
“저쪽에서 난리인데 언제쯤 시간 되십니까?”
“나 일주일 동안 휴가잖아.”
“그렇긴 한데 말입니다. 휴가 중에 시간 못 내십니까? 오히려 휴가라 시간 많지 않습니까.”
유지태 중위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야 뭐······. 괜찮은데······. 유 중위는 괜찮아? 여자 친구랑 시간 보내야지.”
“실은 이 얘기는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유지태 중위가 잠깐 뜸을 들였다.
“뭔 말을 하려고 그래? 말해봐.”
“제가 소개시켜 드리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제 여자 친구의 친구입니다.”
“여자 친구의 친구?”
“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워낙에 얘기를 잘해놔서 보고 싶다고 난리입니다.”
“그렇다면야······. 나는 상관이 없는데. 내일은 그렇고 모레쯤 하는 것이 어때?”
“네 알겠습니다. 오늘 제가 연락해서 시간 정해서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러자고.”
그렇게 회식을 끝내고 다들 각자 돌아갔다. 진우 역시 휴가를 얻어 집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아이고······. 또 일주일 동안 집에서 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네. 이런 식이면 군대에 더 있어도 되겠다.”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저기 앞에 어디서 많이 본 실루엣이 있었다.
“응? 설마······. 아니겠지.”
진우는 그 실루엣의 주인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걸어가는데 그 실루엣이 움찔하며 진우를 불렀다.
“진우야, 이제 와?”
휴가 나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김미영이 진우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진우와 김미영은 집 근처 24시간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냥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해도 되는데.”
그 말에 진우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집에 왜 가?”
“왜? 못 갈 건 또 뭐가 있어. 예전에는 잘 갔잖아.”
“예전에는 너랑 사귀었을 때고. 지금은 헤어졌는데 내가 너희 집에는 왜 가야 하는데.”
김미영이 피식 웃었다.
“웃긴다 너. 처음에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 사귀었어? 안 사귀었어?”
“뭐?”
“그때 나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우리 집에는 왜 왔는데?”
진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김미영은 저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으면서 사람을 이겨 먹는 게 특기였다.
김미영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저런 것마저 신선했다.
그전까지 만났던 여자들 대부분이 진우의 집에 잘사는 것을 알고 그 덕을 보려고 했다.
또 진우가 젊은 나이에 플레이어가 되었고, 플레이어 등급 역시 높으니 어떻게든 진우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랬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당연해진 진우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싸가지 없이 행동했었다. 그때 당시의 진우는 말이다.
그랬는데 김미영을 만나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진우를 잘나가는 한 기업의 후계자로 보는 게 아니라, 딱 플레이어로만 봤다.
더군다나 김미영 역시 플레이어 등급이 높았기 때문에 플레이어로서 인기도 많았다. 그런 김미영에게 무시를 당하자 자존심도 상했고, 그래서 그녀에게 잘 보이고 멋진 남자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과정에서 김미영에게 호감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게 되었다. 연애를 하는 동안도 김미영은 진우를 쥐고 흔들려고 했다. 그런 김미영을 진우도 좋아했다.
여장부답고 리더십 있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돈 많은 남자를 갈아탈 심산으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후 그 모든 것들이 김미영의 가식이고 연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를 같이 해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일단 차부터 마시자.”
“내가 어떤 거 먹는지 알지?”
김미영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진우는 살짝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주문하러 갔다. 그녀가 주로 먹는 것은 캐러멜 마키아토였다. 단 것을 매우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진우도 잊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하고 그것을 들고 김미영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진우가 가져온 자신의 음료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잊지는 않았네.”
“······됐고. 할 말이 뭐야?”
진우의 차가운 말투에 김미영이 미소를 보였다. 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여기 자리 한 시간밖에 못 있어. 더 있으려면 추가로 음료 주문해야 해. 그러니 빨리 말해.”
“그러니까. 왜 여기로 왔어. 우리 집에 가자니까.”
“어차피 추가 요금도 내가 내잖아.”
“칫. 당연한 거 아니니. 남자가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것이고······.”
“하아, 또 저렇게 말을 한다.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진우의 말에 김미영은 살짝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넌 어떻게 내게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어? 아까 밖에서 널 얼마나 많이 기다렸는지 알아? 집에 들어가려고 했다가 내가 꾹 참고 널 기다렸는데······.”
“누구 마음대로 우리 집에 들어가!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네가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안 들어갔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말이야.”
“······.”
진우는 뻔뻔스러운 김미영의 태도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김미영은 더욱 당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의 부모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얼굴 붉히고 짜증 낼 것 같아서 안 들어갔다고.”
김미영의 계속되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할 말을 잃은 진우였다. 어쨌든 지금 김미영의 말은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우 부모님 앞에서 자신이 쪽팔린 일을 당할 것 같아서 안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이야, 김미영······. 너라는 여자는 참······. 언제 봐도 한결같다.”
“사람이 변하면 되겠어?”
김미영은 당당하게 미소를 보였다. 진우는 고개를 흔들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내가 휴가 나온 줄은 어떻게 알았어?”
“뭐가?”
“내 휴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아······. 그건 다 아는 수가 있지.”
순간 진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내가 지금 묻잖아!”
김미영은 그런 진우의 눈빛에 좀 당황했다.
“이야······, 진우 너 좀 달라졌다. 예전에는 이렇듯 집요하지 않았잖아.”
“집요? 지금 난 군인이야. 그것도 장교야. 내 신변과 관련된 문제야. 누구에게 들었어!”
“······.”
김미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내가 직접 찾아낼 수도 있어. 그건 일도 아니야. 그 과정에서 내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 나오면 가만히 안 있어. 나 플레이어 이전에 군인이야! 그건 모르지 않겠지?”
진우가 차갑게 엄포를 놨다. 그러자 김미영이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아니 내, 내가······.”
강원도는 11사단이 지키고 있다. 지역 방위는 물론 게이트도 관리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각성 부대장인 진우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가 되어야 했다. 그것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진우가 무엇을 했는지 다른 누군가가 일거수일투족 미행을 했다거나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연히 조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진우는 요주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설마하니 진우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던 김미영은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 줄 몰라서 솔직하게 말했다.
“선미에게 들었어.”
“선미? 선미가 누군데?”
“너는 네 남동생 여자 친구 이름도 모르니?”
“내 동생 여자 친구를 네가 안다는 거야?”
“그래.”
“네가 어떻게 알아?”
진우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김미영이 팔짱까지 끼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 선미랑 친해.”
그 말에 진우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까 회식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내었다.
-나 오늘 휴가를 나갑니다. 며칠간 휴식을 취할 예정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체 문자를 보낸 것이다. 당연히 동생인 이진상에게도 문자가 갔다. 그때 그 옆에 선미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선미를 통해서 김미영이 소식을 접한 모양이었다.
김미영이 사조직을 통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얻은 것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진우가 자신의 행적을 고스란히 들킨 것은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진우는 오늘 김미영과의 악연을 끊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빨리 말해.”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무슨 얘기?”
“하, 너 진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는 여전하구나.”
“뭐? 뭘 만들어?”
진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김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