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2)

둘. 검에 이름을 붙이는 이상, 넌 결코 날 못 이겨

미연은 숲을 헤매고 있었다. 뽑아 든 칼로 수풀을 베어 넘겨 가면서 서서히 2년 전의 감각이 되돌아오는 걸 느꼈다. 당시 고1이었던 미연은 태진과 함께 바운스로 떨어졌다. 그리고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하는 와중에 자연스레 본래 이상의 검도 실력을 쌓았다. 그 실력은 그녀에게 ‘투신의 전사’라는 간지러운 별명까지 안겨 주었더랬다.

대충 수풀을 베어 내던 수준이던 칼의 휘두름이 점차 예리함을 더해 갔다. 처음 눈을 뜬 장소에서 직선으로 약 1㎞ 정도까지 이동했을 즈음 그녀는 발을 멈췄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길을 헤맬 뿐이야.

미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이윽고 맘에 드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지구에서도 수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이 세계의 나무 종류를 구분해 낼 수 있을 리는 없다. 단지 그 굵기가 맘에 들어서 뚫어져라 봤을 뿐이었다.

끌어안으면 팔이 제법 남을 듯한 굵기의 나무 아래에 서서 손으로 나무의 표피를 만졌다. 수풀이 우거진 것을 보니 최소한 죽은 나무는 아니다. 그녀는 가볍게 칼 손잡이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후우…….”

눈을 감았다가 뜬다. 태진이 옆에 있었더라면 2년 전을 떠올렸을 눈빛. 투신의 전사가 다시금 그 자리에 강림해 있었다.

허리를 비틀며 오른쪽 아래에서부터 칼을 휘둘러 올린다.

―――――!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무음.

나무를 꿰뚫으며 한순간 빛의 선이 그어졌다. 그 후, 나무는 미연의 허리쯤에서부터 깨끗하게 베어져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스으으응― 쿵!

나무의 추락. 그 굉음에 놀란 산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연이어 짐승들마저 사방에서 꽥꽥거리며 요동을 피워 댔다. 그 소란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흠.”

사범 보조인 그녀에게 검도를 배우는 수련생들이 봤다면 기겁할 만한 짓을 벌여 놓고서도, 그녀의 감상은 퍽 간단했다. 지금 그녀에게 아쉬운 건 이 자리에 없는 태진의 존재였다. 이럴 때 가장 힘 있게 칭찬해 주는 건 언제나 그였다.

울적한 마음을 다잡으며 잘린 밑동을 살폈다. 2년 전 태진과 이 세계를 헤매고 다녔을 때 그에게 배운 상식. 나이테를 보면 방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미연은 방향을 가늠했다.

이 숲이 대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정한 방향을 정해 놔야지 나중에라도 편할 것이다.

“좋아, 북쪽으로 가자.”

쓰러진 나무가 동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로츠왈드 왕국은 대륙의 남부에 붙어 있으니 북쪽으로 올라가면 어디가 나오든 나올 것이다. 대충 그렇게 짐작하고 미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태진이 있었다면 좀 더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전에 일검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시 이 세계로 오면서 2년 전의 그 이능이 되돌아왔다. 태진에게는 엄청난 감각과 두뇌 회전을, 그리고 미연에게는 놀라운 신체 능력와 전투 감각을 준 이능이었다.

태진도 이 세계에 있다면 2년 전처럼 이능이 되돌아갔을 터. 그때 그는 현신의 전사라고 불렸었다.

“진짜…… 어딨는 거야, 너.”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칼을 휘두른다. 시야를 괴롭히던 수풀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이럴 때 옆에 안 있어 주고 어딜 헤매고 있는 거야, 대체! 같이 이곳으로 안 떨어진 거 아냐?

아니야,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 있어.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따로 떨어진 거라구. 그래, 분명해!

강태진…… 너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거지?

미연은 결코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2년 전 그날부터 쓰러지려 하는 정신을 스스로 추스르고 일으켜 세워 살아남았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언제나 함께 했던 사람은 태진이었다. 숱한 아수라장을 함께 헤쳐 나온 사이였다. 그 믿음이 그녀를 지금 계속 지탱하고 있었다.

찾아내자, 그리고 다시 둘이서 지구로 돌아가자.

미연의 발걸음에는 결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다음 순간 멈칫했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망설임이 아닌, 보다 실질적인 형태의 방해였다.

시선. 미연의 전투 감각에 걸린 것은 그녀에게 쏟아지는 무형의 시선이었다.

태진의 감각과 다르게 미연의 감각은 전투시, 혹은 그와 상응하는 상황에서 발현된다. 지금같이 칼을 뽑아 든 상태도 마찬가지다. 칼을 든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각성과 마찬가지였다.

그 전투 감각에 몇 개의 시선이 얽혔다.

미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칼을 비스듬히 내린 채 입을 열었다. 물론 한국어가 아닌 대륙 공용어로.

“누구지?”

고요한 숲에는 짐승들의 소리마저 끊겨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시선은 끊임없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 시선을 따라 감각을 넓히다, 그녀는 오른편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 나무 위. 누구야?”

순간 미연은 나무 전체가 움찔거린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만큼 그쪽의 반응은 화들짝 놀랐음에 가까웠다.

나무 위, 우거진 나뭇잎을 걷어 젖히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복면을 코 위까지 덮어쓴 남자는 언뜻 보면 닌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미연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에 닌자 같은 건 없다. 있다면 암살자 정도?

그리고 저 복장은 분명 기억 속에 있었다.

“산적?”

바운스 공식 산적 복장이라고 해도 좋을 복장. 2년 전에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산적들이 주로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다.

“산적이 왜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지? 우선은 아래로 내려와.”

자연스레 배여 나온 명령조에 말투. 잠시 후에야 미연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체감 시간으로 한 시간여. 어느새 2년 전의 버릇이 나오고 있는 건가.

조금 태도를 고치고 다시 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얘기를 하려면 눈높이가 맞아야지 않겠어?”

누그러뜨린 말투에 산적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는 눈짐작으로 15m는 될 법한 위치에서 거침없이 뛰어내리더니 매끄러운 동작으로 나무 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서 보니 특징이 확실히 보였다.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은발. 스스로 광택을 낼 정도로 확실한 은색을 띈 머리칼은 미연과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남자는 대뜸 말했다.

“난 산적이 아니다.”

“……아, 미안. 하지만 그런 복장으로 나타나니까 그런 줄 알았어.”

“산적 같나?”

“이 세계가 바운스가 맞다면.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산적은 그런 복장이었어.”

산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최대한의 활동성과 위장성을 갖춘 복장을 선호한다. 바운스의 산적이란 그런 존재들이었다.

남자는 그 말에 납득한 건지 아닌 건지 아리송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착각을 해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난 산적이 아니다.”

“그래, 미안하다고 했잖아.”

말이 통하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뭐야, 이 사람? 미연은 답답함에 언성을 높였다.

“왜 나를 감시하고 있었지?”

“특별히 너를 감시하고 있던 건 아니다. 이곳은 나의 보호 구역. 외부인으로부터 숲이 훼손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너는 그저 우연히 만났을 뿐이다. 좀 전에, 너는 삼백 년 된 카플러스 나무를 잘랐다.”

미연은 잠깐 말을 잃었다. 조금 전의 베어 버린 나무의 이름이 카플러스였구나. 근데 그게 300년이나 되었던 건가? 미연은 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 그건 방향을 알고 싶었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거든. 그래서 나무를 잘라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어.”

“……너, 외부인이 아닌가?”

“외부인이 정확하게 뭘 뜻하는 건지 몰라서 대답하기 힘든 물음인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나?”

미연은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감시당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상대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향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묻고 싶어. 여긴 대체 어디야?”

미연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남자는 진지하게 그 손짓을 쳐다보았다.

“이 숲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군.”

“이해력이 좋네? 태진이보다는 아니지만 제법 말이 통할 것 같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남자는 이제야 정확하게 ‘대상’으로서 미연을 살펴보았다.

머리칼과 같은 색의 은안(銀眼). 그 이국적인 눈동자를 멀뚱히 쳐다보는 미연에게 남자는 나지막이 물었다.

“너……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건가?”

“그 말, 이 년 전에도 그렇게 많이 들어보진 않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네. 너도 이 년 전에는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인 것 같은데, 아냐?”

“그렇게 물어도 나로선 대답해 줄 수가 없군. 난 태어나서 이 숲을 나선 적이 없다.”

“그럼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만 대답해 줘. 여기는 바운스, 맞아?”

“대륙 공용어를 쓰고 있으면서 그런 물음을 하다니 우습군. 너의 말대로 이 세계는 바운스다.”

“그럼 지금 이 위치는?”

“아키레마 제국 북부 판게리츠 산맥 중부. 통칭 미소의 숲.”

담담하게 내뱉은 남자의 대답이 미연은 바운스에 떨어진 이후 최초로 당황했다. 저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른다.

“잠깐.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냐?”

“어떻게 들었나?”

“제국 최북부의 판게리츠 산맥 중부 미소의 숲.”

“정확하게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미연의 두뇌가 새하얘졌다. 그녀에겐 태진만큼의 두뇌 활동이 불가능하다. 이해가 가능했을 때에나 납득이고 수긍이고 할 수 있다. 지금 그녀에게는 납득 자체가 불가능했다.

“왜!?”

“……왜라고 나한테 물어봤자 돌려줄 대답이 없군.”

은발의 남자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 태도가 묘하게 미연을 화나게 만들었지만 이내 그녀는 차분하게 머리를 식혔다.

칼을 뽑아 든 상태.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차갑게.

그것이 전투 감각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었다.

한참 뒤 미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몇 년이지?”

“735년.”

제국력이다. 바운스의 3분의 2를 지배하고 있는 대제국이 건국된 시기를 원력으로 사용하는 역법. 미연은 체감 기준 2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로츠왈드 건국 원년이 제국력으로 몇 년이었더라……?

“……31년?”

“로츠왈드 왕국 건국력인가? 확실히 올해로 31년이 되겠군. 삼십 년 전에 독립했으니.”

30년!? 태진과 함께 지구로 귀환한 것이 건국 원년이었는데, 그런데 31년이라고?

그건 곧 지구에서 시간이 2년이 지나는 동안 이곳은 30년이나 지났다는 말이다. 이 시간차를 태진은 알고 있을까? 미연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미래의 낭군님을 걱정하며 다시 눈을 들었다.

은색 눈동자가 뚫어져라 미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쪽의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내 할 일을 할 차례다.”

“너의 할 일?”

“말했다시피 이 구역의 자연 훼손을 방지하는 것이 나의 임무. 우리 미소 족의 시선으로 보자면 너는 범죄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외부인인 이상 우리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댈 수는 없다는 것이 장로님의 의지이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너를 우리 미소 족의 마을로 데려가려고 한다. 거부하겠나?”

그 태도는 너무나 진지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미소 족은 여성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남녀평등 주의구나? 맘에 드네.”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며 미연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큰 눈을 굴리며 한 차례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좋아, 나도 그 장로라는 사람에게 물어보고픈 게 있으니까.”

“장로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까칠하게 말해도 소용없어. 난 미소 족이 아니니까.”

나름 죄를 짓고 동행하는 거지만 결코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태도. 남자는 물끄러미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미연은 그와 함께 미소 족의 마을로 향했다.

바운스의 3분의 2에 달하는 영토를 소유한 대제국 아키레마의 최북부에는 거대한 산맥이 있다. 그 산맥 너머에는 넘실거리는 북해만이 존재하기에 그 산맥에는 ‘땅의 끝’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판게리츠 산맥.

예부터 그렇게 불려온 거대한 산맥에는 산지기 민족이 오래도록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민족의 이름이 바로 미소 족. 지금 미연의 앞을 이끌고 있는 은발의 남자가 바로 그 민족이다.

앞에서 넘실거리는 은발을 따라 미소의 숲을 해쳐 나가기를 한참. 이미 한 시간 정도는 길도 없는 수풀을 지나온 것 같은데 남자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게다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태진이라면 몰라도 미연은 이런 분위기를 싫어한다.

“너, 이름이 뭐야?”

“알 필요 없다.”

“응, 필요는 없는데 이야기꺼리가 없잖아.”

“그때는 입을 다물면 된다.”

재미없긴…….

그걸로 또 대화는 끝났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똑같은 풍경을 10분여쯤 더 걸어갔을 무렵 차츰 주변의 일조량이 많아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전방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보이나.”

눈을 돌린 미연은 그곳에서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말 그대로 마을이었다. 나무들의 물결이 끝나고 나타난 고원 위, 한가로운 마을 풍경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로츠왈드 왕국의 건물 양식과는 조금 다른 듯하지만 태진이 아닌 이상 거기까진 구분하지 못하는 미연은 그저 감탄만 내뱉었다.

“저기가 너희 마을?”

“그중 하나다. 우리 미소 족은 판게리츠 산맥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까.”

남자는 다시 걸었다. 약간의 언덕을 지나 밑으로 내려간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던 도중에 주변의 높은 나무 위에서 미연은 몇 개의 시선을 또 느꼈다. 입구라 그런지 몰라도 그 수가 꽤 많았다.

“동료들이 많네?”

“여기가 마을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미연의 짐작은 정확했다. 그 시선 중 하나가 조금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그들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수풀 속에서 일어난 그는 똑같은 은발과 검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미소라, 그 여자는 누구지?”

“나무 훼손자다. 장로님께 처분을 상의 드리러 데리고 왔다.”

새로운 인물은 이리저리 미연을 훑어보더니 길을 비켰다. 미연은 남자를 따라 그를 스쳐 지나가다 작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나.”

“미소라라는 이름이구나?”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다.”

이 반응. 분명하다, 이 무뚝뚝한 남자는 자기 이름을 싫어하는 거다. 외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성격과 미소라라는 이름은 너무 안 어울리잖아?

미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키득댔다. 언짢은 표정으로 잠깐 미연을 뒤돌아본 남자, 미소라는 결국 입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아래로 내려 입을 드러냈다.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웃었다가는 장로님께 데려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처분해 주겠다.”

진심임은 격렬하게 전해져 오지만 미연은 그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수 있을까?”

“무슨 뜻이냐.”

“로츠왈드 왕국과 이곳은 거리가 있으니까 모를 수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게다가 삼십 년 만이니까. 응, 모를 만도 하지.”

혼잣말처럼 떠들어 대는 미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미소라는 흥 하고 짧게 숨을 내뱉고 몸을 돌렸다. 그에게는 아직 미연을 이해할 시간이 너무 적었다.

마을 안에서도 많은 미소 족과 마주쳤다. 여성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은발과 은안을 가진 것이 미소 족의 특징인 듯, 미연으로서는 볼거리가 풍부한 동네였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길들을 똑같은 시선으로 응대해 주면서 미연은 미소라를 따라 마을 중앙을 가로질렀다.

미소라는 언덕 쪽으로 미연을 안내했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곳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집 한 채가 있었다. 미연은 저곳이구나 하고 간단히 짐작했다.

언덕을 올라 집 앞에서 미소라는 걸음을 멈췄다.

“미리 말해 두겠다. 장로님께는 예의를 다해라.”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내 장로가 아니라고. 예의를 다할지 안 할지는 내가 결정해.”

미연의 성격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은 태진뿐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태진뿐이다. 미연이 태진을 미래의 낭군으로 점찍은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기분 나쁜 듯 미연을 흘겨보고서 미소라는 나무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예상보다 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신가요?”

“장로님. 나무 훼손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미소라로군요. 들어와요, 열려 있으니.”

허락을 구한 후 문을 연다. 안으로 안내된 미연은 테이블에 앉은 채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든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대략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노년의 여성. 백색에 가까운 은발과 주름이 진 얼굴에는 세월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은빛 눈동자만은 맑고 투명했다. 미연의 심미안에도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한 번에 파악됐다.

문을 닫은 미소라가 미연은 테이블 앞으로 데려갔다.

“이 자입니다.”

투명한 은안이 미연을 향한다. 한동안 미연의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장로는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미소라에게 눈을 돌렸다.

“고마워요. 나가 봐요.”

“예.”

미연에게 했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깎듯이 대답한 미소라는 지체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문이 닫히길 기다리던 장로는 천천히 일어서 찻잔을 하나 더 꺼내 오며 미연에게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앉아요, 동쪽의 나라에서 오신 분.”

역시.

“알아챘네? 저 녀석은 모르던데.”

“미소라는 아직 어리니까요. 바운스에는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 그리고 그런 복장을 입는 사람이 없어요. 삼십 년 전 대륙 남부에 나타났다던 동쪽의 나라 사람이 지금 당신의 모습과 똑같았죠. 아닌가요?”

“맞아.”

살짝 웃으며 미연은 의자에 앉았다. 장로가 다시 권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마주 보았다.

“미안, 길을 잃었거든. 그래서 방향을 알고 싶어서 나무를 베었어.”

“그렇군요. 악의가 있어서 한 짓이 아니라면 큰 처분을 내리지는 않아요. 게다가 당신은 우리 미소 족이 아니니 그 처분도 당신의 납득에 한해서만 효력을 발휘하죠. 처분을 받아들일 건가요?”

“싫어.”

미연은 히죽 웃었다. 장로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처분은 없어요.”

“이렇게 허술해도 돼? 미소 족은 숲을 지키는 사람들이잖아. 숲을 훼손하면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한 거 아냐?”

“확실히 옛날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최근에 와서 우리들의 기준을 외부인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에요. 그래서 정도 이상의 훼손이 아닌 경우에는 그냥 타이르는 수준에서 그치는 거지요.”

“음, 그럼 난 타이름만 받으면 되는 거네?”

“이름이 뭐죠?”

“신미연.”

장로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자애롭게 말했다.

“신미연 님, 앞으로 함부로 나무를 훼손하지는 마세요. 그들도 하나의 생명임을 명심하시고요.”

“응, 알았어.”

장난기를 지우고 미연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만족한 듯 장로는 웃음과 함께 차를 비웠다. 그 잠시간의 여운을 기다렸다가 미연은 말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그전에 제가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뭐?”

“삼십 년 전에는 대륙 남부에서 나타났었죠. 당신들 동쪽의 나라 사람이. 그러고서 로츠왈드 왕국을 제국에서 독립시켰죠. 그런데 이번엔 이 대륙 최북부 판게리츠 산맥에 당신이 나타났군요. 이건 무엇을 뜻하는 거지요?”

미연은 말이 막혔다. 이 장로가 30년 전의 일을 알고 있다는 건 앞으로의 이야기를 위해 좋은 작용을 할 테지만 아무래도 잘못 알고 있는 듯하다.

“앞뒤가 바뀌었어. 우리가 나타나서 그 일이 일어난 게 아냐. 그 일에 우리가 휘말려든 거지.”

장로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우리…… 라면 설마, 삼십 년 전 로츠왈드 왕국에서 나타났던 신의 전사가 당신이란 말인가요!?”

“응.”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열아홉 살. 여기서 지냈던 이 년을 더하면 스물한 살.”

“동쪽의 나라에서는 이곳과 연령 계산법이 다른가 보군요.”

“아냐, 날짜가 조금 다르지 계산법은 같아.”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의 장로를 향해 미연은 지그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이것부터 설명해야 하겠지? 이 장로라는 사람이 이해할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없는 태진의 존재를 슬프게 느끼며 미연은 이야기했다.

“삼십 년 전 난 이곳 바운스에 한 차례 왔었어. 그리고 이 년을 지낸 뒤에 돌아갔지. 그리고 이번에 또 여기로 와 버린 거야. 일부러 온 것도 아니고 왜 온 건지도 몰라. 아니, 애초에 동쪽의 나라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난 그곳에서 온 게 아냐.”

에라, 모르겠다!

“난 바운스와는 다른 세계, 아니 태진이의 말을 빌리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어.”

찻잔을 든 채로 장로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장로는 한참 미연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으며 미연도 속으로 꺼낼 말을 생각했다.

“그렇군요.”

문득 꺼낸 장로의 말에 미연의 머릿속이 엉켜 버렸다.

“뭐가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신의 전사들이 대륙 남부에 나타났을 즈음 바운스가 미세하게 진동했거든요. 그리고 조금 전에도. 그것이 어떤 뜻인지 알 거 같군요. 당신이 다른 차원에서 온 자라면 이해가 돼요.”

“무슨 말이야? 바운스가 진동해?”

“세계 진동…… 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어요. 이 바운스에 ‘고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있다는 건 알지요?”

“어……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존재했다던 마법 시대? 맞나? 아무래도 그동안엔 잊고 있어서 정확하게는 생각 안 나는걸. 난 태진이가 아니니까.”

“맞아요. 그 고대의 ‘흔적’에서 발견된 문서 중에 세계의 지탱을 이야기하는 문서가 있어요. 그 문서에 차원과 세계 진동이라는 말이 나와요.”

장로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조로 설명했다.

세상에는 바운스가 아닌 다른 차원으로 분류되는 세계가 존재한다.

바운스와 그 세계 사이에는 경계가 있어서 보통은 그 경계가 일정하게 두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가 아닌 액체 상태에 가까운 경계이기 때문에 지극히 불안정하다.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그 흔들림이 극대화되면 경계 자체가 불안해져 순간적으로 구멍이 뚫리고 만다.

“그 현상을 고대 문서에서는 세계 진동이라고 불러요.”

미연은 눈을 깜빡였다.

“그거, 공용어 맞지?”

태진이라면 몰라도 미연에게 세계, 차원 따위는 너무나 고차원적인 문제였다.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고대의 유적지를 부르는 명칭인 ‘흔적’. 그리고 세계 진동으로 차원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

몇몇 중추적인 단어만 멋지게 이해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거 때문에 삼십 년 전에도, 이번에도 지구에서 이 세계로 왔다는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우와, 당신 똑똑한데? 삼십 년 전엔 우리가 왜 이 세계로 왔는지 아무도 제대로 안 가르쳐 줬다구.”

“이 해석이 이루어진 건 십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삼십 년 전…… 현신의 전사가 고대어 해독의 기초를 만들어 주기 전까진.”

장로는 거기서 약간 의문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현신의 전사는 어디 있죠?”

“……어?”

“30년 전에 로츠왈드 독립 전쟁을 이끌었던 두 신의 전사. 투신의 전사는 벼락의 검을 가졌다고 하는 여검사였죠.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당신일 테죠? 그럼 또 한 명, 신의 지혜를 가졌다는 현신의 전사는 어디 있나요?”

미연은 침울해졌다.

“그걸 나도 모르겠어…….”

“네?”

“이상하게도 말야. 분명히 같이 있었는데 바운스로 떨어지고 보니까 없어져 버렸다니까?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그, 세계 진동이라는 걸로 어떻게 알 수 없을까?”

조금 충격을 받은 듯 장로의 눈이 커진다. 은안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없다고…… 요?”

“정확하게 말하면 같이 이 세계로 온 건지 안 온 건지도 모르겠어. 아마 왔을 거야. 그런데 어딨는지를 모르겠다니까.”

“왔는데 그 위치를 모르겠다…… 그런 말이로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미연을 보며 장로는 잠깐 침묵에 빠졌다. 장로도 30년 전의 신의 전사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소문으로 들려온 것뿐.

그래도 비교적 풍문을 제외한 정확한 사실만을 알고 있긴 하다. 그 사실에 기초하여 장로는 신의 전사 중 현신의 전사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투신의 전사와 같이 있지 않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까?”

“글쎄요…….”

잠시 생각한 후 장로는 말을 꺼냈다.

“세계 진동시 가까운 곳에 있었나요?”

“같이 있었어. 데이트 중이었거든.”

“그럼 바운스에서도 가까운 위치에 떨어졌을 확률이 높군요. 일단 저희 미소 족 마을 전부에 사람을 보내 보겠어요. 다른 장로들도 세계 진동을 느꼈을 테니 현신의 전사가 이 산맥에 떨어졌다면 누군가가 알고 있을 거예요. 연락이 올 때까지 이 주 정도 걸릴 텐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신가요?”

미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줄 거야?”

“네, 저도 현신의 전사를 만나고 싶으니까요.”

“너무 연하일 텐데?”

“투신의 전사와 겨루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단지, 전설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존재를 만나고 싶을 뿐이에요.”

장로의 얼굴은 분명히 50대였으나, 미연의 눈에는 마치 20대의 그것처럼 비쳐졌다. 아직까지 투명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 미연은 이 장로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만큼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익숙한 사람도 없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신의 전사를 도울 수 있다면 저도 영광이지요.”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누는 찰나, 바깥에서 미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놈들이 찾아왔습니다.”

무뚝뚝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 실낱같은 감정이 스며든 목소리. 장로는 미연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오는 장로에게 미소라는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또 사절단인가요?”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마을 입구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저기 보이네요. 그럼 미소라는 이분, 신미연 님에게 머물 곳을 잡아 주시겠어요?”

“……저 녀석에게 말입니까?”

장로는 살풋 웃음을 머금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무실 거예요. 그사이 결례가 없게 하세요.”

미소라는 얼굴에 미묘한 표정을 띄웠다. 장로는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마을 전체를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그런 장로가 잘 모시라고 하다니, 저 여자가 대체 무슨 존재란 말인가.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로 뒤쪽의 미연을 훔쳐보더니, 미소라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탁해요.”

장로가 미연에게 손짓했다. 차를 꿀꺽 마시고 있던 미연이 찻잔을 든 채 장로에게 왔다.

“미소라를 따라가세요. 머물 곳을 마련해 줄 거예요.”

“와아, 고마워! 잘 쓸게~”

가벼운 동작으로 미연은 집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몸을 뱅글 돌려 다시 장로를 바라본 후 허리를 꾸벅 숙인다. 장로가 그게 뭔 제스처냐는 듯 궁금한 눈길을 만들고 있자 그녀가 시원스레 웃었다.

“우리식 인사법이야.”

“그런가요. 그럼 저도.”

장로가 미연을 따라 허리를 살짝 숙이더니 어색한 듯 미소를 짓는다.

역시 좋은 사람이야. 미연은 싱글싱글 웃으며 미소라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을 중앙을 통과하며 미연은 한 무리의 제복들과 마주쳤다. 다섯 명 정도의 병사들 사이로 한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같이 걷고 있다.

잠깐 서로에게 눈길을 던지고 다시 멀어지는 두 일행.

거리가 조금 벌어진 후 미연은 미소라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허나 반응이 없었다. 포기할 미연이 아닌지라 그녀는 몇 번이고 미소라가 돌아볼 때까지 건드렸다.

결국 미소라가 노골적으로 짜증을 띄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저 사람들은 뭐야? 제국군이지?”

“너와는 상관없지 않나.”

“거야 그렇지만, 저 방향은 장로님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

미소라는 이내 눈치챘다.

“님?”

“불만 있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가 왜 이러지? 미소라는 그 의문이 담긴 표정을 솔직하게 지어 보였다. 뚫어져라 미소라의 얼굴을 쳐다보던 미연이 한쪽 입가를 올려 비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그 표정은 또 뭐냐.”

“보는 그대로의 표정이지 뭐. 변명하는 표정.”

“그건 비웃는 표정 아닌가?”

“어머, 알긴 아는구나? 응응, 머리에 넣어 둘게.”

알 수 없는 말을 잔뜩 늘어놓고는, 미연은 미소라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안 가?” 하고 재촉한다.

그녀의 등을 보다 미소라는 낮게 한숨을 지었다. 이런 여자에게 결례를 범하지 말라니, 장로님도 엄청난 부탁을 하시는군. 이 여자가 제발 빨리 마을을 떠나주길 바라며 미소라는 비어 있는 집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

미연이 미소 족의 마을에서 지낸 지도 벌써 3일째였다. 그동안 미연은 제법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장로의 언질도 있어서인지 그녀를 만나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할 일 없이 마을 안을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적개심은커녕 환영 가득한 인사를 던져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괜찮은 곳이구나, 여기.”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자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장로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너 같은 자연 훼손자를 곱게 지내게 두진 않았다.”

“응. 그것도 포함해서,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해.”

미소라의 대꾸에도 미연은 웃기만 했다.

지난 3일 동안, 미소라는 미연의 전용 시종 정도의 위치가 되어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장로의 말에 미연이 대뜸 “미소라.‘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말동무가 필요했던 거지만 장로는 묘한 “호오―” 소리를 내더니 그 즉시 미소라를 그녀의 집으로 보내 버렸다. 본래 임무인 훼손 감시까지 뒤로 미루고 미연의 말동무를 하게 만든 것이다.

미소라는 그 위치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냐.”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하루 종일 바깥에 서 있으면서도 미소라의 불평은 끊이지 않았다. 창문틀에 턱을 괸 자세로 미연은 히죽 웃음 지었다.

“나, 네가 꽤 맘에 들거든.”

“더없이 불쾌하군. 너 따위 외부인의 맘에 들다니.”

“너무 쩟쩟하게 살지 마. 어차피 4일 뒤면 여기를 떠날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

밉살스럽게 미소라가 받아쳤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 이름이 뭐야? 이 많은 마을들에 이름이 없을 것 같진 않은데. 게다가 여기가 미소 족의 근원지라며?”

3일 동안 지내면서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이 마을이 판게리츠 산맥 전역에 퍼진 미소 족들의 태어난 본래의 마을이며, 나라로 치면 수도격이라는 것.

그렇기에 이 마을의 장로는 미소 족의 대표격이 된다. 그 인자하면서도 젊어 보이는 노인이 사실 미소 족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는 자라는 사실에, 미연도 처음에는 순수하게 놀랐었다.

“‘리트미소’라고 한다.”

“고대어지? 무슨 뜻이야?”

“리트는 ‘첫 번째’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네. 맘에 들어.”

“네 맘에 들어 봐야 별 소용없다.”

미소라의 옆모습을 보면서 미연은 소리 죽여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불편하게 흘겨보는 미소라. 이것이 3일간의 그들 모습이었다.

산 속의 해는 일찍 진다. 이곳도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리트미소의 해도 금방 떨어졌다. 미연의 체감 시간으로는 고작 오후 4, 5시 정도 됐을 법한 시간이었다.

며칠 동안 바운스에 생체 리듬을 맞추고 있던 미연도 이젠 썩 익숙하게 떨어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아, 맞다. 저녁 얻어먹으러 가야지.”

미연은 집에서 나왔다. 아직 저녁 시간은 아니지만 할 짓도 없으니까 장로의 집으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미소라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제법 익숙해진 길을 걸어 마을을 통과했다.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던 미소 족 꼬마들이 미연을 발견하고 쪼르르 뛰어왔다. 그녀다운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미연은 일일이 꼬마들을 상대해 줬다. 서너 명의 꼬마들이 저마다 인사를 던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미소라가 말을 걸었다.

“아이들에게는 제법 인기가 많군.”

“응. 난 아이들을 좋아하거든.”

“네가 좋아하는 걸 이야기한 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면 상대도 좋아해 주는 법이야. 몰랐어?”

미소라는 코웃음을 치며 답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난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았거든. 내가 가르치는 시간에는 언제나 도장이 북적대서 미어터질 정도였으니까.”

정확하게는 아이들보다는 남정네들이 더 많았지만.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 미연답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넌……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왔나?”

“그거 여섯 번째 질문이야. 아니지, 일곱 번째던가? 하긴 뭐, 아무렴 어때. 난 바운스가 아닌 세계에서 왔어. 지구라고 하는 별의 한국이라는 나라의 서울이라는 도시. 이것도 몇 번이나 한 대답인데 말야.”

미연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솔직히 안 믿기지? 장로님은 쉽게 믿어 주셔서 다행이지만, 이 년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안 믿어 주더라고. 동쪽의 나라라고 꾸며 낸 것도 그 때문이야.”

“이 년 전?”

“아, 이 세계의 시간으로는 삼십 년 전.”

그러면 난 몇 살이 되는 거야? 실없는 생각을 하며 미연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소라는 혼자 생각에 잠긴 듯 다시 말이 없어졌다.

마을 중앙을 통과하자 아직 옅게 넘은 햇빛으로 장로의 집이 보였다. 살짝 높은 언덕에 위치한 그 집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굴뚝 위로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저녁 준비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미연은 기쁘게 발걸음을 빨리 했다.

장로의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문이 열렸다. 그 문에서 나온 것은 미연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남자였다.

제국군의 정복 차림으로 나온 남자는 장로를 향해 돌아서더니 딱히 친절하지 못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도 더는 봐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요. 결정을 고칠 생각이 없습니까?”

“없어요.”

“당신의 결정이 미소 족 전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 봤습니까?”

걸어 나온 장로는 남자를 향해 인자하기 그지없게 미소 지었다. 기분이 나빠진 듯 남자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재빠르게 장로의 집에서 멀어지더니 미연에게 살짝 눈길을 주고선 곧장 내리막길을 걸어 떠났다.

그가 지나간 후에야 미연은 그의 정체를 기억해 냈다.

“그…… 뭐더라. 사신?”

“공식적인 위치는 그렇겠지요. 제국의 사신. 실상은 북부 주둔군의 간부겠지만요. 저녁 드시러 오셨나요?”

“응. 염치없이 또 얻어먹을게.”

“저야 기쁘지요. 들어오세요. 미소라도.”

장로는 두 사람을 기쁘게 맞이했다. 문을 닫고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에게 장로는 수프부터 대접했다.

“올 것 같아서 일찍 만들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일찍 왔군요.”

“할 일이 없잖아. 오늘 운동도 이미 다 해 버렸거든.”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다 될 거예요.”

장로는 다른 이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3일 동안 삼시, 세 끼를 모두 얻어먹었지만 한 번도 귀찮아하는 투를 듣지 못했다. 미연은 사람 한번 잘 만났구나 생각하며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흔들었다.

“그놈들은 뭐야?”

“예?”

“요새 매일 오고 있는 제국군들 말야. 어제는 아예 여기서 묵고 갔나 보네?”

“외부인인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옆에서 끼어 드는 미소라를 무시하고 미연은 장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로는 끓고 있던 요리를 내버려 두고 뒤돌아섰다.

“미소라의 말대로예요. 미연 님이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사정이지만 알고 싶으신가요?”

“응.”

“제국군이 싫으신가요? 삼십 년 전에 싸운 상대이니까 좋은 감정은 아니겠지만요.”

“딱히 싫다거나 하는 감정이 있는 건 아냐. 나로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들이야. 그때도 단지 친구를 돕고 싶은 생각에 싸웠던 거니까.”

우정을 이유로 한 나라를 엎어 버린 그 전쟁은 대륙 최북단의 판게리츠 산맥까지 들려왔다. 그 누구도 반항할 생각을 못했던 제국에게서의 독립을 이룩해 낸 전쟁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장로는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들었다면 통탄할 발언이네요.”

“여기 없으니까 괜찮잖아? 그나저나 그 제국군들이 여기를 귀찮게 하는 거야?”

“귀찮게 한다라…… 재밌는 표현이네요.”

장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곳, 판게리츠 산맥과 제국과의 관계를 아시나요?”

“삼십 년 전도 괜찮다면. 제국이 미소 족을 통합해서 제국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려 한다고 했던가?”

“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이미 오십 년은 넘은 이야기예요. 지금의 황제가 등극한 이후로 이 산맥에 끊임없이 손을 뻗치고 있어요. 삼십 년 전에 로츠왈드에게 패배하고 잃은 만큼의 영토를 이 산맥에서 원하고 있는 거예요.”

판게리츠 산맥는 드넓다. 단순한 산지이지만 그 산맥에 묻혀 있는 광맥과 천연자원들을 생각하면 한 나라와 맞먹는 위치를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산맥에 퍼져 사는 미소 족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그 모두를 고려하여, 제국은 산맥을 원하고 있었다.

“그럼 그 사신은 장로에게 제국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네, 일단 제가 미소 족의 대표니까요.”

미소 족의 수도, 리트미소의 장로는 말했다.

“리트미소만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한 건가?”

“잘못된 생각이지요. 미소 족은 제국이 아니에요. 각 마을의 장로들이 있고 미소 족의 결정은 그 장로들의 회의로 결정돼요. 나만 결정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데, 저 사신은 포기하질 않네요.”

“오십 년 동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거네?”

“제국의 사고로는 장로 회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미연은 한국식으로 생각했다. 눈앞의 장로는 말하자면 대통령. 장로 회의는 국회와 비슷한 것이다. 제국은 왕의 명령이 절대적이지만 미소 족에게 왕의 명령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 인한 사고 차이였다.

게다가 제국 측에서는 그것조차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국은, 역시 바보 같아.”

“신의 전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황제가 슬퍼할 거예요.”

“어쩔 수 없지 뭐. 바보는 바보야.”

미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가 살짝 웃음 짓고서 일어섰다.

“일단 한동안 잠잠할 테니까 당분간은 편할 거예요. 우리는 즐거운 저녁이나 먹을까요?”

“응! 밥 잘 먹었어!”

“아직 먹기 전이다.”

미소라의 대꾸에 장로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두 시간가량 저녁 식사와 디저트 등등. 식후의 담소와 차까지 나눈 후 미연은 장로의 집을 나섰다.

이제 해는 완전히 떨어져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 외에는 깜깜했다. 감시자들도 숲에서 돌아왔다. 산맥은 고요하게 침묵에 잠겨 들었다.

“잘 먹었어. 내일도 잘 먹을게.”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미소라, 미연 님을 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미연은 장로의 집을 뒤로 했다.

어둠에 잠긴 길을 내려오면서 미연은 미소라에게 말을 걸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 말이냐.”

“제국이 미소 족을 원하는 거 말야. 오십 년이나 넘게 된 이야기라면 너도 알 거 아냐? 이렇게 찾아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그래, 나도 이미 숱하게 봐온 일이다.”

미소라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침착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지. 제국으로 들어오라니. 우리 미소 족은 판게리츠 산맥을 지키며 살아왔다. 이 산맥은 우리의 터전이나 삶의 증거다. 그것을 제국은 영토 확장이라는 명분으로 먹으려고 하고 있는 거다. 너 같은 용납할 수 있겠나?”

무뚝뚝하기만 하던 지금까지의 어조와 달리, 미소라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격앙된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미연은 “호오―” 하고 고개를 주억댔다.

“무슨 반응이냐.”

“아냐, 아무것도. 아무튼 싫다 이거지?”

“당연하다.”

애초에 외부인인 미연으로는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는 감정이지만 그래도 이해는 갔다. 자신의 땅을 불순한 놈들이 손을 대는 것은 누구도 탐탁치않을 것이다.

대륙의 3분의 2를 먹고 있으면서 무슨 땅을 또 원하는 걸까…… 제국이란 바보들은.

미연은 어깨를 으쓱대고 마을을 통과했다.

어느새 둘은 미연이 머물고 있는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럼 잘 자, 미소라. 내일도 또 놀자.”

“흥, 귀찮다.”

미연의 인사에도 차갑게 돌아서는 미소라.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연은 싱긋 웃었다. 귀찮다고 하면서도 매일 질리지도 않고 찾아와 준다. 아닌 척하면서 챙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이 문득 누구를 떠올리게 했다.

강태진! 어디 있는 거야! 정말…….

일단 소식은 산맥 전체에 전달되었다. 세계 이동자를 찾으면 리트미소로 연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미소 족의 장로들은 공통적으로 세계 진동을 느낄 수 있으니 발견만 된다면 찾는 건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벌써 3일 전. 일주일 안이라고 장로는 예고했고 그것은 이제 4일이 남았다.

4일 안에…… 태진을 찾을 수 있을까.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미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느끼려 했다. 바운스 어딘가에 있을 태진의 존재를.

“만나면 죽었어!”

그렇게 내뱉고서 몸을 돌렸다. 아무튼 오늘 하루도 잘 지냈다. 내일도 잘 지내야지.

미연은 하루를 정리하고 너무 늦지 않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왕이면 내일, 좋은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 기대보다 앞서 그녀에게도 사건은 일어났다.

늦은 밤. 밝은 달이 검은 하늘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을 때 미연은 눈을 떴다. 곧장 침대 옆에 세워 둔 칼을 붙잡았다. 동시에 깨어나는 전투 감각.

예리하게 날이 선 감각은 마을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챘다. 희미하게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음. 산의 고요와 어울리지 않는 그 소리에 미연 침대를 박차고 집밖으로 뛰어나왔다.

“―――――!”

저 멀리, 숲이 불타고 있었다. 미연은 그곳이 어느 방향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리트미소의 입구가 있는 곳. 그곳부터 일어난 불길은 아직 작았지만 서서히 옆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뭔가 수상했다. 미연은 재빨리 달려 20m 정도 떨어진 위치의 미소라의 집을 습격했다.

“야!”

문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소리쳤다. 한참 뒤에야 미소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문을 벌컥 열었다.

“뭐냐, 외부인. 이 야밤에 무슨 예의 없는 짓이지?”

“예의 따위 차릴 게 아냐. 저길 봐!”

미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 무심하게 눈을 돌린 미소라의 얼굴에 명확한 경악이 깃들었다.

“……산불인가?”

“보통 산불이 아냐, 저건.”

“무슨 말이냐.”

미연은 확신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가 불을 지른 거야!”

불꽃이 치솟은 곳은 그 일대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미연은 극단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야! 발 벌려!”

“뭐라구?”

미소라는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시야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미연의 모습을 발견했다. 급작스럽게 다리를 벌려 그녀의 충돌을 받을 채비를 갖춘다.

그의 무릎을 밟고 미연이 점프했다. 무릎, 어깨를 차례대로 밟은 그녀의 몸이 독수리처럼 떠오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이미 미소라의 집 위에 올라 서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미소라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방향을 살필 뿐이었다.

높아진 시야로 그 모습이 확실하게 보인다.

“심상치가 않아.”

“무슨 뜻이냐.”

“어느 불길이 좌우로 이동하면서 붙는다든? 분명히 누군가가 숲에다 불을 지르고 있어!”

미소라는 그녀의 발언을 뒤늦게 이해했다.

미소 족은 판게리츠의 숲을 지키는 숲지기 민족. 숲이란 그들의 삶터이며 받들어 모셔야 할 존경의 공간이다.

그런 숲이, 그 근엄한 숲이 불타고 있다.

누군가가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나도 올라가겠다!”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내가 확인했으니까.”

미연은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미소라도 놀랄 만큼 그것은 매우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청년단을 깨워. 분명히 뭔가 일이 터진 거야.”

“그럴 리가 없다…… 대체 누가, 왜 숲에 이런 짓을!”

“부정해 봤자 소용없잖아? 저길 좀 보라고!”

미연이 가리킨 곳에서 밤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마을을 둘러싼 채 처절한 기세로 번졌다.

이미 막기에는 늦은 듯이 보였다.

“젠장!”

미소라는 움직였다. 마을 중앙에는 종이 있다.

비상시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종 앞에 도착해 그는 사정없이 종을 쳤다.

땡땡땡!

“불이다! 숲에 불이 났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자 불이 꺼져 있던 집들이 서서히 불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가 다시 불빛을 되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에서 한두 명씩 청년들이 뛰어나왔다.

“미소라!? 무슨 일이야!”

“불이다! 얼른 막지 않으면 큰 화재로 번질 것 같다!”

청년들도 곧바로 눈치 챘다. 마을을 둘러싼 숲에서 일어난 불꽃이 새벽처럼 마을을 밝혀 주고 있었다. 말을 꺼내지 않아도 청년들의 눈에는 동일한 위기감이 스쳐 지나갔다.

마을 중앙으로 청년들이 하나 둘 모였다. 불이 났다는 소식은 리트미소 전체에 금세 전해졌다. 마을이 다시 깨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응에 혀를 차는 이가 있었다.

“쳇! 예상외로 빨리 알아챘군.”

리트미소의 바깥쪽. 숲에 불을 놓으며 뛰어다니는 부하들을 바라보던 자는 미연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어두운 색의 제국군 전투복을 입은 그는 쓰게 말을 내뱉더니 단호하게 명령했다.

“일 조는 계획대로 불을 질러라! 이, 삼, 사 조는 내가 신호하면 출동한다!”

그가 있는 곳은 마을의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이미 청년들이 마을 중앙에 모이기 시작한 모습을 보며 그는 소리쳤다.

“돌겨억! 전부 죽여라!”

“우와아아!”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1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숲에서 뛰쳐나왔다. 칼을 든 그들은 북부 주둔군에서 착출된 특수병들이었다. 리트미소를 급습하기에 그들보다 적절한 병사들은 없었다.

그는 돌진하는 병사들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며 숲에서 빠져 나왔다. 이곳 리트미소는 이제 곧 제국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었다.

저절로 음흉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는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저 멀리서 장로의 집이 보였다.

“후후, 어리석은 장로 같으니! 진작 우리에게 왔다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 어리석음도 오늘로서 끝이다. 이 리트미소를 지도에서 지운 후 판게리츠 전체를 우리 제국의 영토로 선언하겠다!”

칼을 뽑아들고 소리치는 그의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이 그의 작전을 밝게 비춰 주는 듯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음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 변수는 위명대로 제일 먼저 이변을 눈치 챘다.

청년들이 소화를 위해 마을 전체에서 양동이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 순간 미소라는 발견했다, 중앙에 오도카니 선 채 불이 붙은 숲 쪽을 쏘아보고 있는 미연을.

미소라는 소리쳤다.

“이봐, 외부인! 놀지 말고 너도 물을 떠 와라!”

그러나 미연은 눈을 가늘게 뜰 뿐 움직이지 않았다. 미소라가 직접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외부인!”

“저길 봐.”

“뭐? 이 위급한 때에 놀아 달라는 거냐!”

“놀아 달라는 게 아냐! 저걸 봐.”

강제로 미소라의 고개를 꺾어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놓는 미연. 싫든 좋든 그는 확 바뀐 시야 안에서 확인했다.

병사들이었다. 불이 붙은 숲에서부터 100여 명에 달하는 제국군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우오오오!

아스라이 들리는 이 함성은 누가 뭐래도 배틀크라이(Battle Cry)였다.

“저건 제국군 아닌가!”

“역시 그렇지?”

미연은 칼을 뽑아 들었다. 달빛 아래 그녀의 애도(愛刀)가 하얗게 빛을 발했다.

“무슨 짓이냐!”

“놈들을 막아야 할 것 아냐! 모르겠어? 저것들이 불을 지른 거야!”

“제국군이 왜 숲에 불을!”

“당연한 거 아냐? 불을 질러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리트미소를 전부 몰살시키려 하는 거야!”

미소라가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마을의 입구뿐만이 아니라 리트미소를 둘러싼 사방에서 까맣게 병사들이 몰려나온 것이다.

“꺄아악!”

최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미소라가 고개를 돌렸다. 미연은 혀를 차며 그 자리에서 뛰어나갔다.

“싸울 줄 아는 인간들을 전부 모아! 불보다 저것들이 급해!”

“알았다!”

이때만큼은 미소라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타종하며 소리 높여 동료 숲지기들을 불러 모았다.

“숲지기들은 들어라! 제국군의 기습이다! 싸울 줄 아는 이들은 무기를 들어라!”

일파만파로 그의 외침은 리트미소 각 지역으로 전달되었다. 결코 크지 않은 마을이기도 했고, 혼란스러운 사태지만 애초에 그들의 전달력은 대단히 빨랐다.

제국군은 마을 외곽에서부터 덮쳐 들고 있었다. 미처 무기를 들지 못한 이들이 하나 둘 쓰러져 나갔다.

“죽어라!”

“전부 죽여라! 하나도 남기지 마라!”

“오늘이 미소 족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병사들 사이의 지휘자들이 외치는 소리에 그들의 기세가 더욱 올라갔다. 뒤늦게 무기를 들고 달려 나온 청년들이 그들의 칼을 맞고 명을 달리 했다.

“너무 쉬운 거 아냐!?”

“핫핫핫! 고작 이 정도인 주제에 우리 제국에게 건방을 떨었단 말이냐!”

그들은 파죽지세로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마을 중앙에는 미소라가 모은 숲지기들이 운집했다. 그들은 칼과 창, 각각의 무기를 든 채 집에서 뛰어나왔다. 급히 달려 나왔지만 이미 전투태세는 완비해 있었다.

“제국군의 기습이다! 막아야 한다!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죽고 있다!”

그렇게, 뒤늦었지만 리트미소의 반격도 드디어 시작되었다.

미소라가 미연에게 말한 것처럼 미소 족은 남성이고 여성이고 같은 방식으로 교육한다. 일정 나이가 되면 너나할 것 없이 전투 기술과 숲지기로서의 전투 능력을 배양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알고 보면 마을 인구의 절반이 전투 인원인 무시무시한 곳이다.

“제국군! 네놈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목숨을 걸고 막아라!”

“우리의 마을을 지켜야 한다!”

그들은 마을 바깥에서부터 들어온 제국군 병사들을 막기 위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외곽 측에서는 여전히 제국군의 일방적인 살육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정 침투 경로도 없이 무조건 수로 밀어붙여 들어왔기에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은 도륙을 당하고 있었다.

“죽여라!”

칼을 높이 들며 지휘관이 고함쳤다. 제국군 전체에 들리듯 하나가 되어 파도처럼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미연이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별빛처럼 돌연 병사들 앞에 출현했다.

“그만 죽여!”

소리친 지휘관에 대항하듯 한껏 목소리를 높인 그녀의 손에서 칼이 날카롭게 울었다.

병사들은 그녀를 인지하지 못했다.

단지 다른 일반 사람들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한 명의 병사가 창을 꼬나 쥐고 돌진했다. 앞서 네 사람의 멱을 뚫었던 창이었다. 그는 자신에 넘쳐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찌르기는 그동안 훈련한 그대로의 성과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창이 미연에게 꽂혔다. 그리고 그 순간.

한순간이라고밖에 표현 못할 그 촌각에 창이 네 토막이 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창병은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목으로 미연의 칼이 날아들었다.

스각!

몸통에서 목이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런 사태에 피조차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나 몸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땅에 나자빠졌다.

이미 그때 미연은 두 번째 병사의 목을 쳐 날리고 있었다.

“아니, 이년이!”

그때까지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리트미소를 난도질하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갑작스런 미연의 등장에 그들은 동시에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것은 미연이 원하는 바였다. 칼을 똑바로 세운 채 그녀는 외쳤다.

“그만 죽여! 너희가 뭔데 이 사람들을 죽이는 거야!”

미연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지낸 4일. 그동안 외부인인 자신을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 이유조차 모른 채 죽어 가고 있다.

미연으로서는 도저히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미연은 자신의 감정에 굉장히 솔직한 여성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너희들 전부를 죽여 버리겠어!”

바운스에서 30년 전. 그녀는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긴 투신의 전사였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지만 이 세계로 온 뒤 그녀는 직접 사람을 죽였다.

죽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몸서리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이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먹은 이상 그녀의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앞에서 달려드는 두 사람의 칼을 피한 동시에 칼을 뿌린다. 네 개의 팔이 날아가며 절규가 쏟아졌다.

그 절규를 칼로 집어삼킨다.

절규 대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오른다.

“죽여라! 저년을 죽여라!”

멀리서 보고 있던 지휘관에 명령에 또다시 수많은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은 태진의 몫. 그녀에게 전투란 감각에 자신을 맡기는 그 자체였다.

망아(忘我).

적을 대하는 순간, 나를 잊는다!

전방에서 달려드는 두 개의 칼날을 피하는 동시에 옆으로 휘두른다! 번개처럼 번뜩인 칼에 미처 공격조차 하지 못한 병사의 팔뚝이 통째로 날아갔다.

허리를 비틀며 달려들어 방금 날아온 공격의 장본인들의 목을 베어 넘긴다!

후두둑!

세 부위의 신체가 떨어져 나가기가 무섭게 그녀가 돌진했다. 무게중심을 낮게 깐 그녀의 폭발적인 쇄도, 직후 병사 넷이 그녀의 간격 안에 들어왔다.

남은 것은 목이 떨어져 나간 네 구의 시체였다.

피분수가 솟아오르는 그 중앙에서 미연은 이미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돌격에 굳어 버린 한 병사의 팔을 검째로 베어 버리고 가슴에 기다란 상흔을 선사했다.

“이, 이년이!”

뒤쪽에서 기합을 지르는 병사를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칼을 찔러 넣어 죽인다!

푸욱!

하늘 높게 들었던 그 병사의 칼은 허공에서 정지했다.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은 미연의 칼이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수십 명의 병사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녀의 위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덤벼!”

오른손에 칼을 든 채 선언하는 미연.

그러나 아무도 덤벼들지 않았다. 검은 손에 들려 있었지만 그녀를 겨눈 상태로 그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들을 지금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공포였다.

피를 뿌리며 목을 날려 버린다. 그럼에도 본인은 단 한 방울의 피조차 묻히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검세가 가능하단 말인가!

“어, 어서 나서지 못해! 저년을 죽여라!”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의 목소리마저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이 작전의 총지휘관에게 리트미소 동쪽의 침투를 지시 받은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위치상으로는 일반 병사들보다 두 계급 높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힘없이 소리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미연은 날카로운 눈길로 빈틈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그들의 공격에 대응했다.

이미 그녀의 전투 감각은 100% 깨어난 상태였다. 이런 상태를 그녀는 망아라고 부른다. 태진이 지어 준 이름이지만 지금은 그 작명자마저 잊었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주변을 둘러싼 적들뿐.

그녀의 감각 안으로 어떤 자가 나타났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지휘관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그는 부하 중에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알리바! 왜 이제 온 것인가!”

“길을 잘못 찾았습니다. 그보다, 저년입니까? 제가 상대해야 하는 게?”

“그렇다! 얼른 가서 저년을 죽여라!”

“맡겨 주십시오.”

힘차게 대답하며 나타난 자는 제국 북부 주둔군에서도 무위로 명성이 높은 알리바라는 자였다. 그는 미연의 앞으로 가 서슴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서 온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오늘 내 ‘백랑(白狼)’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각오해라!

백랑. 하얀 늑대.

그 이름답게 그의 검은 새하얗다. 지난 기억을 뒤져 봐도 생소한 특색 있는 검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주눅이 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미연은 가만히 적의 행색을 살피고서 대놓고 비웃었다.

“웃기셔. 겨우 그 정도로 나를 죽이겠다고?”

“이년, 뭐가 웃기냐!”

“검 이름이 뭐라고?”

“백랑이다.”

“2년 전에도 그랬지만, 난 칼에다가 이름 붙이는 사람들이 제일 이해가 안 가.”

미연은 고개를 슬며시 저으며 새롭게 눈을 뜬다. 날카로운 그 눈빛이 알리바를 덮쳤다.

“검에 이름을 붙이는 이상, 넌 결코 나를 못 이겨.”

그것은 이미 승리의 선언과 같았다.

***

미소라는 청년단의 일부를 이끌고 마을의 서쪽과 남쪽을 막으려 했다. 리트미소는 일단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에 입구를 두고 있기에 우선 그곳부터 막기로 한 것이다.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준비하고 뛰어가려 할 때 한 숲지기가 미소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소라, 넌 그 외부인을 도와라! 장로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외부인이다. 다른 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너는 그 여자를 구해라!”

미소라는 급히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럼 부탁하겠다!”

동료들과의 작별을 간단히 끝낸 미소라는 다섯 명의 숲지기를 끌고 마을 동쪽으로 달렸다.

그녀가 사라진 곳은 마을의 동쪽. 제국군이 쳐들어오자마자 그녀는 가장 먼저 병사들이 보인 곳으로 달려 나갔다.

제국군은 리트미소의 예상외의 반격에 현재 그 침공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동쪽이었다.

미소라는 동쪽으로 뛰면서 그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분명히 가장 먼저 병사들이 나타난 곳은 동쪽이다. 그런데 가장 침투가 느리다?

그리고 미소라는 동쪽 입구에 도달했을 때 경악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

“이, 이럴 수가……!”

숲지기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미소라는 눈을 부릅떴다.

단 한 명.

수십 명의 병사들이 단 한 명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 한 명은 지금 제국군으로 보이는 남자를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뛰어오르는 듯하더니 검을 내려친다. 힘에 밀린 듯 병사가 새하얀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쇄도해 목을 단숨에 날려 버린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소라는 그제야 주변에 제국군들의 시체가 널려 있음을 발견했다. 미소라는 혼자서 수십 명의 제국군을 막아내고 있는 인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저 여자가 정말로 지난 4일 동안 할 일 없이 마을을 쏘다니며 자신에게 말다툼을 걸던 그 여자가 맞아?

그녀는 하얀 검의 병사를 쓰러뜨린 후 접근조차 못하는 제국군을 향해 칼을 겨눈다.

“자. 또 덤빌 사람?”

그리고 그때, 미연은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의 기척을 느꼈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녀가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와아, 미소라! 도와주러 온 거야?”

당황함을 숨기며 미소라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혼자서 그렇게 가 버리면 위험하지 않나. 너는 장로님의 손님이다. 우리에게 보호 받을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라면 별로 필요 없는데.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이런 압도적인 무력을 보고 고작 ‘내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수준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제국군들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 미연 하나 때문에 수십 명의 인원이 동쪽 외곽에서 한 걸음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지휘관은 입에서 불이 튀어나올 기세로 소리쳤다.

“네, 네년! 대체 정체가 뭐냐!”

“나?”

미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신미연. 올해로 방년 열아홉…… 이지만 사실 두 살 더 먹었으니까 정확하게는 스물하나야.”

“그딴 걸 묻는 게 아니다! 네년, 미소 족이 아닐 텐데 왜 이 마을에 있는 거지!? 게다가 그 머리 하며 옷차림……!”

말하는 순간 지휘관의 머리를 번개가 두들겼다. 자신이 지금 내뱉은 말이 대체 어떤 의미인 건지 겨우 깨달은 것이다.

“도, 동쪽의 나라!”

“아는 게 느려. 쯧쯧.”

칼을 까딱이며 미연은 선언했다.

“소용없어. 너흴 쉽게 놔줄 생각은 없으니까. 미안하게도 난 눈앞의 적을 놔주는 성격은 아니거든? 끝까지 쫓아가서 목숨을 끊어 놓는 쪽이라 도망치려면 세계 신기록을 세워야 할 거야.”

지휘관을 향해 칼을 가만히 겨눈다.

“그러니 더 떠들지 말고 덤벼.”

수십 명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겁을 먹기는커녕 숫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에 지휘관은 열불이 터졌다.

이대로 물러서면 제국군으로서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웃기지 마라! 네년이 동쪽의 나라에서 왔다고 해도 삼십 년 전의 그 인물은 아니겠지! 우리에게는 아직 수백의 병력이 있다! 도망쳐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네년이다!”

그는 목소리 높여 명령했다.

“저년을 죽여라! 죽이는 자에겐 내가 책임을 지고 포상을 내리겠다!”

일개 지휘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을 부하들에게 전한다. 어쨌든 그의 작전을 들어맞았다. 병사들은 금세 주춤거리던 기세를 바꾸고 사기를 높였다.

일곱 대 수십의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

숲속에서는 드디어 불길의 원이 형성되었다. 더 이상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며 총지휘관은 불길 밖에서 리트미소를 살피고 있었다.

이상하다. 예상보다 침공이 느리다.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려 들어가 순식간에 작전을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부하들의 습격이 느려지는 것이다.

그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곳은 마을의 동쪽. 전투가 이어짐에도 조금도 진격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총지휘관은 결단을 내려할 때라고 직감했다. 재빠르게 인원을 계산하여 다섯 명의 부하를 불러냈다.

“장로의 집으로 간다!”

“파제스 장군님이 직접 가십니까?”

“물론이다!”

파제스는 언덕 아래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장로의 집은 이제야 불길이 켜지고 있었다. 장로를 잡아 족치면 작전은 더욱 빨리 끝날 것이다. 파제스는 오로지 속전속결만을 위해서 장로의 집을 기습했다.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미연이었다.

두 명의 제국군의 팔다리를 단칼에 잘라 버린 후 고통에 뒹구는 그들의 몸을 짓밟고 뛰어오른다. 우측에서 달려드는 병사의 목을 베고 왼쪽으로 칼을 휘두르자 또 한 명의 목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눈을 돌렸을 때, 평소라면 보이기도 힘들었을 거리의 일이 불길과 전투 감각의 확장으로 그녀의 눈에 잡혔다.

“미소라!”

정신없는 전투 속에서도 미소라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단검을 병사의 목덜미에 박아 넣으며 그가 그녀의 위치를 찾았다.

“뭐냐! 말장난이라면 바쁘니까 다음에 해라!”

“장로님의 집 쪽이 이상해!”

미소라는 서둘러 북쪽을 보았다. 다른 지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장로의 집이라 보이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 제대로 확인하긴 힘들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지금 뒤쪽 숲에서 몇 명이 달려 나왔다고! 안 보여!?”

미연은 두 사람의 공격을 칼로 쳐내고 곧바로 팔뚝을 잘라 버리며 외쳤다.

“안 되겠어! 여기는 맡길게!”

“어딜 가나, 외부인!”

“장로님이 위험해!”

미연은 날카롭게 대답하고 두 사람의 어깨를 밟고 집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미소라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그녀는 지붕 위를 달려 금방 사라졌다.

동쪽 싸움의 최고 무력이었던 미연이 사라지자 제국군의 기세가 강해졌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의 공세에 미소라는 혀를 차며 필사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곧 지원이 올 것이다!”

지붕을 타고 넘어간 미연은 한 블록 뒤에서 땅에 내려섰다.

마을 곳곳에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청년단을 비롯해 가용한 전투 인원들이 모조리 투입되어 리트미소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 중앙을 통과하며 미연도 걸리는 제국군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거치적거리는 두 명의 병사를 해치운 미연의 눈에 두 명의 꼬마가 잡혔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 마을 중앙으로 피신하지 못한 것이다.

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꼬마들 주위로 제국군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자마자 이미 미연은 병사들 뒤에 다가서 있었다. 세 번의 검격에 병사들 전원이 피를 뿌리며 절명했다.

아이들을 공포에 질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미연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집안으로 들어가! 옷장이든 어디든 들어가서 나오지 마! 알겠니!?”

“으, 응!”

며칠간 쌓은 친분에 아이들은 미연의 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바깥에서 자물쇠를 부숴 잠근 후 미연은 다시 장로의 집을 향해 뛰었다.

동쪽에서부터 북쪽까지 미연은 질풍같이 질주했다. 그녀의 진로에 방해되는 것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언덕에 도달하여 달려 올라가려 할 때 미연의 눈에 장로의 모습이 포착됐다.

장로는 제국군 두 명에게 잡힌 채 집에서 끌려나오고 있었다. 미연은 최대한의 속도로 오르막길을 뛰었다.

파제스는 미연의 질주를 발견했다.

“적이다! 죽여라!”

명령을 받은 한 명의 병사가 미연에게로 달려들었다. 거리상으로 칼이 닿지도 않을 것 같은 간격, 병사는 당연하게도 바닥에 멈춰서 칼을 뽑으려 했다.

다음 순간 그의 목이 날아갔다. 미연의 칼은 바람이 되어 그를 스쳐 지났을 뿐이었다.

시체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사이 미연은 뿌렸던 칼을 가슴 앞으로 가져오며 소리쳤다.

“장로님을 놔줘!”

“뭣들 하는 거냐! 저년을 죽여라!”

파제스는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며칠 전 리트미소에 찾아왔다던 바로 그 외부인이었다.

두 명의 병사가 칼을 뽑았다. 미연은 오르막길을 달려 올라왔음에도 숨 한 번 헐떡이지 않은 채 두 명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한 차례의 반짝임.

칼날이 만들어 낸 빛의 선이 제국군 병사를 가로질렀다. 허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일직선으로 잘려 나가며 두 명의 병사는 저 세상으로 넘어갔다.

파제스는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부하에게서 장로를 빼앗은 뒤, 부하를 앞으로 밀어냈다.

“가라! 나가서 저년을 죽여라!”

얼떨결에 떠밀려 나온 그는 할 수 없이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간격을 좁힌 미연의 칼은 차갑게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미연은 거리낌 없이 칼을 뽑아내 한 차례 핏방울을 털어내고, 차갑게 파제스를 노려보았다.

“너야?”

“뭐, 뭐가 말이냐.”

“네가 리트미소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지?”

딱히 앞뒤 상황을 추론하여 얻어낸 결론은 아니다. 단지 미연의 감이었다.

대답은 해 준 것은 장로였다.

“맞아요, 미연 님. 이 자가 우리 마을을 습격한 거예요.”

“이, 입 닥쳐라! 죽고 싶지 않으면!”

파제스가 칼을 뽑아 장로의 목에 댔다. 미연은 한 차례 꿈틀했을 뿐 더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흐, 흥!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오늘 리트미소는 우리들에게 정복당할 것이다! 지금 항복하면 전부 죽이지 않고 끝내 주지! 장로, 항복해라!”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미연은 낮게 말했다.

“너야말로 지금 그만두면 너까지 포함해서 네 부하들을 다 죽이지 않고 보내 주겠어. 어때, 항복하시지?”

“이, 이년이! 웃기지 마라! 지금 이기고 있는 건 우리다! 그런데 내가 왜 항복을 해야 한다는 거냐!”

“내가 있으니까.”

파제스가 끌고 왔던 다섯 명을 단숨에 해치워 버린 미연. 그녀가 칼끝으로 그 시체들을 각각 가르치고 마지막에 파제스를 겨눈다.

“이제 이곳에서 죽을 사람은 너뿐이야. 장로님을 놔줘.”

파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항복해야 할 이유를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장로의 목에 칼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너야말로 칼을 버려라! 장로를 죽이고 싶냐!”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너, 바보구나. 난 이 마을의 일원이 아냐. 외부인이라고. 나한테는 장로님이 죽더라도 너를 해치우는 게 이 싸움을 멈추는 데에는 더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장로는 눈을 깜빡였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장로는 곧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목 가까이 칼이 느껴졌지만 침착하게 말한다.

“그렇군요, 미연 님. 당신은 외부인이었지요…… 할 수 없지요. 제 명은 여기까지였다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무덤도 만들어 줄게.”

“……고맙네요.”

그들은 파제스를 무시한 채 그렇게 대화했다. 그것이 그의 화를 돋우었다. 숨을 몰아쉬더니 그는 단숨에 고함쳤다.

“이것들이 지금 누구를 놀리냐!”

그 순간―

미연은 빈틈을 감지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겨누었던 칼을 뒤집으며 칼날을 바닥으로 향한다. 즉시 오른쪽 옆으로 베어 내린다!

파제스의 손이 그 궤도상에 있었다. 칼을 쥐어 장로의 목을 노리고 있던 그의 손. 손가락이 몽땅 잘려 나간다.

그의 눈이 경악과 고통을 벗 삼아 배로 커진다.

“으, 으아아아악!”

미연은 한발 내딛으며 장로의 옷깃을 붙잡아 파제스의 팔 안에서 빼내었다.

그리고 무섭게 칼을 겨누어 곧장 그의 목덜미를 찌른다!

“잠깐!”

그때 장로의 외침이 미연의 공격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미연 님! 죽이면 안 돼요!”

공중에서 칼을 멈춘 상태로 미연이 살짝 장로를 돌아봤다.

“뭐? 왜?”

“그가 싸움을 멈추라는 명을 내리게 해야 돼요. 자신들의 대장이 잡혀 있는 모습을 본다면 병사들도 싸움을 그만둘 거예요.”

“……음, 과연. 그렇겠구나.”

미연은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아직 분이 안 풀린다는 얼굴로 파제스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칼을 내렸다.

“항복해.”

손가락이 잘려 나간 고통 속에서 파제스는 용암을 씹어 삼킨 듯한 얼굴로 미연을 노려보다,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크윽, 알겠다…….”

다시 바운스로 떨어진 이후, 미연이 거둔 첫 전투이자 첫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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