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숨긴 귀환자 105화
12. 봄날은 간다(5)
“야! 그래, 내가 지난 시간 심하게, 못되게 굴었던 것은 인정해. 그 부분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옛 여자 친구한테 이러는 것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우가 어이없어했다.
“나 몰래 다른 남자 만나고, 그런 남자 친구를 헌신짝 버리듯 버린 너에게 얼마나 더 잘해줘야 한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
“도대체 뭐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거지?”
“네가 나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잖아.”
“뭔 확신?”
“날 행복하게 해줄 확신 말이야.”
진우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 당시 진우는 어렸고, 김미영과는 만난 지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하물며 조금씩, 조금씩 미래를 그려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한다는 말이 확신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비겁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에 불과했다.
“그래. 예전의 일이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이 중요하지.”
김미영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야 말이 통하겠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널 만날 생각이 없어. 지금도 널 보고 있는 것이 불쾌하고 기분 나빠.”
김미영은 의문을 그렸다.
“왜? 왜 나랑 얼굴 마주치는 것이 불쾌하고 기분 나빠? 내가 도대체 뭘 했는데? 그리고 너도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인정했잖아.”
“그래. 현재가 중요해. 나는 내 인생이 중요하고, 현재의 내 삶이 중요해. 나 지금 정말 바빠. 지나간 인연을 붙잡고 할 여유가 없어. 그리고 너 좋다고 하는 남자 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에게 이러는 거지? 아니지 너 대원 아이템보다 우리 집이 더 잘사니까 그래서 이러는 거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너희 집 재산에 관심이 있는 것은 맞아. 하지만 너의 대한 호감의 일부분일 뿐이야.”
정말이지 너무 뻔뻔한 김미영의 답변에 진우는 진짜 어이가 없었다.
‘와, 진짜······. 저 얼굴이 설마 가짜야? 아니면 인피면구라도 쓴 거야?’
진우는 솔직한 심정으로 저 뻔뻔한 김미영의 얼굴을 손으로 확 잡아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에 가볍게 한숨을 쉰 진우가 물었다.
“야, 김미영. 너 이러고 있는 거 남자 친구는 알고 있냐?”
“그 자식 얘기는 꺼내지도 마.”
김미영은 바로 기분 나쁜 얼굴이 되었다.
“왜? 헤어졌어?”
“요새 연락도 안 돼. 어디서 뭘 하는지. 자꾸 이런 식이면 나랑 헤어질 거냐고 물어봤어. 그런데 짧게 답변이 오더라. 헤어지자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지금껏 살면서 이런 식으로 까이는 것은 처음이야.”
김미영은 여태까지 자신이 남자를 깠지 까인 적은 없었다. 그래왔던 만큼 자존심이 센 여자였다. 박수혁과 길게 연애를 하면서 수도 없이 헤어져 봤다. 그때마다 김미영이 박수혁을 찼던 것이었다. 그리고 박수혁과 헤어진 상태에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만큼 김미영은 스스로를 잘나가고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박수혁이 잠수를 타버렸다. 한마디로 잠수 이별을 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은 처음이었던 김미영은 지금 어떻게든 박수혁을 대신할 남자를 찾고 있었다. 자신의 트로피가 되어 줄 그런 남자 말이다.
그러는 와중 강원도를 아무리 뒤져봐도 진우만 한 남자는 없었다. 그래서 진우를 찾아왔다.
하지만 진우는 예전의 그런 자신만 바라보던 그런 진우가 아니었다. 블랙 게이트를 통해 개고생을 하면서 생각도 깊어지고 또 성격도 예전처럼 무르지도 않았다.
진우가 그런 김미영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무슨 의도로 날 찾아왔는지 알겠는데······. 나 너 안 좋아해. 예전의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러자 김미영이 바로 말했다.
“왜 그렇게 단정해? 우리가 못 본 지 오래되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다시 만나다 보면 예전 감정이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진우는 바로 잘라버렸다.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리고 너는 왜 내가 널 만나면 좋은 감정이 생길 거라고 확신해? 안 좋은 감정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뭐야 너? 설마 남자가 되어서 아직까지 꽁해 있는 거야?”
“네가 잘못한 걸 가지고 왜 남자 타령을 하고 그러지? 너는 연인 사이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 너는 뭐가 잘나서 그리 당당하고, 난 항상 그런 널 이해해 줘야 하지? 난 이게 이해가 안 돼.”
“야, 됐다. 됐어! 남자들은 하나같이 좋다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제 단물 다 빼 먹었다 이거지?”
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너를 그런 식을 깎아내리는 것이 재미있어?”
“뭐?”
“아니, 됐다. 말을 말자. 내가 너를 한때나마 좋아했던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질 지경이야. 제발 그만하자!”
진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왜 일어나?”
“난 더 이상 할 말 없다.”
“난 할 말 있어.”
“······.”
진우는 그런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고는 걸어갔다.
“어디 가!”
김미영이 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긴. 집에 가지.”
“이런 식으로 날 두고 간다고?”
“그래서 너희 집 근처까지 왔잖아. 넌 어서 집에 올라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진우는 차갑게 말을 하고는 김미영의 팔을 뿌리치며 커피숍을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김미영이 짜증을 냈다.
“아이씨. 짜증 나! 뭐 하나 되는 게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우는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었다.
“와, 진짜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저럴까. 이해가 안 된다. 이해가 안 돼. 그래, 이렇게 된 거 빨리 아무나 만나든가 해야지. 스트레스받아 못 살겠네.”
진우는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곤 유지태 중위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 중위. 나 확실히 소개팅해 줘야 해.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답 문자가 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얘기 다 끝났습니다.
그 문자를 확인한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으로 걸어갔다.
다음 날 진우는 모처럼 집에서 푹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등이 근질근질거렸다. 손을 뻗어 등을 긁는데 뭔가 손톱에 끼는 것이 느껴졌다.
“응? 땐가?”
진우가 눈을 찡그리며 자신의 손톱을 확인했다. 검은색 때가 손톱에 끼어 있었다.
“에이씨······. 오랜만에 목욕을 가서 등을 밀어야 하나?”
그러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진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들어가도 돼?”
“어, 그래······.”
이진상이 들어오며 말했다.
“일어났어?”
“그래. 넌 언제 들어왔냐?”
“나? 새벽에.”
“새벽에 들어와 놓고 뭐 하러 일찍 일어나.”
“나 원래 일찍 일찍 일어나. 그보다 형이야말로 뭔 군인이 이렇게 늦게까지 잠을 자.”
“지금 몇 시인데?”
“12시 거의 다 되었어.”
“뭐?”
진우가 깜짝 놀랐다.
“뭐지? 왜 이렇게 잠을 늦게까지 잤지?”
전날 진우는 김미영을 만나고 난 후 짜증이 났다. 그래도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자꾸만 김미영과 안 좋았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생각나며 잠을 쉽게 들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에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아, 김미영······. 진짜 끝까지 날 힘들게 하네.”
진우가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그러다가 이진상에게 손짓했다.
“너 잘 왔다. 나 등 좀 긁어봐라.”
“뭐래. 그냥 씻어. 그리고 엄마가 빨리 밥 먹으러 내려오래.”
“밥은 씻고 먹을게. 그보다 지금 급해! 어서 등 좀······.”
진우가 웃통을 까며 등을 내밀었다. 이진상이 살짝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은 진짜······. 등 긁어줄 여자친구도 없냐.”
그 소리에 진우가 생각이 났는지 바로 말했다.
“아참······. 너! 여자 친구가 선미라며.”
이진상이 약간 께름칙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 형이 선미를 어떻게 알아?”
“야! 너 뭔 생각을 해. 쓸데없는 생각 말고. 너 미영이 알지?”
“미영이? 형 버리고 간 그 여자?”
“그래.”
“그 여자가 왜?”
“어제 미영이가 우리 집 앞에서 날 기다리더라.”
“뭐? 그 여자가 왜?”
“내가 어떻게 휴가 나왔는지 물어봤더니 선미에게 들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선미하고 김미영하고 아는 사이라고?”
“어떻게 만났는지는 몰라. 그보다 너 선미라는 애 어떻게 만났냐?”
“선미? 그냥 아는 사람 소개로.”
“선미에 대해서 잘 알아?”
“엄청 잘 알지는 않고······.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너어······. 선미 만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진우가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했다. 이진상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김미영이랑 친한 사람 중에 정상적인 사람은 못 봤다.”
이진상도 자신의 형인 진우가 김미영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다. 당시 김미영이 얼마나 매정했는지, 그래서 진우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여자 친구인 선미가 김미영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뭔가 께름칙했다.
“일단 알겠어. 내가 알아볼게.”
“그래. 아무튼 너 욕실로 들어와서 등이나 밀어.”
진우는 그 말을 툭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욕실에 들어온 진우는 슬쩍 자신의 등을 거울에 비췄다. 그런데 시커먼 뭔가가 보였다.
“아이씨, 저게 뭐야? 진상아.”
“응?”
“여기 등에 한가운데 이거 뭐냐?”
“어디?”
“이거 말이야. 이거!”
진우가 등 한가운데를 가리켰고 그곳을 뚫어지게 보던 이진상이 짜증을 냈다.
“그거 형이 긁어서 붉게 물들었잖아.”
“빨간 것 말고, 까만 거······.”
“까만 거? 없는데······.”
“잘 찾아봐. 까만 거 있잖아.”
진우는 답답한지 인상을 쓰며 더욱 등을 이진상에게 보였다. 진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리야. 점도 없는데······. 잘못 본 거 아니야?”
“에이씨. 잘못 봤을 리가 있나.”
진우는 다시 거울에 자신의 등을 비춰봤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봤던 그 검은 점이 없어졌다.
“어? 없네. 어디 갔지?”
“아, 진짜! 오늘따라 왜 이래.”
“오늘따라 뭐 인마? 그보다 어디 갔지?”
진우가 투덜거리며 세면타월을 하나 꺼내 적당히 물을 묻히고 바디워시를 뿌렸다.
“자!”
이진상에게 세면타월을 건넸다.
“뭐야?”
“아까 말했잖아. 등 밀어 달라고!”
“물에 적시지 않고 바로 민다고?”
“형 사나이 아니냐. 괜찮으니까, 빡빡 밀어!”
진우가 자신 있게 등을 보였다. 이진상은 살짝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군대에서 이상한 것만 배워왔네. 형 등가죽 찢어져도 모른다.”
“네가 백날 문질러 봐라. 내 등가죽이 찢어지나.”
“어어? 형 나 무시해? 두고 봐.”
이진상이 팔을 걷어붙였다. 세면타월을 야무지게 손에 쥐고는 있는 힘껏 등을 밀었다. 이진상은 이렇게 힘껏 등을 밀면 아프다고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흑룡의 기운을 받아서일까?
이진상이 백날 밀어도 진우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기분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