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당신 정말 사람 잘못 봤어!
남자, 혼자서 주변을 횡 하고 둘러보더니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소리 지르는 그를 쳐다보는 주민들의 시선에 서서히 수상함이 깃들어 가고 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꼬마 하나가 비집고 나타났다. 이제 갓 다섯 살 정도 됐을 법한 꼬마는 아이 특유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흑발과 왠지 모르게 비싸 보이는 옷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꼬마가 쪼르르 그 앞으로 달려가,
“저기, 아저씨.”
남자의 기다란 옷자락을 붙잡았다.
사방을 둘러보던 남자의 눈길이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동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흑안. 꼬마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저씨 누구야?”
아빠와 같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돌풍이 대로를 휩쓸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도 뜨지 못하고 비명과 혼돈을 일으켰다. 그 돌풍은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후에 나타난 것이 이 남자였다.
남자는 꼬마의 말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입이 열렸다.
“그 말, 대륙 공용어입니까?”
꼬마는 고개를 갸웃댔다. 뭐라고 대답을 하려 입을 여는 찰나, 주민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후다닥 달려와 꼬마를 끌어안았다.
“이, 이 녀석아! 여기서 뭐 하는 게냐!”
수염이 덥수룩이 난 남자는 꼬마를 끌어안아 흑발의 남자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 모습을 찬찬히 쳐다보던 흑발의 남자는 수염 난 남자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 되십니까?”
또박또박한 대륙 공용어. 비교적 생소한 흑발을 가진 남자가 대륙 공용어를 이야기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로 또다시 수군거림이 번졌다.
“그, 그렇소만…… 대, 댁은 누구쇼?”
사람은 정체가 불명한 대상에 대하여 경계하기 마련. 흑발의 남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한 순간,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정리해 냈다.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지금은 몇 년입니까? 대륙력도 괜찮고, 로츠왈드 건국력도 괜찮습니다.”
“대, 대륙력으로는 3423년이고, 건국력으로는 31년이오만…… 그건 왜 물어보슈?”
“건국력 31년…… 여긴 로츠왈드 왕국이 맞습니까?”
“마, 맞소. 로츠왈드 왕국 남쪽의 미켈파 남작령…… 이오.”
“그렇군요.”
수염 남자의 말에 흑발 남자는 뭔가 생각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경계하지 않아도 될 사람처럼 보여 수염 남자는 살짝 경계심을 풀었다.
그는 아들을 품에서 내려놓고, 아들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다시 물었다.
“그럼 내 질문에도 대답해 주시겠소? 댁은 뉘쇼?”
흑발 남자는 잠깐 말을 고르듯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선뜻 대답했다.
“제 이름은 강태진. 동쪽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로츠왈드 왕국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여타 전설과는 다르게 그 역사가 매우 짧은 전설. 그래서 지금 현재까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왕국 전체에 깔리고 깔렸다.
그 전설이란 바로, 건국왕 팰리슈 반 로츠왈디스를 도와 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고 로츠왈드를 건국한, ‘동쪽의 나라’에서 찾아온 두 건국 영웅에 대한 전설이었다.
어느 전쟁사에서나 흔히 있을 법한 영웅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들의 능력에 사람들은 앞 다투어 이러한 별명을 붙였다.
동쪽의 나라에서 찾아온 ‘신의 전사’라고.
“……그 두 신의 전사 중에서 ‘현신의 전사’라고 불린 남자가 있었다오. 이름은 강태진. 지금도 왕립 대학교에 가면 그를 기린 동상이 서 있다고 하고, 한때 건국왕 폐하의 지식 스승이라고도 불린 영웅이었다던데…… 당신이 그와 같은 이름을 가졌단 말이오?”
“같은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입니다. 못 믿으셔도 상관은 없지만.”
냉철하게 말하는 태진의 앞에 수염 남자가 앉았다. 일단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그는 슈발트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옆자리는 그의 아들이 앉아 있었는데, 꼬마는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길로 태진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말요…… 좀 이상하지 않소? 건국 영웅들은 왕국이 세워진 직후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갔다고 했소. 건국왕 앞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동쪽의 나라로 말이오. 그런데 삼십 년이나 지난 지금 왜 다시 이곳에 나타났다는 거요?”
“지금 저희의 이야기가 어떻게 회자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신의 전사들의 전설 말이우?”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 전쟁 당시, 건국왕의 최측근에서 싸운 두 명의 신의 전사들의 무용담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전설로서 회자되고 있었다. 태진이 흥미가 있는 건 그것이었다.
“당신이 정말 현신의 전사라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겠소?”
“제가 알고 있는 건 전쟁의 실제 모습입니다. 전설이란 건 무릇 사람들 사이에서 부풀려지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야…… 지금도 신의 전사는 대단한 전설로 이야기되고 있다오.”
슈발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도 건국 이후에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기에 신의 전사를 눈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전설들을 어릴 때부터 귀 따갑게 들어왔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한참 신의 전사가 등장하는 전설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는 소년 같은 생생함이 어려 있었다.
“……뭐, 대충 이 정도지만. 어떻소?”
“제 얘기지만 정말 현실성이 없군요. 아무리 그래도 미연이나 저나, 벨린 협곡에서 제국군들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물리치지는 못했는데 말입니다. 하늘에서 벼락을 떨어뜨린 적도 없고…… 역시 이쪽이 이야기로는 더 재미있군요.”
“뭐, 현실이 다 그런 거 아니겠소.”
슈발트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들을 한 손으로 누르며 물었다.
“당신이 일단 진짜 신의 전사라고 칩시다. 그럼 다른 신의 전사는 어떻게 된 거요? 이번에는 혼자 이 나라로 온 거요?”
“저도 그게 묻고 싶습니다. 분명히 미연이와는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고 보니 없군요.”
“같이 온 게 아니우?”
“그건 제가 더 묻고 싶습니다. 같이 온 건지, 아니면 저만 이쪽으로 떨어진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잠깐…… 그럼 당신들이 원해서 온 게 아니란 거요?”
태진은 쓰게 웃었다.
“삼십 년 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제 뜻대로 이곳에 아닙니다. 저희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갑자기 이 세계로 와 버린 겁니다.”
“그럼 신이 건국왕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건……?”
“전설이란 항상 거짓말을 내포하고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팰리슈 그 녀석과는 어쩌다 동료가 되어서 결국 끝까지 하게 되었을 뿐. 신이라고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전 무신론자이고 말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30년 동안이나 믿어 온 전설을 깨어 버리는 눈앞의 ‘신의 전사’에게 슈발트는 어이없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태진은 그 반응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꿈을 깨서.”
“……아니 뭐, 이 나이 먹고 그런 전설을 믿고 있을 어린 나이는 아니니 됐소. 아들놈이야 지금 우리가 무슨 이야기하는지도 모를 거고. 아무튼 결국 당신도 왜 이리로 왔는지 모른다는 거군?”
“네, 삼십 년 전에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어떻게 원래 세계로 돌아갔었는데…… 휴우, 이번에는 미연이부터 찾아야겠군요.”
“원래 세계라면, 동쪽의 나라를 뜻하는 거요?”
“동쪽의 나라…… 라는 건, 미연이와 제가 임의로 지어 낸 거짓말입니다. 애초에 그런 나라는 이 세계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동쪽으로 가 봤자 나오는 건 바다와 ‘판게리아’뿐 아닙니까?”
바운스에는 세계의 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세계의 끝 너머에 존재하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를 바운스에서는 판게리아라고 부른다.
세계의 끝이란 그 말 그대로, 대륙을 나가 바다를 항해하며 동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그 바다마저 사라지는 ‘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건 숱한 모험가들에 의해 확인된 사실로 둥근 별에서 살다 온 태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이라는데.
“그럼 당신들은……?”
“신의 전사 전설에서 유일하게 실제와 맞는 것은 이 점뿐이군요. 전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흰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이곳 바운스와는 다른, 지구라고 불리는 별에서 이곳으로 떨어진 겁니다.”
“지구……?”
“네. 뭐, 판게리아가 존재하는 이곳 상식으로는 어차피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이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아두십시오.”
능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태진은 이야기를 돌렸다. 더 이야기를 했다가는 슈발트가 정신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아서였다.
그나저나 미연이는 어디로 간 거지?
분명히 그 라면집을 나서는 순간 이곳으로 건너왔다. 거기까지는 2년 전과 똑같은데, 설마 이번에는 나만 이곳으로 넘어온 건가?
“투신의 전사를 찾는 거요?”
“……예. 뭐, 저와 같이 이 세계로 넘어온 것조차 불명확하지만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확인을 한다는 거요?”
“왕궁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슈발트는 눈을 부릅떴다.
“왕궁을?”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삼십 년 전에 저를 본래의 세계로 돌려 보내준 것은 로츠왈드의 마법사들이었습니다. 돌아가려면 다시 그들을 만나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이라면 미연이의 행방을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기왕이면 지구에 그냥 있었으면 좋겠군요. 미연이에게 삼십 년 전과 같은 끔찍한 기억을 또 주고 싶지 않으니까.”
독립 전쟁에 대한 그들의 무용담은 화려했지만 실제 그들이 느낀 감정은 공포와 두려움에 점철되어 있었다.
이 세계로 오기 전까지는 그저 평화롭게 학창 생활을 보내던 태진과 미연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 세계로 와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 그들이 전쟁에 말려들어 영웅으로 불리며 전쟁을 앞장서 이끌었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 끔찍했던 나날을 미연이 다시 겪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웅에게 약한 면은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오.”
“저희도 일개 인간입니다. 약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요.”
쓴웃음을 잠깐 지었다가 태진은 곧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30년 전에 태진은 현신의 전사라고 불리던, 역사에 남은 책사였다.
언제 어디서나 정확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숱한 작전을 펼쳐 독립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록 그 능력이 차원이동에서 오는 ‘이능’ 덕분이었다곤 해도.
이 시점부터 태진은, 스스로 이름 붙인 이능이라는 능력을 사용하는 현신의 전사로 다시 돌아왔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태진은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진심으로 슈발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슈발트도 덩달아 테이블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에…… 내가 해 준 게 뭐 있다고, 이런 인사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기회만 된다면 더 보답을 해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정중하게 이야기하는 그 순간 태진의 이능에 한 가지 정보가 포착되었다.
태진의 이능은 한마디로 설명하면 ‘정보의 무한 흡수’라고 할 수 있다. 차원이동의 여파인지 태진은 지구에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예민한 감각을 얻었다. 오감이 극대화되어,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숱한 정보들이 감각을 통해 두뇌로 흘러온다. 그리고 그 모든 정보를 무리 없이 여과하여 써먹을 수 있다.
지금 그 이능에 포착된 것은 말굽 소리였다. 거리로 따지면 약 100m 정도?
소리는 차츰차츰 그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와 함께 10여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오고 있군요.”
태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는 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소리가 더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거짓말 같이 슈발트의 집 앞에서 멈췄다.
발자국 소리가 집 앞까지 뚜벅뚜벅 다가와 예의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누가 계시나!”
무례하게 집안으로 들어온 자는 갈색의 군복을 입은 기사였다. 슈발트는 그의 신분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기사의 앞으로 달려갔다.
“어…… 기, 기사님이 저희 집에 웬일이신……?”
“이 집에 자신을 현신의 전사라고 밝힌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그는 어디 있나.”
고압적인 기사의 태도에 슈발트는 연신 굽실거렸다. 태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것은 30년 전 그가 지시한 정책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일단 그 사실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스스로 나섰다.
“제가 강태진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는 허리춤의 검을 쥔 모습 그대로 태진을 거만하게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결국 비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네가 현신의 전사라고?”
“믿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저를 찾아온 용건은?”
“남작님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 따라와라.”
“남작님?”
태진은 이 영지가 미켈파 남작령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30년 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성이니 아마 그 이후에 작위를 받은 가문인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왜 저를 찾는 겁니까?”
“남작님에게 그 사람이라니! 무엄하다, 네놈!”
기사는 당장에 칼을 뽑아 들었다. 새하얀 칼날이 태진의 목을 겨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금이라도 지렸을 장면이었지만 태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기사가 소리를 쳤을 때부터 이미 칼을 뽑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태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앞장서십시오.”
“흥! 진작 그럴 것이지.”
위협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는 의기양양하게 검을 집어넣고 돌아섰다. 태진은 호의를 베풀어 준 슈발트의 집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슈발트는 집을 나서려는 태진의 등에 말을 던졌다.
“조, 조심하쇼.”
돌아보는 태진의 입가에는 친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슈발트의 집에서 남작의 성까지는 도보로 30분 정도가 걸렸다. 그 거리를 마차도 없이 그저 걸어간다.
태진이야 별 상관없다지만 오히려 완전무장한 채로 왕복 한 시간을 걸어 다녀야 했던 기사들이 걱정이 될 정도였다. 선두에 서 있는, 좀 전에 태진과 만난 기사는 대장이라도 되는지 말을 탄 채 거만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의 성이 육안으로 확인되었을 즈음 그 기사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곳이 남작님의 성이다. 너희 동쪽의 나라에서도 저 정도 위용을 갖춘 성은 보기 힘들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남작의 성은 제법 사치스러운 구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과연, 지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성이었고, 30년 전 이러저러한 성을 봐 왔던 태진으로서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성을 두른 거대한 수로 위로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며 기사가 소리쳤다.
“나, 미켈파 기사대장이 돌아왔다! 남작님께 알려라!”
성문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경비병 하나가 부리나케 성 안쪽으로 뛰어갔다. 전령이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고서 기사대장은 흡족한 음성을 냈다.
잠깐 설명하자면 각 영지의 영주들에게는 직위에 관계없이 사병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 인원수는 계급별로 제한된다. 그들을 기사대라고 부르며, 이 거만한 남자가 미켈파 기사대의 대장인 모양이었다. 그 직위로 보아 미켈파 남작의 측근으로 여겨졌다.
태진은 조용히 정보를 분석하며 기사대장의 뒤를 따랐다.
성안 역시 사치스러운 저택 하나가 으리으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들어온 뒤에야 느꼈지만 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택 하나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는 듯한 형세였다.
태진으로서는 대체 뭐 때문에 이딴 짓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저택 앞에 기사들이 일제히 멈췄다.
이미 뛰어 들어갔을 전령의 소식을 듣고 저택의 3층,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땅딸보의 배불뚝이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전형적인 모습이군.”
한국어로 중얼대는 태진을 기사대장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았지만 태진은 무시했다.
“나의 충실한 기사여. 그래, 동쪽의 나라에서 온 귀하신 손님은 어디 있는가?”
다 보이면서도 괜히 물어보는 미켈파 남작. 거기에 또 성실하게 응답하는 기사대장.
“주군이시여. 주군의 명을 받들어, 이렇게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자가 바로 주군이 찾으시던 자입니다!”
연극조가 너무 심하잖아? 속으로 냉소하며 태진은 3층 위를 올려다보았다.
“호오…… 그대인가. 동쪽의 나라에는 자네 같이 모두 흑발과 흑안을 가졌는가?”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한국이란 나라는 원래 흑발이 전통이고, 아시아 전체가 그렇지. 염색한 자 빼고는.
“신기하군. 내 생애 자네와 같은 생김새는 처음 보나니, 그대는 정말로 전설 속의 그 인물이란 말인가?”
남작 또한 로츠왈드 왕국 사람이라 전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례지만 남작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올해로 마흔셋이 되네만, 그런 건 왜 묻는가, 동쪽의 나라에서 온 자여.”
“그럼 삼십 년 전에는 열세 살이셨군요. 전쟁을 직접 보지 못하셨을 테니 제 정체를 직접 증명해 주실 수는 없을 거라 사료됩니다.”
말하며 태진은 직감했다. 이 미켈파 남작이란 자는 그를 ‘현신의 전사’라고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를 전설의 영웅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별로 상관은 없었기에 딱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음, 거기서 그렇게 이야기할 게 아니고 올라오게나. 동쪽의 나라에 관해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 싶다네.”
고풍스럽게 안쪽을 가리키는 손짓에 기사대장이 곧바로 태진을 저택 안으로 안내한다. 태진은 조용히 그를 뒤따라 3층까지 올라갔다.
거대한 방이 나왔다.
붉은 융단 위에 자리한, 척 봐도 비싸 보이는 테이블에 좀 전에 본 땅딸보 남작이 서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그의 생김새를 훨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키는 150㎝ 전후, 몸무게는 100㎞에 육박할 것 같은 부피에 턱 양쪽으로 복주머니 같은 살이 늘어져 있다.
이거 제법 국세를 갉아먹을 이미진데?
“앉지.”
“감사합니다.”
미켈파 남작과 태진은 서로 마주 보고 자리했다. 곧장 시녀가 한 명 들어와 그들 앞에 향기로운 차를 놓고 나갔다.
“마시게나. 수도에서 가져온 귀한 차라네. 마트란 차라고 하는데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호오, 동쪽의 나라에서도 이 차를 즐기나 보군. 쓰면서도 달콤한 맛이 일품이지. 또 향은 얼마나 좋은가. 30년 전에 왕국이 건국된 이후 주력 수출품이 되었다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마트란 차를 개발한 것이 태진이었으니까. 맛이 커피와 비슷하여 평소 커피를 즐기던 태진이 대용품으로 삼던 차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훌륭히 국익사업에 이바지하고 있다니.
태진은 뿌듯한 마음에 한 모금 머금었다.
“맛있군요.”
“고맙네. 마트란 차는 우리 영지의 특산품이기도 하다네. 특산품에 대한 칭찬은 곧 나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지!”
진심으로 기쁜 듯 턱살을 흔들면서 웃는 미켈파 남작. 귀족스러운 듯하면서도 이런 점에는 솔직한 것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귀족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는 건 30년 전에 충분히 자각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마트란 차를 내려놓고 태진은 이야기를 꺼냈다.
“왜냐니, 현신의 전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왕국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네, 영웅의 실체를.”
“저를 믿어 주시는 겁니까?”
“그럼, 아닌가?”
찻잔을 든 채 미켈파 남작은 넉살좋게 웃고 있었다. 태진은 솔직히 의외였다. 어디까지 신용할 수 있을까.
일단 태진은 상대의 불신이 지금 자신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말했다.
“특별히 용건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니, 아직 차도 다 마시지 않았는데 말인가? 얼마 전에 왔다고 들었는데 뭘 그리 서두르나?”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제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람? 누구를 말인가?”
태진은 조심스럽게 미연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던 미켈파 남작은 늘어진 턱살을 쓰다듬으며 주억댔다.
“그렇군…… 함께 온 건지 아닌 건지 그것도 불명확하단 말인가? 그럼 어떻게 찾을 생각이지?”
“일단 왕궁으로 갈 생각입니다. 제 정체를 밝히면 그쪽에서 어떤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나친 낙관일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태진에게 기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비약적으로 상승한 두뇌 활동으로도 정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그렇군. 왕궁에는 실력 있는 마법사들도 많을 테니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걸세. 그래,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뭘 말입니까?”
“내게 현신의 전사를 도울 기회를 주지 않겠나? 내가 왕궁까지 데려다 주겠네.”
“예?”
그 직후였다. 미켈파 남작의 넉살 좋은 웃음이 갈라졌다. 눈앞의 영상이 종잇장을 구기듯 구겨지더니 위에서부터 시꺼먼 음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황급히 감각을 활성화시켰으나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감각을 모조리 지배하며 그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고개가 앞으로 떨어졌다.
설마, 약……?
짙은 안개처럼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미켈파 남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헐헐! 자네가 진짜 현신의 전사라면, 난 그 현신의 전사를 잡은 영웅이 되는 건가?”
즐거운 듯한 그 웃음소리조차 끊어졌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완전히 잠들어 버린 태진을 내려다보다 미켈파 남작은 방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대장을 불렀다.
“부르셨사옵니까, 주군.”
“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나, 이런 녀석일수록 쉽게 함정에 빠지는 법이라네.”
“역시 대단하십니다, 주군! 주군의 지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것이옵니다!”
기사대장의 충성에 찬 아부에 미켈파 남작은 기쁜 듯 대소를 터뜨렸다.
“자, 어서 지하실로 옮기도록. 흑발과 흑안! 동쪽의 나라 사람이라니, 대륙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임에 틀림없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알겠습니다!”
기사대장은 두 명의 기사를 불러 태진의 양팔을 잡아 올렸다. 완전히 늘어진 태진은 그들의 손에 의해 딸려 올라갔다. 응접실을 나오기 직전 미켈파 남작이 뒤뚱거리며 다가와 태진의 꺾어진 머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후후훗. 동쪽의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 누구나 다 현신의 전사라고 믿을 줄 알았더냐? 이 멍청한 자식, 그래도 지금까지 만난 어느 사기꾼들보다는 가장 흡사한 생김새구나. 내 쉽게 죽이진 않을 테니 저승에 가서 고마워해라.”
이어서 미켈파 남작의 지시가 떨어진다. 기사대장은 신속하게 태진을 지하 연구실로 옮겼다.
***
눈을 뜨니 똑바로 누운 상태였다. 몽롱한 정신 상태로 한참을 천장 비슷한 것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되돌아왔다.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고막을 두들기고, 그 때문에 태진은 훨씬 더 일찍 깨끗한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깼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니까. 반사적으로 일어서려 할 때가 되어서야, 태진은 자신의 사지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부로 움직였다가 그 아까운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게 자네에게도 좋을 거야.”
가까이 다가온 그 목소리는 미켈파 남작이었다. 턱살이 흔들리면서 흡족하게 태진의 신체를 미끈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좋군. 호리호리해 보였는데 벗겨놓고 보니 제법 근육도 있고. 현신의 전사도 운동은 하는 건가?”
비꼬는 투였다. 태진은 날카롭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네. 지금부터 할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깨어나서 솔직히 놀랐을 정도야. 그렇다고 자네에게 좋을 건 없는데 말야. 고통만 더할 뿐이지.”
무슨 꿍꿍인지 끈적끈적한 시선을 태진에게 보내는 미켈파 남작. 본능적인 구역질을 눌러 참으며 태진은 냉정을 유지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가르쳐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부터 자네 몸에 실험을 좀 할 거야. 내가 얼마 전에 발견한 ‘흔적’에서 약물을 다루는 법을 찾아냈단 말일세. 그런데 마땅히 실험할 대상이 없더군. 영지 밖에서 몇몇 사람을 사서 실험도 해 봤는데 우연찮게도 자네라는 동쪽의 나라 인간이 걸려 들어왔다는 거고. 현신의 전사를 자칭하는 자넨데,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긴지 알 수 있겠지?”
“쉽게 말해 ‘마루타’라는 겁니까?”
“마루타? 그건 또 뭔가? 동쪽의 나라에서 쓰는 말인가?”
바운스의 인간이 한국의 역사를 알 리가 없다.
“동물들에게 실험해 봤자 동물은 인간보다 자연에 더욱 가까운 존재. 마법을 직접 실험하는 것에는 역시 인간만 한 게 없지.”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채 미켈파 남작이 테이블 저쪽에서 걸어왔다. 그 손에는 투명한 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걸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반항해도 소용없으니 순순히 입을 벌려라. 현신의 전사이지 않은가? 자네의 희생으로 왕국의 마법이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게 된다면 자네도 기쁘겠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체도 모를 액체를 순순히 마실까 보냐!
태진은 입을 다문 채 절대 열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미켈파 남작은 그 우악스런 손으로 태진의 얼굴을 휘어잡았다.
얼굴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손이 거칠게 태진의 입을 잡아 벌리려 했다. 태진은 끝까지 반항했다. 그는 사지가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시도했다.
“흥! 반항해도 소용없다고 말했네!”
미켈파 남작도 절대 밀리지 않는 힘으로 태진의 입을 강제로 뜯으려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남작님!”
“뭔가? 실험 중에는 절대 연구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터인데?”
“그, 그것이…… 왕궁 정보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뭣이?”
태진의 저항을 억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시야에 회색빛 천장이 되돌아왔다.
“네.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이라고 합니다. 성 앞에서 대기 중인데 어떻게 할까요?”
“쳇! 왕궁 놈들은 항상 좋을 때 와서 방해하는군. 내 방으로 뫼셔라.”
기사를 먼저 내보낸 다음 미켈파 남작은 넉살 좋게 웃었다. 처음에는 호탕해 보였던 그 웃음도 지금 태진에게는 음흉의 결정체일 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시게. 다시 돌아와서 즐거운 실험을 재개해 보지.”
변태다. 연구실을 나가는 그의 풍채를 노려보며 태진은 결론을 내렸다.
연구실을 나서며 미켈파 남작은 연구실 앞에 두 명의 경비를 세웠다. 아무렇게나 마을 청년단에서 뽑아 놓은 경비였다. 경비는 약간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한마디만 남기고 연구실을 떠났다.
“저놈이 빠져 나오지 못하게 잘 감시하거라. 알겠느냐?”
“예!”
연구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있다. 지하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대동하고 미켈파 남작은 지상으로 빠져 나왔다.
저택의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자 곧 문이 열리며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이 들어왔다.
순찰대장을 처음 본 미켈파 남작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도 그것을 느낀 듯했으나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 아리스 뤼스필드입니다. 미켈파 남작 되십니까?”
상대의 인사에 미켈파 남작도 침착하게 응답했다.
“반갑소. 내가 미켈파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정말로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이오? 내가 알기로 순찰대장은 하이듀크 뤼스필드 경이라고 알고 있소만.”
“아버님의 뒤를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뤼스필드 경에게 딸이 하나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분인지는 몰랐소. 늦었지만 순찰대장직을 맡게 된 것을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아리스 뤼스필드. 아버지인 하이듀크 뤼스필드에 이어 2대째 왕궁 정보부 순찰대장을 맡게 된 그녀는 올해 24세의 젊은 나이였다.
미켈파 남작령은 왕국의 최남부에 있기 때문에 다른 영지보다 왕궁의 소식에 어두운 편이다. 아직 건국된 지 30년 밖에 되지 않는 나라이기에 이런 허점도 있는 것이다.
우선 미켈파 남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아리스를 안내했다. 같이 도착한 10여 명의 순찰대원들은 별채에 쉴 곳을 만들어 줄 것을 명하고, 집무실에 아리스와 함께 대동한 기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집무실에 미켈파 남작과 아리스, 그리고 그들의 호위기사 두 명만이 남았다.
“왕궁에서부터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실 터이니 간단하게 본론을 끝내는 게 어떻소? 아니면 오늘은 쉬고 내일 이야기해도 본인은 상관없소만.”
“심려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길게 갈 이야기도 아닙니다.”
“알겠소.”
미켈파 남작은 어디까지나 남작으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말했다.
“왕궁 정보부에서 왔다면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오. 내가 발견한 ‘흔적’ 때문이오?”
“제가 보고 받은 것에 의하면, 정확하게는 ‘미카일’ 측에서 발견한 것을 미켈파 남작에게 통보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어차피 곧 우리 영지의 일원이 될 땅이오. 지금도 계속 교섭 중이지. 그래도 정확한 사실을 원한다면. 그렇소, 미카일의 산적들이 발견한 흔적이오.”
“그 ‘흔적’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흔적이란 고대의 유적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고유명사치고는 시적인 단어지만 이미 몇 백 년의 역사를 가진 단어로서, 그 말의 존재 자체는 대륙 마법사를 뒤흔들 정도로 무게가 있다.
미켈파 남작은 한 달 전 미켈파 남작령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미카일 산의 산적들에게서 한 가지 통보를 받았다. 미카일 산에서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평소 마법 쪽에 관심이 많던 그는 몸소 그 흔적을 찾아가 탐방했고, 탐방 결과의 일부만 왕궁에 보고했다. 흔적에 관한 건은 왕궁 정보부가 취급하기로 되어 있어서 한 달이 지난 오늘 정보부 소속의 순찰대가 흔적을 조사하러 영지에 도착한 것이다.
미카일 남작은 곧 응답했다.
“미카일 산까지는 이곳에서 한나절 정도 시간이 걸리오. 오늘은 이미 출발하기 늦었으니 쉬었다가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 어떻소? 별채에 따로 쉴 곳을 마련해 줄 수 있으니 뭣하면 조금 더 쉬었다가 가도 상관없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스는 딱딱한 태도로 대답하고 일어섰다. 미켈파 남작은 기사대장에게, 기사대장은 자신의 부하에게 아리스를 별채로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남작의 집무실에서 나오며 아리스의 호위기사는 앞서 가는 남작의 기사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어 그녀에게 말했다.
“딱히 숨기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모르죠, 연기일지 아닐지. 여기 있는 동안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남작의 기사는 그 대화를 듣지 못하고 아리스를 이끌고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리스가 충분히 집무실에서 멀어졌다고 판단한 후 미켈파 남작도 기사대장을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저것들, 뭔가 낌새를 채고 왔을지도 몰라.”
“하지만 주군, 흔적을 조사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조심한다고 나쁠 건 없지. 저것들의 움직임을 잘 감시하도록 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대장은 어디까지나 충직하게 대답했다.
***
태진은 여전히 연구실에 누워 있었다. 딱딱한 감이 등으로 느껴졌지만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팔다리만 꼼지락대고 있었다.
“젠장!”
잘 내뱉지 않는 욕설도 지껄여 보지만 기분이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솔직히 실책이었다. 바운스에 다시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것이다. 현신의 전사로 돌아간다고 마음먹었음에도 그것이 뼛속까지 파고들지 못했다. 이 실책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욱 큰 이유라면 역시, 미연의 부재.
미연이 옆에 있었다면 더욱 신중했을 것이다. 태진 자신의 실수가 곧 미연에게까지 피해를 입힌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 한 잔을 받더라도 의심을 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뼈아픈 이유였다.
한숨을 짙게 내쉰 뒤 똑바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적당하게 다듬다가 그친 듯한 거친 천장은 돌의 느낌 그대로였다.
누운 채로 감각을 넓혔다. 벽 바깥으로 미묘하게 흐르는 물소리는 지하수일까? 문밖에서 서성이는 발소리도 들려온다. 두 개의 발소리. 아마도 경비일 것이다. 이래저래 상황은 좋지 않다.
두두두―
뭘까. 넓어진 청각으로 다른 발자국 소리가 겹쳐졌다. 문밖에서 들린다. 두 개의 발자국이 세차게 뛰어와 문 앞에서 정지했다.
낮게 몇 마디 나눈 후 발자국은 다시 멀어졌다. 남은 두 개의 발자국이 문으로 다가오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명의 경비가 연구실로 들어왔다. 태진은 감각을 다시 평소로 되돌렸다. 무슨 이야긴지는 벌써 다 들었으니까.
“영주님 명이시다. 풀어주마.”
경비병 하나가 태진의 팔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지?”
“다 들렸습니다.”
사지가 자유로워졌지만 도망가기는 힘들었다. 부끄럽게도 태진은 무력이 약하다. 두 명이라고 해도 이 경비들을 쓰러뜨리고 갈 자신은 없었다. 이럴 때 마법이라도 다룰 줄 알았으면 좋을 텐데.
태진은 자유를 얻으면 마법부터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그 편이 태진에게는 더 어울린다.
경비들은 태진의 팔을 제압한 채 그를 연구실 한쪽의 감옥에 집어넣었다. 감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태진을 밀어 넣고 문을 잠근 후, 경비들은 서둘러 연구실을 나갔다.
태진이 얻은 거라곤 그나마 자유로워진 몸과 좀 전에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이 침대도 뭣도 아닌 나무판대기 위였다는 사실뿐이었다.
문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실험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태진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다.
과연 며칠이나 미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안에 탈출하지 않으면 변태 남작에게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실험용 마루타로.
태진은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달린 횃불이 너울대며 불빛을 비춰 주고 있다. 축축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은 지하인 것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벽 밑으로 몇 개의 책상과 서랍장이 보였는데, 온통 실험용 기구들로 가득했다.
서랍장 쪽에는 각각의 색을 머금은 액체들과 고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마도 약품들일 것이다.
태진은 약품들에 주시했다.
감각을 넓혔다. 그 약품들에 손은 닿을 수 없지만 촉각과 시각, 청각과 촉각까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약품들을 구별해 내려 애썼다.
가능성 있다.
몇 분 후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저 약품들을 이용하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난 이 왕국에서 30년 전, 현신의 전사라고 불렸던 몸이다. 이런 곳에서 죽을까 보냐!
이것은 자만이 아닌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태진은 눈앞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감옥. 철로 된 우리. 단단한 자물쇠로 채워진 문.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지?
2차 계획은 수립됐지만 1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난관에 봉착한 채 시간은 흘렀다. 지하인 탓에 빛조차 없다. 기절한 시간 때문에 시간 감각도 없어서 대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감옥 속에서 뇌세포만 늘리고 있을 때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상념에 빠져 있었기에 누군가가 감옥 앞으로 걸어왔을 때에야 태진은 그를 눈치 챘다.
“……슈발트 씨?”
“정말 당신이 현신의 전사요? 현신의 전사가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수다.”
태진은 쓰게 웃었다.
“삼십 년 전에도 몇 번 있었습니다. 아마 알려지진 않았겠지만.”
슈발트는 감옥 안에 앉아 있던 태진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생각보다는 좋아 보이는군요. 마이크 놈한테 들었을 때는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여기 경비 마이크가 내 친구거든.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찾아왔소. 경비는 기사가 아니니까 어느 정도 입김이 작용할 수 있는 거요.”
“흔히 말하는 연줄이군요. 아무튼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올 수 있을지는 모르오. 그래서 먹을 것 좀 챙겨왔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쇼. 마이크한테 부탁해서 넣어 주도록 하겠소.”
구해 준다는 하지 않는다. 그의 신분으로선 영주가 하는 일에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는 노릇. 태진은 그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넘겨주는 빵과 우유를 감사히 받고서 그에게 부탁했다.
“넣어 주실 건 없습니다. 저한테 지금 필요한 건 이 연구실 안에 다 있으니까.”
“연구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뭐 하는 곳이오?”
“미켈파 남작의 연구실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제 부탁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슈발트를 움직여 태진은 서랍장에서 10여 가지의 약품을 건네받았다. 정확히 열다섯 개. 갖가지 색깔의 약품들이 유리병 안에 밀봉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뭘 하려는 참이오?”
“탈출할 겁니다.”
“뭐요?”
공범으로 만들어 놓고 뒤늦게 밝히는 건 좀 뻔뻔한가? 태진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슈발트 씨는 모른 척하고 있으시면 됩니다. 저한테 오신 것도 비밀이지 않습니까? 그냥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시면 될 겁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마법은 못 한다고 하지 않았소?”
“마법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과학입니다.”
태진은 자신 있게 웃었다.
“아직 완전히 믿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전 현신의 전사입니다. 탈출하고 여력이 남으면 한번 뵈러 가겠습니다. 빵과 우유, 잘 먹겠습니다.”
슈발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빵을 뜯으며 태진은 약품을 검사하는 것에 집중해 버렸다. 말을 걸기도 그래서 그는 머쓱하게 일어섰다. 어쨌든 그 당당함만은 인정해 줘도 될 것 같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문을 나가려는 슈발트를 태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불러 세웠다.
“지금 몇 시인지 알 수 있습니까?”
“해가 져서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지만…… 자정 정도 되었을 거요.”
“도움,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자칭 현신의 전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평생을 미켈파 남작령에서 목축업으로 살아온 슈발트는 태진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뭐, 무식한 내가 어떻게 알겠어.’
슈발트는 간단하게만 생각하고 연구실을 빠져 나왔다.
연구실에서 다시 홀로 남은 태진은 열다섯 개의 약품을 일일이 하나씩 확인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태진은 열다섯 개의 약품을 모조리 판별해 냈다.
종류는 열두 가지. 중복되는 약품을 뺀 결과다. 이걸로 이 감옥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묶인 채 감옥에 갇히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작전은 충분하다. 용기는 이미 가득하다. 태진은 관절을 풀며 미연을 생각했다.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면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놀려 댈 게 뻔하다.
그 모습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좋아, 시작해 볼까.”
드디어 현신의 전사는 행동에 나섰다.
***
우유가 담겨 있던 병을 탁탁 털어 내고, 그 안에 두 개의 약품을 섞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여 점차 녹색으로 변해 갔다.
태진은 진녹색으로 변한 액체를 병째로 흔들며 한동안 계속해서 섞었다. 병 속에서 두 개의 약품이 충분히 혼합되기를 기다린 후 일어섰다.
그리고 창살 밖으로 병을 내밀어 자물쇠 위에서 병을 기울였다.
철로 만들어진 자물쇠 위로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두 약품의 혼합액은 철과 만나 반응을 시작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던 자물쇠는 순식간에 갈색 녹으로 뒤덮였다. 내부까지 완벽하게 부식된 것이다.
500㎖가량을 모조리 자물쇠에다 부어 버린 태진은 흡족하게 웃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약품은 신체에는 해가 없다. 녹으로 뒤덮인 자물쇠를 몇 번 흔들어 보고 손에 힘을 넣는다.
푸석―
허탈할 정도로 손쉽게 자물쇠는 태진의 손아귀 안에서 부서졌다.
됐다. 태진은 남은 자물쇠 조각을 치우고 안쪽에서 철문을 열었다.
애초에 이런 연구실에 그를 내버려 둔 것 자체가 실수였다. 현신은 이 세상에 지식을 전해 주었다고 알려진 신이다. 그런 현신의 명을 받아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여겨지는 것이 현신의 전사다.
지식을 넘어 지혜로까지 이용 가능한 사람이 곧 태진이다.
유유히 감옥을 빠져 나와 청각을 문밖에 기울이고 연구실을 뒤졌다. 각종 기구들이 놓여 있는 책상, 약품들이 진열된 서랍. 단 한구석도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보 삼아 두뇌 속에 집어넣었다.
이능으로 깨어난 두뇌로 2년 전의 기억까지 꺼내 분석, 결론을 내린다.
“……미켈파 남작, 당신 정말 사람 잘못 봤어.”
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본래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흥분하면 안 된다. 차가운 머리에서 올바른 판단이 내려지는 법이니까.
태진은 작업을 시작했다. 책상 하나를 영토 삼아 그 위에 필요한 약품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적절하게 이름까지 새겨진 약병들이라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실험기구 중에서 쓸 만한 빈 것들도 가져왔다. 깨지기 쉬운 유리병들이 대부분이라 이용하기가 훨씬 쉬웠다.
20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연구실 구석에서 찾아낸 주머니에 약품이 든 병들을 전부 끌어넣고 일어섰다. 아직도 반응이 끝나지 않아 병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도 있지만, 합성을 일으켜 변환된 약품 중 병을 녹이거나 깰 수 있는 약품은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문에 다가가기 전 벽에 설치해 둔 트랩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착실히 진행되고 있으니 예상 시각에 정확하게 반응할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마이크는 사실 졸고 있었다. 근무 상태가 엉망이라고 상급자에게 된통 한 소리 들을 자세였지만 지금은 그 상급자도 같이 잠든 채였다. 그래서 그도 조금 마음을 놓고 졸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소리는 그때 들렸다.
똑똑―
문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조금 있다 그 소리를 깨달은 마이크가 눈을 확 떴다. 연구실 안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물론 한 명이 있긴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갇힌 몸이고, 열쇠도 없이 빠져 나왔을 리는 없다.
그럼 이게 무슨 소리지? 잘못 들었나?
마이크가 그렇게 여겼을 때,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똑똑똑―
확실하다. 마이크는 옆에서 잠에 빠져 있는 상급자를 깨울까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눈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조심스레 문을 빠끔 연다.
그 순간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반대편 벽까지 굴러간 그것은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파열음과 함께 깨졌다.
폭발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쾅!
불꽃이 한순간 천장까지 치솟아 올라 마이크를 날려 버렸다.
“으아악!”
마이크가 비명을 지르는 찰나 문 뒤쪽에 서 있던 태진이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이제야 잠이 깬 다른 경비의 복부를 짓밟으며 복도를 내달렸다.
마이크가 정신을 차린 것과 비슷한 순간이었다.
“도, 도망이다! 연구실의 죄수가 도망쳤다!”
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방금 그 약품으로 문을 날려 버리려고도 했다.
‘비스트로’와 ‘악세곤’을 혼합한 ‘비스트시곤’. 강한 충격에 흔들릴 경우 폭발해 버리는 약품이다.
그런 식으로 만든 다른 약품들이 태진의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었다. 그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태진은 복도를 내달렸다.
“도망자다! 잡아라!”
뒤쪽에서 마이크와 다른 경비가 추격을 시작했다. 태진은 몇 개 더 만들어 놓은 비스트시곤 중 하나를 뒤쪽으로 집어던졌다.
금방 확 불길이 번지며 추격로를 막았다.
하지만 앞쪽에서도 다른 경비들이 나타났다.
“네놈! 어딜 도망가려고!”
“잡아라! 산 채로 잡아라!”
태진은 코웃음을 치며 비스트시곤을 집어던졌다. 뭣도 모르고 전방에 나타났다가 약품을 정면으로 뒤집어쓴 경비 하나가 폭발했다.
콰앙!
“―으아악!”
“무, 무슨 일이냐!”
뒤늦게 달려온 다른 경비들이 비명을 지르다가 태진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이 반격하기 전 태진은 그들이 달려온 방향 너머를 주시했다. 감각이 공기를 타고 전염되듯 뻗어나갔다.
그의 청각은 이미 슈발트의 발소리를 듣고 계단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 계단이 있는 방향을 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다.
비스트시곤을 투척해 길을 뚫고 태진은 부리나케 달렸다. 하지만 곧 태진의 귀로 계단을 타고 뛰어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주인공들과 태진은 곧바로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 도망자라니!”
“저, 저놈이다! 현신의 전사라고 사칭한 자식이야!”
사칭이 아니라 진짜란 말이다!
속으로 되받아친 태진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또 하나의 비스트시곤을 뒤쪽으로 집어던져 진로를 막은 후 새롭게 나타난 다섯 명의 경비들과 대치했다.
더 시간을 끌며 기사대가 달려올 것이다. 그 전에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다.
태진은 다시 약병을 꺼냈다. 뭉툭하게 생긴 그것은 만들면서도 끔찍함에 몸서리를 쳤던 것이다. 손에 들고 있기도 싫어 태진은 경비들에게로 약병을 집어던졌다.
“훗! 그딴 걸로 우리를 이길성싶으냐!”
한 경비가 용맹하게 창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약병이 깨져 그 안에 들어 있던 약품이 흩날렸다.
태진은 서둘러 숨을 집어 삼켰다.
“컥!”
“이, 이게 무, 무슨!”
“숨, 숨이 안……!”
약품을 뒤집어쓴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서 있을 힘조차 잃어버려 쓰러지는 경비병도 있었다.
태진은 그들을 손쉽게 뛰어 넘어갔다.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그로서도 예상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다 약병이 깨져 전원이 저 약품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약품이 뿜어낸 청산 가스 수준의 독가스는 굉장했다.
한 병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아까운 짓을 했나? 태진은 다시 복도를 달렸다. 불길이 어느 정도 잡혔는지 그를 뒤쫓는 경비들의 움직임이 재개됐다.
계단이 눈앞에 보였다. 이곳을 나가면 저택을 통해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비스트시곤을 꺼내 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육중하게 생긴 나무문이었지만 폭발력에 밀려 금세 산산조각 났다.
“저기 있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뒤늦게 쫓아온 다른 경비들이 악취로 인해 인상 찡그린 얼굴로 계단 앞에 도달했다. 태진은 그들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 순간, 태진이 연구실에 장치해 놓은 트랩이 작동했다.
콰아앙――――!
미켈파 남작성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폭발이 연구실에서 터져 올랐다. 그 진동은 저택 전체를 흔들어, 자고 있던 남작을 비롯해 순찰대 일행, 기사대까지 빠짐없이 깨웠다.
폭발의 여파를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겨우겨우 불길을 잡은 마이크였다. 어디선가 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했더니, 뒤였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엄청난 물줄기가 연구실의 문을 통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으, 으아아아악!”
그 비명조차도 거센 물줄기가 삼켜 버렸다. 바운스 사람들은 경험조차 해 보지 못했을 ‘해일’과 같은 기세로 물줄기는 지하층을 뒤덮기 시작했다.
대량의 비스트시곤 반응을 이용한 태진의 트랩은 연구실의 한쪽 벽을 박살냈다. 그 밖에서 흐르고 있던 것은, 태진이 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수로였다. 수로를 흐르던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연구실에 뚫린 구멍을 통해 지하층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폭발 시간은 태진이 정확하게 예상한 시간과 맞아 떨어졌다.
지하층을 뒤덮은 홍수에 경비들은 더 이상 태진의 생포가 목적이 아니게 되었다.
“사, 사람 살려!”
“이게 무슨 일이냐!”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혼란을 일으키는 경비병들을 내버려두고 태진은 지하층에서 빠져 나왔다.
이 폭발로 성의 모든 이들이 깨어났을 것이다. 그들이 달려 나오기 전에 빠져나가려면 더 서둘러야 한다.
자기 혼자서 그들 전부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태진은 잘 알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약병들도 벌써 반 이상 써 버렸다.
빠져 나온 곳은 예상대로 저택의 1층이었다. 어둠이 뒤덮은 홀을 가로질러 무거운 정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성 안쪽으로 경계하고 있던 경비대가 태진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도망자다! 정문 쪽에 도망자가 있다!”
그 외침은 오히려 태진에게 정보를 주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정문이 아니었으니까. 미련 없이 방향을 바꾼 태진은 저택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경비대가 그의 뒤를 쫓았다. 그들을 향해 비스트시곤을 던져 대며 태진은 정말 열심히 내달렸다.
그의 이능에는 안타깝게도 체력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신체 능력은 지구에서와 동일하고, 그는 지구에서도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쉽게 지쳤다.
다행히 체력이 동나기 전에 저택 뒤쪽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대하던 것을 발견했다.
밝은 달이 마구간을 비춰 주고 있었다. 밤이었기에 마구간지기조차 없다. 자던 말들은 조금 전의 폭발 때문에 잠에서 깨어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마구간으로 뛰어 들어가며 태진은 바운스에서의 30년 전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그는 말을 타고 다녔다. 자동차가 없는 이상 최고의 탈것은 말이었다. 의외로 말은 체질에 맞아서 승마술이 제법이라는 소리도 들었었다.
태진은 잘 달릴 것 같은 말 하나를 잡아 고삐를 붙잡았다. 당연히 투레질과 함께 발광 일보 직전의 행동을 보이는 말을 향해 태진이 조용히 타일렀다.
“조용히 하십시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할 짓이었지만 이것은 미연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이상할 만큼 동물과의 교감도가 높은 그녀는 흥분한 말을 다룰 때 이 행동은 자주 사용하곤 했다.
고삐를 잡으면 말이 시선을 내린다. 그때 천천히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말은 금방 온순해진다. 직접 해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아무튼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 봤다.
놀랍게도 말은 금세 온순해졌다. 태진은 문에 쓰인 말의 이름을 확인하고 웃음을 지었다.
“비키, 잠깐 빌려 가야겠습니다.”
경비들이 뒤늦게 마구간으로 쫓아왔을 때, 태진은 이미 뒤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저쪽이다! 말을 훔쳐서 달아났다!”
“정문! 정문 쪽! 활을 쏴라!”
“안 돼! 활은 안 돼! 생포해야 한다!”
정문 쪽의 경비들은 할 수 없이 창만 꼬나 쥔 채로 정문으로 달려오는 태진을 맞았다. 당연하게도 태진의 손에는 비스트시곤이 들려 있었고,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콰앙!
한 명이 불꽃에 휩싸여 절규했다. 동료가 타 죽어 가는 모습에 다른 경비들이 공포의 비명을 질렀지만 태진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문을 여십시오! 당장 열지 않으면 당신들 모두를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
경비대는 마을에서 뽑혀 온 청년들이다. 기사처럼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두 태진의 작전에 포함된 사항이었다.
예상대로 그들은 허겁지겁 문을 열기 시작했다. 말이 빠져나갈 만큼의 틈이 생기자 태진은 안장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이랴앗!”
갈기를 휘날리며 비키는 태진을 태운 채 내달려 성을 빠져나갔다. 성문 위에서 지키고 있던 경비들에게는 나무다리를 건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태진의 모습만이 겨우 보였을 뿐이었다.
잠이 든 중에도 확연히 느껴지는 커다란 진동. 벽 전체가 떨리는 진동이 침대를 흔들었다.
아리스는 눈을 떴다.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침대 옆에 기대어 둔 검을 붙잡는다.
진동은 다시 가라앉았지만 그녀의 신경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리스는 어둠 속에서 우선 불빛을 만든 후 창문을 벌컥 열었다.
고요했다. 미켈파 남작성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침묵에 빠져 있었다.
……잘못 느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창문을 닫고 돌아섰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호위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리스 님!”
“괜찮아요, 류토. 무슨 일이죠?”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지진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지금 저택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저택 쪽이라면 미켈파 남작의 일인가요?”
“그런 듯싶습니다. 경비대와 기사대까지 출동했습니다.”
“심상치 않네요. 우리도 움직이죠.”
“지금 순찰대를 깨우겠습니다.”
“곧장 일 층으로 집합하라고 하세요.”
“예!”
호위기사, 류토는 그녀의 명에 예를 갖추더니 방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리스도 얼른 순찰대장의 복장을 갖추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1층에는 이미 순찰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시종들도 한밤의 소란에 깨어나 있었다. 류토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순찰대원을 정렬시켰다.
“불침번은?”
“이 둘입니다.”
간밤의 불침번을 맡았던 두 명의 기사가 아리스 앞으로 뛰어나왔다. 아리스는 그들에게 상세한 사정을 물었다. 사실 그들도 별채에 있었기에 제대로 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다. 일단 아는 대로만 대답하고 아리스는 결정을 내렸다.
“일단 저택으로 가서 미켈파 남작을 만나야겠군요.”
아리스는 앞서 별채를 빠져 나왔다.
별채는 본 저택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정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옆으로 돌아가야 했다. 순찰대가 저택 오른쪽을 지나감과 동시에 태진은 마구간에서 준마 비키를 훔쳐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순찰대가 정문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는 이미 태진이 성문 수비병 한 명을 불태우고 밖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저 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리스의 물음에 류토가 답할 방도는 없었다. 아리스는 일단은 미켈파 남작을 만나기 위하여 정문으로 달려갔다.
그 순간 정문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폭포수 같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물러서라!”
선봉에 있던 아리스가 급히 피신하며 소리쳤다. 순찰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물살을 피해 내는 동안 물은 쉴 새 없이 빠져 나왔다. 마치 홍수라도 나서 계곡물이 불어나 넘쳐흐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런 성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리스는 물살과 함께 떠밀려 나온 기사들에게로 뛰어갔다. 순찰대원들에게 그들을 구조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녀 또한 그 기사가 숨이 트이도록 도왔다.
한참을 콜록거린 기사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숨을 몰아쉬었다.
“대답할 수 있겠나요? 무슨 일이죠?”
“죄, 죄수가 한 명, 타, 탈옥했습니다……!”
기사는 희미한 정신 사이에서도 그녀가 왕궁 정보부에서 온 순찰대장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죄수?”
“예! 지하 실험…… 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방금 탈출하면서 이런 짓을……!”
아리스는 방금 성문을 빠져나간 말 한 마리를 떠올렸다.
뭐라고 다시 물으려는 사이 물살이 줄어든 정문에서 뚱뚱한 남자가 기사를 대동한 채 뛰어 나왔다. 볼 것도 없이 미켈파 남작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소란이란 말이다!”
바닥을 뒹굴던 남작의 기사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서도 예를 갖추는 정신은 대단했지만 아리스는 칭찬해 줄 겨를도 없었다.
“그, 그놈이 도망쳤습니다!”
“그놈!?”
큰 몸을 흔들며 달려와 아리스 앞의 기사의 멱살을 부여잡는 미켈파 남작의 모습은 아리스의 관념을 깨어 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놈이라니! 그, 현신의 전사 놈 말이냐!”
“예, 예! 그, 그놈입니다! 나, 남작님의 시, 실험실에 잡아 두었는데, 타, 탈출한 것 같습니다!”
“멍청한 놈들! 고작 그 한 명을 못 잡고 있었단 말이냐! 그놈이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단 말이다!”
기사를 물이 질퍽대는 바닥에 패대기치고서 미켈파 남작은 분노를 이기지 못한 듯 고래고래 악을 썼다.
“잡아 와라! 당장 추격대를 조직해서 놈을 잡아 오란 말이다! 실험 재료로는 더없이 알맞은 녀석이거늘! 노예를 사도 그런 놈을 사기는 힘들단 말이다! 그놈을 놓치다니!”
미켈파 남작의 기사대장의 표정이 하얘졌다. 이토록 분노하는 남작의 모습은 본 적도 없거니와, 그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쏟아내고 있는 남작의 뒤에는 아리스 뤼스필드 순찰대장이 서 있었다.
“나, 남작님. 고, 고정을―”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기사대장! 어서 놈을 잡아 오지 않고 뭐하고 있는 게냐!”
“남작님!”
미켈파 남작은 끝내 아리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오히려 자신의 호위기사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기사대장은 이내 체념하고 말았다.
“미켈파 남작. 방금 그 말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조용한 그 목소리에 미켈파 남작의 태도가 급변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류토를 옆에 두고 아리스는 조용히 선고했다.
“전 흔적의 조사뿐 아니라 한 가지 더 지시를 받고 이 영지에 왔어요. 최근 미켈파 남작령과 오켈라니아 남작령 사이에서 노예 시장이 은밀히 계속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거든요. 이번 흔적 조사 방문은 사실 그쪽 임무도 비밀리에 진행하러 온 것인데, 겨우 첫날에 손쉽게 걸려들 줄은 몰랐네요.”
“아, 아니! 자, 잠깐. 뤼, 뤼스필드 경! 내, 내 말을 들어보시오!”
“전 아직 정식 기사 자격을 받지 않았기에 경이 아니에요. 그러니 편하게 순찰대장이라고 부르세요.”
“그, 그럼 순찰대장. 내, 내 마, 말을 좀 더 들어보시오. 그…… 그게 아니고 말이오.”
“류토.”
아리스는 냉철하게 명령했다.
“이들을 체포하세요.”
“노예 거래는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진 않겠죠? 당신은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당장 왕궁으로 이송되어서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될 거예요. 물론 오켈라니아 남작령에 대한 조사도 진행될 테니 그렇게 알아두시죠.”
아리스는 밧줄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끙끙대고 있는 미켈파 남작 앞에 섰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리스는 순찰대장의 자리에 올라 있는 자였다. 그녀의 아버지 하이듀크 뤼스필드의 성품을 곧게 이었다는 평을 받는 그녀는 위엄 있게 미켈파 남작을 내려다보아 그의 고개가 꺾이게 만들었다.
“제길…….”
목을 숙인 채 욕지거리를 내뱉는 미켈파 남작.
아리스는 다른 기사들마저도 전부 구속된 모습을 둘러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류토. 여기를 맡기겠어요.”
“대장님,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탈출한 자를 잡아오겠습니다.”
아리스는 그 말을 저택 뒤쪽의 마구간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 그녀를 류토가 서둘러 말렸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대장님께서 이 자리를 벗어나시는 건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니요, 제가 다녀오겠어요. 이들이 그 죄수를 뭐라고 불렀는지 못 들었나요?”
다시 몸을 돌려 아리스는 미켈파 남작에게 물었다.
“당신의 죄수로 있던 그 자는 정말로 현신의 전사였나요?”
“……자기 스스로 그러더군. 생김새도 비슷했고 말이오.”
“생김새가 어떻던가요?”
“역사에 기록된 모습 그대로였소.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까지. 하지만 아닐 거요. 신의 전사를 사칭하는 놈들은 내 숱하게 봤지. 현신의 전사가 그렇게 쉽게 잡혔을 것 같소?”
“그렇긴 하군요.”
순순히 긍정하며 아리스는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 방도도 없었던 상황에서 성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도망친 자이기도 하죠. 가능성은 있지 않겠어요?”
미켈파 남작은 그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일리는 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아리스는 다시 류토를 바라보았다.
“해가 뜨기 전까지 그를 붙잡아 오겠어요. 만약 그가 정말로 현신의 전사라면 제 눈으로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류토는 아리스를 잘 알고 있었다.
왕립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의 목표는 건국영웅인 현신의 전사였다. 아버지를 이어 기사 수행을 받았지만 언제나 현신의 전사를 목표하여 공부하고 수련해 온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현신의 전사에 관련된 일이라면 다른 일보다도 무거운 무게를 지닌다.
자신의 호위기사면서 부순찰대장을 맡고 있는 류토에게 지휘권을 양도하고 아리스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자신의 말을 타고 나온 그녀는 성문에서 수비병들에게 죄수가 향한 방향을 묻고, 전속력으로 성을 빠져나갔다.
류토는 아리스가 성을 나갔음을 확인 후 미켈파 남작과 기사대를 일으켜 세웠다. 취조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오늘 하룻밤은 가두어 둘 수밖에 없다.
그는 이제 모든 물이 빠져 나온 듯한 저택 안으로 그들을 끌고 들어가 2층에 구금하려 했다.
잠에서 깬 시종들에게 물어 그들이 전부 들어갈 만한 방을 찾아 몰아넣으려 했을 때였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방에 갇히기 직전에 미켈파 남작이 반항을 시작했다.
“난 미켈파 남작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왕국의 귀족이란 말이다! 이렇게 잡아 두고서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 보았느냐!”
“미켈파 남작. 순찰대의 특성을 아직 잘 모르시나 보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남작을 부를 때 왜 ‘님’을 붙이지 않는지 모르십니까? 순찰대는 기본적으로 순찰대장 외에는 아무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왕국의 귀족, 남작 이상의 백작, 공작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대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은 우리에게 모두 똑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국법을 어긴 자로서 우리에게 구속되어 있습니다. 순찰대에서는 죄수에게 예를 갖추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치 책이라도 읽는 듯 감정이 결여된 그 말투에는 미켈파 남작의 기세도 꺾일 수밖에 없었다. 류토는 담담하게 그런 사실을 내뱉은 후 마지막으로 방 안에 미켈파 남작을 쳐 넣었다.
“수몰되어 감옥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류토는 순찰대 몇 명을 감시로 붙여 두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순찰대원들의 인사를 받고서 류토는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실수를 범했음을 눈치 챘다.
복도에 순찰대의 배가 넘는 기사대가 나타났다. 순찰대가 잡은 기사대의 숫자는 고작해야 10명 안팎. 하지만 남작인 영주가 소유할 수 있는 기사대의 숫자는 50명. 그 말은, 이 저택에 현재 약 40명의 기사가 더 있다는 말이었다.
류토와 그의 부하들은 순식간에 기사대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남작님을 구해라!”
기사대가 양쪽에서 순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그들에게 응전하면서 류토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대장님……!’
상황은 허무하게도 그렇게 뒤집히고 말았다. 기사대의 숫자에 밀려 순찰대는 가볍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순찰대를 완전히 제압한 기사대가 방 안에서 달려 나온 나머지 순찰대마저 단칼에 베어 버리고 미켈파 남작과 다른 기사대원들을 구출해 냈다.
미켈파 남작은 숨이 끊어져 가는 류토의 피범벅이 된 얼굴을 내려다보며 잔뜩 비웃음을 머금었다.
“대장은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그 부대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허술하다니. 내가 순찰대가 어떤 조직인지도 모를 것 같았나? 모르면서 그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었는 줄 알았나? 그것은 다 나의 명령이었다. 이 층은 원래 나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니까 얼마든지 그들을 불러낼 수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알겠나?”
류토는 꺼져 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큭……! 이, 이러고도 무, 무사할 줄 아는가!”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올렸다. 바위가 하나 올라가있는 듯한 움직임으로도 그는 기어코 미켈파 남작의 바짓단을 붙잡았다.
“어, 어쩔 생각이냐……!”
“곧 죽을 텐데 가르쳐 줘도 소용없지 않나?”
류토의 눈동자가 분노로 차올랐다. 남작의 차가운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는 직감했다.
“대, 대장님께 소, 손을 대었다간 내가…… 크흑!”
기침을 터뜨리는 류토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다는 듯 미켈파 남작이 돌아섰다. 기사대장이 류토의 손을 발로 차 미켈파 남작에게서 떨어뜨렸다.
기사대장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눈을 감은 미켈파 남작이 조용히 고했다.
“조용히 죽게. 곧 그대의 대장도 따라갈 터이니.”
“지금 당장 현상 수배를 붙여라. 자칭 현신의 전사놈과 그 망할 순찰대장 년을 잡아들인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은 그들의 소행으로, 그들은 지금 도주 중인 것이다. 알겠느냐? 곧바로 영지에 수배지를 돌려라!”
“옛!”
기사대장의 충직한 대답 소리가 류토가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